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한 편의 詩에서 위로를 받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시편(詩篇, Psalms)이 아니라도 ‘아 이것은 정녕 한편의 詩구나!’라고 찬탄하게 되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구절을 읽고 또 음미하는 것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구절에서 놀라움과 위로와 감사 그리고 섬광처럼 마음을 밝히는 빛에 오롯이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詩와 함께 성경의 시적 표현을 살펴보기로 한다. / 표시된 곳은 쉬어가면서 낮게 소리 내어 읽어 보시면 시에 숨은 운율(韻律,가락), 내재율(內在律)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은 연(聯) 바꿈으로 넣었다.
※ 시편은 모두 알다시피 구약성경의 가장 뛰어난 시와 노래의 모음이므로 따로 읽어 보시기 바란다.
〈김현승 시인의 시와 욥의 노래〉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옆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의 기도, 김현승
김현승 시인이 택하고 싶은 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시에는 유독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 까마귀, 산까마귀란 이름이 많이 나온다. 시인의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짝 말라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까마귀처럼 외롭고 슬프고 가난한 마음에 이른다. 그리고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위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마 그의 아름다운 열매는 겸허한 모국어로 채워진 사랑의 시(詩)이거나, 성화하는 삶이거나, 주님에 대한 사랑일 수 있겠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나 뵈올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精金)같이 나오리라
- 욥기 23:8~9
문학가들은 욥기를 가장 탁월한 성서문학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재산과 명예를 불시에 잃고, 온몸이 악창으로 마른 나무껍질처럼 덮인 욥의 마음은 김현승 詩의 마른 나뭇가지와 같고, 욥 자신은 겨울에 외롭게 바람을 맞고 있는 김현승 詩의 까마귀와 닮아있다. 욥은 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확실하나 아직은 자기를 만나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다. 그러나 욥은 고통스러운 단련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정금(精金)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기막힌 고통의 골짜기에서 부르짖는 욥의 탄식과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채우는 한편의 詩요 향기라고 하겠다.
〈윤동주 시인의 시와 바울의 탄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序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어령 선생은 이 시의 ‘하늘’을 유교의 천지인(天地人)에서의 하늘(天)로 해석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인 윤동주가 쓴 이 서시에서는 하늘을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고 보면 어떨까? 그러면 시인의 부끄럼은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의 갈등 즉 선을 지향하지만, 악한 상태에 빠지고 마는 탄식과 기도가 된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물론 밤하늘에서 총총히 빛나는 별은 윤동주의 이상이요 순수이며 궁극의 꿈일 것이다.
아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로마서 7:24-25, 바울의 탄식
윤동주의 ‘序詩’의 부끄러움은 바울의 탄식과 닮았다. 사실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윤동주나 바울과 같은 심정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면서도 육신으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탄식하는 것이 성화(聖化)되어가는 성도의 모습일 것이다. 바울은 이 짧은 탄식으로 때때로 유혹에 흔들리는 잎새와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울의 이 탄식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닌 인간의 고뇌를 담은 기막힌 한편의 詩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들이 쓴 고백의 시 두 편〉
이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구약 시대 선지자의 고백,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들이 쓴 詩를 해설이 없이 두 편만 감상해보자.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며 읽어 보시기 바란다. 이 시를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신앙의 최고 경지는 무엇일까를 알 수 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6-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 하박국 3:17-19
〈김선우 시인의 시와 아가(雅歌)의 사랑 노래〉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김선우 시인(여성),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운율이 숨어있는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이는 꽃이 피고 벌이 찾아드는 것을 보며 시인이 생명의 경이로움을 노래하고 있다고 느낀다. 꽃이란 타자(他者)와 시인이 하나가 되고 있다고 느낀다. 아이를 잉태한 어느 여인은 이 시를 읽으며, 자기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작고 소중한 사랑의 열매를 생각하며 마음에 차오르는 기쁨과 감사를 느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시를 읽으며 남녀가 하나가 되는 관능적이며 본능적인 사랑의 행위와 은밀하게 포장된 애로티시즘(eroticism)1)을 느꼈다고 했다.
