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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물론 전세계의 켄도의 요람이었던 노마도조(野間道場) 가 지난 2007년 돌연 새 건물의 증축을 이유로 건물 자체를 허물어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한다고 발표를 했다.
당시 전세계의 검도인들은 이 소식을 처음에는 잘 믿기조차 못하는 분위기 였다.
일부 사이트에서는 모금운동까지 벌이며 이 문화유산인 건축물을 보존하자고 까지 했지만, 도쿄의 땅값도 땅값이거니와 코단샤 출판사의 결정으로 백지화 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파벌과 단체 등을 초월해 검도를 하는 모든 이에게 개방을 한 노마도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여기서는 앞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리고 이 곳 노마도조에 사범님이셨던 모치다 모리치 선생님과의 직접적인 인연으로, 그리고 역시 켄도 역사에 길이 남을 "성지聖地" 로써 노마도조를 소개하려 한다.
도쿄 분쿄구(文京区) 의 고코쿠지(護國寺) 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노마도조는 1925년에 코단샤 출판사의 설립자인 노마 세이지(野間 淸治) 가 설립했는데, 지난 2007년에 문을 닫게 되고 근처 사무실건물의 현대식 수련관으로 대체가 된다.
최초의 노마도조는 일본에서 가장 저명한 명성을 자랑하는 도장이었다. 노마도조는 이전에 다른 곳에 있던 도장을 에도시대(江戸時代 도쿠가와 지다이徳川時代 라고도 함. 1603-1868) 부터 있던 건물에 만든 것으로, 노마도조와 같은 도조의 형태로 21세기까지 남아 있던 도조는 단 하나도 없었으며 일본의 언론은 노마도조를 가리켜 '켄도 수련자들의 성지(聖地)' 라고 일컬어 왔다.
도장 내부는 노마도조만의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양쪽 벽면이 모두 창틀문으로 되어 있어서 문을 열면 바로 정원과 푸른 하늘이 보이고, 특유의 탄력이 있는 바룻바닥이 있다.
긴 마루바닥은 바로 두 명이 한 조로 일렬로 서서 수련을 하는 켄도 수련에 적합한 구조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니혼 케이자이 심분(日本経済新聞) 의 2006년 9월15일자 사설에, 전 코단샤 의장 하토리 토시유키는 코단샤 출판사는 회사 부지의 재개발의 일환으로 노마도조를 폐쇄하기로 했다고 발표한다.
하토리 의장은 노마도조의 "방향성의 어두운 색감의 괭택이 나는 나무" 는 바로 "저명한 검도가들의 피와 땀이 스며들어" 만들어 진 것이라고 먈하며 회사의 이러한 계획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한다. 건축가들과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몇몇 사회인사들이 노마도조를 보존하자고 또는 최소한 새 부지에 옮기자고 한다.
그렇지만 2007년 10월까지 코단샤는 20세기초에 지어진 귀족풍의 저택을 허물고 그 부지에 새 사무실용 건물을 짓는다. 새 도조는 이 건물 5층에 있다.
뒤늦게 노마도조의 회당을 보존하고 노마 세이지의 고향에 옮겨 놓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단지 툇마루부분만 옮겨 놓기로 합의가 됐다. 건물의 나머지 부분은 12월 초 이전에 모두 철거되었다.
노마도조는 단지 건축상의 가치는 차지하고서라도, 그곳에서 검도를 지도한 저명한 사범들로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모치다 모리치 선생이 그 중 한 분 이신데, "쇼와시대의 검성" 이라고 불리우시며 10단을 수여받으신 분.
노마도조는 코단샤 켄도부에서 사용하기도 했지만 아침 7시 부터의 수련은 도장이나 단체와는 상관없이 모든 검도인들에게 지난 수십년 동안 개방이 되었다.
코단샤는 천정의 채광창과 같은 옛 노마도조의 회당의 특징을 담은 새 도장에서도 아침수련은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다음은
코단샤 노마도조(講談社 野間道場) 의 홈페이지
제2차세계대전 전에 '도쿄의 4 대 도장' 이라 불리는 도장이 있었다.
