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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집인가 하나님의 집인가 ?
안유섭 목사 (아르케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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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 중에 보면 46절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야곱의 집이 무슨 뜻인가?
위와 같이 번역된 행 7:46의 말씀은 의역을 함으로써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게 하고 있는 부분인데 특히 ‘야곱의 집을 위하여’라는 표현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본 절은 전반적으로 번역이 잘못되었으므로 문장 전체를 다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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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 (휴렌) (카린) (에노피온) (투) (떼우) (카이) (에테사토) (휴레인) (스케노마) (토) (떼오) (야콥)
who 발견하였다 은혜를 ~앞에서 (그) 하나님 그리고 구하였다 발견할(볼) 것을 장막을 (그) 하나님을 위하여 야곱의 첫 번째 단어 호스(ὅς)는 주격 관계 대명사인데 행 7:45의 끝 단어 다비드(Δαβίδ) 즉 다윗을 받는 말로서 ‘그는’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다음 휴렌(εὖρεν)은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εὑρίσκω)라는 동사의 과거 형태로서 여기서는 뒤따르는 명사 카린과 함께 ‘다윗이 이미 은혜를 깨달았다’라는 뜻이다.
다음의 카린(χάριν)은 기쁨 또는 은혜라는 뜻을 가진 여성 명사인 카리스(χάρις)의 목적격 형태로서 앞의 동사 휴렌의 목적어가 된다.
다음의 에노피온 투 떼우(ἐνώπιον τού θεού)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의 전치사구이다. 여기서 투 떼우는 소유격의 형태인데 헬라어 전치사는 영어의 전치사가 목적격만을 취하는 것과 달리 소유격과 여격도 취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다음의 카이(καὶ)는 ‘그리고(and)’ 또는 ‘혹은(or)’의 뜻을 가진 접속사이다.
다음의 에테사토(ᾐτήσατο)는 ‘구하다(Seek, Ask) ’ 또는 ‘간구하다(Desire)’의 뜻을 가진 동사 아이테오(αἰτέω)의 과거형태로서 뒤따르는 부정사 휴레인과 함께 ‘보게 해주시기를 간구했다’라는 뜻이 된다.
다음 휴레인(εὑρείν)은 휴리스코(εὑρίσκω)동사의 부정사(Infinitive)인데 ‘발견하게 되기를’ 즉 ‘보게 되기를’이라는 뜻이다.
다음의 스케노마(σκήνωμα)는 장막 또는 성막(Tubernacle)이라는 뜻이다. 마지막 어귀인 토 떼오 야콥(τῷ θεῷ Ἰακώβ)은 ‘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토 떼오는 이익 또는 관심의 여격(Dativus Commodi)이라는 형태로서 ‘하나님을 위하여’로 해석하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아무튼 표준 원문에는 이 마지막 어귀에 ‘집을 위하여’라는 말이 없고 ‘야곱의’라는 소유격으로만 나타나 있다.
이 구절은 스데반이 대제사장과 유대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 중에서 교회의 모형인 성막과 성전에 대하여 언급(행 7:38-50)한 내용 중의 일부분으로서 다윗 시대까지 이동하여 다니던 성막이 앞으로 성전으로 지어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윗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을 하나님의 큰 은혜로 깨닫고 자신의 당대에 그 역사(役事)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된 것을 보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7:47 말씀을 보면 그렇게 소원하던 다윗은 성전 건축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성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준 원문에 따라 행 7:46-47을 다시 번역하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깨닫고 야곱의 하나님을 위한 성전 볼 것을 간구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게 되었다”가 된다. 이렇게 알기 쉬운 내용을 개역 성경은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는 등 이상하게 번역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은 다윗(물론 많은 죄를 짓기도 하였지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 역시 온유하기가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과 대면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지만 그는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이로 볼 때 인간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으며 궁극적으로 완성되어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게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전 개념의 점진적 계시)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 계시는 곳인 성전의 성경적 개념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하나님은 어느 특별한 장소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렘 23:24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근원적으로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계신 분이시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곳에서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성전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구약의 성전의 개념은 완전히 바뀌어진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구조는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 한꺼번에 모든 비밀을 알려주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히 5:11의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라는 말씀대로 어린아이에게 장성한 자가 먹는 음식을 주면 먹을 수도 없고 먹는다 하더라도 소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비밀을 깨달을 그릇으로 자라지 못한 자에게 처음부터 온전한 지식을 주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계시는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고 조금씩 발전하여 가다가 결국에는 그 비밀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성전의 개념 역시 이러한 성경 계시의 원리에 따라 구약에서 신약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구약의 성전의 개념은 성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를 통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던 중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명하셨다(출 26:1). 성막은 히브리어로 미쉬칸(ן)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라는 뜻으로서 이는 다시 성소와 지성소로 구별(출 26:33)하도록 하셨다. 성소를 코데쉬(שׁ) 또는 미크다쉬(שׁ)라고 부르고, 지성소를 코데쉬 코다쉼(םיֳק שׁ) 또는 데비르(רי)라고 불렀다.
