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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29권
9. 파집아품(破執我品) ①
이것(즉 불타정법)을 벗어나 다른 가르침에 의지한다 한들 어찌 해탈이 없다고 할 것인가?63)
이치상 필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허망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미혹되고 뇌란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정법 이외에 온갖 이들이 주장하는 아(我)는,
바로 온(蘊)의 상속상에 일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온을 떠난 아[離蘊我]’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곧 ‘아’에 대해 집착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가 생겨나고, 3유(有)를 윤회하여 결코 해탈할 수 없는 것이다.64)
어떠한 논거로써 온갖 ‘아’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온의 상속을 가리키는 것일 뿐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안 것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온을 떠나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는 진실로 현량(現量, 직접지각)이나 비량(比量,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 자체가 그 밖의 다른 어떤 법이 존재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실체[實物]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장애하는 조건[障緣]이 없을 경우 6경(境)이나 의근처럼 마땅히 현량에 의해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65) 혹은 5색근(色根)처럼 비량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5색근이 비량에 의해 획득된다고 하는 말은 세간에서 현견(現見)되는 것과 같다.
즉 비록 온갖 연(緣)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별도의 연이 결여될 경우 결과는 생겨나는 일이 없지만 결여되지 않았을 경우 바로 생겨나니, 마치 종자가 씨앗을 낳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견(見)’에 있어서도 역시 비록 현재찰나의 대상과 작의(作意) 등의 연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모든 장님과 귀머거리, 그렇지 않은 정상인[不盲聾]에게 그러한 등등의 인식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별도의 연이 결여된 것인가, 결여되지 않은 것인가에 따른 것임을 결정코 알아야 한다.
여기서 ‘별도의 연’이란 바로 안(眼) 등의 근으로, 이 같은 사실을 일컬어 ‘색근은 비량에 의해 인식된다’고 말한 것이다.66)
곧 온을 떠나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는 두 가지 인식방법[量]에 의해 결코 인식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진실의 자아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부(犢子部)에서는,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가 존재하니, 그것 자체는 온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것을 실유(實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가유(假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논주 세친)
실유와 가유의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독자부)
색이나 소리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바로 실유의 상이며, 젖이나 낙(酪)처럼 단지 적취물로서 존재하는 것은 가유의 상이다.
(세친)
실유로 간주하거나 가유로 간주할 경우, 거기에는 각기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독자부)
만약 보특가라 자체가 바로 실유라고 한다면 마땅히 온과는 달라야 할 것이니, 각각의 개별적인 온처럼 그 자성이 온과는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필시 마땅히 원인을 갖어야 할 것이며, 혹은 마땅히 무위(無爲)여야 할 것으로, 이는 바로 외도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다.67)
또한 마땅히 그 작용도 없어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무슨 이익이 있어] 실유의 보특가라를 주장할 것인가?68)
그러나 만약 보특가라 자체가 가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설하는 바와 동일하다.
(세친)
우리가 설정한 보특가라는 그대가 따지고 있는 실유나 가유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현재세에 포섭되는 내적인 유집수(有執受)의 제온(諸蘊)에 근거하여(skandhān upādāya) 보특가라를 설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일 뿐이다.69)
(독자부)
이 같은 기만의 말은 그 의미가 아직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여기서 무엇을 일컬어 ‘근거’라고 한 것인가?
만약 ‘제온을 취[攬]하여(skandhān gṛhītvā)’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근거’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미 제온을 취하여 보특가라가 성립한 것으로,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마땅히 가유가 되어야 할 것이니, 젖이나 낙(酪) 등이 색(色) 등을 취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70)
또한 만약 ‘제온을 원인[因]으로 하여(skandhān pratītya)’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근거’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미 제온을 원인으로 하여 보특가라가 설정되었으므로 보특가라 역시 이러한 온과 동일하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71)
(세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독자부)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된 것인가?