바로 다카노 사사부로(高野 佐三郎) 의 오노하 잇토류(小野派一刀流)의 메이신칸(明心館)과 나카야마 하쿠도(中山 博道) 의 신토 무넨류(神道無念流)의 유신칸(有信館), 이시이 사부로의 코도기카이, 그리고 유명한 검도인이자 코단샤(講談社) 출판사 회장이자 창립자인 노마 세이지(野間 清治) 가 세운 노마도조(野間道場) 가 그것이다.
각 도장의 규모와 수준과 수련내용으로 볼 때 모두 '4대 도장'으로 불리울만큼 훌륭했으며, 많은 유명한 검도가들이 이들 도장에서 수련을 했다.
하지만 전전검도는 각 도장과 유파의 영향을 강하게 보존하고 있어서 다른 유파끼리의 수련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노마도장은 일본 전역의 검도인들이 함께 수련을 할 수 있도록 개방을 하였다.
- 하라조노 미투노리의 "노마도조 이야기" 중에서. 고단샤 출판.
고코쿠 진자(護國神寺)
노마도조에 있는 신사
고코쿠 진자(護國神寺) 는 원래 코단샤의 창립자 노마 세이지의 유명한 정원에 있는 폭포수 옆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노마의 저택과 넓은 정원은 1934년 당시 새로 지은 코단샤 본사의 뒤편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정원과 저택의 부지는 본래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 백작이며 전 법무부 장관이었던 야마다 아키요시의 소유였다고 합니다. 또한 기록상으론 부지 주인인 야마다는 당시 메이지 일황의 방문을 받는 영광을 얻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 결과로서 신토(神道) 의 신조로 그 지역은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30년 초에 신사(神寺) 를 짓는것이 건의되었습니다.
신사는 고코쿠 진자(護國神寺) 로 이름지었는데- 훨씬 더 오래 된 고코쿠지 절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34년 11월 3일에 신격화되고 메이지 진구(明治神宮) 에서 예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원을 포함한 노마 저택 주위의 대부분의 부지는 1960년대에 5번 고속도로 건설로 징발당했습니다. 그래서 신사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해서 현재의 위치인 노마도장 입구 옆에 있게 됩니다.
노마 쇼이치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문"
노마 사와코
코단샤 주식회사 회장 겸 CEO
코단샤 본사
1925년에 숲으로 뒤덮힌 오토와 언덕에 노마도조가 지어진 지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코단샤 직원들은 노마도조에서 아침저녁으로 수련도 하고 식사도 하고 목욕도 하고 나무 처마 밑에도 잠도 자기도 하면서 지난 수십년 동안 노마도조는 그들에게 '집' 이자 수련장의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숙사는 없지만, 현재 문화유산 건물로 등록이 되어있는 도장은 아직도 매일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마도조만의 역사와 분위기를 느끼고 도쿄 최고의 검사들과 게이코를 하기 위해 각지에서 방문객들이 방문합니다. 노마도조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그 특성과 일화들 대한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노마도조는 나의 할아버지이시자 열성적인 검사이셨던 노마 세이지가 설립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분의 자서전인 "와타시 노 한쇼(코단샤의 9가지 잡지)" 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도의 철학(무도武道) 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지요.
"부도의 수련의 핵심은 바로 평화에 대한 열망이다.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의 협동과 조화의 이념이다. 이 위대한 조화로움은 부武 안에 덕德 을 만들어 내고, 이러한 덕德 이 각 부분이 상호연관되어 일치하게 되어 '하나의 마음, 하나의 검' 으로 융합되어 모든 부분이 완성이 되어 결국은 웅대한 검( 또는 진리) 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 낸다.
켄도劍道 의 가르침은 단지 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켄도의 수련은 진리로 이끌고, 진리는 인간을 단련시킨다."
노마 세이지는 켄도를 탐구의 수단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부武' 의 덕德과 부武 가 사회에 주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설명하고 장려하며, 켄도의 연구와 수련을 통한 더욱 위대한 조화를 위한 탐구였지요.
