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인격의 회복
2018. 9. 2. 이현래 목사님
오늘은 늘 하는 말씀인데, 하려고 하면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어제 밤에도 혼자 ‘하나님, 어째서 이것을 젊었을 때부터 가르쳐주시지 마지막에 가르쳐주셨습니까?’하고 기도하였다. 책을 보니까 10년 전에 했던 말씀에도 이 말씀이 있다. 그런데 나는 꼭 오늘 처음 받은 말씀 같다. 너무 신기하다.
내가 마지막 말씀을 전한다면 무슨 말을 전할 것인가? 여유가 있으면 이 말씀도 하고 저 말씀도 하겠는데, 여유가 없고 딱 한 번만 하고 만다면 무슨 말씀을 전할 것인가? 지금 나는 나올 때마다 그런 생각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늘 같은 말이다. 내가 할 말이 이것이 마지막 말이구나. 준비할 때마다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르겠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신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었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는 우리 때문에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때문에 지으셨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천상에 있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왜 내가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커서 아는 것은 내가 부모 때문에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는 모른다. 그것은 특별한 복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별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도 그렇게 살고 있고, 소도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만 그렇게 낳은 것이 아니다.
특별히 성경이 복된 것은 부모가 너를 낳았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가 필요하여 사람을 지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없는 것이다. 아무도 모를 말이다.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하나님이 필요해서 나를 지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모른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한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이 땅위에 살려면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몰랐고 요청한 일도 없고 갈급한 일도 없다. 사람을 만들어달라고 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이 태어난 사람을 보고 창세기 1장 1절은 전능하신 이가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너무 생소한 말이다. 여러분이 늘 교회에서 들으니까 항상 있는 말씀 같지만 이 말은 너무 생소한 말이다. 어디에도 없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다. 사람 속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말을 할 수가 없다. 사람이 기껏 아는 것은 부모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이것밖에 모른다.
성경은 엉뚱하게 하나님이 필요해서 너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우연히 태어났다고 하면 인생이 무엇인가? 우연이다. 우연히 태어났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메바가 진화했다고 하면 저주이다. 과학적으로 맞을지는 몰라도 만일 아메바 속에서 진화했다고 하면 인생은 저주이다.
또 사람은 원숭이가 진화했다고 하는데, 과학적으로는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라는 것은 증명이 되었지만 그것이 맞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태어난 것은 누군가가 말해주어야 안다. 우리 아버지가 누구라고 말을 해주어야 알지 저절로 아는 것이 아니다.
아기를 낳아서 다른 사람이 키우면 자기 친부모를 모른다. 부모가 같이 키우면서 내가 너의 부모이고, 내가 너를 낳았고, 내가 너의 엄마라고 계속 말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누가 나에게 와서 너는 내가 지었다고 해야 아는 것이다. 사람이 굉장히 지식이 많은 것 같지만 이런 문제에서는 깜깜하다. 아무것도 모른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심지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아이들을 놀리기도 하는데,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어렸을 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신과적인 문제가 된 사람도 있다.
사람은 누군가가 너는 누구라고 말을 해주어야 안다. 내가 나를 알 것 같지만. 불가에는 자기가 자기를 알려고 나간 것이다. 출가를 왜 하는가? 자기가 자기를 알려고 나간다. 평생을 쫓아다녀도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른다. 누군가가 말을 해주어야 안다. 사람이 이상한 존재이다.
하나님이 내가 필요하여 너를 지었다고 한다. 어디에 가서 이 말을 듣겠는가? 임금님이 어떤 아기에게 내가 필요해서 너를 낳았는데, 내가 어려서 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자. 그 아이는 땡잡는 것이다. 그 임금이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복이다.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 큰 축복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늘 듣는 말씀이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그러려니 할 일이 아니고,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지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이요 생명이시다. 비유하면 우리 마음과 똑같다. 마음이 있어도 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지었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과 같다. 나에게는 손이 없고 발이 없고 입이 없고 활동할 수가 없어서 너를 지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별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먹고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가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꼭 몸이 없는 사람의 마음과 같다.
6.25때 비참한 사람을 보았다. 팔 다리가 다 없는 사람이 있다. 몸통만 있다. 그때는 보훈처 같은 것이 없을 때니까 이 사람을 가방에 넣고서 메고 다니면서 구걸을 한다. 구걸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냥 내팽겨쳐 버린다. 짐짝처럼 벗어나 버린다. 그러면 이 사람은 꼼짝을 못한다. 구를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고 아무것도 못한다.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남이 짊어지고 다니다가 놔둬버린다.
시골에 둥구(쇠똥구리)라는 것이 있다. 아이들이 짓궂게 발을 모두 떼어버린다. 발을 떼어버리면 몸통만 있어서 죽을 때까지 뺑뺑 돈다. 꼭 그와 같은 현상이다. 상이군인도 그렇게 비참하게 된 상이군인은 처음 보았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있지만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우리 인간도 마음이 있지만 어떻게 할 수 없으면 그처럼 비참한 것이 없다.
카프가의 ‘변신’이라는 소설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괴물이 되어 버렸다.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이 괴물이 되어버렸다. 식구들이 와서 보고 깜짝 놀란다. 처음에는 식구이니까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괴물이니까 방법이 없다. 결국은 사람들끼리 그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땅에 묻어야 되는지, 화장을 해야 되는지, 이런 이야기를 자기 앞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인생이 비참하겠는가? 현대인의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소설을 써놓았다. 분명히 마음속은 저쪽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그런데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된다. 부부 간에도 못 사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소통이 안 되어서 못 산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돈도 있고 다 있는데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시니까 자기를 나타낼 형상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을 지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사람은 얼마나 소중한가!
우리는 하나님을 아쉬우면 찾고, 아쉽지 않으면 찾지 않는다. 궁지에 몰려서 죽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하지만 편안하게 살고 있으면 다 잊어버린다.
자녀들도 객지에 나갔는데 소식이 없으면 부모는 걱정을 한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밥은 먹고 있는가?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가? 온갖 것을 다 걱정한다. 그런데 자식은 자기가 잘 살면 전혀 생각이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소식이 없으면 잘살고 있는 것이다.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가 편하면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편할 날이 없다. 존재 자체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어찌 할 수가 없다. 이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다.
