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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7권
27) 삼세처(三世處)
과거법이라 하는 것과 미래법이라 하는 것과 현재법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논을 지었는가?
[답] 다른 생각을 끊게 하기 위해서다.
즉 세계에 과거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현재도 무위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들의 생각을 끊기 위해서 이 논을 지었다.
이 과거와 미래란 것은 진실한 말이며 그 종자와 모습이 있는 것이다.
[문] 만약 과거와 미래는 종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곧 어떤 잘못이 있게 되는가?
[답] 만약 그것이 종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것에 연한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생각이란 경계가 없는 것인데 만약 경계가 없는데도 생각이 생긴다면 이는 의거하는 곳이 없이 생긴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거하는 곳이 없이 생각이 생긴다면 아마도 이는 아라한의 경지에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든 후에 문득 생긴 생각일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을 의거도 없고 연도 없으면서 생긴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생긴 생각이란, 이는 해탈할 것도 없고 결(結)에서 떠나야 할 것도 없으며 출요(出要)를 얻을 수도 없으니 여기에 허물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까닭에 과거와 미래는 진실로 존재하며 거기에는 종자[種]도 있고 모습[相]도 있는 것이다.
[문] 그 밖에 과거와 미래가 언다는 생각에는 또 어떤 잘못이 있는가?
[답] 만약 그것이 종자가 되지 아니한다면 마땅히 성취되고 성취되지 아니하는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머리가 둘이며 손이 세 개며, 음(陰)이 여섯 가지며, 입(入)이 열세 가지라 하는 것은 성취된 일도 없고 성취되지도 아니한다.
이와 같이 만약 과거와 미래가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마땅히 성취되는 것도 없고 성취되지도 아니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성취되거나 성취되지 아니하는 구별이 있다면 그것이 종자가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런 까닭에 이것으로써 과거와 미래는 진실로 존재하고 종자도 있고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이 과거와 미래는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려 한다면 응당 이렇게 따져야 할 것이다.
만약 그때 현재 존재하는 과보의 원인은 어느 곳에 있으며, 이것은 과거인가, 또한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약 과거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과거가 존재한다는 것이니 과거는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그래도 만약 과거는 없다고 한다면 이 일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된다.
또 만약 미래라고 말한다면 이는 미래가 있다는 것이니 미래가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면 이 일은 그렇지 아니하다는 결론이 된다.
또 만약 현재에 존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한꺼번에 원인도 있고 결과도 있다는 결론이 된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송의 뜻에 어긋난다. 부처님께서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악한 업 지어도 곧 과보 받지 않음은
사라수[薩闍]가 우유를 소락으로 만드는 것과 같나니,
죄악의 과보는 마치 불타는 곳을 뒤쫓아
재가 타오르는 불길을 덮은 것과 같다.
이것은 게송의 뜻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업 지어도 곧 과보받지 않음은 사라수가 우유를 소락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어떤 사람이 설명하기를,
“만약 사라수의 수액을 우유 속에 넣으면 곧 우유가 소락[酪]이 된다.
그러나 악업을 지었을 경우는 이와 같이 곧 그 죄를 받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답] ‘죄악의 과보는 마치 불타는 곳을 뒤쫓아 재가 타오르는 불길을 덮은 것과 같다’ 한 것은,
마치 재로 불을 덮고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는 차갑지만 발밑이 점점 깊숙이 내려가면 곧 불에 타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생사를 윤회하면 악행을 하면서 즐거움 속을 굴러가다가 몸을 버린 뒤에는 악한 세계에 태어나서 악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다면 그로 인해 마땅히 과보도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과보가 없다면 그로 인해 그의 인(因)은 사실이 아니다.
마치 머리는 둘, 손은 셋, 음(陰)은 여섯, 입(入)은 열세 가지라 하는 것과 같다.
혹 무위(無爲)의 세계 같은 영구불변의 세계가 있다면, 그때의 과보는 현실로 존재하지만 그 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약 과거에 존재한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과거가 있다는 것이니 과거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과거는 없다고 한다면 이 일은 그렇지 아니하다는 결론이 된다.
만약 미래에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미래가 있다는 것이니, 미래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만약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면 이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또 만약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며,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송의 뜻에 어긋난다.
부처님은 게송에서 말씀하셨다.