할아버지는 윈칙론자이셨습니다. 여기에 다시 그 분이 책에 쓰셨던 말씀을 올립니다.
"부武 안의 덕德 은 바로 아그사-덴(슌주-사시덴) 의 교의에서 요구하듯이 칼집 안에 있는 검劍 이라 여긴다.
이 교의는: 폭력을 지양하고, 병역을 중단하고,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만족하며, 슌주-사시덴을 설교하고, 슌주-사시덴을 지지하라. 라고 가르친다."
이 교의에서 저는 할아버지이신 노마 세이지가 켄도수련을 통하여 조화와 화합을 이루시려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노마도조는 할아버지의 이러한 목표와 신념의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1930년대에도 해외에서 검사들이 노마도조를 방문하였고, 그 중 한 분으로 켄도에 관한 저서의 공동집필자이신 Gordon Warner 씨가 계신다.)
노마 세이지는 전쟁이 발발하려는 1938년에 돌아가셨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슬프지만 노마도조의 회원들이 전쟁에 참가하자 나의 아버지, 노마 쇼이치는 노마도조를 닫아버렸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얼마 안 있어 켄도가 수련 되긴 했지만, 노마 쇼이치는 1962년까지 코단샤 직원외의 외부인에게 노마도조 개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모치다 모리치 선생님(10단) 사토 유키치(9단) 선생님, 그리고 마쓰다 신스케(9단) 선생님의 지도하에 노마도조가 검도인들로 붐비는 집합지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노마도조의 회원이 400명을 넘었는데, 이는 바로 노마도조 도코카이와 코단샤 켄도부의 강함 때문이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영국과 체코 공화국, 독일, 말레이시아, 스위스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방문객들이 오십니다. 실제로 노마도조의 명성은 전세계의 무도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이 참으로 기쁩니다.
국적이 다른 사람들끼리 개인적으로 만나 함께 수련하고 우정과 함께 스포츠 정신을 나누다는 사실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이러한 관계와 우정은 한 번 맺어지면 더더욱 커지는 것이지요.
저희 아버지는 사업활동을 통해 일본과 다른 나라와의 문화교류의 관계를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외부의 세계를 일본에 가져와서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셨고, 또한 코단샤 출판사를 통해 일본을 세계에 소개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분의 좌우명은 바로 "세계를 행해 열려 있는 코단샤" 였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 노마 쇼이치의 신념이 그 분의 아버지, 저의 할아버지이신 노마 세이치의
"세계와의 원대한 조화" 라는 철학과 유사하다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노마도조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저는 검도인들을 진심으로 도장으로 초대를 하고, 맨처음 도조 설립 취지의 정신으로 수련을 합니다.
"켄도수련은 진리로 이끌고, 진리는 인간을 단련시킨다."
하토리 토시유키 범사
전일본학생 검도연맹 부회장. 명예 고문.
코단샤 주식회사.
켄도의 교훈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 켄도의 숙달은 진리로 이끌고 진리는 인간을 단련시킨다."
이 격언은 20세기 초기의 노마도조의 설립 당시부터 켄도수련의 근간이 되어 온 철학과 윤리입니다. 이 철학을 맨 처음 받아 들인것은 코단샤 출판사의 창립자 노마 세이지(野間 淸治) 입니다. 오늘날 그의 업적은 오타와의 아름다운 낡은 도장에서 울려 퍼지는 머리치기와 죽도끼리 부딪히는 매일의 수련 속에서 기리 기억될 것입니다.
노마 세이지(野間 淸治) 는 크게 성공한 출판업자로서 1909년에 첫 잡지를 발간했고, 1911년에 코단샤 출판사를 창립했습니다. 그로부터 노마라는 이름과 코단샤는 도쿄의 켄도와 그 뜻을 같이 했고, 사실상 일본의 켄도를 뜻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초창기부터 노마도조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이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일본에서는 아주 드문 일로써 원래 켄도는 도장간의 경젱이나 대립과 파벌과 당파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노마 세이지는 켄도의 보급과 장려에만 그 뜻을 두고 노마도조를 켄도를 수련하고자 하는 모든이에게 개방을 하였습니다.