(세친)
이는 마치 세간에서 땔감에 근거하여 불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독자부)
어떻게 땔감에 근거하여 불을 설정한 것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세친)
이를테면 땔감을 떠나 불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땔감과 불은 다른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불이 땔감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각기 서로 개별적 실체라고 한다면) 땔감은 마땅히 뜨겁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불이 땔감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태워지는 것이 바로 능히 태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을 떠나 보특가라를 설정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보특가라는 온과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보특가라가] 온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만약 온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는 마땅히 단멸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독자부)
그대는 지금 여기서 바야흐로,
‘무엇을 불이라 하고 무엇을 땔감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마땅히 설하여, 나로 하여금
‘불은 땔감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의 뜻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친)
[불과 땔감에 대해]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만약 설하라고 한다면 마땅히 ‘태워지는 것[所燒]’은 바로 땔감이며, ‘능히 태우는 것[能燒]’은 바로 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독자부)
그렇다면 여기서 마땅히 다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무엇이 태워지는 것이고, 무엇이 능히 태우는 것이기에 ‘땔감’이라 이름하고 ‘불’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세친)
바야흐로 스스로 타지 않는 것으로서 태워지는 온갖 사물을 일컬어 ‘태워지는 땔감’이라 하고,
온갖 광명을 갖고 지극히 뜨거우며 [스스로] 타올라 능히 태우는 사물을 일컬어 ‘능히 태우는 불’이라고 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이것(불)은 그 같은 사물의 상속을 능히 태워 다음다음의 찰나를 그 전찰나와는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불)과 저것(땔감)은 비록 8사(事)를 본질로 하는 것일지라도,72) 땔감을 근거[緣]로 하였기 때문에 불은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마치 젖과 술을 근거로 하여 낙(酪)과 초(醋)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73)
그래서 세간에서는 다 같이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부)
만약 이러한 이치에 따를 경우 불은 땔감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니, 후찰나의 불과 전찰나의 땔감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대가 생각하는 보특가라가 마치 불이 땔감에 근거하는 것처럼 제온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이러한 보특가라는 온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 것으로, 그 본질은 제온과 다르며, [그럼에도] 무상성을 성취한다’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74)
또한 만약 타고 있는 나무 따위의 난촉(煖觸, 火의 자상)을 ‘불’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사물(8사 중 난촉을 제외한 7事)을 ‘땔감’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즉 불과 땔감이 동시에 생기한 것[俱生]이면서 마땅히 다른 존재[異體]가 되어야 할 것이니, 자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근거한다[依]’는 뜻에 대해서도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이 이미 동시에 생기한 것이라면 어떻게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을 설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이 때(동시 생기할 때)의 불은 땔감을 원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각기 자신의 원인으로부터 동시에 생기하였기 때문이다.75)
또한 이 때 불이라는 명칭은 땔감을 원인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니, 불이라는 명칭은 난촉(煖觸)을 원인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앞에서 설한 ‘불은 땔감을 근거로 한다’는 말이 동시 생기[俱生] 혹은 근거[依止]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온과 구생하거나 혹은 온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이는 이미 그 자체 온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땔감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 자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듯이,
제온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특가라 자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대는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독자부)은 여기서 스스로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불이 땔감과 다른 것이라면(각기 서로 개별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땔감은 마땅히 뜨겁지 않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그들은 마땅히 뜨거움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결정코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뜨거움이란 이를테면 난촉(煖觸)을 말한다’고 해석한다면, 땔감은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니,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76)
또한 만약 ‘[땔감의] 뜨거움이란 난상(煖相)과 화합한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면, [난(煖)과는] 다른 존재(즉 7事)도 역시 ‘뜨거움’이라는 명칭을 획득하여야 할 것으로,
실제적으로도 ‘불’이라는 명칭은 오로지 난촉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밖의 난상과 화합한 것도 모두 ‘뜨거움’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다.77)
그런즉 ‘땔감을 일컬어 뜨거운 것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땔감과 불이 다른 것일지라도 [그럴 경우 ‘땔감이 뜨겁지 않게 된다’는] 허물은 성취되지 않으니, 어떻게 앞서 언급한 그 같은 사실로써 힐난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만약 ‘나무 등이 두루 탈 때를 설하여 땔감이라 이름하고 또한 역시 불이라고도 이름한다’고 할 경우,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 때 ‘근거’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78)
곧 보특가라와 색 등의 온은 결정코 마땅히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 같은 사실을 능히 부정할 만한 어떠한 이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한,
“마치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을 설정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온을 근거로 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한다”고 하는 말은,
앞뒤로 따져 보아도 그 이치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독자부)이 만약 “보특가라는 온과 동일한 것이라고도, 다른 것이라고도 다 같이 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인정하는 3세(世)와 무위법과 아울러 불가설(不可說)의 다섯 종류의 이염(爾焰, jeya)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설할 수 없어야 할 것이니,
보특가라를 다섯 번째라거나 다섯 번째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79)
또한 그들이 시설(施設)한 보특가라에 대해 마땅히 다시 확실하게 진술해 보아야 할 것이니, 무엇에 의탁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온에 의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가설적(假說的)인 것이라는 뜻이 이미 성취된 셈이니, 시설된 보특가라는 보특가라에 의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같이 시설된 보특가라가 보특가라에 의탁하는 것(즉 자기 원인적 존재)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앞에서 제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인가?
