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도론 제14권
24. 초품 중 찬제바라밀의 뜻을 풀이함
【經】 마음이 요동치 않는 까닭에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구족한다.
【論】
【문】 무엇을 찬제(羼提)5)라 하는가?
【답】 찬제는 진나라에서는 인욕(忍辱)이라 한다.
인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생인(生忍)과 법인(法忍)이다.
보살은 생인을 행해 무량의 복덕을 얻고, 법인을 행해 무량의 지혜를 얻는다.
복덕과 지혜, 두 가지를 구족하는 까닭에 원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있다.
마치 사람이 눈과 발이 있으면 뜻하는 대로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보살이 혹은 거친 말과 매도하는 말을 만나고, 혹은 폭력을 당한다고 해도,
사유를 통해 죄와 복의 인연을 알고,
모든 법의 안팎이 끝내 공하여 나와 내 것이 없다고 하고,
세 가지 법인[三法印]으로 모든 법을 대조[印]하기 때문에,
비록 힘으로 능히 당할 수 있으나 악심을 내지 않고 거친 말을 하는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때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6)이 생하는 것을 일컬어 인(忍)이라 한다.
이 참음의 특성[法]을 얻는 까닭에 인의 지혜 역시 견고해진다.
마치 채색으로 그림을 그릴 때 아교를 섞으면 견고하게 붙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착한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거친 것과 섬세한 것이다.
거친 것을 인욕이라 하고 섬세한 것을 선정이라 한다.
아직 선정을 얻지 못했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능히 뭇 악을 차단한다면 이를 인욕이라 하고,
마음이 선정을 얻어 뭇 악을 짓지 않음을 즐긴다면, 이것을 선정이라 한다.
이 인욕은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이어서 마음과 서로 응하여 마음 따라 움직이며, 업도 아니요 업보도 아니건만 업행을 따른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세계에 속한다”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단지 욕계(欲界)에만 속하거나 혹은 속하지 않는다. 색계에는 참아야 할 바깥경계의 악이 없기 때문이다” 한다.
나아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 범부와 성인이 모두 얻기 때문이다.”
혹은 “내 마음과 남의 마음의 착하지 못한 법을 막기 때문에 일컬어 선(善)이라 한다.
선한 까닭에 혹은 사유로써 끊기도 하고, 혹은 끊지 않기도 한다” 한다.
이러한 갖가지를 아비담에서 자세히 분별했다.
【문】 무엇을 생인이라 하는가?
【답】 두 종류의 중생이 보살에게 오나니,
첫째는 공경하고 공양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화내어 꾸짖고 때리기 위해서이다.
이때 보살은 그 마음을 능히 참아서 공경하고 공양하는 중생이라고 애착하지 않으며,
해[惡]를 가하는 중생이라고 화를 내거나 하지 않나니,
이것을 일컬어 생인이라 한다.
【문】 어찌하여 공경ㆍ공양을 해도 그에 대해서 참는다 하는가?
【답】 두 가지 번뇌[結使]가 있으니,
첫째는 애착에 속하는 번뇌요,
둘째는 성냄에 속하는 번뇌이다.
비록 공경ㆍ공양은 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하여금 애착케 하나니, 이를 부드러운 도적[軟賊]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에 대해 스스로 잘 참아서 집착하지 말고 애착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능히 참는가?
곧 그 덧없음을 관찰하여 이것이 곧 번뇌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양(利養)이라는 종기가 깊어짐은 마치 가죽을 뚫고 살에 이르고, 살을 뚫고 뼈에 이르며, 뼈를 뚫고 골수에 이르는 것과 같다.
사람이 이양에 집착되면 지계(持戒)의 가죽을 부수고, 선정의 살을 끊고, 지혜의 뼈를 깨뜨리며, 미묘한 선심(善心)의 골수를 잃는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가비라바국(迦毘羅婆國)7)으로 유행하셨을 때, 1250인의 비구와 함께하시니, 모두가 범지(梵志)의 몸으로서 불[火]을 공양하는 까닭에 형색이 초췌했으며, 음식을 끊고 고행하는 까닭에 몸이 여위고 피부는 검었다.
이에 정반왕은 생각했다.
“내 아들의 시종들이 비록 마음이 깨끗하고 청결하나 모두가 용모가 모자라니, 나는 가문이 번성하고 자손이 많은 집을 골라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을 내게 하여 불제자로 만들어야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는 온 나라에 칙령을 내려,
“여러 석가족이나 귀족의 자제 가운데 공고에 맞는 사람을 간택해서 모두 출가케 하라” 했다.
이때 곡반왕(穀飯王)8)의 아들인 제바달다(提婆達多)9)가 출가하여 도를 배워 6만의 가르침[法聚]을 외우고 부지런히 수행해 12년을 채웠다.
