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경록 제1권
1. 표종장
[아래에서 다시 널리 열며 풀이하는 까닭]
[문] 위에서 드러낸 것으로 이미 대의(大意)를 알았거늘, 무엇 때문에 아래에서 다시 널리 열며 풀이하는가?
[답] 상근(上根)과 영리한 지혜는 전생에 익혔는지라 태어나면서부터 알아서 겨우 제목의 종(宗)이라는 한 글자만 보아도 벌써 부처의 지혜 바다 안에 온전히 들면서 섬세한 의심까지 영원히 끊고 단박에 큰 뜻을 밝히므로 곧 한 마디 말이 거의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그를 포섭하여 남는 것이 없다.
만약 바로 1백 권의 끝까지 보고 항하 모래만큼 많은 뜻에 이르면 용궁(龍宮)의 보장(寶藏)과 축령(鷲嶺)의 금문(金文)도 설명은 다르나 다른 길이 아니다.
그를 펴면 법계(法界)에 두루 하며 앞은 생략되고 뒤는 자세하나 이는 오직 한 마음일 뿐이다.
근본은 말고[本卷] 끝을 펴도[末舒] 모두가 동일한 경지요, 끝내 다른 뜻이 없고 막힘이 있어도 앞의 종(宗)이다.
도무지 뜻이 미혹해서 망령되이 취사(取捨)를 일으켜 종이와 먹과 문자를 보고 책이 많은 것만을 싫어하며 고요하고 묵묵히 말 없는 것에 집착하여 요약된 것만을 기뻐한다면, 이는 모두가 마음이 미혹해서 대경을 따르며 깨달음을 저버리고 티끌에 합하는 것이다.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의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하나와 많음[一多]이 일어나는 곳을 통달하지 못하여 치우치게 국집된 소견을 내면서 다문(多門)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소승(小乘)이 법공(法空)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파순(波旬)이 뭇 선행을 조심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을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든 모양을 따라 굴리면서 있음과 없음[有無]에 떨어지는 것이니,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대열반의 한 글자와 한 글귀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도 글자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글귀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듣는다는 모양을 짓지 않고 부처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설명한다는 모양을 짓지 않으면, 이와 같이 되는 이치를 모양 없음의 모양[無相相]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해석하건대 만약 문자에 나아가서[卽]모양 없음[無相]이라 하면 이는 상견(常見)이요, 만약 문자를 여의고[離] 모양 없음이라 하면 이는 단견(斷見)이다.
또 만약 모양 있음의 모양[有相相]에 집착하면 이것도 상견이요, 만약 모양 없음의 모양에 집착하면 이것도 단견이다.
다만, 즉(卽)ㆍ이(離)ㆍ단(斷)ㆍ상(常)의 사구백비(四句百非)의 온갖 소견들이 없어져야만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
종종경(宗鏡)에 드는 때가 친히 나타나게 되면, 무슨 문언(文言)과 식지(識智)로 설명하고 기술할 수가 있겠는가?
그 까닭에 선덕이 말하였다.
“만약 경을 찾아 성품을 안다면 진여(眞如)를 들을 필요 없거니와
만약 법을 계족산(鷄足山)에서 찾는다면 산간의 가섭(迦葉)에게 물으라.
대사(大士)는 옷을 가지고 이 산에 있거니와
무정(無情)은 첫째 되기를 구하지 않는다.
이러하다면 이는 곧 어찌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마음을 운용하여 문자와 글귀 뜻의 이해를 짓겠는가?
만약 종(宗)에 밝고 성(性)에 통달된 이면 비록 널리 헤치고 찾는다손 치더라도 오히려 한 글자의 모양도 보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언어의 이해를 짓지 않으리라.
마음이 미혹해서 사물[物]을 세우는 이만이 종이와 먹이라는 소견을 낼 것이다.
때문에 『신심명(信心銘)』에서는,
“6진(塵)은 나쁘지 않아 도리어 정각(正覺)과 같나니,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無爲]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가 속박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6진이 모두가 이는 참 종[眞宗]이요, 만 가지 법이 묘한 진리[妙理] 아님이 없다. 어찌하여 관견(管見)에게 국집하여 큰 뜻에 미혹할 것이며, 어찌 모든 부처님의 광대한 경계와 보살의 작용(作用)의 문을 알겠는가?
그 까닭에 큰 바다의 용왕이 십천(十千) 가지의 질문[問]을 두었고, 석가문불이 8만 가지의 고달픈 인생의 문을 열었으며, 보혜 보살(普慧菩薩)이 2백 가지의 의심[疑]을 말하였고, 보현 대사(普賢大士)가 2천 가지의 요설변(樂設辯)으로 대답했다.