이치상 다만 보특가라를 근거로 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오로지 온에 의탁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시설한 보특가라는 가설적인 것이다.]
또한 만약 온이 존재하기에 이것(보특가라)을 바로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앞에서 ‘이것은 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한다면,80)
이는 바로 온갖 색(色)은 안(眼) 등의 연(緣)이 있어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색 등도] 마땅히 ‘안 등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상 세친)
또한 바야흐로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보특가라는 6식(識) 중의 어떠한 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인가?
(세친)
6식에 의해 알려진다.
(독자부)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세친)
만약 어느 때 안식이 색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아니, 이 같은 사실을 설하여 ‘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하였다.81)
그렇더라도 [이 때의 보특가라를] 색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다.82)
나아가 어느 때 의식이 법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아니, 이 같은 사실을 설하여 ‘의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이 때의 보특가라를] 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이다.
(독자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들이 생각한 보특가라는 마땅히 젖 따위처럼 오로지 가설적으로 시설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안식이 온갖 색을 인식할 때, 만약 이로 인해 능히 젖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바로 설할 수 있을지라도 색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지는 신식이 온갖 촉을 인식할 때, 만약 이로 인해 능히 젖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신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바로 설할 수 있을지라도 촉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동일하다고 한다면] 젖 등은 네 가지(색ㆍ향ㆍ미ㆍ촉)를 성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혹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네 가지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83)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마치 세간에서 색 등(향ㆍ미ㆍ촉) 모두에 근거하여 젖 등을 시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제온 모두에 근거하여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일시 시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이러한 존재는 바로 가설적인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설한, ‘만약 어느 때 안식이 색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안다’고 하는 이 같은 말은 무슨 뜻인가?
온갖 색이 바로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근거[因]가 된다는 말인가, 색을 요별할 때 보특가라 역시 요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온갖 색은 바로 이러한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근거가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색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설한다면,
이는 곧 온갖 색은 안(眼)과 밝음[明]과 작의(作意) 등의 조건[緣]을 요별의 근거로 삼기 때문에 마땅히 색이 안 등과 다른 것이라고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84)
그러나 만약 ‘색을 요별할 때 이것(보특가라)도 역시 요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색을 능히 요별하는 것(즉 안식)이 바로 이것도 능히 요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능히 요별하는 별도의 [안식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색을 능히 요별하는 것이 바로 이것도 능히 요별한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자아 자체가 바로 색이라고 하거나, 혹은 오로지 색에 대해서만 이것을 일시 설정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혹은 마땅히 ‘이러이러한 것은 바로 색이고 이러이러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자아이다’와 같은 분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니,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색이 존재한다’거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곧 존재성[有性]은 바로 분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85)
나아가 만약 ‘이것을 능히 요별하는 별도의 [안식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요별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이는 마땅히 색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니,86)
마치 노란색이 푸른색과 다르고 전찰나의 법과 후찰나의 법이 다른 것과 같다.87)
나아가 법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이 따져 힐난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같은 힐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테면 이것(보특가라)과 색은 결정코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설할 수 없으며,
능히 요별하는 두 가지 종류의 식을 서로 비교해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면,88)
이 때 ‘능히 요별하는 식’은 마땅히 유위에 포섭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89)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바로 [오로지 자아만이 불가설이라는] 자신의 종의를 허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상 세친)
또한 만약 ‘색(色)이라고도, 비색(非色)이라고도 설할 수 없는 진실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색(色) 내지 식(識)에는 모두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90)