그 뒤 공양의 이로움을 얻기 위해 부처님께 와서 신통 배우기를 구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담(憍曇)10)아, 너는 5음의 무상함을 관찰하면 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신통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더 이상 신통 얻는 법을 자세히 말씀하시지는 않으시니,
그는 나와서 사리불과 목건련 및 5백 명의 아라한을 구했으나, 아무도 신통 얻는 법을 말해 주지 않은 채 다만 말하기를,
“그대가 5음의 무상함을 관찰하기만 하면 도를 얻고 신통도 얻을 것이다” 했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여 슬피 울면서 아난에게 가서 신통 얻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난은 아직 타심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형을 공경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가르쳐 주었다.
그는 신통 얻는 법을 얻은 뒤에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오래지 않아 5신통을 얻었다.
5신통을 얻고는 생각했다.
“누가 나의 단월이 되어주겠는가? 아사세(阿閣世)11) 왕자는 대왕의 상호가 있으니, 그와 친해져야 되겠다.”
그리고는 하늘에 올라가서 하늘음식을 취하고, 다시 울단월(鬱旦越)에 들러 저절로 생긴 쌀[粳米]을 구하고, 다시 염부숲에 들러 염부 열매를 따 가지고 와서는 아사세 장자에게 주었다.
어느 때는 스스로의 그 몸을 변화하여 코끼리ㆍ말보배가 되어 그의 마음을 현혹시켰으며,
혹은 어린아기가 되어 그의 무릎에 앉기도 했는데,
왕자는 안고 입을 맞추거나 핥아 줄 때면 가끔 자기의 이름을 말해서 태자로 하여금 알게 하며, 갖가지 변태를 부려 그 마음을 흔들었다.
왕자는 홀딱 반해서 나원(奈園) 안에다 큰 정사를 지어 바치고 네 가지 공양과 갖가지 물건을 공양하여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게 하였다.
그로써 제바달다에게 공양하고 날마다 대신들을 거느리고 가는 한편 스스로 5백 개의 솥에 국과 밥을 보냈다.
제바달다는 많은 공양은 얻었으나 무리가 적은 것을 섭섭해 하면서 생각했다.
“나에게는 서른 가지 상호가 있으니, 부처님과는 불과 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제자가 모이지 않기 때문인데 만일 대중이 둘러싸 준다면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승단을 깨뜨려 5백 명의 제자를 얻었으나, 사리불과 목건련이 다시 이들을 설법하고 교화하여 승단은 재차 화합하게 되었다.
이때, 제바달다는 더욱 나쁜 마음을 내어 산을 밀어 부처님을 압사시키려 했으나 금강역사(金剛力士)12)가 금강저(金剛杵)13)로써 멀리 던져버렸다.
하지만 부서진 돌조각이 날아와 부처님은 발가락에 상처를 입고 마셨다.
이를 본 화색(華色) 비구니14)가 그를 꾸짖으니,
그는 주먹으로 비구니를 때렸는데, 비구니가 눈알이 빠져 죽음으로써 세 가지 극악한 죄를 지었다.
그는 다시 나쁘고 삿된 스승인 부란나(富蘭那)15) 외도 등과 친교를 맺어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다.
또한 독약을 손톱에 묻혔다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기회에 해치려 했으나, 아직 왕사성에 채 이르기도 전에 땅이 저절로 갈라지고 불수레[火車]가 마중을 나오더니 산 채로 지옥으로 들어갔다.
제바달다는 몸에 서른 가지 거룩한 모습이 있으되, 그 마음을 항복시키지 못하여 공양 때문에 큰 죄를 짓고 산 채로 지옥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양은 깊은 종기이어서 가죽을 뚫고 골수에 이른다” 하였으니,
마땅히 나에게 공양하는 사람을 애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일컬어,
‘보살은 참는 마음으로 공경하고 공양하는 사람에게 애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공양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전생의 인연과 복덕 때문이요,
둘째는 금생의 공덕으로서 계행ㆍ선정ㆍ지혜를 닦기 때문에 남에게 공경과 공양을 받는 것이요,
셋째는 허망하고 거짓되게 속여 속에는 진실한 덕이 없으면서도 겉으로 청백한 체하여, 그로써 당시의 사람들을 홀려 공양을 얻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공양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전생의 인연으로 부지런히 복을 닦았기 때문에 이제 공양을 받는 것이라면 이는 자신이 부지런히 닦아 얻었을 뿐인데, 어찌 이에 대해 과시를 하겠는가.
마치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것과 같으니, 스스로 노력해 얻었을 뿐이거늘 어찌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사유해 그 마음을 굴복시킨다면 집착하거나 교만하지 않게 된다.
만약에 금생의 공덕으로 공양을 얻었다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지혜로써 모든 법의 실다운 모습을 알고 혹은 번뇌를 능히 끊었다.
이런 공덕 때문에 이 사람들이 공양하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사유해 그 마음을 굴복시킨다면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는다.
이는 실로 공덕을 좋아할 뿐 나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계빈(罽賓)16)의 어떤 삼장(三藏) 비구가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고 왕사(王寺)로 갔는데, 때마침 절에 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들어가려 했으나 문지기는 그의 의복이 남루한 것을 보고 문을 막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으나 의복이 누추하기 때문에 번번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므로, 방편을 써서 좋은 의복을 빌려 입고 오니, 문지기는 막지 않고 들여보내 주었다.