악한 업 지어도 곧 과보 받지 않음은
사라수가 우유를 소락으로 만드는 것과 같나니
죄악의 과보는 마치 불타는 곳을 뒤쫓아
재가 타오르는 불길을 덮은 것과 같다.
이 게송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 게송에서 ‘악한 업 지어도 곧 과보 받지 않음은 사라수가 우유를 소락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것을 어떤 사람은 설명하기를,
“사라수의 수액을 우유 속에 넣으면 우유가 곧 소락이 된다.
악업을 짓고 받는 죄의 과보도 이와 같이 곧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답] ‘죄악의 과보는 마치 불타는 곳을 뒤쫓아 재가 타오르는 불길을 덮은 것과 같다’라 하셨다.
마치 재로 불을 덮어둔 곳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는 차갑지만 발이 점점 깊숙이 내려가면 곧 불에 타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생사를 윤회하면서 악행을 하면서 즐거움 속을 굴러가다가 몸을 버린 뒤에는 악한 세계에 태어나서 악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없다면 그로 인해 마땅히 인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인이 없다면 그 과보는 진실이 아니다.
마치 머리는 둘, 손은 셋, 음은 여섯, 입(入)은 열셋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진실이 아니다.
혹 무위의 세계처럼 영구불변의 세계가 있어 혹 그 세계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종자가 되는 세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유학(有學)의 도가 없다는 맡이 된다.
존자 바수밀이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
만약 과거ㆍ미래 없다면
이는 스승이 없음이니
스승이 없다는 것은
배움의 길이 끝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약 과거와 미래가 종자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라면 이미 허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
과거가 없다고 말한다면
설사 세월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어찌 영구불변의 세월이 아니겠는가.
이미 거짓말임을 알 수 있구나.
그들은 무지의 결과, 어리석음의 결과, 어둠의 결과, 침착하지 못한 결과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서로 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오직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진실로 종자가 있고 모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끊고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는 일에 진여의 바른 법 그대로를 설명하는 일이라 하며,
그런 까닭에 이 논을 지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도 끊지 말게 하고 자기의 생각도 나타내지 말게 하면서 오직 진여의 바른 법만을 말하게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과거법ㆍ미래법ㆍ현재법에 관해서 이 논을 짓게 된 것이다.
[문] 어떤 것이 과거법인가?
[답] 과거의 18계(界)ㆍ12입(入)ㆍ5음(陰)이 그것이다.
[문] 어떤 것이 미래의 법인가?
[답] 미래의 18계ㆍ12입ㆍ5음이 그것이다.
[문] 어떤 것이 현재법인가?
[답] 현재의 18계ㆍ12입ㆍ5음이 그것이다.
[문] 가령 이것이 행하는 데 있어서는 오고 가는 것이 없고 머무는 것이 없는 듯하다.
만약 오는 것이 있다면 이는 미래며 과거는 아니어야 하고,
만약 떠나갔다면 이것은 과거며 미래는 아니어야 한다.
존자 바수밀이 게송으로 설한 바와 같다.
가는 것은 끝내 오지 아니하니
이는 공(空)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간 것도 없고
끝내 머물지도 않는다.
만약 행(行)에 오고 가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삼세(三世)를 건립하는 것인가?
[답] 행에 기인한 까닭에 삼세를 건립한다.
만약 어떤 법이 아직 행해지지 아니하였다면 이것을 미래법이라 말한다.
그러나 만약 행하기 시작하였다면 이것은 현재법이라고 말한다.
또 만약 이미 그 행이 소멸되었다면 이것은 과거법이라 말한다.
예를 들면 눈이 아직 색을 보지 아니하였을 경우 이것을 미래법이라고 하고,
만약 보고 있다면 이것은 현재법이라 하고,
만약 본 것이 이미 소멸되었다면 이것을 과거법이라 한다.
이와 같이 6근(根)의 마지막인 의근(意根)에 이르기까지,
만약 그것이 미래의 종자라면 이것을 미래법이라 하고,
현재의 종자라면 이것을 현재법이라 하고,
만약 종자가 이미 소멸하였다면 이것을 과거법이라 한다.
가령 생겨나지 않아 떠나가지 아니하면, 이것을 미래법이라 한다.
또 가령 생겨나서 아직 떠나가지 아니한 것이라면 이것을 현재법이라 한다.
또 생겨났다가 이미 떠나간 것 이것을 과거법이라 한다.