또한 그들(독자부)은 보특가라는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이미 인정하였는데,
이와 같은 안식은 색경(色境)과 이 같은 보특가라, 그리고 두 가지 모두 가운데 무엇을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색을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안식이 능히 보특가라를 요별한다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은 성처(聲處) 등과 마찬가지로 안식의 소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식이 이러한 경계(색)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났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경계를 소연연(所緣緣)으로 삼았을 뿐 보특가라는 안식의 소연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앞에서] 안식의 소연이 될 수 있다(‘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설한 것인가?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보특가라는 결정코 안식에 의해 요별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안식이 이 같은 보특가라 혹은 두 가지 모두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난다고 한다면 경설에 위배될 것이니,
계경 중에서는,
“식이 일어나는 것은 두 가지 연에 의한다”고 판별하고 있기 때문이다.91)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안근을 인(因)으로 하고 색경을 연(緣)으로 삼아 능히 안식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존재하는 모든 안식은 다 안과 색을 연으로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92)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안식의 소연이 된다고 한다면) 보특가라는 마땅히 무상한 것이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온갖 인(因)과 온갖 연(緣)으로서 능히 식(識)을 낳는 것은 모두 다 무상한 존재이다”고 하였다.93)
만약 그들(독자부)이 마침내 ‘보특가라는 식의 소연이 아니다’고 한다면,
[자아는] 마땅히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 존재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자신의 종의를 허무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만약 6식에 의해 인식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를테면 색과 같은 것으로 소리 등과는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며,
이식에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를테면 소리와 같은 것으로 색 등과는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 밖의 식에 인식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아를] 설정하여 6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경설에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근의 행처(行處)와 경계가 각기 다른 것임을 범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각각의 근은 오로지 자신이 작용하는 처소[所行處]와 자신의 경계만을 수용할 뿐 다른 근으로서 다른 근의 행처와 다른 근의 경계를 역시 능히 수용하는 일은 없다.
여기서 5근이란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을 말한다.
그렇지만 의근의 경우만은 5근의 행처와 그 경계 대상도 함께 수용하니, 그것(5근)들은 의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94)
혹은 보특가라가 바로 5근의 경계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바로 5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자신의] 종의에 어긋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 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근(意根)의 경계도 역시 마땅히 [다른 근의 경계와] 달라야 할 것이니,
『육생유계경(六生喩契經)』 중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은 6근의 행처와 경계에는 각각의 차별이 있어 각기 다른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처소와 자신의 경계만을 즐거이 추구[樂求]하는 것이다.”95)
(독자부)
이 경에서는 안(眼) 등의 6근을 설한 것이 아니니, 안 등의 5근과 그것에 의해 생겨난 식에는 낙(樂)과 견(見) 따위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96)
즉 여기서는 다만 안 등의 뛰어난 세력에 의해 인기된 의식(意識)을 설하여 안 등의 근이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다.
즉 단독으로 작용[獨行]하는 의근의 뛰어난 세력에 의해 인기된 의식은 안 등의 5근이 작용하는 경계를 능히 즐거이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의 뜻에는 앞서 언급한 사실과 위배되는 과실은 없다.
또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나는 지금 그대들을 위하여 통달되는 것[所達]과 알려지는 것[所知]에 대한 법문을 모두 연설하리라.97)
그 본질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안색(眼色)과 안식(眼識)과 안촉(眼觸)과, 안촉을 연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수(受)로서, 그것은 혹은 낙(樂)이고 혹은 고(苦)이며, 혹은 불고불락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의촉(意觸)을 연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수로서, 그것은 혹은 낙이고 혹은 고이며, 혹은 불고불락이다.
이것을 일컬어 일체의 통달되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같은 경문에 의하여 일체의 통달되는 법과 알려지는 법은 오로지 그 같은 법만이 있는 것으로 결택 판단되니, 여기에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특가라는 역시 또한 알려지는 것[所識]도 아니니, 혜(慧)와 식(識)의 대상은 반드시 동일하기 때문이다.
‘안근이 보특가라를 본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은,
안근은 이것(색)이 소유한 상을 보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나 아닌 것[非我, 즉 이것(색)이 소유한 상]을 보고서도 ‘나’를 보았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악견의 깊은 구덩이에 거꾸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도 경 중에서 스스로 이 같은 뜻을 결택하여 ‘오로지 제온에 대해 보특가라를 설할 뿐이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인계경(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안근과 색경을 연으로 하여 안식을 낳으며, 삼사(三事)의 화합인 촉은 수(受)ㆍ상(想)ㆍ사(思)와 함께 일어난다.