모임에 이르러 자리에 않자 갖가지 음식이 나왔는데, 그는 먼저 음식을 옷에 부어 버렸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무슨 이유로 그러시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나는 요즘 이곳에 자주 왔으나 번번이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이 옷 덕분에 들어와서 여기에 앉아 이렇게 좋은 갖가지 음식을 얻게 되었으니, 실로 이 옷 때문에 얻은 것이요.
그래서 그것을 먼저 옷에다 부어 주는 것이요.”
수행자는 수행의 공덕과 지계와 지혜 때문에 공양을 얻거든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공덕을 위한 일이요, 나를 위함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능히 스스로 마음을 굴복시킨다면 이를 일컬어 인욕[忍]이라 한다.
만일 허망하고 거짓되게 공양을 얻는다면 이는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니,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응당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이런 허망한 것으로 공양을 얻는다면 도적이나 강도가 밥을 얻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는 거짓으로 속이는 죄를 범할 뿐이다’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세 종류17)의 공양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도 내지 말고 교만한 생각도 갖지 않는다면 이것을 생인이라 한다.
【문】 사람이 도를 얻기 전에 의식(衣食)이 급하거늘 나에게 공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능히 참아 그 마음이 베푸는 이에게 집착하거나 애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 지혜의 힘으로 무상한 모습ㆍ괴로운 모습ㆍ나 없는 모습을 관하여 마음으로 항상 싫어한다.
마치 죄인이 형벌을 당하기 직전 아무리 맛난 음식이 앞에 있고 가족들이 권하더라도 죽음을 근심하기 때문에 맛난 음식을 먹더라도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행자 역시 이와 같으니, 항상 무상한 모습ㆍ괴로운 모습을 관한다면, 비록 공양을 얻을지라도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슴이 호랑이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풀과 맑은 물을 얻어먹는다고 해도 마음에 염착이 없는 것과 같으니,
수행자 역시 그와 같아서,
‘항상 무상의 범에게 쫓기어 쉴 틈이 없다’고 사유해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면,
비록 맛난 음식을 얻더라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공양하는 사람에 대해 그 마음이 스스로 인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인이 와서 오락으로써 보살을 유혹하려 하거든, 이때 스스로 마음을 굴복시키고 참아서 욕망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 앉아계실 때 마왕(魔王)이 근심이 되어 세 딸[王女]을 보냈으니, 첫째는 낙견(樂見)이요, 둘째는 열피(悅彼)요, 셋째는 갈애(渴愛)였다.
그들은 와서 몸을 나타내어 갖가지 교태를 부리면서 보살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때 보살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잠시도 눈을 주지 않으셨다.
이에 세 여자들은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아 좋아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젊은이를 좋아하거나 혹은 중년에 애착하며, 키가 큰 이를 좋아하거나 혹은 키가 작은이를 좋아하며, 피부가 희거나 혹은 검은 사람을 좋아한다. 이렇듯 갖가지로 좋아함이 다르다.’
이때 세 여인은 각각 5백 명의 미녀로 변화했는데, 하나하나의 변화한 여자는 다시 한량없는 교태를 나타내며 숲에서 나왔으니, 마치 먹구름에서 잠시 번개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혹은 눈썹을 드날리거나 눈길을 주거나 어리광을 부리거나 눈을 가늘게 떠 홀리며, 갖가지 풍악을 울리는 등 온갖 교태를 부리면서 보살에게 다가와서 교태로운 몸으로 보살에게 접촉하려 했다.
이때 밀적금강역사(密迹金剛力士)18)가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꾸짖었다.
“이 분이 누구이신데 너희들이 감히 음탕한 교태로 접근하려 하느냐.”
그리고 밀적은 게송으로써 그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은 천명(天命)을 모르는구나.
예쁜 모습 잃으면 머리카락 변하니
큰 바닷물 맑고 아름다웠으나
오늘엔 모두가 쓰고 짜게 변한 줄을.
그대들은 날로 줄어드는 도리를 모르는 구나.
바수(姿數)19)의 하늘들도 나쁜 길에 떨어지고
불이 본래는 하늘의 입이었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을.
이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런 줄 알지 못한 채 이 성인을 가벼이 여기는 구나” 하였다.
그때 여자들이 머뭇거리다가 조금 물러서서 보살에게 말했다.
“지금 이 아씨들은 모두가 단정하고 예쁨이 견줄 이 없으니 즐겨보실 만합니다. 우두커니 앉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보살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부정하고 더럽도다. 물러가 헛되이 말을 걸지 말라.”
이때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몸은 더러움의 숲
부정하고 부패한 무더기이니
실로 걸어다니는 뒷간이라 하리니
무엇이 즐거울 게 있으랴.
여자들은 이 게송을 듣고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우리들이 청정한 하늘의 몸임을 모르는 채 이런 게송을 읊고 있구나.’
그리고는 곧 몸을 변하여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 찬란한 빛으로 숲을 비추고 하늘의 기악을 연주하며 보살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몸이 이러하거늘 어찌 꾸짖을 수 있습니까?”