또 가령 아직 생겨나지 않아 사라지지도 아니하면 이것을 미래법이라 하고,
생겨나서 아직 사라지지 아니한 것 이것을 현재법이라 하며,
생겨났다가 이미 사라진 것 이것을 과거법이라 한다.
또 가령 아직 생겨나지 아니하여 허물어지지도 아니한 것 이것을 미래법이라 하고,
생겨났으나 아직 허물어지지는 아니한 것 이것을 현재법이라고 하고,
생겨났으나 이미 허물어진 것 이것을 과거법이라 한다.
또 가령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여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 이것을 미래법이라 하고,
일어났으나 없어지지 아니한 것 이것을 현재 법이라 하고,
일어났다가 이미 없어진 것 이것을 과거법이라 한다.
또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여 허물어지지 아니한 것 이것을 미래법이라 하고,
일어나서 아직 허물어지지 아니한 것 이것을 현재법이라 하며,
일어났다가 이미 허물어진 것 이것을 과거 법이라 한다.
이로 인하여 모든 법이 경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에 이르기를,
“비구들이여, 태어난 것이 있으면 그것은 참으로 짓는 것[作]이 있고 하는 일이 있다[有爲].
생각하고 연이 일어나고[緣起] 다하는 법과 쇠하는 법과 욕망 없는 법과 멸하는 법과 허물어지는 법이 있는 것인데 이것이 허물어지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그런 이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태어나는 것이 있다[有生]라고 한 것은 곧 생(生), 즉 중생들의 태어남을 말한 것이고, 진실이라고 한 것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짓는 것이 있다[有作]라고 한 것은 작위(作爲)하는 것이 있는 유위(有爲)의 세계를 말한 것이며,
하는 일이 있다[有爲]라고 한 것은 재앙과 근심이 그것이다.
생각이라 한 것은 생각에 기인하여 잊지 아니하는 것이 그것이며,
연기(緣起)라고 한 것은 인연(因緣)을 말한 것이다.
다하는 법ㆍ쇠하는 법ㆍ욕망 없는 법ㆍ허물어지는 법이라고 한 것은 곧 있게 될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허물어지지 아니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이치는 없다고 한 것은 끝내 이러한 것은 자유자재한 존재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삼세의 앞 시기를 과거라 하고 삼세의 뒷 시기를 미래라 하고 삼세의 중간시기를 현재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삼세의 과보를 미래라 하고 이세(二世)의 과보를 현재라 하며 일세(一世)의 과보를 과거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삼세의 인(因)을 과거라 하고 이세의 인을 현재라 하고 일세의 인을 미래라 한다”라고 하였다.
[문] 이와 같은 이세의 과보에는 한 세계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고, 두 세계는 불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한 세계가 줄었다는 것은 미래의 과보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두 세계가 불어났다는 것은 과거의 과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미래의 과보는 왜 줄어드는 것이 없고 과거의 과보에는 채워지는 것이 없는가?
[답] 존자 바수밀은 설명하기를,
“자못 그렇게 헤아리는 경우가 있다. 과거와 미래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불어나고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과거와 미래는 한량이 없기 때문에 줄어들고 불어나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에서 백 개ㆍ천 개의 병이나 그릇으로 그물을 퍼담는다 하더라도 물이 줄어들고 불어나는 것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과거와 미래는 한량이 없는 세월인 까닭에 과보가 불어나고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미래의 과보는 아직 생기지 아니한 까닭에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없고,,
과거는 자꾸 불어나기 때문에 가득해지는 시점을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설명하기를,
“미래의 과보는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과보이기 때문에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없고,
과거의 과보는 사라진 과보이기 때문에 가득해지는 것을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존자 담마다라는 말하기를,
“여러분, 만약 세계에 두 종류가 있다면 불어나고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일에 기인하여 합쳐지고 모이기 때문에 법은 생겨났다가 또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문]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법은 일찍이 없었던 법이 아닌데도 존재하게 되며,
또 만약 이미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법이 바뀌어져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현재 존재할 수 있는가?
[답]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났던 것이 일어나게 되고, 또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였던 것이 일어나게 된다.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났던 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각기 스스로 그 종류와 본질과 모습과 머무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였던 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미래의 세계 속에서 모든 미래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일이다.
[문]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났다가 곧 멸하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면 다른 존재가 멸하게 되는 것인가?
만약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그것이 곧 소멸된다고 한다면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곧 미래에 소멸하는 것인가?
