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8세 관람가
종두(설경구 분)는 뺑소니 교통 사고로 형을 살다가 교도소에서 막 출소했다. 그 사이 이사를 가버린 가족들을 겨우 찾아가지만 가족들은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않는다.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간 종두는 마침 다들 이사가고 난 낡고 초라한 아파트 거실에 정물처럼 혼자 뎅그러니 남겨진 장애인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종두는 또다시 그녀를 찾아간다. 비루한 살림살이가 널려있는 여자의 아파트에서 종두는 여자를 상대로 혼란스러운 욕정을 느끼지만 여자는 두려움에 일그러진 몸짓을 한다. 종두는 여자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괴감에 빠져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던 어느 밤, 잘못 걸린 듯한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속 주인공은 뜻밖에, 여자다.
공주(문소리 분)는 중증뇌성마비장애인이다. 오빠 부부가 이사가던 날, 비둘긴가 햇살인가 그 사이로 낯선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행동이 부자연스런 그녀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방안에 걸린 오아시스 그림에 밤마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다. 그것은 창 밖 커다란 나무가 흔들리며 가로수에 비춰지는 것이지만 공주는 그림의 위치를 바꾸지도 나무를 어쩌지도 못한다. 어느 날 혼자있는 공주의 아파트에 남자가 들어온다. 공주는 남자를 본 것부터 그 남자가 자기의 몸을 만진 것, 아프게 한 것까지 온통 난생 처음인 것뿐이다. 남자가 사라지고 난 후 공주는 오아시스 그림과 밤과 혼자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워졌다. 무슨 생각이 났던 것일까. 공주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전화번호를 누른다.
종두와 공주는 비로소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남자인 종두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공주가 그려나가는 사랑이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전화 통화를 시작하고 종두의 형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데이트를 하기 시작하고 짜장면을 먹기도 하면서 둘은 서서히 감정을 교류해 나간다. 사랑 안에서 공주는 정상인으로 걷고 웃고 말하며, 사랑 안에서 종두는 사랑하는 한 여자를 가슴에 보듬는 듬직한 남자다. 둘은 오아시스 그림 앞에서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지만 운명은 때로 잔인하게 엇갈린다.
꽤(!) 좋은 리뷰입니다.
속수무책인 육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요령부득인 혓바닥은 나비도 만들고 코끼리도 만들고 급기야는 춤추는 인도의 아가씨도 만든다. 얼씨구나 절씨구, 육체가 육체를 떠나니 이렇게 좋다. 판타지는 육체를 가두는 문화에 대한 복수다, 축제다.
흔들리는 촛불을 보라. 느낄 수도 없는 미세한 바람의 분노가 끊임없이 촛불의 외곽을 잡아 흔든다. 그러나 촛불의 중심은 더 없이 밝고 환하다. 추억이 있다면 그 밝고 평화스런 중심에 있다. 그러나 어떤 추억도 확고부동한 중심 속에 있지 않다. 추억은 늘 뿌옇고 애매하다. 그것 같기도 하고, 그것 아닌 것도 같은 것이 추억이 아니었던가. 추억은 항상 분명한 시공간 속에 있지 않다. 그러기에 그것은 안개와도 같이 잡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기억은 그 추억의 중심을 낚아채려 하지만 어떤 시간도 공간 속으로 완벽하게 수렴되지 않는다.
프레임은 확고부동한 외곽선을 가진다. 오만하게도 영상은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눈"의 소유자인 이성이 주장하는 현실일 뿐이다. 봄[視]은 모서리[角]를 가지기에 바라봄엔 반드시 사각(死角)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계는 그리고 타인은 대개의 경우 시각의 바깥, 즉 사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예술가들은 프레임이 간과하고 있는 공간[사각]을 제 시각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기를 거부한다. 이창동은 사각(死角)을 시각(視角)의 영역으로 포섭하기 위해 헨드헬드를 사용한 것은 아닌지. 들고 찍으니 앵글은 흔들리지만 흔들리니까 무릇 경계가 사라진다. 대체 프레임 속의 명확한 외곽선은 무엇인가. 예술과 현실의 경계, 주관과 객관의 경계, 미와 추의 경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헨드 핼드는 그 명확한 외곽선을 지운다. 아니, 흐린다. 아니, 섞어 버린다.