“때가 오면 스스로 알 것이니라.”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그러자 보살은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하늘나라 동산 숲에
7보의 연꽃 피는 연못가에서
하늘사람이 서로 어울려 즐기나
잃을 때가 되면 너희들 스스로 알리라.
이때 무상이 나타나면
하늘의 즐거움 모두 고(苦)가 되니
그대들은 마땅히 욕락을 싫어하고
바르고 참된 도를 사랑해야 하리라.
여자들이 이 게송을 듣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큰 지혜가 한량이 없다. 하늘의 즐거움이 청정하거늘 오히려 그 삿됨을 알고 있으니, 당할 수가 없도다.”
그리고는 즉시 사라졌다.
보살은 이와 같이 음욕의 즐거움을 관찰하고는 스스로 마음을 제어하고 인내해 요동치 않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음욕의 갖가지 부정(不淨)을 이렇게 관찰한다.
“모든 쇠퇴함[衰] 가운데서 여자의 쇠퇴함이 가장 무겁다.
칼ㆍ불ㆍ우레ㆍ번개ㆍ벼락ㆍ원수ㆍ독사 따위는 오히려 잠시라도 가까이할 수 있으나,
여자의 간탐ㆍ질투ㆍ성냄ㆍ아첨ㆍ추태ㆍ싸움ㆍ탐욕ㆍ시기 등은 가까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자는 소인인지라 마음이 얕고 지혜가 얇아서 음욕만이 눈에 뜨이고, 부귀ㆍ지덕ㆍ명예는 보지 않으며, 오로지 음욕만을 행하여 남의 선근을 깨뜨린다.
결박ㆍ칼ㆍ우리ㆍ감옥이 벗어나기 어렵다 하나 오히려 풀기 쉽거니와,
여자의 사슬이 사람을 결박함은 물듦이 굳고 뿌리가 깊어서 지혜 없는 자가 빠지면 벗어날 수가 없다.”
뭇 법 가운데서 여자의 법이 가장 무거우니, 부처님께서는 이런 게송을 말씀하셨다.
차라리 달구어진 무쇠로
눈 속을 휘저을지언정
흩어진 마음으로 헛되이
여색을 살피지 말아라.
웃음을 머금고 맵시를 부리며
교만하고 다시 수줍어하고
곁눈질하면서 눈알을 굴리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양을 부린다.
걸음걸이는 요염하여
사람을 홀리고
음욕의 그물을 널리 펴서
사람을 모두 걸려들게 한다.
앉고 눕고 다니고 설 때
두리번거리며 교태를 부리면
지혜 얕은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마음이 취하게 된다.
검을 쥐고 달려드는 적군은
차라리 이길 수 있을지언정
여인이라는 도적이 사람을 해하는 일이야
막아낼 도리가 없다.
독을 품은 독사는
차라리 잡을 수 있겠지만
여자의 정이 사람을 홀리는 것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보지 말아야 하나니
만일 보고자 한다면
어머니나 누이같이 여기라.
자세히 관찰해 보라.
부정물(不淨物)의 쌓임이니
음욕의 불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 때문에 타게 되리라.
또한 여자란 공경을 받게 되면 남편으로 하여금 우쭐하게 만들고,
공경을 받지 못하면 남편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든다.
여자는 항상 이렇게 번뇌ㆍ근심ㆍ두려움을 사람들에게 끼치거늘 어떻게 가까이하겠는가.
친하고 좋아하던 이들이 등지고 갈라섬은 여자의 죄요, 남의 잘못[惡]을 교묘히 살핌은 여자의 지혜이다.
큰 불이 사람을 태우는 것은 오히려 가까이할 수 있고,
형체 없는 맑은 바람은 오히려 잡을 수 있고,
독을 머금은 독사는 오히려 건드릴 수 있지만,
여자의 마음은 진실로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여자란 부귀ㆍ단정ㆍ명예ㆍ지덕ㆍ종족ㆍ기예ㆍ말재주ㆍ친분ㆍ사랑 등은 보지 않아 도무지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음욕만을 보기 때문이다.
마치 교룡(蛟龍)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오직 사람 죽이기만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또한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근심ㆍ걱정ㆍ초췌함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재산을 넉넉히 부양하고 공경해 받들어 주면 그 교만과 사치가 억제하기 어렵다.
또한 여자는 착한 사람에게는 제멋대로 교만한 마음을 품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원수같이 여기고,
부귀한 사람에게는 따르면서 공경히 사랑하고,
빈천한 사람은 개보듯 하면서 항상 욕심만을 따르고 공덕은 따르지 않는다.
전하는 말에, 어떤 국왕에게 구모두(拘牟頭)20)라는 딸이 있었는데,
때마침 술바가(述姿伽)라는 어부가 길을 따라가다가 멀리서 왕녀가 높은 누각에 있는 것을 창틈으로 보고는 애착심을 일으켜 잠시도 버리지 못했다.