『화엄경』의 보안법문(普眼法門)에서,
“가령 어떤 사람이 큰 바다 만큼의 먹과 수미산 더미의 붓으로써 이 보안 법문의 1품(品) 중에서 1문(門)을, 1문 중에서 1법(法)을, 1법 중에서 1의(義)를, 1의 중에서 1구(句)를 베껴 쓰려 하여도 그 조그마한 부분조차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달아 아는 바의 온갖 법은 마치 대지(大地)로 인하여 초목들을 나게 하는 것과 같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펴 말한 바의 것은 마치 손 안의 풀 잎사귀와 같다’고 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만 이미 말한 법의 가르침은 용궁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용수(龍樹) 보살이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1백 낙차의 분량을 잠깐 보았는데 서천(西天)에 있는 것은 그것의 백 분의 1도 못되고 동쪽 땅에서 번역된 것은 실로 말할 거리조차 못되거늘, 하물며 아직 말씀하지 못한 바의 법이겠는가?
이야말로 그지없는 미묘한 뜻이라 얕은 지혜로써는 알 바가 아니다. 성기(性起) 법문을 어떻게 이해가 하열한 이로서 볼 수 있겠는가?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헤아리며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넓고 푸른 바다의 깊음을 알겠는가?
마치 사자의 큰 울음을 너구리로서는 낼 수 없는 것과 같고,
향상(香象)이 졌던 짐을 나귀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비사문(毘沙門)의 보물이 가난한 이와는 같을 수 없는 것과 같고,
금시조(金翅鳥)가 나는 것을 까마귀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직 망정에만 의지해서 소견을 일으키며 사물을 쫓으면서 뜻이 옮겨질 뿐이다.
혹은 존재[有]를 말하면서 공(空)을 관계하지도 아니하고, 혹은 공을 말하면서 존재를 겸하지도 아니한다.
혹은 간략함[略]을 말하면서 많음 밖의 하나가 되기도 하고, 혹은 자세함[廣]을 세우면서 하나 밖의 많은 것이 되기도 한다.
혹은 침묵을 여의면서 말에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말을 여의면서 침묵을 구하기도 한다.
혹은 사(事) 밖의 이(理)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이 밖의 사에 집착하기도 한다.
자못 자재한 이 원종(圓宗)을 깨치지 못하면, 자세함은 펴도 많은 것이 아니어서 이는 바로 하나 안의 많은 것이요, 간략함을 드러내도 하나가 아니어서 이는 바로 많은 것 안의 하나이다.
공을 말하되 아주 없지[斷] 않아서 이는 곧 존재의 공이요, 존재를 논하되 항상하지[常] 않아서 이는 곧 공의 존재이다.
혹은 설명이 있되 역시 이는 침묵 속의 설명이 되기도 하고, 혹은 설명이 없되 역시 이는 설명 속의 침묵이 되기도 한다. 혹은 이사(理事)는 상즉(相卽)하기도 한다.
또한 이(理)는 바로 사(事)를 이루는 이(理)요, 이 사(事)는 바로 이(理)를 드러내는 사(事)가 되기도 한다.
혹은 이(理)와 왜냐 하면 일여(一如)로써 이여(二如)가 없는 참된 성품이 언제나 어울리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은 사(事)와 사(事)가 상주했다는 것도 옳다. 왜냐 하면 이는 온전한 이(理)의 사(事)로서 하나하나가 걸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혹은 이사(理事)가 다 아닌 것은, 곧 또한 온전한 사(事)의 이(理)로되 사(事)의 소의(所依)가 아니고 능의(能依)가 아니어서 진제(眞諦)가 숨지 않았기 때문이요,
온전한 이(理)의 사(事)로되 이(理)의 능의가 아니고 소의가 아니어서 속제(俗諦)를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하다면 존재하고 없어짐이 하나의 즈음[際]이요, 숨음과 드러남이 같은 때이다.
마치 보안(普眼)의 법문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모두 이는 진리 안의 이치요,
대천(大千)의 경권(經卷)과 같아서 마음 밖의 글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때문에 경에 말씀하기를,
“하나의 법이 능히 한량없는 이치를 낸다”고 하셨다.
이는 성문과 연각으로서 알 바가 아니요, 단공(但空)의 조화를 저버리는 설명과 편고(偏枯)의 결정된 소견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제 이 그지없는 미묘한 뜻으로 하나의 법을 드러내서 권속들이 따라 생기고 원만한 성종(性宗)으로 하나의 문을 들어서 모든 문(門)이 널리 모인다. 순일하지도 않고 잡다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은 아니다.