숨쉰다는 것, 심장이 뛰고 혈액이 순환을 한다는 것, 연비어약(鳶飛魚躍), 몸은 본질적으로 갇히기를 거부한다. 순수한 육체인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약동한다. 달리고 까딱거리고 찧고 까분다. 그러다 자빠지고 징징거린다. 어른들은 말한다. 가만 있지 못하겠니. 어른들에겐 그것이 쉬운 일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겐 형벌이다. 제도와 문화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비로소 아이들은 고요해진다. 그렇다고 그들 안의 도약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의 몸엔 성장하지 않은 아이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인류는 미성년이다.
공주는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자꾸 몸이 흔들린다. 가만있으라고 율법은 명령하지만 공주의 몸은 가만있을 수가 없다. 뇌성마비인 공주의 몸, 누군가가 그 몸을 진정시켜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위대한 어머니가 그 고단한 노동을 감내하랴. 공주, 너희들은 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은 "격리"다. 그 속에서 너희들은 웅크리고나 있어라. 몸을 진정시킬 수 없는 자, 제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자, 너희들의 땅은 이곳이 아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또 하나의 인간이 있다. 홍종두. 제발, 발 좀 까딱거지 않을 수 없니, 재수 없다. 제발 흔들지 좀 마라. 하지만 당신들에게 쉬운 일도 "다 큰 어린아이" 종두에겐 쉽지 않다. 그의 몸은 다리를 떨든 노래를 하든, 가만있을 수가 없다. 아니 가만있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종두의 비극은 언어를 배우지 못한 데 있다. 제대로 된, 문화화 된 언어가 있다면 왜 어린아이가 기를 쓰며 울겠는가. 한 여자의 몸을 발그랗게 달굴 연애편지를 쓸 수 만 있었다면 종두가 왜 한 여자를 범했겠는가. 종두에게 언어가 있다면 왜 폭력의 전과를 달아야 했겠는가. 종두는 언어가 없는 어린아이다. 이창동은 그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친다. 이 영화의 말미를 보라. 종두가 공주에게 그럴싸한 편지를 쓰고 있지 않은가.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성장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공주를 위하여 나뭇가지를 자른다. 종두는 언어뿐만이 아니라 상징적 행위를 구사하기도 한다. 종두는 이렇게 어른이 된다. 그 성인식은 눈물겹다.
종두의 세계는 언어 이전의 세계, 문자 이전의 세계다. 강간미수, 폭력, 그것은 언어 이전의 폭력이다. 사기, 업무상배임 같이 고급스런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엄격히 몸이 저지른 죄악이다. 그러나 그 누가 몸으로부터 정신을 정밀하게 분리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전통적으로 종교는 고약한 이분법을 가르친다. 육체와 정신, 정통과 이단, 예토와 정토, 성과 속, 미와 추, 선과 악, 현실과 판타지, 차안과 피안, 무수한 구획을 통하여 종교는 딛어야 할 땅과 딛지 말아야 할 땅을 가른다. 목사님의 기도 앞에서 종두는 참으로 피곤하다. 종두의 몸은 가만 있어주지를 않는다. 정착할 수 없는 몸뚱이를 가지고 율법의 땅에 정착해야 하는 종두에게도 그러나 구원은 있다. 공주다. 정적(靜寂)을 모르는 공주의 몸뚱이. 뒤틀린 육체. 그 두 개의 몸뚱이가 만나 연애를 한다. 해방이다. 그 해방의 공간은 전철 안이기도 하고 청계천 고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한다. 다정한 연인들처럼 생수병으로 뒷통수를 치고도 싶고, 입을 쫑긋거리며 투정이라도 부려보고 싶어한다. 연인들이란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육체로 육체의 끝에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언어로라도 끊임없이 존재의 심연에 닿고 싶어하는 자들이 연인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언어로도, 육체로도 그 심연에 닿을 수 없는 존재는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한다. 판타지!
속수무책인 육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요령부득인 혓바닥은 나비도 만들고 코끼리도 만들고 급기야는 춤추는 인도의 아가씨도 만든다. 얼씨구나 절씨구, 육체가 육체를 떠나니 이렇게 좋다. 판타지는 육체를 가두는 문화에 대한 복수다, 축제다.
출처 : 블로그 > sama****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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