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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쟝켈레1959앙리베16L04A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1절 사유와 두뇌 Pensée et cerveau 80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Πολλάκις ἐγειρόμενος εἰς ἐμαυτὸν
ἐκ τοῦ σώματος καὶ γινόμενος
τῶν μὲν ἄλλων ἔξω, ἐμαυτοῦ δὲ εἴσω,
θαυμαστὸν ἡλίκον ὁρῶν κάλλος, ..."
플로티노스, 엔네아데스, IV, 8, 1.
첫째로, 물질과 기억(1896)이란 책은 아마도 벩송의 저술들 중에서 가장 천재적인 저술이며, 이 책은 의식을 마치 유기체 안에 참여된 것처럼 연구했다. 그 유기체에게 의식이 의존하고 있고, 또한 유기체는 의식을 바깥으로 드러낸다. 이 의존의 정확한 본성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에 이어서, 시론(1889)이 우리에게 반명제들의 첫 목록을 제공했었는데, 그 반명제들이 어떤 형식을 띠고 있는가? (49NLJ)
제1절 사유와 두뇌 Pensée et cerveau 80
물체와 정신의 소통에 대한 벩송의 이론은 평행론자의 - 부대현상론자, 실재론자, 관념론자 - 체계들에 반대하여 작성되었다. 이 체계들은 두뇌와 의식의 동등성[등가성]을 인정하고, 심지어는 의식적 사실의 절대적 허풍[자만심]을 인정한다. 이 등가성은 모든 “구심적인” 심리학들이, 또한 밖에서 안으로 신체에서 영혼으로 가는 모든 형이상학들이, 다소 암암리에 주장하는 등가성이다. 그러나 정신적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통찰(notre vision)은 이 선천적(a priori) 해결을 아주 있을 수 없는(très improbable 그럴듯하지 않는) 것이게 한다. 어떤 물질적 현상도 어떤 두뇌의 변양도, 거대하게 무한한 영혼의 상태와 공연적(coextensif)일 수 없을 것이다. 신경체계의 해부학에서는 정신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사실에 대해서 소진할 수 없는 그 깊이와 그 풍부함을 고려해 온 바가 없다. 벩송은 수천 개의 다른 형식들로 이 근본적인 생각을 표현한다. 기억은 두뇌보다 더 무한히 펼쳐져(étendue 부피가) 있다. 자아는 신체를 넘쳐나는데 비해, 신체는 자아를 공간과 시간 속에 가두고 있다. 공간 속이란 것에 대해, 왜냐하면 우리의 상상작업이 동시에 도처에 있음(unbiquté)이란 소질(le don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소질은 또한 민첩한 존재이기에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 속이란 것에 대해, 왜냐하면 정신은 스스로 추억을 되새기고 또 상상작업은 자기-자체를 스스로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경체계는 무엇에 쓰이는가? 나의 신체는 우선 행동의 중심일 뿐이다. 신체는 운동을 받아들이고 되돌려준다. 이 행동의 중심에서 신경 축은 본질적 임무로써 자극들을 받아들이고 이 자극들을 운동들로 이어간다. 척수(la moelle épinière)의 수준에서 자극은 무매개적으로 운동 반작용으로 “반사된다”. 따라서 반사(le reflexe)는 본질적으로 외적 세계를 향해서만 일종의 열려진 회로이다. 자극은 주변에서 하부 중추들(척수, 신경절, 연수)에까지 길을 따르면서, 무매개적으로 폭발적인 방출을 일삼는다. 이 방출은 아직은 두뇌에게까지는 작용을 행하지 않은 것이다. 고등척추동물에게서 두뇌의 출현은 응답을 연기하고 지체하게 하는 것을 특히 효과로써 삼는다. 오류 가능성 없지만 획일적이고 맹목적인 적응체계[순응 체계]는 보다 느리지만 덜 운명적이고 그럼에도 유연하며 다양한 적응체계로 대체된다. 그 반사가 이렇게 숙고된 의도에서 복잡해짐에 따라서, 두뇌의 여러 메카니즘들[기계적 작용들]은 작동의 두 항들 - 외적 선동과 응답이라는 - 사이에, 점점 더 오랜 지연을, 즉 우리 품행의 비결정성을 증가하게 하는 집행유예를, 개입시킨다. 벩송의 관점을 밝히는데 여기서 매우 적당한 삐에르 쟈네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의지와 분간을 천성으로 부여받은 존재들의 중요한 덕목[탁월성]은 잠복과 대기의 덕목이란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첫째로 자기 두뇌에 빚지고 있다는 것[의미], 그것은 원하는[바램] 능력이라기보다 훨씬 더 많이 스스로 자제하는(de s'abstenir) 권능이다. 그러나 자제는 또는 충력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지 않는가? 우리가 조금 전에 말했던 회로(le circuit)는, 둘째로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내부를 향해 열려있다. 더 좋게 말하자면 뇌활동 작업은 피질의 에너지 저장에 의해 무한히 늘어진 순환 작동 대신에, 점점 더 자의적이고 예견 불가능한 작동들로 대체 한다. 정신적 세계를 더 이상 포함하지 않는 자동화된 활(궁, 弓)은 추억들과 이미지들로 부풀려진 행위들로 쏘아댄다. 신중한[대뇌를 사용하는] 인간은 척수의[조건반사의] 인간에 뒤를 잇는다. 따라서 늑장부리는 여러 메카니즘들을 지닌 두뇌는 선택의 기관이자 자제의 기관이다. [스페인 제수이트인] 그라시안(Baltasar Gracián, 1601-1658)은 시의에 맞는 행동(temporisement)과 조심스런 신중함의 이론가인데, 그는 뇌의 기능이 지체(le délai, Mora)이며, 본성상 연체하는(moratoire, = moratorium 지불유예명령)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두뇌는 앙심(la rancune)[깊숙이 처박기]과 생각 바꾸기(le ravisement)를 허용하고 반면에 반사적 행동은 바깥으로부터 선동들과 하부 중추[신경]들 사이에 둥글게 원을 돌면서, 우리의 충동적인 복수들을 오히려 내려놓는다. 먼 기간의 지불기한 만기들을 예견하는 가능성은 열정적으로 표현하는 즉흥곡적인 것들과 그 즉석연설적인 것들에 대해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을 이때부터 우리에게 회피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벩송이 강조하기를, 척수의 기능들과 대뇌의 기능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한다. 동일한 구심적 자극은 대뇌에서 무한히 많은 운동[을 전달하는 회로]의 길들에서 선로 변경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반작용들의 음계(la gamme, 주파수)는 가능한 진동들의 음계 보다 훨씬 더 많이 넘쳐난다. 연수[척수]와 대뇌의 기능들의 본질적인 동질성은 벩송 생물학의 근본적인 원리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신경학자들이 그것을 충분하게 확인해 주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감응성에서 감성으로 또 “자발적인” 운동으로 고양됨에 따라서, 쇼펜하우어가 이미 주목했듯이, 비례에 맞지 않은 이 불균형이 자극과 반작용 사이에서 점점 더 커진다. 