만약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면 다른 존재는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색음(色陰)이 일어나는 경우 수음(受陰)은 소멸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행음(行陰)이 일어나면 식음(識陰)은 소멸하는 것인가?
[답]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일어났다가 곧 그것이 소멸한다고 말하게 되고,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일어나게 되면 다른 존재는 소멸하게 된다고 말하게 된다.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일어났다가 그것이 곧 소멸된다고 하는 것은 색음이 일어났다가 색음이 소멸하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음이 일어났다가 수ㆍ상ㆍ행ㆍ식의 음이 소멸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하나의 존재가 일어나면 다른 존재는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미래의 세계가 일어나면 현재의 세계는 소멸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는 5음이기 때문에 어떤 존재가 일어났다가 그것이 곧 소멸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의 존재가 일어나면 다른 존재는 소멸되는 것이다.
[문] 세계가 일어나는가? 세계 가운데서 일어나는가?
만약 세계가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아니할 수 있으며, 다른 행도 존재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 만약 세계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마땅히 버리는 존재도 있어야 할 것이다.
[답] 일에 기인하는 까닭에 세계가 일어나게 되며, 또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세계 가운데서 일어나게 된다.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세계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시절(時節)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며, 시절 그것이 곧 세계다.
또 일에 기인하기 때문에 세계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미래의 세계 가운데서도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곧 다가올 세상에서도 허공이다.
[문] 자기의 성품[性]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는가? 다른 성품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는가?
만약 자기의 성품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성품이 성품이 아니며, 또한 존재하지 아니하는 성품이면서 존재하는 성품이라 할 수 있으며,
만약 다른 성품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버리는 존재도 있어야 할 것이다.
[답] 자기의 성품 속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성품 속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문] 만약 자기의 성품 속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성품 속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답] 그 법은 자기의 성품 속에서 일어나게 되면 곧 소멸한다.
[문] 그 과거와 미래는 모여들어 합쳐져서 지금 현재와 같은 집과 방과 담장과 수목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와 미래에는 떨어져 흩어지게 되는 것인가?
만약 합쳐지고 모여들어 현재의 집과 방과 담장과 나무들과 같아진다고 한다면 시주의 보시한 법이 어떻게 공허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으며,
또 어떻게 볼 수 있는 방향과 장소가 없다고 할 수 있겠으며,
또 어떻게 영구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만약 과거와 미래에는 떨어져 흩어지는 것이어서 현재와 같이 합쳐지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경에서는 말하기를,
“과거도 이와 같다”라고 하였는가?
경에 이르기를,
“과거의 세상에 선법(善法) 강당이라고도 불리는 구사바제왕성(拘舍婆提王城)이 있었는데 왕의 이름은 선견(善見)이었다”라고 하였다.
또 어찌하여 경에 이르기를,
“다가올 세계도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는가?
경에 보면,
“다가올 미래의 세계에 계두말왕성(鷄頭末王城)이란 성이 있을 것이며, 왕의 이름은 양가(蠰伽)라 할 것이며, 그때의 부처의 이름은 자씨(慈氏:미륵불)라 할 것이며, 이 부처님은 지극히 진실하고 등정각(等正覺)을 이룬 부처님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떻게 과거의 경계인 숙명지(宿命智)가 건립될 수 있으며, 미래의 경계인 묘원지(妙願智)가 건립될 수 있는가?
또한 미래의 세계에서는 떨어져서 흩어진다고 한다면 그때는 그 법은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계에 이르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합쳐졌을 때는 없었던 것이 있게 되고 떨어져 흩어졌을 때는 있었던 것이 없어진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답] 이 논을 지은 후에 어떤 사람이 설명하기를,
“그 과거와 미래에도 합쳐지고 모여지면 현재의 집과 방과 담장과 나무와 같은 것이 존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시주의 보시한 법이 공허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답] 뚜렷이 보이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 아니다.
[문] 어떻게 방향과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답] 방향과 장소가 있다.
[문] 왜 보이지 않는가?
[답] 많은 행(行)을 짓지 아니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 만약 많은 행을 지었을 경우에는 곧 보이게 된다.
[문] 어떻게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답] 시절의 변화는 멈추지 아니하기 때문에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사람도 있으니,
“과거와 미래는 떨어져 흩어지게 되고 현재는 하나로 합쳐져 모여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문] 만약 과거와 미래에는 떨어져 흩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경에서는 “과거도 이와 같았다”는 말이 있는가?