상주사범 모치다 모리치 선생님이 오시고 나서는 노마도조의 명성과 위치는 더욱 확고히 되었습니다. 노마 가족의 켄도에 대한 공헌은 막대해서, 1934년에는 노마 세이지의 아들인 노마 히사시는 명성있는 대회인 텐란 지아이에서 우승을 하셨습니다.
몇 년 뒤인 1940년에는, 마쓰다 신스케 사범과 코단샤 직원이신 모치즈키 마사푸사씨가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각각의 조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모치즈키씨와 모리 토라오 그리고 저와 다른 검사는 칸토지역(도쿄) 에서 셀 수 없을 만큼 각종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강함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사실 이 시대가 노마도조의 "황금기" 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테평양전쟁(1941-1945) 이후, 일본은 연합군에 의해 1945년부터 1952년 까지 점령을 당했습니다.
켄도와 다른 무술들은 이 당시에 연합군 합참본부(GHQ) 의 명령하에 수련이 금지되었지요. 놀랍지도 않게도 켄도는 급격하게 하향세를 걷게 되었습니다.
GHQ 는 1940년 말에 켄도와 각종 무술을 금지하는 법을 폐지하게 되고, 코단샤 직원들은 노마도조에서의 수련을 재개했습니다.
그리고 1962년 가을에, 정기적인 아침 켄도수련이 코단샤의 회장이신 노마 쇼이치의 지시로 모치다 선생님에 의해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노마도조에서의 수련은 모든 이에게 개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공적으로 울려 퍼져서 기존의 회원과 새로 등록하는 회원들로 노마도조는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도장의 전통 또한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고, 모리시마 타케오 범사가 현재 사범직을 맡고 게십니다.
격렬하기로 유명한 아침수련은 일주일에 7일,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이며, 노마 도코카이 회원 검도인들이 도쿄 전 지역에서 수련을 하기 위해 모여듭니다.
최근에는 켄도에 대한 관심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적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체적인 효과는 물론 심리적인 정신건강에도 좋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었지요.
"인간을 단련시킨다." 는 옛 켄도격언은 오늘날에도 통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마도조에 훌륭하신 선생님꼐서 계속해서 지도를 하시고 켄도가 일본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전세계에 널리 퍼져 많은 이들이 수련을 하고 즐겼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들의 켄도를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노마도조에 대한 간략한 역사(1975에 씌어짐)
모치즈키 마사푸사, 전 노마도조 사범
노마도조는 코단샤 출판사 회장 노마 세이지가 1925년에 설립하셨습니다. 그 분은 학생시절부터 켄도를 수련하였으며 "무도는 인생의 여정을 반향한다." 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켄도에서 우리는 칼을 든 적과 3 샤쿠(약 99cm) 떨어진 거리에서 대치를 합니다.
도장에서 하는 우리의 행동이 바로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지요; 우리의 성격과 믿음 그리고 도덕적 품성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또한, 켄도수련은 경건한 분별력과 현명한 깨달음을 요구하고, "치(知)" 와 용기 또는 "유(柔)" 와 배려하는 마음 또는 "진(仁)" 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사회의 모든 양상은 켄도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노마도조의 철학과 무도에 대한 견해는 "켄도는 인생의 모든 것을 반향한다." 하는 것입니다. 수련의 목표 중의 하나가 바로 검의 운용과 개인의 성장의 조화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노마도조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그 중에서도 중요하고 의미있는 인물과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오타와에 있는 코단샤 사무실의 옆에 큰 경찰서가 있는데, 그 곳에 켄도도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1920년대의 이야기 입니다. 노마 세이지의 아들인 노마 히사시 씨는 1923년 15세 나이로 이 경찰서 검도부에서 혹독한 켄도수련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유신칸(有心館) 의 회원이 되었지요.
노마 세이지는 기이치 아베에게 자기 아들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같은 해에 마쓰다 신스케 사범과 와사다 테츠오 사범도 초빙을 하여 새로 설립한 코단샤 검도부에 가입을 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해 가을 노마씨의 집 공터에 작은 도장이 지어집니다.