결국에는 의욕 안에서 중추들[신경체계들]은 우리의 근육들이 소모하는 에너지를 창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주 단순하게 두뇌는 시간 속에서 아주 충만한 행동에 접속하고서(articuler), 부속된 인상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에너지를 무한히 축적한다. 이 불균형은 극한에서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두뇌 자체는 운동의 절대적 원인이 아니다. 사람들은 벩송이 “자연주의자(naturaliste)”라고 비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뇌의 작업에게 기적적인 독창성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관념론자들은 인간 정신의 순결한 존엄성을 간직하기 위하여 이 두뇌에게 부여한 독창성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심층에서 아주 반대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척수의 활동성과 두뇌의 활동성 사이에 단절을 거부하면서 벩송이 두뇌 활동과 정신 활동 사이에 이제까지보다 더 깊고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을 보고(報告)할 수단들을 예약해 두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리고 사유를 [신경의] 모양변화들에서 추출하기 위하여 몰래 끼워 넣은 궁여지책이란 어떤 것을 벩송이 이렇게 부인한다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감화적인 강도성의 문제를 토론하는 벩송은 윌리엄 제임스와 더불어 노력의 구심적 이론을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희생자로 보았듯이, 회고적 착각의 희생자인 상식의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성을 전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지적작용을 중심적이고 사방으로 퍼지는 노력처럼 해석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전복이 이루어지라라는 것은 정신 그 자체를 위해서이다. 나도[아무도] 모를 어떤 창조적 방출(émission) 능력을 신경 중추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주변의 모양변화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다. 왜냐하면 모양변화들이, 정신적인 것에, 즉 운동과 그 행동의 유일한 핵심에 맞서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극들과 운동들 사이에서 개입하는 두뇌가 하는 역할을 우리는 점치기에 된다. 우리가 대뇌에 의해 신경충동을 우회하면서 얻는 것을 사람들이 어려움 없이 막연하게 들여다 본다. 우리가 시간을 번다. 그리고 여기서 시간이 자유라는 의미이기를 원하다. 삶의 투쟁들에서 중대한 사건, 그것은 사건의 개입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 즉 사건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따로 떼놓은 가능적인 것을 맞자기(pour soi, 대자)로써 갖는다는 것이다. 먼 시간이 지나서 기한 만기된 것들을 예견하는 자들과 시간화하면서 조정의 범위와 계산의 정확성을 열배 커지게 하는 자들은 강한 자들이다. 따라서 유예의 도구인 두뇌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자유의 도구이다. 이러한 대로 시론은 자유라는 것을 우리에게 모조리 말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이 두뇌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이제 어떻게 가능한가?
두뇌는 일종의 “중앙 전신전화국”이다. 그것의 역할은 소통을 부여하는 것이고 소통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또한 [두뇌는] 유기체의 관점에서 받아들인 흐름을 가능한 수많은 방향으로 던질 수 있는 “전환기”(un commutateur)이다. 벩송은 훨씬 더 분명하게 다른 곳에서 뇌(l'encéphale)를 “무언극의 기관”에 비교했다. 뇌의 역할은 정신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지, 그것을 생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어떤 상응이 있으며, 더욱이 뇌피질의 분자의 모양변화들과 이미지의 계속 사이에는 동시성(un synchronisme)이 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의 몸짓이 매 순간에 교향곡의 리듬의 분절들에, 즉 그 몸짓들이 정확하게 또박 또박 맞아떨어지는 분절들에, 상응하는 것을 어떻게 놀라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교향곡이 지휘봉에도, 악보대 위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박자를 맞추는 몸짓이 박자를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만일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뇌의 삶은 매 순간에 정신적 생명의 박자에 맞추어 두드리는 것이지, 정신적 삶이 뇌의 삶의 기능인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한편의 희극은 배우들의 연기 몸짓 속에 소진되지 않는다. 벩송은 놀이(le jeu)라는 용어에 도움을 청하면서 자주 표현하는 데, 이에 대해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전적으로 그것을 새롭게 했다는 점이다. 놀이 역할을 하는 자(le jouable)와 역할을 부여받는 자(le joué) 사이의 관계는 모방 작업이라기보다 오히려 무언극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문자적인 닮음(유사)의 연관을, 또는 타동사[외적 힘의]의 원인성의 연관을 배제한다. 그런데 하나[심 心]의 출현은 단지 다른 하나[신 身]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을 지적한다. 심리적인 것은, 평행론자들이 번역을 인정하는 것과 같이, 두뇌의 선(線)상에서 병치하는 것과 같은 번역이 아니다. 심리적인 것은 거의 언어에 가까운 측면에서 원본 텍스트 안에 있는 만큼만 정확하게 번역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런 위치 이전은 아무 것도 보태지 못하고 삭제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상응하는 이 두 판본은 이 둘의 내용의 측면에서 이제 무한히 동등한 것이 아니며, 이들의 본성상으로 보면 절대적으로 이질적이다. 스피노자가 그렇게 원했던 대로, 하나의 유일한 실체는 두 가지로 정식화되어 평행하는 관용어법(deux idiomes)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실재성의 두 질서로 되어 있다. 