여기서 뒤의 네 가지를 무색(無色)의 온이라 하고,
처음의 안근과 색을 일컬어 색온이라 하니,
오로지 이러한 근거[量]에 의해서만 인간[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존재(제온)에 대해 각기 뜻의 차별에 따라 일시 명상(名想)을 설정하니,
혹 어떤 경우 유정(有情)이라 하기도 하고,
불열(不悅)ㆍ의생(意生)ㆍ유동(儒童)ㆍ양자(養者)ㆍ명자(命者)ㆍ생자(生者)ㆍ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역시 스스로 일컬어 ‘내 눈이 색을 본다’고 말하고,
또한 다시 세속(世俗)에 따라 이 구수(具壽)는 이름이 이와 같고, 종족이 이와 같고, 성류(性類)가 이와 같고,
먹고 마시는 것이 이와 같고, 받아 즐기는 것이 이와 같고, 받아 괴로워하는 것이 이와 같고,
목숨의 길이가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오래 머물며, 이와 같이 목숨이 끝났다[壽際]고 설하니,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만 명상(名想, 개념)일 뿐이며, 이것은 오로지 자칭(自稱)일 뿐이며, 이것은 다만 세속에 따라 일시 설정된 존재[施設有]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일체의 존재는 무상하고 유위이며, 온갖 연[衆緣]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서 사(思)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98)
즉 세존께서는 항상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할 것을 가르쳤는데, 이 경은 요의이니, 마땅히 달리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박가범께서 범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일체의 존재[有]는 오로지 12처(處)뿐이라고 설한다”고 하였다.99)
만약 수취취(數取趣, 즉 보특가라)가 이러한 12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라면 존재하지 않는다[無體]는 이치가 성립할 것이며,
만약 이러한 12처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불가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부파(독자부)에서 외워 전승하는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존재하는 모든 안근(眼根)과 존재하는 모든 색경(色境)……(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에 대해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모두 일체(一切)로 시설하였으니,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법[自體法]을 일체로 건립하였다”고 하였다.100)
즉 여기(12처)에 보특가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것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빈비사라계경(頻毘娑羅契經)』에서도 역시 설하기를,
“우매하며 [진리를] 들은 적이 없는 모든 이생은 가명(假名)에 수축(隨逐, 집착)하여 그것을 아(我)라고 헤아리지만, 여기에는 아도 아소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체 중고(衆苦)의 법체만이 존재하여 미래[將]ㆍ현재[正]ㆍ과거[已]에 생겨날 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101)
또한 세라(世羅, Śilā)라고 이름하는 아라한의 필추니(苾芻尼)가 마왕을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 악견취(惡見趣)에 떨어져
헛된 행취(行趣, 즉 유위행) 중에
그릇되이 유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니,
지자(智者)는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이는 마치 여러 부품을 취하여
수레라고 일시 개념[假想] 짓는 것처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제온을 취하여
세속(즉 가명)으로 유정이라 한 것임을.102)
또한 세존께서는 『잡아급마(雜阿笈摩)』 중에서 바라문인 바타리(婆柁梨, Bādari)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바타리여! 잘 들어야 할 것이니
능히 온갖 번뇌[結]를 푸는 법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에 의지하여 염오가 있고
역시 마음에 의지하여 청정이 있을 따름이다.
아(我)라고 하는 것은 실로 무아성으로
전도로 인해 존재한다고 집착하지만
실로 유정도 없고 ‘아’도 없으며,
오로지 존재의 원인인 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테면 열두 가지 존재의 갈래[有支]에
포섭되는 온ㆍ처ㆍ계만이 있을 뿐으로,
이 같은 일체의 존재에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잘 생각해야 하리라.
내입처(內入處)가 이미 공(空)하다고 관찰하였고
외입처(外入處)의 공도 역시 그렇게 관찰하였으니,
이같이 능히 [일체를] 공으로 관찰한 이는
역시 또한 어떠한 것(보특가라)도 인식하지 않으리.
또한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我)를 주장할 경우 다섯 가지 종류의 과실을 범하게 되니,
이를테면 아견(我見)과 유정견(有情見)을 일으켜 악견취(惡見趣)에 떨어지게 되며,
온갖 외도와 동일하게 되며,
[열반의 올바른] 길을 벗어나 가게 되며,
마음이 공성(空性, 즉 5온무아) 중에 깨달아 들지 못하여 능히 청정한 믿음을 낳을 수 없고 능히 안주할 수 없어 해탈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며,
그에게 있어 성법(聖法)은 능히 청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상 세친)
이것(앞의 경증)들은 모두 올바른 근거[量]가 아니다.
