<접동새>는 설화를 소재로 하여 현재의 자신을 염려해 줄 대상을 소망하는 5연으로 구성된 시이다. 이 시는 지금까지는 단순히 설화를 소재로한 시로써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논의 되어 왔다.
<접동새>는 고전소설로 재창작된 설화일 정도로 널리 알려진 설화이다. 계모에게 학대받던 처녀가 죽어 접동새가 되었다는 동물 유래담의 하나이며 변신담에 속한다. <접동새>에 얼힌 설화는 일반적인 ‘접동새’ 설화와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인 ‘접동새’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부인이 아들 아홉과 딸 하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후처로 들어온 부인이 딸을 몹시 미워하여 늘 구박하였다. 처녀가 장성하여 시집갈 때가 되었으므로 많은 혼수를 장만하였는데, 갑자기 죽어버렸다 아홉오라버니가 슬퍼하면서 동생의 혼수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계모가 주변을 돌면서 아까워하며 다 태우지 못하게 말렸다. 화가 난 오라버니들이 계모를 불 속에 넣고 태우니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 처녀는 접동새가 되어 밤만 되면 오라버니들을 찾아와 울었다. 접동새가 밤에만 다니는 이유는 까마귀가 접동새를 보기만 하면 죽이므로 무서워서 그렇다고 한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19, 한국정신문화원, 1991, 684-685)”
위 설화의 내용으로 보면 ‘아우래비 접동’에서 ‘아우래비’가 ‘아홉 오래비’를 접동새의 울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소월의 <접동새>에 관련된 설화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진두강 가에 10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계모를 들었다. 계모는 포악하여 전실 자식들을 학대했다. 소녀는 나이가 들어 박천의 어느 도령과 혼약을 맺었다. 부자인 약혼자 집에서 소녀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 왔는데 이를 시기한 계모가 소녀를 농 속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재 속에서 한 마리 접동새가 날아 올랐다. 접동새가 된 소녀는 계모가 무서워 남들이 다 자는 야삼경에만 아홉 동생이 자는 창가에 와 슬피 울었다.”
위 설화의 내용으로 보면 ‘아우래비 접동’에서 ‘아우래비’가 지금까지 통용되어오던 ‘아홉 오래비’ 즉 ‘아홉 오빠’를 변형시킨 것이 아니고 남동생을 뜻하는 ‘아우오래비’를 접동새의 울음으로 변용시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시에서도 5연의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이 이를 뒷받침한다. 접동새가 ‘죽어서도 못니저 참아못니저’ 하는 것이 ‘오랩동생’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우래비’는 ‘아홉오래비’가 아닌 남동생을 뜻하는 ‘아우오라버비’를 접동새의 울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아우오라버니’는 현대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등재되어 있는 ‘오라버니’는 ‘ꃃ오빠'의 높임말’이고 낮춤말로는 ‘ ꄃ오라범.ꄃ오라비’로 쓰였다. 일반적으로 ‘오래비’는 손아래 여자 동생이 손위의 남자 형제에게 쓰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오라버니’라는 단어가 ‘동생’에게도 쓰였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오라버니’가 동생에게도 쓰였다는 사실은 김완진이 이미 밝혀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남동생을 뜻하는 ‘아우오라버니’가 있었음을 말하고 ‘아우래비 접동’의 ‘아우래비’가 ‘아홉 오라비’를 변형시킨 것이 아니고 ‘아우오래비’를 변형시켜 표현한 것임을 밝혔다. ( 김완진 근거 )
<접동새>의 1연은 접동새가 동생들을 부르는 슬픈 감정을 접동새의 울음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2연과 3연은 접동새에 대한 설화가 제시되어 있다. 2연은 현재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우는 접동새를 서술하고 있다. 3연은 접동새가 진두강에 와서 우는 내력을 서술하고 있다. 1연과 2연은 현재이고 3연은 과거의 전설이다. 그리고 4연은 서정적 화자가 등장하여 접동새가 된 전설 속의 ‘오랩동생’의 누나를 자신의 누나로 삼는다. 그러면서 의붓누나가 ‘싀새음에 몸이죽’‘어 ‘접동새가 되’었다는 사실을 ‘오오 불설워’ 하고 있다.