더군다나 타동사[왜재적 힘]의 원인성은 없으며, 벩송은 이 관점에 관하여, 라이프니쯔가 실체들의 상호소통의 문제에 대한 데카르트적 해결에 반대했던 비판들을 기꺼이 자신의 것을 만들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창조적 진화에서는, 물체성이 생명에 관해 효과적인 작용(une action)을 행사하기는커녕, 아주 부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사유와 두뇌를 연결하는 연관은 오히려 표현이라는 연관, 즉 상징적 연관일 것이다. 표시(le signe, 기호)는 의미화된 사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상징은 상징화된 사물을 더 이상 닮지 않는다. 표시는 사물을 놀이 삼는다(jouer 상연한다). 이것은 바로, 데카르트 그 자신이 과학의 자치성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사유의 순수성을 좋아하여 이원론을 무엇보다도 먼저 유지하고자 고민하였던 것인데, 그의 저술 세계론(Du munde) 앞부분에서 그가 이미지들과 감각적 대상들의 본질적 비유사성(la dissemblance)을 강조할 때 가정한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다. 번역은 두 사물들 사이에 내적이고 총체적인 의존성을 창조(생산)한다. 왜냐하면 번역은 그것들의 내용들에 대하여 평행론 자체에 근거한 상사(相似 une similitude)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징주의는 사물들의 기능에 근거한 단선적이고 추상적인 관계이지, 사물들의 형태학(morphologie)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은 사물을 단지 새로운 관습에 옷을 입히면서 그 사물 전체를 운반하는데, 이에 비해 상징물은 사물을 연출하기 위하여 사물의 분배된 몫(une portion)을 추출한다. 예를 들어, 근육[근육운동]의 전송에서 멜로디[강도]는 높이로 변화시키는 것이지 옆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쇠와 장롱을 바꾸는 것으로, 또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원했던 간격을 음정을 높이거나 낮추기 위하여 음악 보표 위에 음표를 이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은 운반된 뇌의 물질이 아니며, 알고리듬(algorithme, 계산식)의 단순한 대체는 우리를 하나의 기보법에서 다른 기보법으로 결코 운반[이동]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물질과 기억에서는 상징주의의 역할이 전개되고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고, 시론에서는 특히 그것의 부정적 기능, 건조함, 불투명성을 고발했었다. 이 뇌의 상징물은 이제 우리에게 특히 무언극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분명하게도 무언극 안에는 모방된 감정들 안에서 보다 훨씬 더 적은 것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몸짓 속에서나 표현하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 자체로부터 일어나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 감동들(nos emotions, 감응들) 중의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적 삶 중에서 가장 잘 요약되고 가장 겉껍질 같이 분배된 몫일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를 들어 필체학(la graphologie)은 성격학의 류(類)적인 것을 지적하지만 개별적 종(種)별화도, 종적인 것으로부터 모방할 수 없는 만큼이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뉘앙스도 지적하지 못한다. 무언극과 “모방된” 사물은 아주 다른 두 질서에 속한다. 이것들은 동일한 도식(le plan, 평면) 위에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본질적 이질성 속에는 정도의 변이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식이란 면에서 차이들의 심리학적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표시(le signe, 기호)와 기호화된 사물은 차이 있고 중첩되는 두 도식(평면)위에 있다. 반대로 번역은 원본 텍스트와 다른 도식위에 있지도 않고, 또 아주 다른 질서로부터 나오지도 않는다.
따라서 뇌의 작업은 정신적인 작업의 연출만 할 뿐이다. 이 두 도식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적 척도도 없으며, 그리고 벩송의 심리학은 처음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이원론으로 나타난다. 모든 평행론 체계들의 공통적 잘못은 - 또한 관념론자들도 부대현상론자들도 마찬가지인데 - 근본적 이질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뇌의 모양변화[양태변화과정]들은 모양변화 그 자체일 뿐이며, 다시 말하면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수천 개의 다른 이미지들 중에서 매우 특별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모양변화들이 부추긴 것으로 간주된 지각들은 뇌의 현상들 그 자체를 포함하는 전 우주를 정확하게 표상[재현]한다. 정신적인 사실은 그것의 경이로운[놀라운] 탄성[탄성체 성질]에서, 그리고 전 세계와 동등하게 되고자 하는 그것의 자질(재능)에서 본질적으로 총체성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하나의 유일한 전체의 부분들을, 동등하든 또는 동등하지 않든, 이 두 부분들을 그 자체들로 비교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전체 그 자체를 부분들의 하나에 비교할 수 없다. 차이는 모든 측면에(toto genere) 있다. 그런데 지각은 심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전체이다(est tout). 사람들은 부대현상론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를 생성하게 하는 책임을 진 두뇌운동들을 사유에 의해서 표상한다고 하는데 대해 근거를 가지고 자주 비난하지 않는가? 심신 평행론에 대해 벩송의 비판이 고발한 순환논증의 오류는 - 예를 들어 그 순환논증 오류 속에서 움직이는 쇼펜하우어의 관념론이 대우주를 세부 현상일 뿐인 두뇌 속에 가두어 둘 때 - 사유의 우선성을, 그리고 사유가 우리를 감싸고 있는 필연적 명증을, 기원으로 삼는다. 경험적이든 또는 구심적이든 모든 주변적 설명을 - 이 설명은 정신적 삶의 고유성을 그것의 고유한 요소들과 더불어 생겨나게 한다고 주장했을 지라도 - 암묵적인 부당전제의 오류(une pétition de principe)라고 이렇게 단죄하는 것은 정신적 삶의 고유함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적 삶은 보편적인 현전[출현]이며 총체적 확신이기 때문이다. 이 총체적 사유는, 마치 웃이 못에 걸려있는 것처럼, 뇌에 걸려있으며, 뇌는 사유를 보다 좋은 자신의 방식으로 모방한다. 그러나 어떤 이가 도대체 못과 웃이 닮았다고 주장했던가? 왜냐하면 나사는 기계를 고정하는 대 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계전체를 나사에 동등한 가치라고 말할 것인가?