왜 사람을 잡아다가 구속을 해놓았는가? 일부러 답답하게 하려고 잡아놓은 것이다. 집에 놔두어도 되고 전화로 물어봐도 되는데 왜 하필이면 영창에 가두어놓는가? 답답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1년 간 갇혀있는 사람도 있다. 자기 집에 둔다고 달아나겠는가? 못 달아난다. 그런데 가두어놓는다. 이것은 고문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사람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것을 안다면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찾으시는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찾으시는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사정과 하나님의 사정은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복이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팔아달라고 하여 집을 나갔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불효막심한 놈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그 좋은 살림을 다 팔아서 나갔는데, 소문을 들으니까 이러저러하여 재산을 다 없앴다고 하면 욕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부모는 재산이 없어졌다는 것이 처음에는 좀 아쉽지만 뒤로 가면 내 자식이 어디에 가 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이 생각만 난다. 그 아들은 잘 나갈 때는 전혀 부모 생각을 하지 않다가 돼지우리를 치면서 쥐엄열매를 먹으니까 우리 집에 가면 그래도 이보다 나을 것인데 하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속해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탕자의 비유이다. 아버지 마음과 자식 마음은 다르다. 그것은 어떻게 되지 않는다. 아무리 효성이 지극해도 부모 마음과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안 된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무지무지하게 소중한 존재이다. 남은 나를 욕하고 비난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아주 소중한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릴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시편에 나온다.(시27:10 참고)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사람이 가다 보면 다 버림 받을 수도 있고, 다 비난 받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욕하기 시작하면 다 욕을 한다. 어떤 사람을 비난하면 다 그렇게 한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묘하다. 그런 사람을 옹호하면 내가 불의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이 대들고 손가락질하고 욕을 한다. 그럴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집안에서 부모와 문제가 없는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문제가 생겨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와의 관계가 깨져버리면 밖에 나가서 아무리 잘 살아도 소용이 없다. 자기가 인정받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책임이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의 책임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할 수가 있다. 어떻게 100%를 하겠는가? 아무리 해도 100%가 안 된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사람은 다 정죄 아래에 있다. 왜? 율법으로는 흠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 정죄 아래 있다.
우리말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이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사람 앞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생각하는 것만큼 자기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꼭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다.
부모는 그렇게 자식을 생각하고 있는데, 자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효가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이 불효이다. 크게 나쁜 짓을 하는 것이 불효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내가 맨 처음 여기서 출발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방황을 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방황하고, 예수를 찾는다고 방황했지만 아무리해도 모르겠더라. 천당, 영생,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라.
그런데 어느 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이 말이 딱 들려왔다. 거기서부터 기점이 생겼다. 그런데 귀신같이 친구가 나에게 편지를 하여 요즘 뭘 하고 있느냐는 물었다. 그 친구와는 아무 이야기를 한 일이 없다. 너무 신기하니까 하나님이 하셨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위에서 더 생각하고 있지 아래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더 생각하지 자식이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 이상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을 받으면 밭이 되도록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동산을 경작하고 거기에서 살게 하심.
이 사람을 지어서 어디에 두었는가? 이 사람을 무엇으로 지었는가? 흙으로 지었다. 왜 흙으로 지었을까? 흙은 그냥 두어도 밭이 된다. 생명을 받으면 밭이 될 수 있도록 흙으로 지었다. 이것도 너무너무 놀라운 말씀이다.
사람을 돌로 지었다고 하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돌로 지었으면 생명을 받지 못한다. 금으로 지었으면 좋을 것 같다. 금으로 지었으면 생명을 받을 수 없다.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생명을 받을 수가 있다. 밭이 된다. 왜? 하나님은 씨이기 때문이다.
씨를 가진 사람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밭이 필요하지 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씨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에게는 유일하게 흙만 필요하다. 밭만 필요하다. 그 흙에 씨를 심어놓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생산이 된다. 신기하다. 아주 천한 것인데 농부에게는 아주 귀한 것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이것이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끝없는 가능성이다. 어제 비록 가시덤불 밭이었다고 하더라도 좋은 농부를 만나서 경작을 하게 되면 오늘은 포도밭이 된다.
어제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어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우리가 못 박아 놓을 수가 없다.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무슨 씨가 올지 모른다.
우리 교회 어떤 형제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지금은 옛날이 생각도 안 날 것이다. 기억도 안 난다. 그 엉겅퀴 밭이었던 밭이 완전히 포도밭이 되어 버렸다.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신기하다.
왜?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농부만 만나면 그렇게 된다. 농부만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자갈밭 같은 밭도 부지런한 농부를 만나면 좋은 소출이 나온다.
내가 어려서 보았다. 우리 동네에서 살던 일본 사람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 같았다. 술도가를 한 사람인데 산비탈에 있는 땅을 개간해서 밭을 만들었다. 완전 자갈밭을 개간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과실들을 심어놓았다. 귤, 사과, 배, 포도, 별것을 다 심어놓았다. 그 사람이 다 따 먹지를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그 밭이 동네 밭이 되었다. 동네에 일하는 사람이 경작을 해먹고 했는데 1~2년이 안가서 도로 자갈밭이 되어 버렸다. 나무는 다 뽑아 가버려서 그 동네에만 어느 집에 가면 귤나무가 있고, 어느 집에 가면 포도나무도 있다.
농부를 잘 만나면 흙은 아주 영광스럽게 된다. 그 시대에 우리가 사는 섬에는 귤이 없었다. 제주도에도 그때는 지금 우리가 먹는 일본에서 온 귤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와서 귤을 심어 놓았다. 포도도 그렇고 배도 그렇다. 우리가 전에 먹어보지 못했던 것들이 그 밭에 심어져 있었다.
농부를 만나면 사람은 다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했는데 농부시니까 흙을 찾는 것이다. 씨를 가졌으니까 흙을 찾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있어도 돈이 저절로 불어나는 것이 아니다. 곶감 빼먹듯이 다 빼먹고 만다. 그런데 씨를 뿌려 놓으면 가을이 되면 30배 60배 100배 수확이 온다. 다음에 그것을 또 뿌리면 얼마나 많아지겠는가? 해마다 많아진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었다. 이것은 너무 놀라운 말이다. 사람이 귀하면 금으로 지을 것 같은데 아니고 흙으로 지었다. 그래서 밭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경작자로 하나님의 동산을 맡겼다.