이 시를 읽으며 꽃을 피우는 그대가 누구인지? 그대 몸속으로 뛰어든 꽃 벌이 누구인지? 시인이 아닌지? 그리하여 나의 마음이 아득해질 만치 사랑에 빠져 그와 내가 하나가 된 것은 아닌지? 내가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처음부터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닌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주1): 애로티시즘: 남녀간의 사랑이나 관능적 사랑의 이미지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암시하는 경향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드리시니/ 너는 나를 안내하라/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로구나/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났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새끼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이 향기는/ 각양의 향품보다 승하구나
-아가(雅歌, Song of Songs)에서 발췌
이보다 더한 사랑 노래가 있을까? 아가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노래이다. 위의 글은 솔로몬과 솔로몬이 사랑을 나누는 검은 피부의 술람미 여인주1)의 노래로 아가에서 발췌했다. 이 노래에서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읽는다. 2장 15~16절에 보면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라는 구절이 있어서인지 모른다.
다만, 여기서는 술람미 여인과 사랑에 빠진 솔로몬의 뜨겁고, 열렬한 눈먼 사랑의 詩를 문자 그대로 사랑하는 남녀의 사랑으로 그대로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입맞춤, 침궁, 몰약(사랑의 몰약이란 말, 마취제란 뜻으로도 쓰인다.), 백합화(힘, 영화로움, 아름다움 등을 상징, 이스라엘의 상징, 성서 문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로만 보자), 아름다운 얼굴, 두 유방, 각양의 향품(香品)보다 승(勝)한 (향기 나는 물건보다 진한 살냄새) 등을 보라. 이 사랑의 고백은 지독히 뜨겁고, 욕망에 철저한 사랑, 어떤 불로도 끌 수 없는 사랑의 노래(詩)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처음 읽는 분은 이 시를 보고 ‘아니, 성경에 이런 글이 있어!’하고 놀라기도 한다.
주1: 술람미 여인(Shulammite) :‘평화’란 뜻.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극진히 사랑한 여자(아 6:13). 그녀에 대하여 정체는 의견이 나눠지나 수넴 여인인 아비삭이라 말하기도 한다. 히브리어에서 ‘술람미’를 솔로몬의 여성명사로 보아 ‘솔로몬의 여자’ 혹은 ‘솔로몬의 신부’로 보기도 하지만, 70인역(ⅬⅩⅩ)에서 ‘수넴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보아 ‘수넴’이란 지명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라이프성경사전,
이어서 성경 속의 사랑의 詩,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詩 두 편을 보기로 하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기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성경을 읽다가 이 크나큰 사랑의 구절을 만난 기쁨은 어디에 비할 바가 없다.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니 얼마나 큰 사랑인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된 사람은 쉽게 알 것이다. 나의 핏줄을 이어 태어나고, 자라고, 웃고 우는, 또 가끔은 떼를 쓰고 잠투정도 하는 손주란 고 작은 존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품속으로 뛰어 들어와 안기는 작은 생명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보고 또 보아도 얼마나 또 보고 싶은지! 부모나, 조부모는 아이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줄 수 있다. 이 아름다운 詩를 읽으며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잠잠히 보고 계시며 사랑하고 계심을 그리고 우리를 기뻐하심을 모른다면 이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눈길은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는 어머니의 눈길과 같다.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가의 사랑스러운 이마에 입을 맞추는 엄마의 입술과 같다.
그리하여 다음 아름다운 성경 구절은 사랑이 커도 너무나 커서, 결국 독생자인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게 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詩기 된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깊이 알아(야다,yada) 이런 사랑의 詩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yada(야다,히브리어): 1.단순한 지식보다 더 깊은 차원의 앎 2. 서로를 완전히 아는 것 3. 모든 차원에서 깊은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 서로를 완전히 알아 가는 것. 4. 가
* 이 글은 부천의 참빛교회 교회지 '참빛우리' 2023년 봄호에 실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