날과 달이 갈수록 더욱 잊지 못해 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 어미가 그 사유를 물은즉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왕녀를 보고나니 잊을 수 없습니다.”
어미가,
“너는 소인이요 왕녀는 존귀한 몸이니, 아니 될 말이다”라며 타이르니,
아들이 말했다.
“내 마음이 간절히 원하여 잠시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내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살지 못할 것입니다.”
어미는 아들을 위하는 까닭에 왕궁에 들어가서 항상 살찐 물고기와 맛난 고기를 왕녀에게 바치면서도 그 값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왕녀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무슨 원하는 게 있느냐?”
그러자 어미는 왕녀에게 말했다.
“바라옵건대 잠시 좌우를 물러나게 해 주십시오. 사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외아들이 있는데 왕녀를 사모하는 나머지 한이 맺혀서 병이 되어 목숨마저 멀지않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가엾이 여기시어 그의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이에 왕녀가 말했다.
“그대는 돌아가서 아무 달 보름날 아무 데 있는 천사(天祠) 안의 천상(天像) 뒤에 있으라.”
어미는 돌아와서,
“네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위의 사실을 다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이 되자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천상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왕녀는 때가 되자 부왕에게 말했다.
“저에게 불길한 조짐이 있으니, 부득이 천상 앞에 나아가서 복을 빌어야 되겠습니다.”
왕은 “좋다”고 말했다.
곧 수레 5백 대를 장엄시켜 천사까지 데려다 주게 했다.
천사에 이르자 모든 시종들에게 명해 문을 경계로 멈춰 서게 하고는 혼자서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천신(天神)은 생각하기를,
‘이 일은 옳지 못하다. 왕은 인간세상의 주인인데 이 천한 백성이 왕녀를 욕되게 하게 할 수는 없다’ 하고는,
곧 그 아들을 홀려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왕녀가 들어와서 보니 그가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흔들었으나 깨지 않기에 10만 냥어치나 되는 영락(瓔珞)을 그에게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그녀가 떠난 뒤에 깨어나서 보니, 영락이 목에 걸려 있었다. 곁의 사람들에게 물어보고서야 왕녀가 왔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을 통하려던 원[情願]을 이루지 못한 채 근심하고 괴로워하더니 음욕의 불에 복받쳐 죽었다.
이런 예로 보아도 여자의 마음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음욕만을 쫓는다는 것을 알겠다.
또한 옛날 어떤 왕녀는 전다라(栴陀羅)21)를 따라다니면서 부정한 짓을 하였으며, 어떤 선인의 딸은 스승의 아들을 따라다녔다.
이러한 갖가지 형태의 여자들은 마음에 아무런 가리움이 없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여자에 대하여 욕정을 버리고 인내해 애착하지 말아야 한다.
성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여야 참을 수 있는가?
곧 응당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모든 중생은 죄지은 인연이 있어서 서로 침해한다.
나 또한 지금 시달림을 받는 것도 전생의 행위[本行]의 인연일 것이다.
비록 금생에 지은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내가 전생에 저지른 나쁜 갚음을 받는 것이니, 의당 달게 받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빚을 지는 것과도 같으니, 빚 주인이 달라고 하면 응당 기쁜 마음으로 갚을지언정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수행자는 항상 자애로운 마음을 써야 하며, 아무리 번뇌와 어지러움이 몸에 닥치더라도 반드시 참고 견디어야 한다.
예컨대 찬제(羼提)22) 선인이 큰 숲에서 인욕을 닦고 자비를 행하는데, 이때에 가리왕(迦利王)이 채녀(採女)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놀았다.
음식을 먹고는 왕이 잠시 잠든 사이에 궁녀들이 꽃나무 사이로 구경을 다니다가 이 선인을 보자 공경하여 절을 하고 한쪽에 섰다.
선인은 채녀들에게 자비와 인욕을 찬양하며 말해 주었는데, 그 음성이 아름답고도 미묘하여 듣는 이가 싫증이 나지 않아 오랫동안 돌아갈 줄을 몰랐다.
가리왕이 깨어나 보니 궁녀들이 보이지 않았기에 칼을 뽑아들고 자취를 찾아 쫓아가 그녀들이 선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교만과 질투가 복받쳤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며 칼을 뽑아 겨누고서 물었다.
“너는 무엇 하는 자이냐?”
선인이 대답했다.
“나는 여기서 인욕을 닦고 자비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그대를 시험해 보리라. 이 칼로 네 귀를 베고, 코를 자르고, 손발을 끊겠다. 그래도 성을 내지 않는다면 그대가 인욕을 닦는다고 알겠노라.”
선인이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왕은 곧 칼을 들어 그의 귀와 코를 베어내고 손발을 끊고 나서 물었다.
“이래도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느냐?”
선인이 대답했다.
“나는 자비와 인욕을 닦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왕이 다시 말했다.
“네 한 몸만이 남아 있어 아무런 세력도 없거늘 아무리 입으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해도 누가 그 말을 믿겠느냐.”
이때 선인은 발원을 했다.