이리하여 뇌의 위치화[지도화] 작업들의 우상은 사라진다. 뇌의 위치화 작업은 진실한 과학적 골상학의 약속을 얻기 위하여 지난 한 세기를 보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벩송의 천재적인 진솔한 특성에 의해 대부분의 생물학자들보다 앞서서, 히트찌히(Julius Eduard Hitzig, 1838-1907), 베르니케(Carl Wernicke, 1848-1905), 플레히지히(Paul Emil Flechsig, 1847-1929) 등의 지배적인 이론에게 1896년부터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는 것을 안다. 의사 노데(Dr Nodet 1873-1923)와 초기 시기에서부터 피크(Arnold Pick, 1851–1924)는 벩송의 예상참여들의 가치를 분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늘날 마리(Pierre Marie, 1853-1940)와 무띠에(François Moutier, 1881-1961), 모나코프(Monakov, 1853-1930)와 무르그(Raoul Mourgue 1880-1950)의 작품들 덕분에, 아무도 이미지들의 중추들에 대해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데 더 이상 과감하게 모험하지 않는다. 뇌수와 심리의 절대적 이질성은, 어떻게 이미지들이 피질의 세포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는지를,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떻게 영혼의 모든 지리학[위치화]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게 금지 한다. 실어증의 연구는 이런 인상을 확인한다. 사람들은 뇌의 반구들의 몇 가지 손상들에 의해 일으켜졌던 다양화된 혼란들이 1861년에 브로카(Paul Pierre Broca, 1824-1880)에 의해 확립된 두뇌의 지형학[위상학]에 출발점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도 사람들은 피질의 단절[손상]들과 소위 말하는 추억들의 상실 사이에 필연적 연결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우선, 매우 진실하게 추억들이 피질의 세포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어증 환자에게서 단어들은 기계적으로, 즉 손상이 넓어지는 정도에 따라서, 하나 다음에 다른 하나로 차례차례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물질적 사물들의 고유함[동일성]은, 우리가 그 고유함을 알고 있는 대로, 그 물질적 사물들 자체이외 다른 사물을 함축하고 있지 않는 다는 것이고, 그리고 [사물들 자체들이] 서로 상호 배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추억들과 이미지들이 뇌의 흔적들에, 마치 투사가 모델[원본]을 되찾는[덮고 있는] 것처럼, 점 대 점으로 대응한다면, 추억들이 굴복한 사건들은 정확하게 추억들의 상호 외재성을 표출해야만 했을 것이다. 사실상 경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게 해준다. [한편] 그것은 전적으로 약화되고 전적으로 사라지는 심적 청취 일반의 기능이다. 또는 [다른 한편] 단어들은 리보(Ribot 1839-1916)가 정립한 퇴행 법칙에 대체로 복종하는 불변의 순서로 사라진다. 우선 고유명사들이, 그러고 나서 일반명사들이, 결국에는 동사들 사라진다.
동사적인 이미지들이 그 이미지들의 문법적 본성에 따라서 뇌 속에서 배치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인가? - 여기서는 동사들과 좀 더 나아가면 형용사들 - 그리고 기적적 우연에 의해 손상이 동사들을 항상 동일한 순서로 차례로 제거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인가? 가설이 낯설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기분 좋은 가설을 정식화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단어들은 그 단어들의 기능(fonction)이란 이유 때문에 타격을 입는 것 같지,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미 두뇌와 사유의 일반적 관계는 “놀이”와 같이 기능적인 연관들이 형태학적 유사성 또는 구조들의 평행론보다, 심리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예감하게 하는 것 같다. 실제상으로 실어증환자에게서 망각은 범주들에 영향을 입지, 단어들에 영향을 입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엄격히 말하자면, 단어들이 두뇌 안에서 소리 이미지의 자격으로 특이하게 보존될 수 있다하더라도, 반대로 단어들의 분류들은 전혀 위치화될 수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추상의 계열들이기도 하고, 이때 이 계열들의 단위는 아주 형식적이며, 또한 류들(des genres)이기도 한데, 우리의 정신이 이것들을 따라 떼어 놓기도 하며, 어떠한 감각적 경험도 이것들을 뇌의 피질 속에 표지로 세울 수 있는 영역으로 기입할 수는 없다. 사유의 결과로써 범주들은 그 자체에 의해 총체성이며, 다시 말하면 범주들은 무한히 많이 실재적 또는 잠재적 단어들을 미리 수집한다. 그러나 어떠한 신경 섬유도 무한한 사유를 고정시킬 수 없다. 물질적 기관은 다른 물질적 현존과 동연적(coextensif)이다. 그렇다고 가능한 현존들과 또는 관계들에 공연적(coextensif)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실체적으로 정의된 [뇌의] 중추들은 가능적인 것의 역동성을 명령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인 면에서 위치화 주장자들은, 절망적인 양자택일[궁지]에 빠지게 되어, 즉 부사들의 중추와 전치사들의 중추를 인정하게 되거나, 또는 자의적인 언어만큼이나 어림잡는 언어를 단호하게 포기하게 된다.