당시에는 켄도수련은 공식적으로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였으며, 주로 유년 직원들(15세의 나이에 회사를 입사한 사람들) 이 건강과 운동의 목적으로 하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마 세이지는 직원들의 수련에 많은 관심을 보여서 아무리 바빠도 도장에 반드시 들러서 조언도 하고 했기 때문에 켄도수련은 점차적으로 진지해지고 참가자들도 점점 실력이 늘기 시작했지요.
1927년에는 모치다 모리치 선생님이 처음으로 전일본 켄도의회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1930년 8월에는 일황의 입회하에 텐란 지아이에서 우승을 하셨습니다.
당시에 모치다 선생님은 한국의 조선총독부에서 켄도를 지도하고 계셨는데, 이 우승 후에 노마 세이가 선생님을 초빙하여 코단샤의 직원으로 채용하셔서 노마도조에 상주하시면서 사범으로 지도를 하시게 됩니다.
모치다 선생님이 코단샤에 오신 이후에 일본 전역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려고 노마도조로 검도인들이 방문을 했습니다. 이러한 여건을 만들기 위해 저녁수련을 시작했고, 그 해 11월에 도장도 더 넓게 신축을 했습니다.
모치다 선생님과 함께 다른 선생님들도 아침수련에 지도를 하셨는데, 그분들이 바로 마쓰다 신스케 선생님과 야기 산자부로 선생님, 오노 코모노리 선생님, 쿠와타 후쿠타로 선생님 그리고 오타와 고이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교사 자격의 선생님들이 54 분이나 계셨습니다! 또한 코단샤 직원이 아닌 남녀 수련자들과 아이들반도 있었는데, 회원은 금새 100명을 넘어서고 도장은 활성화 되었습니다.
1933년 11월에 노마도조는 현재 크기로 신축되었습니다. 도장의 크기는 9 x 28 m 로, 이는 개인 도장으로는 매우 큰 크기입니다.
노마도조는 일본에서 가장 번성한 도장 중에 하나가 되었지요. 아사게이코(아침수련) 후에 검사들은 목욕도 하고 담소도 나누고 옆의 코단샤 부엌에서 쌀죽과 미소 국을 먹고는 상쾌한 마음으로 도쿄 근방의 각자의 일터로 돌아 갔지요.
매일매일의 수련을 통솔하는 검사는 노마도조의 정규적인 방문객들이었습니다. 켄도의 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노마 히사시를 대장, 또는 넘버 1으로 하고, 토라오 모리를 츄켄, 또는 넘버 2, 그리고 츄지 추치다를 센포, 또는 넘버 3 으로한 코단샤 켄도팀은 1927년 6월에 열린 코도 기타이 대회에서 첫 우승을 맛보게 됩니다. 노마도조를 연지 4년만의 일이었지요.
그 이후로 코단샤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거듭하고, 1922년, 1926년 그리고 1939년에 우승을 합니다.
노마도조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순간 중 하나가 바로 1934년 5월이었는데, 바로 노마 히사시가 도쿄현 대표로 출전한 이틀간의 일황의 궁전에서 일황의 입회하에 열린 전일본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입니다.
당시 그는 겨우 26살 이었는데, 이 승리로 코단샤의 켄도에 대한 명성은 더욱 높아졌지요.
코단샤는 당시의 주요 대회들에서 많은 입상과 우승을 햇는데 특히 전일본상공부선수권대회에서는 1937년과 1939년에 우승을 하였습니다. 이는 놀랄만한 업적으로 마침내 1939년의 우승은 한 해전에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노마 히사시가 없이 우승을 한 것이었지요..