이 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곳, 함께 사는 곳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면 어떻게 되는가? 함께 살면, 그것을 잘 경작하면 거기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나온다.
결혼하여 두 사람이 연합해서 살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나온다. 사랑이 나오고 자식이 나오고 막 이런 것이 나온다. 혼자 살면 나오는가? 혼자 살아서 자식이 나오는가? 혼자 사는데 사랑이 나오는가? 아무 것도 안 나온다. 방안에 들어가면 냄새만 풀풀 난다. 홀아비 방에 가면 냄새만 나니까 사람들이 안 들어가려고 한다.
우리를 밭이 되도록 흙으로 지으시고 경작하도록 동산을 맡겼다. 이 농사야 말로 최고의 농사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경작하는 농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합해서 경작을 하게 되면, 그 말은 우리 인격 안에서 경작한다는 말인데, 하나님과 내가 씨름도 하는데 이것이 경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이것이 싸움이다. 그런데 이런 경작을 통해서 인격이 변화된다. 얼마나 경작했느냐에 따라서 변화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야곱은 정말 고약한 사람이다. 알고 보면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경작해서 완전히 새 사람을 만들고 영화롭게 했다. 오죽 영화로웠으면, 자기가 얼마나 영화로우면 바로 앞에 가서 바로를 축복하겠는가? 임금 앞에 가서 내가 쫄리면 어떻게 축복을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러 갔는데 상대방이 어디 나가는데도 많고 돈도 많고 지위도 높으니까 쫄려서 그냥 와버렸다. 왜? 복음으로 영화롭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영화롭게 되면 상대방이 돈이 많던지 지위가 높던지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것은 다른 것이다. 영광이 다른 것이다. 같은 영광이 아니다. 같은 영광이면 별 하나짜리 장군이 별 2개짜리를 만나면 발발 긴다. 3개짜리 만나면 발발 긴다. 촛대 까이고 장군들도 그런다고 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계급에 눌린다. 군인 아파트에 사는데, 한 아파트에 계급이 여러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러면 아이들도 그렇고 부인들도 계급이 똑같다. 아이들 때부터 대장 아들이 다르고, 소장 아들이 다르고 다 다르다. 그렇게 산다.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축복을 하겠는가? 못한다.
그런데 야곱이 받은 축복은 그런 축복이 아니다. 야곱이 받은 영화로움은 그런 영화로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까 담대하게 축복을 했다. 바로도, 거기에는 말이 없지만, 야곱에게서 영광을 못 봤으면 감히 자기 앞에서 축복을 하는데 그것을 듣고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어떤 거지같은 사람이 임금 앞에 와서 축복을 하고 있으면 그것은 당장 죽는다. 임금을 무시해도 유만 분수가 있지 임금을 모독한 것이다. 그런데 오죽 했으면 그 축복을 두 번이나 했는데 그냥 있었겠는가? 그 말이 없지만 무엇이 비췄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영광을 가지고 전하면 내가 모르는 무엇이 나타난다. 내가 충주에 갔을 때 C.C.C.가 있던 건물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갔다. 가서 10분밖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목사님이 오신다면 다시 한 번 일을 해보자고 하셨다.
나는 생전 그런 것을 처음 보았다. 내가 사람을 설득하는 설득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그때 C.C.C.에 들어와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고 한다고 간증만 했다. 충주 시내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인데, 처음에는 다 내보내기로 했다고 해놓고는 10분후에 뭐라고 한 줄 아는가? 우리 다시 일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나에게 6개월 간 자기 교단을 맡겼다. 목사가 자기 교단을 맡긴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너무너무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맡기고 캐나다를 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내 힘으로 되겠는가? C.C.C. 간사라고 해보았자 겨우 밥 얻어먹고 사는 것인데, 내가 뭐가 있다고 가능하겠는가.
야곱은 수십 년 동안 엎치락뒤치락 많이 했는데, 그것이 밭 갈고 논 갈고 씨 뿌리느라고 그런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변하고 나니까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담대히 그 자리에서 선포하지 거기 서서 감히 축복을 하겠는가? 상상을 해봐라. 임금 앞에 가서 어느 존전이라고 내가 당신을 축복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미친놈이 아니면 그것이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이미 그 안에 많은 축복을 다 넣어 놓았다. 엄청난 축복을 넣어 놓았는데, 그것을 지금 우리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흙으로 지어서 밭이 되도록, 생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생명을 경작해서 인격화 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다 넣어 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연합하여 완성하도록 생명의 배필을 지어주심.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다. 연합을 해서 완성하도록 배필을 주었다고 한다. 이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둘이 연합하여 된다고 하는 말은 생명이다.
생명은 둘이 연합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다. 지식은 혼자 하지만 생명은 연합해서 무엇을 한다. 그래서 배필을 주었다고 한다. 완벽하게 주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삶을 위해서 완벽하게 사람을 지어놓았다고 한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지어 놓았다.
그런데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은 한 사람 밑에 있고 만민의 위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대역죄라고 한다.
천주교에 가면 대죄 소죄라고 하는데 이것이 원죄이고 대죄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양식이 되었음으로 동산에서 추방되어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 하다가 바벨로 가서 흩어졌음.
그렇게 축복을 했는데 그것을 마다하고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같이 살 수가 없다. 같이 살수가 없기 때문에 동산을 쫓겨난 것이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가? 바벨로 갔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는 바벨로 간다. 다 흩어져서 소용없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소용없이 되어버렸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다시 찾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축복하셨으며 야곱을 연단하여 영화롭게 하셨음.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시 찾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빼낸 것이다. 불러냈다. 이것이 새로운 시작이다. 경륜의 변화이다. 다 만들어 놓았는데 배신하고 갔으니까 이것은 다른 사람을 찾은 것이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많은 약속을 했다.