“내가 실로 자비와 인욕을 닦았다면, 피가 젖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러자 즉시에 피가 젖으로 변했다.
이에 왕은 크게 놀라며 채녀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이때 숲 속에 있던 용신이 이 선인을 위해 천둥ㆍ벼락을 내리니, 왕은 그 독해(毒害)를 입고는 궁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번거로운 가운데서 능히 인욕을 행한다” 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자애의 마음을 닦고 행하는데,
일체 중생은 항상 뭇 고통이 있으니, 태내에 있을 때엔 옹색해서 온갖 고통을 받고, 나올 때엔 옹색함에 눌리어 뼈와 살이 부서지는 듯하고, 찬바람이 몸에 닿는 고통이 칼로 베이는 것보다 심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고통 가운데서 태어나는 고통이 가장 무겁다” 하셨다.
이와 같이 늙음ㆍ앓음ㆍ죽음의 고통과 갖가지 고액이 있으니, 어찌 수행자가 다시 그들에게 고통을 보태어 주랴. 이는 종기에다 다시 칼을 대어 흠집을 내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항상 생사의 흐름을 따를 것이 아니라.
마땅히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서 그 근원을 다하여 열반[泥洹]의 길에 이르리라.
일체의 범부들은 침해를 당하면 곧 화를 내고, 이익을 만나면 곧 기뻐하며, 두려운 곳에서는 곧 겁을 먹는다.
하지만 나는 보살이거니 그들과 같을 수는 없도다.
비록 아직 번뇌의 씨앗을 다 끊지는 못했으나 스스로 억제하여 인욕을 닦되 해치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공경과 공양을 하더라도 기뻐하지 않으며, 뭇 고통과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오직 중생들을 위하여 큰 자비심을 일으키리라.”
또한 보살은 어떤 중생이 와서 괴롭히거든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나의 친구이며 나의 스승이다” 하고는,
더욱 친애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그가 온갖 괴로움을 가해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나는 인욕의 행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나의 친한 친구이며 또한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명심해야 하나니,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은 시작이 없고 세계는 한계가 없으니, 5도(道)를 오가며 끝없이 헤맨다.
나도 일찍이 중생들의 부모 형제가 되었고, 중생들도 나의 부모형제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러하리라” 하셨다.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삿된 마음으로 성내고 해하려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중생들 가운데는 부처의 종자가 매우 많으니, 내가 화를 내어 그들을 대한다면 이는 곧 부처님께 화를 내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부처님께 화를 낸다면 이미 끝난 것이다.
말씀하셨듯이 비둘기도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 지금은 비록 새이지만 가벼이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번뇌 가운데서 성냄이 가장 무거우며,
착하지 못한 과보 가운데 성냄의 과보가 가장 크다.
다른 번뇌에는 이런 중한 죄가 없다.
예컨대 석제바나민(釋提婆那民)이 부처님께 게송으로 물은 바와 같다.
어떤 것을 죽이면 안온해지고
어떤 것을 죽이면 후회가 없으며
어떤 것이 독의 근본이 되어서
모든 선근을 죽여 버리나이까?
어떤 것을 죽이면 칭찬받으며
어떤 것을 죽이면 근심이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성내는 마음을 죽이면 안온하고
성내는 마음을 죽이면 후회가 없으며
성냄이 독의 근본이어서
성냄은 일체의 선근을 멸해 버린다.
성냄을 죽이면 부처님들이 칭찬하시고
성냄을 죽이면 곧 근심이 없어진다.
다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연민[悲]을 행해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한다.
성냄은 모든 선근을 멸하고 모든 것을 독으로 해치거늘 내 어찌 이 중한 죄를 범하겠는가.
만일 화를 낸다면 스스로 즐거움과 이익을 잃어버리니, 어떻게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겠는가.’
또한 불보살들은 대비(大悲)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니 성을 낸다면 대비를 멸하는 독이 되고 마니, 특히나 안 될 일이다.
만일 대비의 근본을 무너뜨린다면 어찌 보살이라 하며, 보살이 어디로부터 나오랴.
그러므로 인욕을 닦아야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온갖 성냄의 고통[瞋惱]을 가하더라도 그 공덕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이 중생이 비록 한 가지 죄가 있으나 달리 묘한 여러 공덕들이 있을 것이니, 그 공덕 때문이라도 그에게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욕하거나 때리더라도 그것은 나를 다듬는 것이 된다.
마치 금쟁이가 금을 정련하면 티는 불을 따라 없어지고 순금만 남는 것과 같다.
이 또한 이와 같으니, 내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전생의 인연 때문이니, 이제 마땅히 그것을 갚아야 한다. 화를 내지 말고 인욕을 닦으리라.’
또한 보살은 인자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마치 갓난아기같이 여기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염부제 사람들은 근심 걱정은 많고 즐거운 날이 없으므로 혹 와서 꾸짖고 모함하거나 혹은 중상을 가해 스스로 즐거워한다면, 이 즐거움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네 마음대로 꾸짖으라.
왜냐하면 내가 본래 발심한 것은 중생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느니라.’