(독자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세친)
우리 부파에서는 일찍이 그것을 외워 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부)
그대 종의에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근거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대들 부파의 주장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부처의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그대들] 부파의 주장이 바로 올바른 근거라고 한다면 부처는 그대들의 스승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대들은 석자(釋子)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올바른 근거가] 부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는 모두 부처의 말씀인데, 어떻게 올바른 근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세친)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부처의 참된 말씀이 아니다”고 하였다.103)
(독자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세친)
우리 부파에서 외워 전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부)
이는 지극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세친)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가?
(독자부)
이와 같은 경문은 모든 부파에서 모두 외워 전하는 것으로, [연기의] 법성(法性)이나 그 밖의 다른 경에도 위배되지 않거늘 감히 이에 대해 빈번히,
‘우리가 외워 전승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의 참된 말씀이 아니다’고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흉악하고도 미치광이가 그러할 뿐이기 때문에 지극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 부파(독자부)에도 어찌 ‘일체법은 모두 비아성(非我性)이다’고 말하는 이러한 경이 없을 것인가?
만약 그들이 ‘보특가라는 그 소의가 되는 법(즉 5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법(5온)은 모두 비아이다’는 의미로 말할 경우,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의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식(識)은 두 가지 연(緣)에 의해 낳아진다’고 경에서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104)
또한 그 밖의 다른 경과는 어떻게 회통하여 해석할 것인가?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비아를 ‘아’라고 헤아리는 것, 여기에는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전도(顚倒)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105)
(이상 세친)
‘아’를 헤아려 전도를 성취하는 것은 비아에 대해 설한 것으로 ‘아’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닌데,106) 어찌 번거롭게 회통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독자부)
[그렇다면] 비아란 무엇인가?
(세친)
이를테면 온ㆍ처ㆍ계를 말한다.
(독자부)
이는 바로 앞에서 ‘보특가라는 색 등의 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설한 것에 위배되지 않는가?
또한 또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일체의 사문 바라문 등으로서 ‘아’ 등과 그에 따른 관견(觀見)을 주장하는 모든 이는, 그러한 일체의 주장을 오로지 5취온상에서 일으킨다”고 하였다.107)
따라서 ‘아’를 근거로 하여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며, 다만 비아의 법을 그릇되이 분별하여 ‘아’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또 다른 경에서 말하기를,
“여러 숙주(宿住)에 대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과 미래의 기억, 그러한 일체의 모든 기억은 오로지 5취온상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108)
따라서 결정코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이 경에서는 다시,
“나는 과거세에 이와 같은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109)
(독자부)
이 경은 숙주의 한 상속 중에 여러 일들이 있었던 것을 능히 기억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만약 실유의 보특가라가 존재하여 과거 생에 능히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유신견(有身見)을 일으키는 과실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혹은 마땅히 ‘이러한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부정하여야 할 것이다.110)
그렇기 때문에 이 경은 총상(總相)의 가아(假我)에 근거하여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고 말한 것이니,
그것은 마치 [곡물]더미[聚]와도 같고, [물의] 흐름과도 같다.111)
(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일체지(一切智)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심ㆍ심소로써는 찰나찰나에 변이 생멸하는 일체법을 능히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아’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일체법을 능히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다.112)
(독자부)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니, 마음이 소멸할 때 이것은 소멸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그대들이 인정하는 종의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113)
우리들은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 대해 능히 단박에 두루 알기 때문에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이름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속신에 [일체지를] 감당할 만한 공능[堪能]을 가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부처라는 명칭을 획득한 이는 제온의 상속에 이와 같은 [일체지를] 감당할 만한 뛰어난 공능(즉 一切智德)을 성취하여 문득 작의(作意)할 때 알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전도됨이 없는 지(智)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체지’라고 이름한 것으로, 한 찰나[一念]에 능히 단박에 [일체의 경계를] 두루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이와 같은 게송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불이 일체를 삼켜 버리듯이
상속신에 감당할 공능이 있기 때문이니,
이처럼 일체지(一切智)라고 함은
두루 단박에 알기 때문이 아니다.114)
상속신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아는 것이라고 설할 뿐, 자아가 두루 아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독자부)
불세존께서 3세에 존재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세친)
어디서 설하고 있는 것인가?
(독자부)
이를테면 어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중생의 근심을 멸하시네.115)
그대의 종의에서는 오로지 온(蘊)만이 3세에 존재하며 수취취(數取趣, 보특가라)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자부) [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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