마치 다섯 가지 맛으로 그 국을 조화시키고 여러 가지 채색으로 그 수(繡)를 이루며 뭇 보물로 그 광을 이루고 백 가지 약으로 그 환(丸)을 만드는 것과 같다.
가와 겉이 막힘없이 통하고 뜻과 맛이 두루 갖추며, 은밀함을 찾고 미묘함을 들춰내어 종경(宗鐘) 안의 것을 다하며,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뒤섞여 녹고 원인과 결과가 걸림이 없으며, 인아(人我)와 법아(法我)가 둘이 없고 처음과 뒤가 같은 때이다.
한 문을 들면 모두가 그지없는 법계(法界)를 뚜렷이 껴잡아서 안도 아니요 바깥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그를 펴면 거쳐 들어감이 겹겹이요, 그를 말면 참 문이 고요하고 고요하다.
『화엄경』에서는,
“사자좌(師子座)의 장엄구(莊嚴具) 안에서 각각 한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의 몸이 구름같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의보ㆍ정보ㆍ인아ㆍ법아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눈썹 사이에서는 승음등불(勝音等佛)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원인ㆍ결과ㆍ처음ㆍ뒤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내지 세계 국토의 작은 티끌에도 각각 그지없는 지혜와 덕이 갖추어져 있고, 털구멍의 몸 부분에도 낱낱이 광대한 법문을 껴잡아 들인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기이하고 생각하기 어려운가?
이것은 한 마음이 융합하면 곧 본래 그런 것이다.
요점을 들어 말하면 온갖 그지없는 차별된 부처 일이 모두가 모양 없음의 참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서 존재할 뿐이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부처는 매우 깊은 참 법성(法性)에 머무르고
적멸(寂滅)하고 모양 없어 허공과 같되
제일의 진실 이치 안에서
갖가지 행할 바의 일을 나투어 보인다.
하는 일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니
다 법성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다.
모양과 모양 없음이 차별 없나니
구경(究竟)에 들어야 모두 모양이 없다.”
또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게송으로 말했다.
“곧 모든 삼마지(三摩地)는
대사(大師)께서 말씀하되 마음이라 하셨다.
마음의 채색으로 그리기 때문이니
마치 짓는 바의 일들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범인과 성인이 지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는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이 한 생각의 마음이 찰나(刹那) 동안 일어나는 때에 곧 3성(性)과 3무성(無性)의 여섯 가지 이치[六義]가 갖추어진다.
한 생각의 마음은 바로 연기(緣起)의 법이요 바로 의타기(依他起)이며,
뜻에 실체가 있다고 헤아리면 곧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바탕이며,
본래 공하고 고요하면 곧 원성(圓成)이다.
곧 3성에 의하여 3무성을 설명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이치가 갖추어진다.
만약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나면 이 여섯 가지 이치가 갖추어지며 곧 온갖 법이 갖추어진다.
온갖 진제ㆍ속제며 만 가지 법은 3성과 3무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법성론(法性論)』에서 이르기를,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성(性)이 아니다.
일어남에도 일어남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비록 일어난다 하더라도 항상 하지는[常] 아니하다.
사라짐에도 사라짐의 성품이 없으므로 비록 사라진다 하더라도 아주 없지는[斷] 아니하다.
만약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네 가지 소견[四見]의 그물에 빠지게 된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상(相)을 찾으면서 성(性)을 추구하면 모든 법의 무성(無性)을 보며, 성을 찾으면서 상을 추구하면 모든 법의 무상(無相)을 본다.
그러므로 성과 상을 서로 추구하면 모두가 다 성품이 없거니와,
만약 성품이 있다고 고집하면 네 가지 소견의 사면 숲에 떨어진다.
만약 성품이 공한 것을 환히 알면 한 마음의 바른 길에 돌아간다”고 했다.
때문에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스스로가 깊이 자성(自性)이 없는 진실한 법에 들어가며,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자성이 없는 진실한 법에 들게 하면 마음이 안온하게 된다”고 하셨다.
이로써 미묘하게 통달하여야 비로소 이 종(宗)에 들며, 곧 물건마다[物物] 진리에 명합하고 말마다[言言] 뜻에 계합한다.
만약 아직 친히 살피지 못하고 뚜렷한 기연(機緣)이 발생되지 않았다면 말하게 되어도 잃게 된다. 어찌 4구(句)로써 취하여 6정(情)으로 알 바이겠는가?