접동새가 화자의 누나가 아닌 것은 ‘누나라고 불너보랴’의 ‘-라고’와 ‘-보랴’에서 알 수 있다. 친누나라면 이러한 조사와 단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자는 ‘오랩동생’의 누나를 자신의 누나로 삼는 순간 계모의 ‘싀새음’에 의하여 불행하게 죽은 누나의 사연이 자신의 누나의 일이 되면서 그 사실이 너무나 ‘불설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오랩동생’의 누나를 자신의 누나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5연에서 제시된다.
접동새가 된 누나가 ‘아웁이나 남아되든 오랩동생을 / 죽어서도 못니저 참아못니저 / 야삼경 남다자는 밤이 깁프면 / 이산 저산 올마가며슬피’ 울기 때문에 화자는 자신의 누나로 삼은 것이다. 동생을 ‘죽어서도 못니저 참아못’잊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누나가 되면 화자가 동생이 되기 때문에 접동새가 된 누나는 화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야삼경 남다자는 밤이 깁프면’ 아무도 화자에게 주의를 기울여주지 않는데 이 때도 접동새가 된 누나는 ‘이산 저산 올마가며’ 혼자 있는 화자를 걱정하면 ‘슬피’ 울게 될 것이다. 즉 화자는 야삼경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자신을 걱정하는 누나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접동새가 된 누나는 그 옛날 ‘진두강압마을에’ ‘살든’ ‘아웁이나되던 오랩동생’이 죽었는지 모르고 우는 것인가. 아니다 누나는 옛날 친동생들이 이미 죽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접동새>의 초판본에 나온다. <접동새>가 처음 나왔을 때는 지금 일반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다음과 같은 뒷부분이 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에 살든누나는
진두강압마을에
와서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뒤의
진두강가람에 살든누나는
이붓어미싀샘에 죽엇습니다
누나라고 불너보랴
오오 불설워
싀새음에 몸이죽은 우리누나는
글세요죽어접동되엿세요
아웁이나되던 오랩동생도
죽엇스니니즈랴, 못니저서,
해지기를디다려, 밤을 기다려
아우래비접동을부르며웁니다.
이 뒷부분은 1-4연이 앞의 시와 다른 점이 거의 없다. 4연에서 ‘글세요죽어접동되엿세요’가 다를 뿐이다. 이렇게 긴 부분이 단순히 반복됨으로서 리듬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의 긴장미를 떨어뜨린다. 이러한 점이 인식되었는지 아니면 뒷부분이 없어도 의미 전달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개정판에는 뒷부분이 생략되었다.
5연에서 ‘죽엇스니니즈랴, 못니저서,’라 한 것은 접동새가 된 누나가 친동생인 ‘오랩동생도’ 죽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하기에 이제 접동새를 자신의 누나로 삼은 화자는 ‘해지기를디다려, 밤을 기다려 / 아우래비접동을부르며’ 우는 접동새가 자신을 위하여 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을 위하고 지켜줄 가까운 사람의 존재가 있기를 원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화자가 죽어서도 동생을 걱정하는 접동새의 전설 속의 누나를 심리적으로 자신의 누나를 삼음으로서 소망을 충족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 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화자는 조국을 잃고 나라가 없어 보호해 줄 주체가 없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야삼경’은 일제강점으로 인한 절망적인 상태를 말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 민족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접동새 전설’로 표상된 ‘민족의 전통과 정신’이라는 의미전달과 이러한 ‘민족의 전통과 정신’이 ‘야삼경’ 속에 살아 있음을 말하고 있는 시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