훨씬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기억이 두뇌와 결합되어 있다면, 나는 수천 개의 신중한 이미지들에 대해 동일한 단어, 동일한 대상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각 대상 각 단어는 무한히 많은 개별적 형태들 아래서, 또한 밝기, 장소, 배경, 강도 등의 모든 종류의 특이한 상황들에서 나의 감관들에 각인하러[인상을 주러] 왔기 때문이다. 두뇌[기억]에게 그 자체를 넘어서도록 허락하는 엔그램(un engramme, 과거의 개인적 경험이 머리속에 남겨 놓은 흔적) 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두뇌는 감각적 진동이 두뇌 속에 기입되었다고 가정되었던 것만을 오직 등록한다. 그런데 내가 동일한 단어로부터 또 동일한 인격으로부터 유일한 이미지를, 즉 말하자면 유연하고 역동적인 한 이미지를, 보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미지에 의해 나는 단번에 불연속적인 인상들의 부스러기를 넘어선다. 청각적 이미지는 류(類, un genre)이며, 벩송이 관념연합론에 반대하는 다른 문제들을 위해 그것을 제시했던 대로, 나열적으로 류들을 구성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기억은 총체성이고, 그리고 위치화 주장자들은 원자들을 가지고 기억을 재구성하는데 힘을 다 소모한다.
실어증에서 이 총체성은, 조각들로 잘게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폭 넓은 넓이에 따라서 동시적으로 흩어진다[풍화된다]. 이것은 동사적 기억의 붕괴[분해]가 증명하는 바의 것이다. 동사적 기억은 시초에서부터 그리고 점점 더 깊이 있게 완전히 타격[손상]을 입는다. 다시 말하여, [이 방면의] 선구자들의 언어를 여기서 말하자면, 망각은 추억들을 [회로 상] 선(en ligne)으로 공격하지, 땅굴에 무너지듯이 폭삭 무너뜨려지지(en sape) 않는다는 것이다. 단어 대 단어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길을 가는 대신에, 망각은 평면[도식]에서 평면[도식]으로 파서, 깊이 파고 들어간다. [기억손상] 질병은 존재자들의 구조를 분해하면서 그 구조를 원망하며(accuser), 어느 정도로는 정신의 가장 큰 차원[규모]에 따라서 작동한다. 그런데 정신은, 마치 우리가 정신을 기호(le signe)와 기호화된 것(le signifié)의 관계로 증명했던 것처럼, 두께 있게 [유기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정신은 진행성 건망증(l'amnésie)에서 가장 많이 손상 입을 수 있을 것이다 “폭삭 무너뜨리기”(en sape)같은 이 붕괴에서, 망각은 처음부터 심층적으로 총체적일 것이고, 외연[확장]적으로(en extension) 제한될 것이다. 반대로 실어증에서, 망각은 우선 거의 모든 그것의 외연(son extension) 안s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망각은 시작에서 피상적이 될 것이고, 그러고 나서 기억을 향하여 점점 더 깊이 있게 잡아먹는다. 말하자면 평행론은 뇌 안에서 질병의 조각들이 병든 실물의 조각들에게 상응[대응]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원자론적 “표현주의”(expression- nisme)가 바라는 것, 즉 언어 조각들이, 즉 실사들, 전치사들, 접속사 등들이, 의미의 조작들에게 호응[대답]할 것이라고 ...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불가분의 의도인 의미는, 대체로 그리고 차후에도 문장 일체에 내재하고(inherent 타고난, 천성적)있는 것인데, 그 문장 일체는 향기처럼 의미를 높일[널리 퍼질] 것이고, 또는 문장의 의미는 매력이라는 방식으로 돋보이게 된다. 그러나 의미는 문법적 형태학의 단편적인 인용구들(membra disjecta) 사이에서 나누어져 있지 않기에, 집합된 단어들은 그 의미를 퍼즐처럼 재구성할 것이다. [프랑스 작곡가] 포레(Gabriel Fauré 1845-1924)의 멜로디(음률)가 시의 시상을 뭉뚱그려 표현하였듯이, 그 음표들의 각각은 [시의] 원문의 부분들 각각에 상응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의미를 단어 대 단어에 의해 철자 표기를 읽지 않듯이, 음표 대 음표로 읽지[듣지]도 않듯이, ... 추억들을 신경세포 대 신경세포로 구성하지 않는다. 실제로 벩송의 표현에 따르면, “타격을 받은 것은 뇌 전체이며, 마찬가지로, [현의] 매듭이 잘못 이루어졌을 때, 이완되는 것은 긴장된 현(la corde) 전체이지 이러저러한 부분들이 아닌 것과 같다” 이어서 그 잘못은 그 현의 결정적인 심도에 있는 것이 아니며, 감염[음의 전파 또는 조율]의 의미는 오히려 수평적이라기보다 수직적이다. 그것은 기억의 생생함에 점점 더 날카로운[예민한] 침투이지, 추억들의 확장적 오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기억에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동사들은 실사들[대명사, 명사, 형용사]보다 더 끈질기다. 왜냐하면 모든 단어들 중에서 동사들은 행동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고, 동사들은 무매개적으로 행동이 연기[놀이]할 수 있고 모방할 수 있는 것 속에서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동사들이 뇌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동사들이 거기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언극의 기관인 뇌가 본질적으로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뇌의 손상은 무엇보다 행동의 병[질병의 상태]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것이다. 행동은 뇌 속에(dans) 있지 않으며, 만일 위치화[지도]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역동적 의미에서이지 기계적 의미가 아니다. 피질의 중단에 의해 일어나는 대부분의 혼란들[장애들]은 추억들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추억들의 활동화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병든다[환자가 되게 하는] 라는 것은 추억들을 이용한 우리들의 소질(notre aptitude)이다. 손상의 결과는 사물들을 희박하게 하는(raréfier des choses)것이 아니며, 이때 이 사물들은 모든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불가침투적이고 유한하다. [손상의 결과는] 오히려 어떤 기능을 느슨하게(détendre une fonction)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것 자체를 벩송은 “생의 주의”(l'attention à la vie)라 불렀고, 그리고 실어증은 이 전자의 주의(注意)를 무디게 하는 것이다. 