다만 조사의 가르침과 아울러 정혜(定慧)의 쌍조(雙照)를 베풀며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허물이 없을 뿐이다.
자기의 앎을 굳게 고집하여 믿지 않음이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장애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다른 이가 배우는 길을 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열 가지의 물음으로 기강(紀綱)을 정하겠다.
환히 성(性)을 깨달아 봄이 마치 낮에 빛깔을 본 것 같고 문수(文殊) 등과 같을 수 있는가?
인연을 만나 경계를 대하면서 빛을 보고 소리를 듣고 발을 들고 발을 내리고 눈을 뜨고 눈을 감되 모두가 종(宗)을 밝히고 도(道)와 상응할 수 있는가?
일대시교(一代時敎)와 위로부터의 조사의 말과 글귀를 열람하되, 깊은 것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진실로 알고 의심이 없을 수 있는가?
차별된 어려운 물음과 갖가지 힐난으로 인하여 네 가지 변재[四辯]를 갖추어서 모두 다른 이의 의심을 결단할 수 있는가?
언제 어디서나 지혜로 비추어서 걸림이 없고 생각생각마다 원만하게 통하여, 하나의 법도 장애함을 보지 않고 아직 한 찰나 동안의 잠깐도 사이가 끊어진 일이 없게 할 수 있는가?
온갖 거역함과 따라줌[逆順]ㆍ좋음과 미움[好惡]의 경계가 앞에 나타날 적에 간단없이 모두 알아서 깨뜨릴 수 있는가?
백 가지 법의 밝은 문과 마음 경계 안에서, 낱낱이 미세한 체성(體性)과 근원의 일어나는 곳을 보고 생사와 근진(根塵)에게 어지럽힘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네 가지 거동 안의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서 흠앙하여 받들고 공경히 대하며, 옷 입고 밥 먹고 잡고 짓고 실지로 베풀어 행하는 때에 낱낱이 가려서 진실할 수 있는가?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이 안 계시고 중생이 있고 중생이 없고 혹은 칭찬하기도 하고 헐뜯기도 하고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설명을 듣고 한 마음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가?
차별된 지혜를 듣고서 모두 성상(性相)을 밝게 통달하고 이사(理事)를 함께 회통하여 걸림이 없으면서 하나의 법도 그 근원을 비추어 보지 아니함이 없을 수 있으며, 그리고 천 성인[千聖]이 세간에 출현할 것까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실로 이러할 공(功)을 얻지 못했다면, 잘못된 머리와 속임수의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가 만족한 줄 아는 뜻을 내어서는 안 된다.
바로 모름지기 지교(至敎)를 널리 헤치고 선지(先知)에게 널리 물어서 조사와 부처의 자성(自性)의 근원에 사무쳐서 배움이 끊어지고 의심이 없는 자리에 도달하여야 한다.
이 때라야 비로소 배움을 쉬고 유심(遊心)이 쉬게 되며, 혹은 스스로가 판단하여도 선관(禪觀)이 상응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를 위한다면 방편으로 열어 보이게 되리라.
설령 두루 법계(法界)에 참여하거나 널리 여러 경전을 궁구할 수 없다 하여도 종경(宗鏡) 안의 것을 자세히 보기만 하면 저절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야말로 모든 법의 요점[要]이요, 도에 나아가는 문이다.
마치 수절하는 어머니로써 그의 아들을 알고, 얻어진 근본으로써 그의 끝을 알며, 그물을 잡아당겨 그물의 코와 코를 모두 바르게 하고 옷깃을 끌어당기면 올과 올이 함께 따라 오는 것과 같다.
또 사자의 힘줄로 거문고 줄을 만들어 한 번 타면 온갖 다른 줄까지 모두 다 끊어지고 부서지는 것처럼 이 종경(宗鏡)의 힘 역시 그러하여 그를 들면 모든 무리가 빛을 잃고 그를 나타내면 모든 문이 자취를 감춘다.
이 하나의 법칙으로써 천 갈래 길을 부순다면 어찌 고달프게 관문과 나루를 건너며 따로 지름길을 내야 하겠는가?
그 까닭에 지공(志公)이 노래했다.
“6적(賊)으로 빛이 숨고 티끌에 섞인지라[和光同塵]
힘 없으면 크게 핑계하기 어렵네
안에서 알음[解] 내도 공이요 무상(無相)이라
대승(大乘)의 힘이라야 물리칠 수 있으리.”
오직 자세히 열람하다가 뜻을 얻는 때만이 이 글이 구경(究竟)이요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