‘세간의 중생들은 항상 모든 병고에 시달리고, 또한 항상 죽음의 도적이 그를 쫓아 엿보니,
마치 원수가 항상 안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찌 착한 사람으로서 사랑하여 가엾이 여기지 않겠는가.’
‘고통을 주고자 하나 고통이 그에게 미치기 전에 먼저 내가 해를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저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인욕을 닦아야 한다.
또한 마땅히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성냄은 그 허물이 가장 깊어서 삼독 가운데서 이보다 깊은 것이 없다.
98사(使)가운데서 이것이 가장 견고하고, 모든 마음의 법 가운데 가장 고치기 어렵다.
성내는 사람은 착한 것도 모르고, 착하지 않은 것도 모르며, 죄와 복도 관찰하지 못하고, 이익과 손해도 알지 못한 채 스스로 억념하지도 못하다가 스스로 악도에 떨어진다.
착한 말을 망실하고 명예를 아끼지 않으며, 남의 괴로움을 모르고 자기의 몸과 마음이 피로하고 지치는 줄도 모른 채 성냄에 지혜의 눈을 가려 오로지 남을 괴롭히는 짓만을 한다.’
어떤 5통선인(通仙人)이 화를 냈기 때문에 비록 청정한 행을 닦았으나 한 나라 사람을 다 죽이기를 마치 전다라와 같이 했다.
또한 화를 내는 사람은 마치 삵과 같아서 함께 머물기 어려우며, 마치 악성 종기와도 같아서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무너진다.
화를 내는 사람은 마치 독사와도 같아서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며,
화를 쌓은 사람은 악심이 점점 커져서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러 아비도 죽이고 임금도 죽이며 악의를 품은 채 부처님께 향한다.
예컨대 구섬미국(拘睒彌國)23)의 비구들은 사소한 일로 성내는 마음이 점점 커져서 두 패로 나뉘게 되었다.
만일 판정을 하고자 한다면 석 달이 걸려도 풀리지 않았을 것이나, 부처님께서 오셔서 상륜(相輪)의 손을 들어 막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싸우지 말라.
거친 마음이 상속되면
괴로움의 과보도 무거워진다.
그대들은 열반을 구해
세간의 이익을 버리고
착한 법 가운데 들어왔거늘
어찌 성내고 싸우는가?
세상 사람들의 분쟁(忿爭)은
용서할 수야 있겠지만
출가한 사람이야
어찌 싸울 수 있으랴.
출가한 이가 마음에 독기를 품어
스스로 해치는 것은
마치 찬 구름에서 불이 나와
몸을 태우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법왕이시니, 잠시 잠자코 계십시오. 이 무리들이 나를 침해하니 어찌 대꾸하지 않으리이까.”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은 제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승중 가운데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숲으로 들어가셔서 조용히 삼매에 드셨다.
성내는 죄는 이와 같아서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듣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반드시 성냄을 제거하고 인욕을 닦아야 한다.
또한 능히 인욕을 닦는다면 자비를 얻기 쉽고,
자비를 얻으면 곧 불도에 이르게 된다.
【문】 인욕하는 법이 모두 좋기는 하나 단 한 가지만은 옳지 못하다.
곧 소인배들이 가벼이 여겨 말하기를 ‘겁을 낸다’ 한다. 이런 까닭에 모두 참을 수는 없다.
【답】 만일 소인들이 가벼이 여겨 ‘겁낸다’고 하는 까닭에 참지 않으려 한다면 참지 않는 죄는 이보다 심하다.
왜냐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은 현성의 착한 이들이 가벼이 여기시고,
인욕하는 사람은 소인들이 가벼이 여기나니,
그렇다면 두 가지 가벼이 여김 가운데서 차라리 어리석은 자에게 업신여김을 받을지언정 성현들의 천대를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에 업신여기고,
성현은 천히 여길만한 것을 천히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인욕을 닦아야 한다.
또한 인욕하는 사람은 비록 보시와 선정을 행하지 않더라도 항상 미묘한 공덕을 이루어 하늘이나 인간에 태어나며 나중에는 불도를 얻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부드럽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금생에 나를 괴롭히고 욕보이며, 이익을 빼앗고, 업신여기고, 꾸짖고, 속박하더라도 우선은 참아야 한다.
만일 내가 참지 못한다면 지옥에 떨어져서 무쇠기둥ㆍ무쇠담ㆍ뜨거운 땅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리니, 태우고 삶고 굽는 등 고통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리라.’
소인들은 지혜가 없어서 비록 보잘것없는 것도 귀하게 여기며, 참지 못하여 위맹을 부려서 비록 상쾌한 일이나 천하게 여긴다.
그러기에 보살은 인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처음 발심해 중생들의 마음의 병을 다스려 주고자 맹세했거늘 어찌 그들 때문에 자신이 병들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인욕해야 하리라.’
마치 약사(藥師)가 모든 병을 고치는 것과 같으니, 귀신이 붙어 미친병이 들어 칼을 뽑아들고, 헐뜯으며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해도 의원은 귀신의 병인 줄 알기 때문에 오직 고쳐 주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는다.