성경에 약속이라는 말도 있고 언약이라는 말도 있다. 약속이라는 말은 일방적으로 내가 하겠다는 것이다. 약속은 하나님이 하시니까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이다. 언약은 둘이 협정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협정을 했을지라도 한쪽이 이행하지 않으면 무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언약은 파기될 수가 있다. 그러나 약속은 내가 하겠다는 것이니까 파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약속을 믿는 것은 너무너무 쉽다. 그것은 우리가 아주 불가능할 것 같이 여기지만 그것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약속한 것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언약은 아무리 잘했을지라도 내가 아담처럼 이렇게 가버리면 무효가 되는 것이다. 계약서를 아무리 써도 한쪽에서 위반해버리면 안 된다. 꼭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은 다 이루어졌다.
이삭에게 축복을 했다. 얼마나 축복을 했는가? 눈 감고, 눈이 어두워서 분간을 못 할 때, 에서를 축복한다는 것이 야곱을 축복했다. 이것이 엄청난 문제이다. 그때 당시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내 전권을 주는 것이다. 축복이라는 것이 내 가정의 전권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큰 일이 났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옳게 여겼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잘못된 것인데 하나님께서 옳게 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한 야곱은 영화롭게 됐다. 에서는 축복을 받으려다가 못 받고 야인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너무 너무 신기한 일이다. 잘못되어도 되는가, 이런 일이다.
분명히 잘못했다. 눈도 안 보이니까 에서인줄 알고 축복했다. 에서가 나중에 와서 내가 당신의 큰 아들 에서라고 하니까 방금 축복을 다 주어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나를 축복해달라고 하니까 이삭이 뭐라고 한 줄 아는가? 우리 같으면 그냥 입으로 한 축복 같으면 또 하면 된다. 그런데 다 주어버리고 없다,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축복이라는 것이 그냥 한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남은 찌꺼기를 주었다.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야곱이 다 가져가고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참 묘하게 써 있다. 야곱을 연단해서 영화롭게 했다.
이것이 경륜의 변화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지어놓은 대로 살아도 영화롭게 되도록 지어 놓았다. 하나님을 나타내면 영화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아담으로 인해서 틀어졌다.
옛 언약이 틀어졌다. 그래서 새로운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은 불러내서 되는 것이지 속에 들어가서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한동안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세상에 들어가서 변화시키지 못한다. 들어가면 오히려 세상에 잡아먹히고 만다.
불러내야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200만이 되는 사람들이 애굽에 살았다. 애굽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래서 불러낸 것이다.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어라. 너희 내 백성은 따로 있어라. 우리는 따로 있어서 여기서 생명을 가지고 공급을 하는 것이지 그 속에서는 불가능 한 것이다.
기독교가 그렇게 하다가 다 실패했다. 다방 목회니 피크닉 목회니 이런 것을 한참동안 많이 했다. 그런데 다 실패하고 말았다.
불러내야 된다. 여러분이 전도하거든 반드시 불러내야 한다. 알고 보면 부르러 가는 것이다.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말이 불러냈다는 뜻이다. 교회라는 말이 에클레시아(Ecclesia)인데 부름 받아 소집되었다는 뜻이다. 거기 놔두고는 안 되는 것이다. 말 잘 듣고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해서 거기 놔두면 안 된다.
어떤 형제도 옛날 사람들과 같이 살면 또다시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그 형제는 교회를 떠나면 절대로 안 된다. 교회에 살아야 된다. 그 형제도 마찬가지이다. 거기 들어가면 안 된다. 나는 이제 자신 있다고 하고 거기 들어가면 금방 먹혀버린다. 불러내야 된다.
독수리가 날개치고 너풀거리면서 그 새끼를 끌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고 나왔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독수리는 맹수이기 때문에 자기가 맹수인 것만큼 다른 맹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높은 바위틈에 알을 깐다고 한다. 거기 밑에 가시방석을 깔고 그 위에 토끼털 방석을 깔고 알을 까는데, 이놈들이 어느 정도 크면 날아야 하는데 절대로 날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밑을 내려다보니 천길만길이고 떨어지면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미 독수리가 발톱으로 카펫을 끌어낸다. 푹신푹신한 양털 담요는 끄집어 내버린다. 싹 긁어 버리면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그러면 그 새끼들이 어떻게 해서든 있어보려고 하는데, 이리가도 찔리고 저리가도 찔린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더 있지를 못하니까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내면 날개로 올라온다고 한다. 그렇게 끄집어낸다.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억류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함.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는가? 그것이 그래서 하는 말이다. 자기가 살만하면 안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궁지로 몰아넣어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면 모세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가도 나오지 않는다. 매일 같이 노동하는데 끌려 나가고, 잘못하면 맞아 죽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야 하는 이런 상황까지 왔다. 그러므로 나왔다.
우리가 이런 상황이 된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데로 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내가 잘 살았으면 안 온다. 내가 잘 살았으면 친구가 그런 편지를 못한다. 해봤자 소용이 없다. 나는 올 데 갈 데 없었다. 그냥 나오라는 말 자체가 좋았다. 어디로 가는 것도 문제가 안 된다. 거기서만 나오면 된다. 거기서만 나오면 살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마디에 나왔다.
나는 그렇게 결단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아주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여러분이 나를 겪어 보면 알지만 뭔가를 결정하려면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를 돕는 교회 형제가 애를 먹는다. 한다고 했다가 안한다고 했다가 하므로 그 형제는 성질이 급해서 못 견딘다. 나는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본다. 아침에 생각했다가 저녁에 바꾸고 저녁에 생각했다가 아침에 바꾼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강력한 결정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친구도 강력한 결정을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를 불러냈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불러낼 수 없다. 오죽 이론이 또 많이 있고 핑계가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그런데 독수리 날개로 왔을 때, 내가 저기 안타면 죽겠구나 하여 날개 위에 오른 것이다.
이스라엘도 그랬던 것 같다. 세상에서 문제가 생기거든 그것에 절망하면 안 된다. 거기서 나오면 된다. 그 세계에서 나오면 된다. 얼마든지 세계가 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세계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평안의 세계가 준비되어 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해보니까 그렇다. 나는 갈 데가 없어서 그러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부르시니까 단번에 나올 수 있게 되고, 교단에서 싸움할 때도 나는 갈 데가 없었다. 그러니까 4년간 버티고 있었다. 4년을 버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피가 마르는 일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으니까 버티고 있었다.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나왔다.