정신과의사 민코프스키(Eugeniusz Minkowski, 1885-1972)는, 자폐증과 “생명적인 것과 실재성의 접촉”의 상실에 의해 분열증을 설명하는데, 그의 깊이 있는 임상실험으로 벩송주의에게 지지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심적(mental, 심리적) 생성의 경화증에다가 책임을 돌리는 - 시론이 스스로 흡족했던 - 그 언어는, 어떤 방식으로 뇌가 사유를 연출하는지를, 그 언어의 사라짐 자체에 의해 우리에게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특히 동시대 생물학자들에게서 현실화에 대한 벩송 이론을 재발견하는 것은 교훈적이다. 왜냐하면 모나코프와 무르그의 “시간생성의 위치화”(localisation chronogène)는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 손상은 공간 속에 있지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능은 시간 속에(dans le temps) 있다. 매우 필수적인 이 구별은 의식을 공간에 대립시키는 극복할 수 없는 반주제로부터 결과 되어 나오지 않는가? 기능이 스스로 행사되기 위하여 해부학적 기초를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관 없이(sans organe)는 가능한 기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섬유질들 안에서 기능은 자기 좌석(son siège, 중추)을 갖지 못한다. 또한 사람들이 뇌(un encéphale)라고 부르는 사유의 필수적인 이 조건은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 기능은 멜로디처럼 조직화된다. 이 멜로디의 연속적인 계기[순간]들은, 더 잘 모이는 경향들이 중요함에 따라서, 점점 더 복잡한 리듬을 채택한다. 그리고 사실상 사람들이 관찰하는 바로써는, “위치화 주장자들”의 시대인 지난 세기에 깊이 연구된 대부분의 질병들의 특징이, 조작적 작동의 장애(혼란)들에 의해서 또 멜로디의 고장과 불균형에 의해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시간의 질병들이다. 미래를 향해 기다릴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고 또 바라볼 수 있는 두뇌의 참석(현전)이 그 시간을 인간적 기획들 속에 개입시킨다. [시간의 질병들에서] 예를 들어 비정합적이고, 공백이 있고, 절뚝거리게 되는 것은 멜로디이다. 운동장애증(l'apraxie)에서 활동화 작동 그 자체가 타협의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실어증(l'aphasie)은 단어들을 내부적으로 동원하는(mobiliser)데 자질이 없어서,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흘러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말투는 일반적으로 존속하나, 입으로 말하는 멜로디와 사유와 사이에 접촉이 상실되었다. 타격[손상]을 입은 것은 음소들과 단어들의 역동적 이용방식이다. 우리가 인용한 생물학자들은 일시적으로 귀에 거슬리는 옹알이(cacophonie temporelle 말더듬)의 여러 형태들을 분류하기를 즐겨했다. [즉 분류로는] 보속증(保續症, persévération)[병의 원인이 제거되었는데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증세가 유지되는 현상], 반복증(réduplication), 선행증(先行症, anticipation), 혼합증(confusion), 허위 재촉증(fausse sommation) 등등이다. 멜로디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불구가 되었거나 또는 고장 났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들에서, 행동거지(l'allure)가 이제 구조(la structure)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오래 전에 리보는 “구심 심리학”의 편견들 때문에 보다 더 맹목적이 되었으며, 의지의 원리적 저하[퇴행]들에서 해부학의 침묵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의지 결핍증(l'aboulie 무기력증)은 근육체계와 운동기관들의 온전한 상태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온전한 상태의 특징은] 이 운동기관들이 지성과 욕망만큼이나 아무 타격도 입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막혀있는 것은 작동으로 이행과정이다. 따라서 의지 결핍증은 진실로 무기력(une "impussance")이며, 그리고 만일 사림들이 의지 결핍증을 실어증에 비교한다면, 이 의지 결핍증은 이것이 우리 위치에서 경험을 하게 하는 특별한 관심을 표시한다. 의지 결핍증은 나머지를 모두를 존중하면서, 의지의 역동성, 즉 생의 주의를 따로 분리한다. 물론 리보는, 게다가 타격을 입은 것은 있는 대로 삶이 아니라 행위에 호소하는 한에서 감성이라고 보지 않고서, 또는 삐에르 쟈네가 말하듯이 실재적인 것의 기능이라고 보지 않고서, 선동[격려]들의 약화에 의하여 주변적인 설명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쟈네에게 있어서 심리학적 긴장의 관념[생각]은 벩송에서 지각의 관념에 비교할 수 있는 충분히 역할을 한다. 쟈네는 실재적인 것의 기능은 보다 강한 강도성을 현재에게 부여할 뿐만 아니라는 것을 이유[근거] 있게 주목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만일 예를 들어 의심의 광기에서, 지각이 그것의 크기와 분명성에서 배타적으로 공격을 받았다면, 사람들은 심성적 정신병리학에서 본질적인 것이 해부학적 손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경물질의 물질적 단절과 우리 지각의 양적 점증(漸增) 사이에는 분명하고 지성적인 연관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샤를 르누비에는 심성적 소외로부터 정신적 본성을 그리고 비해부학적 본성을 이미 주목했다. 그런데 정신병은 도처에 있지만 어느 [정해진]곳에는 없다. 신경중추들에게 일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정신병은 거기에서 기준 표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무기력과 생의 주의 사이에서 차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성상 차이이다. 쟈네는 이제 신경쇠약의 고전적 이름 아래에다가 심성적 불충분함을 몇 가지 경우의 수로 그룹으로 모았다. 이 몇 가지 불충분함은 본질적으로 작동으로 이행에 타격을 주는 것이거나 또는 그가 표현한 말한 대로 “대상의 현재화(présentification, 현재화 과정)”에 타격을 주는 것이다. 그는 실재적인 것의 기능에서 우리의 지각이 활성화되는 운동들만을 본다고 벩송을 비난했다. 