보살 역시 이와 같아서, 만약 어떤 중생이 화를 내어 꾸짖으면 그 화를 내는 자가 번뇌의 병에 끄달리고 미친 마음에 시달린 줄을 잘 알아 방편으로 고쳐줄지언정 싫어함이 없다.
또한 보살은 일체를 기르고 사랑하기를 마치 아들과 같이 하나니,
어떤 중생이 보살에게 화를 내며 괴롭힐지라도 보살은 가엾이 여기어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는다.
마치 인자한 아버지가 자손을 어루만져 기르지만 자손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기에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매를 들기도 하며, 공경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르더라도,
그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음을 가엾이 여기어 더욱 사랑하며 설사 허물이 있더라도 성내거나 꾸짖지 않는다. 보살의 인욕도 이와 같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나에게 화를 내고 괴롭히더라도 나는 인욕해야 하리라.
만일 내가 참지 않으면 금생에 후회하고 나중에 지옥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요,
만일 축생이 되면 독한 용이나 뱀ㆍ사자ㆍ범ㆍ이리 따위가 될 것이요,
만일 아귀가 되면 입에서 불이 나올 것이니,
마치 사람이 불에 데며, 데일 때는 차라리 조금 아프지만 나중에 더욱 아파지는 것과 같으리라.’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보살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해야 한다.
만일 내가 인욕하지 못한다면 보살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악인이 되리라.’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 무리[衆生數]요, 둘째는 중생 아닌 무리[非衆生數]이다.
나는 처음 발심해 모든 중생을 위하리라고 맹세했다.
만일 중생 아닌 무리, 즉 산과 돌ㆍ나무ㆍ들ㆍ바람ㆍ추위ㆍ서늘함ㆍ더위ㆍ물ㆍ비 따위가 침노해 오더라도 오직 피하려 할 뿐 처음부터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중생들은 내가 위해야 할 대상이다.
나를 해친다고 해도 나는 마땅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거늘 어찌 화를 내리오.’
또한 보살은 여러 겁 이전부터 인연이 화합하여 거짓으로 사람이라 했을 뿐 실로 사람이라 할 법이 없음을 안다.
그러니 누가 감히 꾸짖을 수 있겠는가. 오직 뼈ㆍ피ㆍ가죽ㆍ살이 있을 뿐이다.
마치 벽돌을 쌓은 것과 같으며,
마치 나무로 만든 인형[木人]의 기관이 움직여 가고 오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음을 안다면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자신이 화를 낸다면 이는 어리석은 짓으로, 스스로 죄와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인욕을 닦아야 한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에 한량없으며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부처님들께서 보살도를 닦으실 때에 모두가 먼저 생인(生忍)을 행하시고 나중에 법인(法忍)을 수행하셨다.
나도 이제 불도를 배우려 한다면 의당 부처님들이 행하신 법과 같이 할지언정 화를 내어 악마의 법과 같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인욕을 닦아야 한다.
이러한 갖가지 한량없는 인연에 의하여 능히 참으니, 이것을 생인(生忍)이라 한다.
5)
범어로는 kṣānti. 찬제(羼提)란 참고 감내함을 뜻한다.
6)
범어로는 caitasika-dharma. 신역어는 심소법(心所法). 심수(caitasika)란, ‘마음에 속하는 것’이란 뜻으로 ‘마음에 속하는 작용’ 나아가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작용’을 가리킨다.
7)
범어로는 Kapilasastu.
8)
범어로는 Dronodana.
9)
범어로는 Devadatta.
10)
범어로는 Gautama. 데바닷따의 성(性)이다.
11)
범어로는 Ajātaśatru.
12)
범어로는 Guhyakavajrapāṇi,
13)
범어로는 vajrayudha. ‘결코 부서지는 일 없는 방망이’를 의미한다. 이 금강저(金剛杵)를 지니고 바즈라빠니(vajra-pāṇi, 執金剛)가 항상 부처님을 그 곁에서 수호한다고 한다.
14)
범어로는 Utpalavarṇā.
15)
범어로는 Pūrāna. 육사 외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견(空見)에 집착했다고 한다.
16)
범어로는 Kaśmīr. 현재 북인도의 까슈미르 지역을 말한다.
17)
의ㆍ식ㆍ주의 셋을 말한다.
18)
인왕(仁王)이라고도 한다.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야차. 28부중 가운데 하나. 인도에서는 나형, 중앙아시아 동부에서는 무장을 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으며, 진나라 말로는 절문 좌우에 안치되어 사원을 지키는 수문존(守門尊)이 되고 있다. 이 금강역사를 안치하는 문을 ‘인왕문(仁王門)’이라 부른다.
19)
범어로는 Vāsu.
20)
범어로는 Kumuda. ‘지희화(地喜花)’라 의역한다. 혹은 ‘아직 개화되지 않은 연꽃’을 의미하기도 한다.
21)
범어로는 caṇḍala.
22)
범어로는 kṣānti.
23)
범어로는 Kauśam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