나와 놓고 보니까 너무너무 넓은 세계가 있었다. 나는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다. C.C.C.에 들어가 보니까 이렇게 넓은 데가 있는 것이다.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크게 울어보았자 소리질러보았자 우물 안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C.C.C.에서 나가라고 할 때는 뭐 좋은 일이 있으려나보다 하고 아주 기쁜 것으로 나왔다.
우리 형제들이 20명이 나왔는데 나는 20명이 나올 줄도 몰랐다. 대구 사람들이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도 안 오면 올라가지 이렇게 있었고, 우리 형제들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어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내가 물어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정말 아무것도 안 된다. 나는 나대로 나오니까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따라 나왔다.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매를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더라. 똑같다. 그때 학생들이 한 60명 있었는데 누가 나올지 갈지 아무도 모른다. 자기들도 말을 안 하니까 나도 아예 모른다. 그런데 나와 놓고 보니까 딱 나올 사람만 나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일을 맡았던 간사가 하는 말이 나에게 귀신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완전히 귀신작전이었다. 내내 같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간사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인데, 어느 날 한 20명이 그냥 나가버렸다. 그러니까 나보고 귀신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무슨 귀신같은가? 나는 할 수 없으니 그렇게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 신기하다. 겪어보면 너무 신기하다.
완전히 안 될 것 같은데 되고, 될 것 같은데 안 된다. 나는 내가 생각한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다. 내가 계획을 해서 잘된 일이 하나도 없다. 나는 그것을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계획한 대로 하나라도 되었으면 늘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예 안 되는 줄 알기 때문에 계획을 안 하려고 한다. 내가 계획을 안 하니까 우리 형제들이 편하다. 내가 계획을 계속 해보라. 못 견딘다.
내가 C.C.C.에 갔을 때 서무실 직원들이 있는데, 이 직원들의 얼굴이 항상 찌그려져서 있다. 왜냐하면 김목사님이 계속 지시를 내린다. 김목사님은 생각난 것을 생각날 때마다 수첩에 적는다. 전도하면 다 일이다. 그러면 그것을 서무실에 내려서 시행하라고 한다. 그러면 직원들이 그것을 시행해야 하니까 죽을 지경이다. 상관이 계속 명령을 하면 밑에 사람은 못 견딘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안했다.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실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여러분이 편하다. 나도 편하고 여러분도 편하다.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괜히 분주해서 자기가 하면 잘될 것처럼 생각되지만 잘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해놓으면 다 저질러 놓은 것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은 영원히 찬송할 일만 해놓았다.
율법과 제사로 백성을 깨우치려 하였으나 한계에 이르렀으므로 새 언약을 세우심(렘31:31,눅22:20)
그렇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갇혀 있으니까 모세를 통해 불러냈다.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해주겠다. 그래서 불러냈다. 그리고 율법을 주고 제사 제도를 주고 성막을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최고의 혜택을 준 것이다. 그 시대에 어떤 민족에게도 이런 혜택을 준 일이 없다.
그런데 천하에 없는 율법을 주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못 지킨다. 천하에 없는 제사 방법을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형식 밖에 안 된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겉으로는 다 할 수 있다. 율법도 다 지킬 수 있고, 제사도 다 그렇게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이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속에서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을 보시는 분이니까 내가 아무리 겉으로 해도 안 된다. 그래서 선지서를 읽어보면 맨날 우상 숭배한다. 맨날 모두가 불순종한다는 이런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고약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미국에 가서 유대인을 만나보니까 얼굴만 봐도 정말 거룩하게 생겼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갈 때 궁금한 것이 유대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는데 기가 팍 죽었다. 생긴 것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모른다. 구레나루 수염을 하고, 여름인데도 까만 양복을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는데,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너무너무 잘생겼다. 위엄이 당당하고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겠는가? 그런데 맨날 율법을 범한다고 한다. 예수님이 왔을 때 그것이 드러났다. 그전에는 잘하는 것 같았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오니까 그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안 되겠으니까 새 언약을 세우셨다. 유명한 말씀이 있다. 예레미야 31장 33절 이하에 있는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는 이 말씀은 사람을 바꾸겠다는 말씀이다. 어떻게 하나님 법을 사람 속에 넣겠는가? 칩이 있다면 모르지만 생명의 칩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을 바꾸겠다는 말이다. 완전히 바꾸겠다. 뒤집겠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새 언약을 준 것이다. 율법을 폐하려고 준 것이 아니고, 율법을 사람에게 주니까 도저히 못 지킨다. 그래서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새 언약을 준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 와서 비로소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완성된 것이다.
예수를 보내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새 언약을 성취하여 그 안에 만민을 포함하고(롬6:5), 새 생명 나에서 행하게 하심(롬6:4).
그래서 예수를 보내서 십자가와 부활로, 십자가 이야기 많이 들었을 것인데, 십자가와 부활로 새 언약을 성취했다. 이것이 신기한 것은 그 성취하신 그 인격 속에 만민이 포함될 수 있도록 성취했다.
석가모니는 해탈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해탈을 해서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거기에는 우리가 포함이 안 된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스님이 있는데, 사당까지 있다. 어느 경지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거기 포함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성인군자들이 다 그렇다. 내가 포함될 수 있는 성인군자는 없다. 그 사람들을 우러러 보기만 하고 쳐다보기만 하지 방법이 없다. 내가 포함이 안 되니까 그럴수록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도 위대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존경 받고 있다. 빛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으로, 뭐로, 뭐로, 뭐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다 존경하고 받들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성인, 복자라고 해서 유명하고 그들을 본받으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본받아지는가? 본받아 지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나는 일찍 포기한 것이 잘했다. 그것을 해보겠다고 했으면 목숨이 이만큼 살아 있겠는가? 건강한 사람도 못 견디는데 나 같은 사람이 살아있겠는가.
20살 때 어떤 스님이 나에게 스님이 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셨다. 가만히 생각해보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0평생을 수도를 했는데 성불을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으니까 지금 인도환생하기를 소원하고 있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다시 또 출가를 해서 도를 닦겠다는 말이다. 그 말을 듣는데 아득한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하얗게 되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안될 일이구나. 그때 내가 참 머리가 좋았다. 만약 미련하게 한다고 했으면 중이 되어서 안할 고생을 할 뻔 했는데, 그때는 어떻게 머리가 그렇게 잘 돌아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만민을 포함하고 있다.