이 비난은 물질과 기억의 “형이상학”이 아주 다른 상황에서 두렵게 하는 리보의 한 제자[쟈네]의 붓으로는 충분히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운동(le mouvement)”에 의해서 벩송이 “행동(action)” 일반을 자주 말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특히 물질과 기억에서 우리가 외적 환경과 접촉하기 시작하는 생생한 역동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쟈네 그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였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근대 신경과학이 벩송의 예상참여들에 제공했던 모든 지지를 알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앙리 들라크르와(Henri Delacroix, 1873-1937)는 언어에 관한 그의 책에서, 많은 설득력 있는 사실들을 열거하였다. 신경병리학은, 이미지 중추들의 고전적 이론이 질병들을 인정하였던 것과 같은 그러한 임상적 질병들(les entites cliniques)을 체념해야 했다. 심리주의는 피질 속에 도처에 그의 자리를 마련하였고, 어느 곳에도 그의 중추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점점 더 임상실험자들은, 예를 들어, 삐에르 마리(Pierre Marie, 1853-1940)는 실어증에 의해 일어난 일반적 지적 장애에 관하여 강조하였다. 그리고 지성은, 연관들을 형성하고 체계들의 순서를 세우는 능력을, 또 우리가 스스로 현재에 재빨리 적응하는 상징적 기능을, 여기서 매우 자주 지적한다. 들라크르와가 말하듯이, 실어증환자는 시간적 공간적 지도[도식]를, 특히 시간적인 지도를, 조절할 줄 모른다. 거의 매일 관찰자들은 기억과 “궁극적 의도”의 주목할 만한 약화를, 과거와 미래의 간격 좁힘[시간 줄임]을, 작동들에 대해 아주 규칙적 혼란을 확인하였다. 실어증의 변말(le jargon, 은어, 횡설수설)의 연구는 - 피크(Arnold Pick, 1851–1924)의 비문법장애증과 헤드(Henry Head, 1861-1940)의 말잇기실어증(aphasie syntactique) 등 - 문장 구문론이 여기서 분류가 하는 역할 보다 더 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왜냐하면 총체성이 우리가 총체성으로 구성한 단순한 요소들 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이에 대해 놀라지 않겠는가? 잭슨(John Hughlings Jackson, 1835–1911)이 이미 말했듯이, 실어증은 무엇보다 먼저, 명제(proposition, 문장)에 타격을 가하고, 계속적인 소리들을 빌려오는 명제적 운동의 질서를 흩어놓는다. 이것은 “문법주의”의 진솔한 고민이다. “의미론”의 실어증에서, 잘못은 의미에서 기호로 이행에, 즉 지적 작업과정 자체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지적 작업과정이, 즉 기호를 우리에게 이해하게 하는 작동이, 뇌의 어떤 구역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 1850-1909)가 관찰하였듯이, 사람들은 한 동물의 이미지가 피질 속에서 가축으로 선정하였을 것이라고 엄격하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때에 두 동물의 유사성을, 류를, 두 동물이 속하는 분류를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우리가 자문하듯이, 소리들과 이미지들을 의미(significatifs) 있게 하는 갑작스런 계시는 어디에 자리 차지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단어들을, 동사적(언어적) 이미지들을 위치화[지도화]시키는데, 그러나 무엇이 우리에게 문장들의 자리를 제시할 것인가?
따라서 뇌가 그 고유한 의미에서 영혼의 “기관”이며, 즉 영혼이 사물들 속으로 침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기구이다. 그러나 뇌는 영혼의 “번역”(la traduction, 번역도구)이 아니고, 뇌는 그것[번역]의 동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관심(l'intérêt)은 생명성 그 자체의 분신들(les avatars)에 관한 뇌-척수의 위상학(la topologie)으로 교체되었다. 아마도 “상상지도”(La carte de Tendre)를 부인하는 것만큼이나 형태학적 말투 방식들을 부인하는 것 보다 더 낫다. 모든 물질적 사물은 단순하며, 빈약하며, 조잡하다. 그것은 정신의 구체적인 충만을 고정할 줄 모른다. 따라서 사람들은 의미로부터 기호로 결론 낼 수 있으나, 기호로부터 의미로 결론 낼 수 있다. 엄격히 말하자면, 사유로부터 뇌작용(la cérébration)으로 이지, 뇌작용으로터 사유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신적 삶의 영속성은, 몸짓이 그것을 결코 수집할 수 없을 것이라기보다, 더 많이 섬세하고 미묘한 사물들을 무한히 굴러가게 한다. 뇌의 모든 회백질 안에는 이 모든 풍부함을 고려하는 그 무엇도 없다. 반대로, 그 영혼의 상태가 그의 비밀을 우리에게 전달한다면, 영혼의 상태 안에는 상응하는 분자 운동이 생성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해독하면서, 우리는 그 정신적 사실의 무용술(la chorégraphie)에서 하물며 이 정신적 사실[비밀]을 읽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하기 위하여, 첨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삭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류에 대해 만족하기 위하여 종별 차이가 달아나게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학적 분류작업화들에서 개별성을 편대로 편성하기 위하여 정신적 상태의 개별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내부적 목가주의의 수많은 뉘앙스를 소품(la rubrique, 관행)의 일상성에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두 멜로디가 평행하는 이런 이전작업[종에서 류로 이행]에서, 사람들은 하나[멜로디]에서 다른[멜로디, 계열]로 무차별적으로 건너간다. 무매개적으로 또 둘째 멜로디에서 첫째 멜로디로 음표 대 음표로 읽기 위하여 숫자 또는 음자리(la clef, 음조)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듯이, 심리적인 것(le psychique)은 뇌의 이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호를 통해서 비밀 해독(解讀)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만일 사람들이 당신에게 텍스트의 문장부호들만을 준다면, 당신들은 텍스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며, 이 문제에서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을 것이다. 따라서 뇌의 동일한 영역은 영혼의 다양한 상태들을 지배한다. 뇌의 영역은 이것에 대해 이것임(l'haeccéité, 특이성, 인격)임을 -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 규정하지 못한다. 이것에 의해서 그러한 경험은 유일하며 모방할 수 없다. 