미쉬칸은 출 25:8에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소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지성소를 구별하여 모세와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출 25:22).
다윗 시대까지 여러 곳으로 이동하여 다니던 미쉬칸은 솔로몬 시대에 와서 마침내 성전으로 완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성전은 히브리어로는 헤칼(לי)이라고 부르고 헬라어로는 히에론(ἱερόν)이라고 부르는데 성막과 마찬가지로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었다. 헬라어로 히에론이라 할 때는 성전의 외소(外所)를 말하`며, 내소(內所) 중에서도 지성소는 나오스 (ναός) 또는 하기온(ἅγιον)이라고 부르는데, 구약 성전의 지성소인 데비르와 같은 것이다. 히에론(ἱερόν)은 제사장을 뜻하는 히에류스(ἱερεύς)에서 연유되었으며, 이는 제사장이 제사지내는 거룩한 곳이라는 뜻으로 주로 장소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오스 또는 하기온은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각하는 의미가 있다. 즉 나오스 또는 하기온은 하나님과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인격적인 만남이란 막연히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존재 속에서 구체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건을 말한다.
고전 3:16-17의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사건이 우리 안에 이루어 질 때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성전이 될 뿐 아니라 엡 2:21에서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체들인 우리가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로 지어져 갈 완성된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된 이 위대한 사건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인 우리가 화목을 이룩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대 제사장의 도움 없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지성소엔 대제사장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예 지성소 자체가 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는 성전된 우리 몸 안에서 실존적으로 만나는 역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각 사람에게 이루어 진 것이다.
(돌로 지은 성전 개념의 종식)
이제 성전에 대한 계시가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살펴보자.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까지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성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나 요 2:21의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에서 성전은 예수님의 모형이었을 뿐이며 성전의 실체는 주님 자신라고 말한다. 돌로 지은 성전이 주님 자신을 예표한 것이었다는 것은 성전에 대한 계시가 집이라는 물질적 장소에서 인격 안에 존재화되는 사건으로 점진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성전에 대한 계시는 계속 발전하여 주님께서 자신의 죽으심을 통한 단번에 드리는(히 7:27)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휘장이 찢기워지게 됨(마 27:51)에 따라 다시는 대제사장을 통한 제사가 필요 없게(히 10:18) 되었으며 동시에 제사의 장소인 성전은 완전히 필요 없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 세상에 돌로 지은 성전은 다시없으나 그 대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참 성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이제는 하나님께서 다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돌로 만들어진 성전에 거하시지 않으시고 성전된 육체인 우리의 몸에 거하신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이 성전에 대한 최종적 계시인 것이다.
최초로 지어졌던 솔로몬 성전은 유다 왕국의 멸망과 함께 붕괴되고 후에 재건되었으나 마카비 시대에 로마에 의해 다시 훼파되었다. 그후 예수님 성육신 하시기 전에 헤롯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었다가 AD 70년 로마에 의해 다시 한번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현재에 이르기까지 성전 없는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은 주의 날이 임하여 예루살렘이 심판받을 때 하나님의 진노로 모든 것이 파괴되리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때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마 24:2)고 말씀하셨다. 그 아름답던 성전(눅 21:5)이 반드시 훼파(눅 21:6)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였던 성전이 주님께서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 하신 후에는 가장 가증스러운 복음의 장애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주님의 부활 승천 후에도 헤롯 성전에서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가증스러운 예배행위를 계속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행위였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멸망 심판을 예고하신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들은 성전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건축하는 것을 마치 솔로몬이 받았던 축복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무리하게 성전 건축을 감행하다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일을 당하기도 한다.
돌로 지은 것이 성전이 아니라 성도의 몸이 바로 성전이 되었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성전 건축에 집착하는 교회들이 많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도들을 성전에다 묶어두려는 개교회 성장 위주의 사고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개교회 주의 사상은 성도의 교제를 비롯하여 전도를 하든지 구제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들의 교회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성도들을 이기적 신앙으로 오도할 수도 있는 무서운 사상이다.
교회는 서로 도와야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자 교회는 가난한 교회를 돌아보고 힘있는 교회는 약한 교회를 도우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화려하게 잘 지어진 성전 건물 안에서 자신들끼리만 평안하다하면서 고복격양(鼓腹擊壤)하고 있다면 아마도 그런 교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으실 것이다.
한편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부득이 성전 건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빚을 잔뜩 지고 성도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면서까지 무리하게 성전 건축을 추진하는 것 또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성전 건축을 함에는 다윗이 장기간 풍부하게 준비한 것을 가지고 솔로몬이 여유있게 건축하였던 모델을 본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는커녕 교회 분열과 사회적 물의를 야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가 만일 그동안 성전 건축에 쏟아 부었던 힘과 열정을 구제와 전도하는 일에 힘써왔다면 기독교가 오늘날과 같이 무기력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