그 전에 모든 사람은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뭔가를 짊어지고 있다. 계급장을 짊어지고 있다. 군대에 오래 있는 사람은 훈장이 양쪽 가슴까지 꽉차있다. 북한 사람들을 보니까 훈장이 양쪽 가슴까지 달려 있다.
십자가에 가면 그것이 다 헛일이다. 원래 없던 것이니까 우리 인생에 원래 없던 것은 다 없어질 것들이다. 십자가에는 원래 있는 것만 남았다. 원래 있는 것, 존재만 남았다.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다고 하던데, 소유는 끝나고 존재만 남았다. 그 존재 안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되는 것이다. 소유에는 포함될 수가 없다. 지금 이 안에 사람이 이렇게 많지만 아무도 포함되지 못한다. 그 사람 성질에 포함되겠는가? 그 사람 능력에 포함되겠는가? 그 사람의 무엇에 포함되겠는가? 똑같아지려고 해봐라. 못한다.
나는 성질도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다. 괜찮은 편이라고 여러분이 내 성질을 닮으려면 어렵다. 그런데 개차반 같은 사람도 닮으려면 어렵다. 하여간 똑같이 되어 보려고 하면 너무너무 어렵다. 포함이 안 된다. 다 각각남남이다. 모두 남남이다.
그래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유는 다르다. 성질도 다르고 나와 맞지 않아도 그 사람은 그 사람 성질이고, 난 또 내 성질이니까 다 묵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나도 그 사람 못 따라가고, 그 사람도 나를 못 따라온다. 어차피 피장파장이다.
남이 나처럼 못하면 나도 그 사람처럼 못한다. 그런데 비판한다. 그런 줄만 알아도 도통한 것이다. 내가 못하는 것은 남도 못하는구나. 그리고 저 사람이 하는 것은 내가 못 할 수도 있구나. 내가 하는 것을 저 사람이 못 할 수도 있구나. 이것만 알아도 도를 많이 통한 것이다.
이것을 알려면 몇 십년 산에 올라가서 염주를 돌리고 있어야 한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안 되어서 서로 싸우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되어서 이럴 수가 있느냐, 저럴 수가 있느냐고 하는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너그럽게 생각되겠지만 나는 좁을 때는 무지무지 좁다. 그래도 너그러울 때는 또 무지무지 너그럽다. 누가 이것을 닮으려고 하면 못 닮는다. 타고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으심에는 만민이 포함된다. 죽으려고 예수 믿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죽으려고 절에 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 잘 돼 보려고 가는 것이다. 뭔가 도통하고 잘 돼보려고, 군자 되고 성불하려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밀이 있다. 원형의 인간, 다시는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존재만 남은 것이다. 그 안에 우리 모두가 다 포함되어 있다.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다. 뭐를 가지고 있으면 진실한 것이 아니고, 그 아무 것도 없이 남은 그 사람만 진실한 것이다.
내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다. 평생 붓글씨를 쓴 분인데, 자기 글씨를 보면서 자랑하는 말로 자기 글씨에 군더더기가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군더더기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글씨를 볼 줄 몰랐는데 그분이 그렇게 말했다.
오래 쓰면 군더더기가 없어지고 괴목처럼 꼭 있을 것만 있게 된다고 한다. 우리 집에 오면 천지창조라고 쓴 한자가 있다. 우리나라 명필이 쓴 글씨인데 아무리 봐도 고칠 데가 없다. 더 이상 씻어 내릴 수 없도록 다 씻어 내려가고 괴목처럼 뼈다귀만 남아있다.
주목 같은 것이 오래 사는 나무인데, 오래되고 다 썩어나가고 나면 속이 다 썩고 단단하니까 완전 뼈다귀만 남는다. 그런데 그것이 명품이다. 글씨를 그렇게 써야 잘 쓴 것이라고 한다. 나는 매끈하게 돌려놓으면 잘 쓴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있을 것만 딱 있게 써 놓은 그것이 명필이다.
예수님도 도를 통한다든지 뭐를 한다든지 그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죽은 것이다. 그런데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이 진실이다. 그것이 인간의 진실이다.
거기에 덮어쓰고 있는 것은 다 옷이다. 불교에서도 이것은 다 옷이라고 한다. 계급장도 옷이고 뭣도 옷이고 다 옷이라는 것이다. 벗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벗으면 그만이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고 있는 그분들이 예수만 보면 간단한데, 그것을 안 보려고 저러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인간이 되어 보려고, 그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이 되어보려고 한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다. 그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이 되어보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니까 동산을 나와서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 왜 두려운가? 자기가 없을 것이 있으니까 두려운 것이다.
거지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문단속을 안 한다. 부잣집에 가면 철조망을 이중으로 쳐 놓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중 삼중으로 쳐 놓았다. 왜? 자기에게 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집은 오히려 편하다. 그러니까 인생도 아무것도 없으면 편하다. 뭐가 있으니까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았더라고 했는데, 창세기 3장에 가면 무화과 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왜? 부끄러워서 가리기 위해서이다. 뭐를 가지면 더 당당해질 줄 알았는데, 선악이라는 지식을 가지니까 두려움이 온다. 부끄러움이 왔던 것이다.
이것이 인류사의 시작이다. 이것을 면해 보려고, 하나님 앞에 그런 대로 인정을 받아보려고, 가인과 아벨은 제사를 드리러 갔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모르시겠는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자기가 지어놓은 것은 어떻게 지어놓았는지 다 안다. 그런데 거기에 뭘 좀 칠해서 ‘나를 좀 봐주십시오.’라고 하면 봐주겠는가? 성형수술해서 하나님 앞에 가면 내가 언제 너를 이렇게 만들어놓았느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너를 이렇게 만든 일이 없다. 당연히 이렇게 할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에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7:22.23).”라는 말이 있다. 왜 모른다고 하겠는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니까 모른다고 한다. 내가 한 것은 다 안다. 내가 해놓은 것은 다 안다. 내가 안 했으니까 모른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모른다.