거기에는 “과거의 세계에 선법강당이라 불리는 구사바제왕성(狗舍婆提王城)이 있었고, 왕의 이름은 선견(善見)이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답] 앞 시대를 현재 시대처럼 관하는 눈이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문] 어떻게 경에서는, “미래의 세계도 이와 같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 경에는 “미래의 세계에 계두말왕성이란 성이 있을 것이고, 왕의 이름은 양가며 부처님의 이름은 자씨여래(慈氏如來)라 할 것이며, 지극히 진실한 등정각을 이룬 부처님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답] 그것도 역시 후세를 현재의 시대처럼 관하는 안목이 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문] 과거의 경계인 숙명지(宿命智)는 어떻게 건립되는가?
[답] 그것도 역시 앞 시대를 현재의 시대처럼 관하는 안목이 있기 때문에 말씀 하신 것이다.
[문] 미래의 경계인 묘원지(妙願智)는 어떻게 건립될 수 있는가?
[답] 그것도 역시 후세를 현재의 시대처럼 관하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문] 만약 미래에서 떨어져 흩어진다고 한다면 그때 그 법은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데,
어떻게 “합치면 없었던 것이 있게 되고 떨어져 흩어지면 있었던 것이 없어진다”라고 안할 수 있겠는가?
[답] 모든 법은 자기의 성품과 종류와 모습에 머문다.
이것을 설명한 것에 네 가지의 인(因)의 해설[薩婆多]이 있다.
첫째는 일이 다르고, 두 번째는 모습이 다르고, 세 번째는 시절이 다르고, 네 번째는 이숙(異熟)이다.
첫째 일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 법이 세계와 더불어 따라 바뀌는 것을 말한 것이다.
시절과 일에 문득 다른 것이 있게 되는 것으로 종자가 다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유가 소락으로 변화를 이루었을 때 맛에는 다른 것이 있으나 색은 다르지 아니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 법이 미래의 세계에서 현재의 세계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미래의 일을 버리게 되지만 그 종자를 버리지는 아니한다.
또 현재의 세계에서 과거의 세계에 이르게 되면 그때 현재의 일은 버리게 되지만 종자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모습이 다르다고 한 것은,
그 법이 세계를 따라 바뀔 때 과거의 시절에는 과거의 모습이 성취되지만 미래와 현재의 모습도 성취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미래의 시대에서는 미래의 모습이 성취되지만 과거와 현재의 모습도 성취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의 시대에서는 현재의 모습이 성취되지만 과거와 미래의 모습도 성취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한 여자에게 염착(染着)하였다고 해서 다른 여자에게 염착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이것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다음 시절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 법이 세계와 더불어 따라 바뀌어질 때 그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시대 때문이지 근본 종자 때문이 아니다.
마치 주판알이 처음 아랫자리에서 하나로 시작한 것이 열이 되고 백이 되고 천이 되는 것과 같이, 그 하나의 주판알이 자리가 바뀜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비유하면 한 사람의 여자를 여자라 부르기도 하고 지어미라 부르기도 하고 어머니라 부르기도 하고 할머니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한 사람의 여자가 시절에 따라 다른 호칭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그 법도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인데 이는 시절 때문인지 근본 종자 때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설명하기를,
“이는 가장 어지럽지 아니하게 세계를 건립한 것이다.
이는 행(行)에 기인하여 삼세(三世)를 건립한 것이다.
가령 그 법이 아직 행을 시작하지 아니하였다면 이것을 미래라 하고,
만약 행을 시작하였다면 이것을 현재라 하고,
이미 행이 끝났다면 이것을 과거라 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가장 어지럽지 아니하게 세계를 건립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이숙(異熟)이라고 하는 것은 그 법이 시절따라 바뀌어질 때 이것을 이숙이라고 말한다.
이는 시절 때문도 아니며 또한 종자 때문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설명한다면 이는 가장 어지럽게 건립되는 세계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미래의 과보는 한 시절뿐이고 현재는 두 시절의 과보가 있으며 과거는 세 시절의 과보가 있다.
또 현재가 한 시절의 과보를 얻을 경우 과거는 두 시절의 과보를 낳는다.
이것은 한 세계 가운데 삼세를 건립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가장 어지럽게 건립되는 세계다.
삼세처(三世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