주어진 하나의 “중심”(un "centre")이 운동들의 모든 진리를, 그리고 물체[신체]의 자세를 명령한다. 동일한 종합에너지들과 동일한 근육들이 매우 다양하게 몸짓을 지배한다. 근대 신경학의 진행들이, 마치 심층에서 상층으로 점점 가지치기처럼 된 그물망과 같은 신경체계로써, 그 다음 차례로 이 체계를 넘쳐나는 심리학적 사실까지를 고려하기에 이르러서 마땅히 우리를 초대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로서로 조금씩 합류하여 신경세포의 길들을 주변으로 내려가고, 그리고 또 밖에서 접합하는 순간에 희박하게 되는 정도에 따라서 고려하기에 이른다. 영국의 신경생리학자인 셰링톤(Charles Scott Sherrington, 1857–1952)의 관찰에 따르면, 마치 필연적으로 여러 갈래의 행동으로 가는 “공통 오솔길들”(les sentiers communs)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가능한 몸짓들의 음계(la gamme)는 무한히 많은 신경섬유들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끝에서는 동일한 영역(une même zone)이 무한히 많은 가능한 지각들에 상응해야 하는 것과 같은데, 왜냐하면 감응들과 경향들의 등록부는 모든 기계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극들의 자판(le clavier, 건반) 위에 두드리기들(les touches)이 있다기보다, 인간적 감성 안에는 더 많은 뉘앙스들과 음색들(les timbres)이 있다. 따라서 또한 운동성은 가능한 인상들의 연장(외연)을 무한히 초과한다. 운동성의 여분에서, 그리고 이 [초과했기에] 과도함(ce trop)에서도, 자유가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외적 공간이 자유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대답하는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의 품행을 점점 더 적게 예견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나의 자발성을 점점 더 많이 공격적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격(la riposte)의 순간에, 나는 선택의 곤경(l'embarras, 당혹)에 빠진다. 말하자면 나는 사건들보다 더 광대하고 더 다양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형태학의 모든 설명들이 행위의 넘쳐나는 이 잉여[초과]를 포함하는데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행위의 성질들과 다수의 반향들(les sonorités)이 뇌 물질의 몇몇 음계들(les gammes)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두뇌가 자유를 그래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예견했듯이, 자유는 뇌의 맴돌기들 안에 기거하지 못한다. 뇌는 지극들을 넘어서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오히려 정신이 뇌를 무한히 넘어선다. 그리고 이번에 그의 차례에서 정신은 그 자체로 휴식 없이 스스로 넘어선다. 왜냐하면 정신이 무한하게 무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도 예견 불가능하듯이, 또한 나의 창도력들(les initiatives 결정권들)더 내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예견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의 고유한 의지는 나에게 있어서 놀라움(l'étonnement)과 두려움(l'effroi)의 영속적 주체이다. 거기에 거대한 불가사의(un grand mystère)가 있다. 생명은 영속적인 자기-뛰어넘음이다. 그리고 생명이 위로 향한 섬세한 꼭지점[첨예한 끝]에 의해서 외적 세계에 관통할 때, 생명은 세계를 매우 넓게 위로 복 솟아오르게 하여, 생명이 세계 위에다가 자신의 무게로 누른다. 특히 위치화 작업들에 대한 벩송의 비판은, 그 불가사의가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또 그 불가사의는 아주 다른 질서로부터(d'un tout autre ordre) 나온다 라는, 깊이 있는 철학적 생각에 우리를 익숙하게 한다. 사람들은 사유를 뇌의 피질 세포들 속에서 해독(解讀)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한정하게 눈을 크게 뜬다고 하더라도, 온신(Dieu)을 깜박거리는 별들 속에서 해독하지 못한다(별이 박힌 하늘이 자기 방식으로 신적 영광을 “이야기한다(raconter)”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술(l'écriture) 속에서 총명(le génie)을 발견하지 못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숨결에서 죽음을 읽지 못한다. 죽음 그 자체는 여기에도 또는 저기에도 있지 않다. 생명성의 불가사의는 자기 차례가 되어 세포의 핵 속의 어떤 곳(quelque part) 에도 숨지 못하며, 또는 염색체의 “유전자”속에도 숨지 못한다. 생명의 생명성은 근본적으로 자리를 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속이고, 또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성은 우리가 세운 표식깃발(기준표)들을 무한히 달아난다. 이 불가사의의 지형학은 브로카(Broca, 1824-1880)의 지도만큼이나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형학은 관념들을 고정시키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관념들이 고정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불가사의는 항상 있고, 다른 사물은 항상 다른 곳에 있다. 즉 여기(여전히) 그리고 다른 곳에(aliud et alibi) ... 따라서 의미들이 감추어져 있다고 가정된 기호들의 매개 작업은 완전히 비어있고 상징적인 매개 작업이다. 이 매개 작업은 기념묘비 만큼, 또 속고 있는 사색만큼, 비어 있으며, 거짓 깊이의 전형 자체이다. 즉 어느 곳(때)에든 그리고 아무 데(때)도 아닌(ubique et nusquam)! 이러한 것(cela)은 온신(Dieu)에 대해 진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매력(le charme, 마력)에 대해 진실이며, 그리고 영혼 자체에 대해 진실이다. 즉 모든 곳에 출현하고(omnipresente) 모든 곳에 부재하는(omniabsente) 영혼, 신체에 연결되어 있지만 기준표시를 할 수도 없고 또 위치화 할 수도 없는 영혼. 그런데 신체 안에 있으나 또한 신체 밖에 있는 영혼. 영혼이 신체 안에 있듯이 신체가 영혼 안에 있도다! 매력(마력)은 문법적 문장과도, [말투로 쓰이는] 소리들과도 아주 다른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럼에도 매력이 그곳에서 잘 구현되는 얼굴이 아닌가? (49OKF)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