예수 안에 만민을 포함한다는 것은 너무 너무 놀라운 일이다.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도 못 박혔단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 없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 그가 죽을 때 나도 죽었다. 그 안에서 자기가 발견되니까 그렇다.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된 나만 진실한 나다. 그것만 하나님 앞에 보일 수 있는 나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려면 그것만 보여야지 다른 것을 보여서는 안 된다.
계급장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에게 보이겠는가? 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보이겠는가? 아무 소용없다. 그분이 만드신 대로 가 보여야 한다. 그것이 제물이다. 그분이 만드신 대로 보이는 것이다. 피를 볼 때 넘어갈 것이다. 피 외에는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것 외에는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고 했다.
그것을 왜 그렇게 했는가? 다른 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잔뜩 무엇을 입혀 놓았다. 그것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과 상대가 안 된다. 다 벗어진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새롭게 연합할 수 있다.
내가 뭘 많이 가지고 있으면 연합이 안 된다. 내 성질, 너 성질은 연합이 안 된다. 내 잘난 것, 너 잘난 것은 연합이 안 된다.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어야 연합이 잘된다. 그래서 초등학교 학생들은 연합이 잘 된다. 제일 친한 것이 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초등학교 친구들이 제일 친하다고 한다. 올라갈수록 친근감이 적어진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하려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것으로만 연합이 가능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전혀 연합할 수 없다. 형제들과의 연합도 마찬가지다. 내 어떠함과 네 어떠함으로는 연합이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소유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식으로 다 똑같이 하는가? 그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연합이 안 된다. 진실만으로 본질만으로 연합이 되기 때문이다.
그 연합한 것, 그것이 새 생명이다. 새 생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전혀 연합할 수 없는 사람이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새 생명이다. 옛 생명은 바벨로 가는 생명이다. 가면 갈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분열되는 생명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고 나니까 이제는 연합할 수 있는 생명이 되었다. 그래야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연합이 안 되니까 교회가 안 된다.
철근은 철근대로, 시멘트는 시멘트대로 자기 특성을 주장해 보라. 건축이 되겠는가? 그런데 건축자에 의해서 철근은 속에 들어가고, 시멘트는 밖에 있으니까 건축이 되는 것이다. 콘크리트 속에 들어 있는 철근은 수명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아주 옛날 집을 뜯어봐도 철근은 그대로 있다. 녹이 슬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밖에 나와 있다면 벌써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왜 나는 밖에 나와 있지 못하고 안에 있어야 되느냐고 하지만 철근은 속에 있어야만 영원하다. 옛날 집 뜯는 곳에 가보라. 철근은 그대로 있다. 전혀 안 썩는다.
우리가 생명의 연합을 가지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가 아니고 비소유로, 존재로 연합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존재로 만나고 존재로 연합되는 곳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어지는 곳이다. 존재로 만나고 존재로 연합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참된 건축이 된다. 진짜 사람과 사람의 교통도 그래야 진짜 교통이 된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 이 새 생명을 사도들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우리가 잘 들어야 한다.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했는가?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이다. 여러분은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이것이 말이 되는가? 안 된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되는 말로 생각하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한다.
왜 이 말이 나왔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서 앞부분에 이 말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다. 처음에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시는 동안에 자기들도 그 안에서 죽고 살아서 교회를 통해 그 사람을 체험한 것이다. 그 인격을 체험했다. 체험하고 나서 마지막에 쓴 말이다.
처음부터 누가복음 1장을 쓴 것이 아니고, 교회를 다 지나고 난 다음에 쓴 것이므로 결론이다. 이 사람을 보니까 아무래도 육신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땅에서 난 사람이 아니구나.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이구나.
누가복음에서 족보를 이야기 할 때도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눅3:23).”라고 써 놓았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눅3:23).” 그 말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을 보고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한다. 무슨 꿈을 꾸어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사람, 우리 안에 없던 사람, 사람의 생각에는 없던 사람이라는 말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마1:23), 임마누엘 사람(마1:23),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요1:14),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17:5).”
성령으로 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였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 사람이 임마누엘 된 사람인 줄 알겠는가? 하나님을 말을 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니까 이런 말이 가능하다.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3).”
요한은 특별하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라고 하였다. 말씀이 어떻게 육신이 되는가? 이것은 예레미야 31장을 두고 한 말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완성된 인격이다. 완성된 인격을 보고 지금 한 말인데, 이 완성된 인격은 연합된 인격이다. 하나님과 연합된 인격이다.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야 사람과도 연합이 된다. 하나님과 연합되고 사람과 연합이 된다. 이것이 완성된 인격이다.
인격이 완전히 고상하고 고매하며 훌륭하다고 하는데 누구와도 연합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인격이 된 것이 아니고 완전히 망가진 것이다.
돌아가신 분인데 이야기를 해서 안 됐지만 그 영감님은 재주가 많았다. 머리도 비상하게 좋았고 글씨도 명필이었다. 한의사들을 많이 만나 봤는데 이분만한 사람이 없다. 진맥을 해도 그렇고, 약을 쓰는 것도 그랬다.
진맥을 하면 어떻게 병을 잘 알아맞히는지 모르겠다. 너무너무 신기하다. 약도 별 약을 안 쓴다. 대부분이 아는 약을 쓰는 데도 딱 적중한다. 그 기술이 정말 아깝다. 그런 분을 한 번만 더 만나면 지금도 내가 살아날 것이다. 그 정도로 재주가 비상한 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자기 아들도 자기 아버지를 버렸고, 며느리도 당연히 가 버렸다. 막내딸도 자기 아버지를 싫다고 했다. 아무도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 한탄이 ‘나에게는 왜 사람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나를 볼 때 시시한 사람이 아닌가? 아주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다. 어디 가면 나 같은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 평범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분이 관상도 보는데 늘 지켜보았는데, 관상을 보는 지식으로 보면 아무리 봐도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저렇게 사람이 많이 따라다니는가? 이것이 이분의 평생 의문이었다. 마지막까지 의문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를 몰랐다. 왜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성질이 대쪽 같다. 조금도 못 봐준다. 한 치도 못 봐준다. 너무나 예리하기 때문이다. 재주가 그렇게 비상한데 말이다.
