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고뇌
무의식에 바탕을 둔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의 최종 목적은 불안(anxiety)을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불안은 없앨 수가 없다. 그래서 불안을 좀 누그러트리거나, 할 수 있다면 오랜 시간 동안 해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분석과 치료를 통해 할 수 있는 최대이다. 이는 불안은 늘 인간과 더불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이다. 철따라 등장하는 감기처럼 인간은 늘 불안을 달고 사는 것이 진실이다. 과연 불안은 무엇인가? 이는 망상-분열과 우울의 위치가 생겨나는 인간의 본래적인 현실에서 연유한다.
내가 공격한 대상이 좋은 대상이었다는 슬픔, 이런 처지에서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 그런 나에 대한 비판과 죄책감. 그리고 과연 좋고 싫다는 이 양가적 감정은 해소될 수나 있을까?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증오와 사랑의 감정,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이다. 양가성이 죄의식과 불안의 진원지이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가 곧 불안의 근원이다.
불안은 인간의 마음이 대상과 온전한 화해를 하지 못하고, 선과 악이 반복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본래 구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우리문화에서는 고뇌(苦惱)라고 불렀다. 고뇌는 어른이 되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젖을 빠는 순진무구한 아이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고뇌는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늘 함께 있다. 정신분석학은 궁극적으로 불안은 지울 수 없다고 하지만, 고뇌를 말하는 문화에서는 어찌어찌하면 이를 지울 수 있다고도 한다. 전자의 우울한 생각에 비해 후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안하고 우울한 현대에 후자를 지지하는 심리학이 출현한다. 통합심리학이나 까르마에토스 심리학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심리학은 약 2500년 전에 이미 출현한 심리학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참신하나 오래된 것)
성숙의 길, 창조
우울적 위치에서는 죄의식과 불안이 생겨나지만, 또한 창조성과 승화의 토대가 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성숙과 발달이 일어난다. 상실한 것을 다시 찾으려고 하거나 회복시키려는 충동이 곧 창조의 충동이며 승화이다. 그런데 이는 죽음충동의 성공적인 포기, 다른 말로 하자면 삶 충동 즉 에로스와 상실에 대한 애도작업을 통해 발생한다. 타나토스의 불안을 이겨내고, 균형을 취하려는 에로스의 충동에 따른 것이다.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드는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완벽함에 대한 욕망이 이미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파괴한 것들이 좋은 것이라면, 파괴한 것을 원래의 좋은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를 어둠과 빛의 은유로 설명해보자.
어둠의 두려움이 박해불안이다. 하지만 실상을 보니 어둠은 빛이었다. 그래서 어둠을 증오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우울불안이다. 왜 불안한가? 증오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타나토스 때문이다. 박해불안이나 우울불안이나 모두 타나토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어둠이 빛이라면 빛도 어둠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나마 보존한 빛이 어두워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감이 엄습하고, 이는 우울불안을 야기한다.
우울불안을 극복하려는 것은 보존된 빛을 지키는 것이며 어둠을 빛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은 더욱 빛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어둠을 완전히 누르려는 의도 즉 에로스의 과도한 충동이 이 위치에서 드러난다. 이는 창조성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은 실로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채울 수 없는 허기, 궁극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 소망이기 때문이다. 타나토스도 사라지지 않고, 에로스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름답고 완벽한 것에 대한 충동은 빛의 충동 즉 에로스의 충동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타나토스의 충동이 있다. 그래서 영원히 창조하고 영원히 파괴한다.
대체와 상징
상상적으로 존재하는(*환상) 완벽한 어머니의 상은 인간이 시도하고 추구하는 대상회복의 모든 노력과 갈망을 추동하는 힘이다. 하지만 완벽한 어머니상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포기로부터 정신병적 상태가 생겨난다. 번뇌망상(煩惱妄想)의 근원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체(substitutes)이다. 대체는 상상과 환상을 대신하는 것며, 이는 상징 작용을 가리킨다. 빛의 충동을 멈추면 어둠의 충동이 지배하고 이는 정신병을 일으킨다. 이를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조로 보자면, 첫 번째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의 상실이 주는 두려움(*우울불안)은 대체를 위한 욕구를 야기한다. 아이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아버지에게 돌아서고, 아버지는 완전한 사람으로 내사된다. 아버지는 상징의 다른 이름이고, 이는 언어의 탄생을 가져다준다. 상상의 그윽한 아름다움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으며, 대체를 통해서, 상징을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회복된다.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제공하는 대상(*어머니)을 상실하고, 아버지의 금지를 받아들이면서(*외디푸스), 상실한 대상을 재발견(*대체)하면서 욕망은 고리를 이루어 아이는 타자를 인식하는(*객관성) 사고하는 주체로 재탄생한다(*점진적 객관화의 과정). 어머니를 잃어버린 뒤(*신화의 에덴) 불안하고, 이 불안을 이기기 위해 상징(*언어)을 발달시키면서 세상을 살아나간다. 하지만 늘 불안이 엄습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마음을 가진 채로. 이것이 인간 고뇌의 근원이다. 상징을 통해서 치유되거나 잠시 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실하지만 우울한 초상 對 상승
프로이트의 패러다임을 유지하면서 독창적인 이론을 구축한 멜라니 클라인은 식상한 듯한 결론, 인간에게 어머니의 중요성을 새삼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자애로운 모성이 아니고 페미니즘의 여성성도 아니며, 심리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결정적 요인이자 실체로 어머니를 이해하는 지적인 인식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지적 정교화는 멜라니 클라인을 거치면서 아동심리학이라는 미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아동은 커서도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멜라니 클라인의 가장 큰 공은 프로이트 보다 더 철저하게 인간이란 고뇌하는 존재이며 이것이 실상이라는 우울한 초상을 그려 보여준 것이다.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그녀의 보고는 진실하고 정직한 것이었다. 그런데 고뇌하는 인간의 초상은 진실하지만, 인간을 다 안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신을 정직하게 이해하자 마주친 우울한 초상은 최종적 사실이 아니라, 이제 겨우 인간 이해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이른바 정신분석 패러다임은 정직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정신분석의 진실을 마주한 인간은 비유하자면, 빙하기가 지난 땅속에서 나와 눈앞에 펼쳐진 너른 광야에서 우물쭈물 서 있는 모습이다. 그 곳은 진실했지만 세상은 더 넓고 그 곳으로 가는 길이 오래 전부터서 이미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 그는 더 고뇌가 필요하고, 그에 따라 더 큰 창조를 할 것이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더 큰 충동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인간은 땅속에서 땅위로, 이윽고 저 하늘로 상승 할 것이다. 원초적 상상과 다시는 만날 수 없어서 생겨난 고뇌가 사라지는 곳에 이를 때까지.
(*편집자주: 필자 이창일은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주역>으로 철학박사, 서울불교대학원에서 트랜스퍼스날심리학을 전공하고 성격유형론 연구로 심리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동양철학, <주역>, 심리학 분야에 다수의 저술과 논문이 있다.)
(**알립니다. 심리학의 거장 시리즈는 멜라니 클라인을 마지막으로 종결됩니다. 이창일 박사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코너로 찾아뵙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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