우리말에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는 말이 있다. 재주가 높으면 덕이 없다는 말이다. 재주가 많고 덕도 많으면 좋은데, 재주가 많은 사람은 덕이 없다는 말이 있다. ‘재승박덕’이라는 말이다. 그분을 보면 꼭 그래 보인다. 마지막엔 혼자 돌아가셨다. 아무도 없었다.
그 의문을 이야기 해 준다고 해도 그 분이 고칠 수 있는가? 못 고친다. 또 우리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다. 경륜이 얼마인데 그런 말을 하겠는가?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제일 고상한 사람이다.
자식과도 연합이 안 되고 사는 도사인데 무슨 인격자인가? 자기 혼자 낙락장송(落落長松)되면 뭘 하는가? 내 옆에 있는 이 소나무 분재가 여기에 와 있으니까 빛이 나지 자기 혼자 있으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내가 봐도 양쪽에 소나무가 있으니까 아주 굉장해 보인다. 나와 같이 있으니까 그렇다.
연합한 사람! 이것이 교회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연합으로 완성되도록 지어 놓았다. 하와를 지어서 아담에게 이끌어 오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 이것이 마지막 축복이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될지라.” 우리가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고 마지막 축복이다. 누구와도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가장 아무 것도 아닌 자리에서 우리 모두를 포함하였다. 그가 잘 나간 자리에서 우리를 포함한 것이 아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나는 거기에 포함되지 못한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일 때 나는 거기에 포함될 수가 없다. 놀라운 사람이 아닌가! 놀라운 사람인데 거기에 나는 포함이 안 된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 안에는 내가 포함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나의 주님’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 우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람을 보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17:5).”한 것이다. 그냥 우연히 한 말이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다.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소원했던 그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17:5).”이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은 너무너무 쉽다.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애쓴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보면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너무 쉽다. 그 쉬운 길을 버리니까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것을 버리고 자기를 만들어 보려고 하니까 어렵다. 자기를 메이커 업 하려니까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은 얼굴을 하도 고쳐서 누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겨울에 추우면 온도차가 생기니까 표가 난다고 한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성형수술을 한 것을 봤는데, 제대로 붙지 않으니까 꼭 가죽제품을 조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냥 있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성형을 했는데 제대로 안 되니까 썩어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는 어딘가에 좋은 데가 있다. 사람은 어디가 좋아도 좋은 데가 있다.
존재 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면 못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소유 안에서 만나려니까 어려운 것이다. 내 성질로 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내 지식으로 만날 수도 있다. 다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 존재로 만나면 아무도 어려운 사람도 없고 두려울 사람도 없고 그렇다.
나도 사람을 대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지금은 두려운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환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보이고 나도 환히 보인다. 너나 나나 마찬가지라는 뜻이 아니고 당신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까 너무너무 쉽다.
사람 때문에 사람은 얼마나 시달리는지 모른다. 직장에 가도 사람 때문에 시달린다. 사람이 아니면 시달릴 데가 없다. 만물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니면 시달릴 데가 없다.
로마서에는 “피조물(만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기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별 것으로 알지만 만물이 볼 때 다 증오스러운 존재들이다. 우리가 수풀 속에 들어가면 다 밟아서 못 쓰게 되니까 모든 수풀이 우리를 원망하고 저주한다. 우리는 잘났다고 하지만 잘난 것이 하나도 없다.
만물이 탄식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17:5).” 이런 자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슨 위대한 사람인가?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존재만 남은 사람이다. 그 사람을 보고 하나님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보고 비참해서 3년 반이나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다 버리고 도망쳤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17:5).”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의 부활이 교회이다.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 교회이다. 우리를 그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고 그가 우리를 포함했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연합이라는 말은 ‘같은 모양’이라는 뜻이다.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우리가 그의 살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둘이 아니다. 예수와 하나이다. 둘이 아니다. 만민 안에 포함된 사람이다. 나는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이다. 나만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만민 속에 있는 사람이다.
보통 인간이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도 모든 것이 되는 사람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는 사람이다. 나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이야기 하면 자기도 그 안에 있으니까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무시하면 내가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자기를 무시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예수를 존중하면 내가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 된다.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하나님도 나를 무시한다. 내가 하나님을 존중하면 하나님도 나를 존중한다.
이 말이 예수에게 와서 딱 성취가 되었다. 내가 그를 존중하면 그도 나를 존중하고, 내가 그를 무시하면 그도 나를 무시한다. 사람도 그렇다. 내가 어떤 사람을 무시하면 그 사람도 나를 무시한다. 내가 그 사람을 무시한다고 그 사람이 나를 존중해 주는가? 안 해 준다.
내가 그 사람을 무시한 대로 그 사람도 나를 무시한다. 반대로 내가 누구를 존중해보라. 그 사람도 나를 존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계속해서 존중하면 나를 존중해 준다.
아까 말한 그 영감님도 처음에 가니까 나를 시답지 않게 생각하였다. 누구나 처음 보면 다 그렇다. 내가 계속 가서 자기를 존중하고 존경하니까 뒤로는 슬슬 무엇을 좀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분과 같이 있으면 다 배우겠다 싶었다. 마음을 사면 다 가르쳐 준다. 안 그러면 안 가르쳐 준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안 가르쳐 준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처방도 내놓고 보여주면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어?’ 오히려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내가 존중하면 상대방도 나를 존중한다. 아무리 남산 구락부 같은 사람이라도 내가 자기를 존중하는데 자기는 나를 존중하지 않겠는가? 또 내가 무시하는데 왜 나를 무시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17:5).” 이것이 인격회복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또 여기에 인류의 소망이 있다. 그리고 교회의 소망이 이 안에 있다.
우리는 영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100살밖에 못 살고 죽어도 우리는 영원한 사람이 되고, 영원한 세계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계가 다른 세계이다. 판이 다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사람들은 어느 판에 살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이 판인지, 저 판인지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면 된다. 온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만 인정하시면 된다. 이렇게 쉬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 이보다 쉬운 일이 세상에 또 있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한 줌의 흙밖에 안 되는 인생을 너무너무 축복하셔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안에서 완성된 모든 축복을 우리와 함께 누리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원합니다. 이 은혜에서 낙오된 사람이 없기를 바라고 이 은혜 안에서 다 완성되기를 원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