그의 죽음은 노마도조와 코단샤에 커다란 반향을 몰고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없이 코단샤 팀이 우승을 함으로써 당시 코단샤 켄도팀의 깊은 실력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도장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1940년 3월에는 코단샤 직원 중 5명이 5단을 받았고 33명이 4단을, 21명이 3단, 32명이 2단 그리고 106명이 초단을 수여받았습니다. 거기에다가 19명이 렌시 칭호를 받았고(면허사범): 후에키 테이지, 쿠로이와 마사미, 하이시 카다요시, 쿠리하라 토시히코, 아베 마사오, 스와 코타로, 마치다 마사오, 우에다 센베이, 오가와 우시마츠, 핫토리 토시유키, 코이키 킨사쿠, 카키누마 토메키치, 나가오카 세이, 모치즈키 마사푸사, 토이 토쿠지로, 오토모 하시타츠, 나가이 타케오, 시미즈 마코토와 오테 히데오.(굳이 이름을 다 써놓고..-..-;;)
그리고 1940년 6월에 2600년의 일황통치를 마감하는 기념 대회가 일황의 입회하에 열렸는데, 노마도조의 사범이신 마쓰다 신스케 선생님이 시드를 배정받아 참가하셨고 코단샤 직원인 모치즈키 마사푸사 선생님이 도쿄현 대표로 출전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결승전까지 올라가셔서 사제간의 승부가 펼쳐졌는데, 두 분 모두에게는 물론 노마도조에도 영광스런 순간이었습니다.
이 승리와 함께 노마도조는 명성을 흠뻑 누리고, 그 위치가 일본 전역에서 격상되었습니다!
아쉽게도 노마 세이지나 노마 히사시는 이러한 승리의 영광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요.
그 해에 노마도조의 켄도수련을 후원하고 계셨던 노마 세이지의 미망인이신 노마 사에씨가 코단샤를 경영하고 계셨습니다.
1941년 말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폐해로 코단샤의 직원과 회원들이 다수 일본군으로 차출되어 갔습니다. 켄도수련은 이따금 열렸으며, 1944년에는 당시 코단샤 회장이셨던 노마 쇼이치에 의해 죽도소리가 멈추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 사령부가 들어섰는데, GHQ는 당시에 켄도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1947년까지 코단샤 직원들은 노마도조에서 켄도수련을 하지 못했습니다.(사실 도장을 전쟁으로 집이 파괴된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도쿄켄도연맹이 1952년에 설립이 되었고, 켄도데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조금씩 생겨서 몇 년후 1962년 가을에 코단샤는 노마도조의 아침수련을 다시 재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침수련은 모치다 모리치 선생님의 지도 아래 일년내내 열리게 되고, 노마도조는 다시 번창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모치다 모리치 선생님, 마쓰다 신스케 선생님, 사토 유키치 선생님, 츠르미 이와오 선생님, 오자와 타카시 선생님, 오가와 츄타로 선생님, 오노 소이치로 선생님, 나카노 야소지 선생님들과 같은 위대한 인품의 선생님들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모리시마 타테오(9단) 선생님께서 노마도조를 맡고 계십니다. 수련을 하시는 분들은 코단샤 작원이나 방문객들, 그리고 학생들과 아이들이 있습니다.
쿄시와 렌시의 수는 더 많아지고 있고 이런저런 상황으로 전전 시대를 회상하게 됩니다.
아침수련은 여전히 모든 이에게 개방을 하고 있고, 코단샤 켄도부는 일주일에 세 번 저녁에 수련을 합니다.
노마 세이지의 유지가 3 대에 걸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즐겁고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노마도조 도코카이
멤버십 조건과 규칙
노마도조를 이용하시는 노마도조 도코카이 회원과 준회원은 코단샤 주식회사가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임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노마도조 도쿠카이의 회원과 준회원은 노마도조의 역사와 전통을: 설립자이신 노마 세이지의 철학과 수십년간 노마도조를 위해 헌신하신 켄도 센세이의 유산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마도조 도쿠카이는 노마도조에서의 전통적인 지도와 규칙적인 수련, 그리고 회원들간의 관계를 통해 켄도의 진가를 배우고 발전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동료 회원들에게 몸가짐이나 언행이 단정치 못한 사람은 노마도조 도코카이 회원 자격을 몰수 할 것이며 노마도조에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회원자격 취득
회원자격은 자격요건이 좋은 기존의 회원의 개인적인 소개로만 얻게 됩니다.
노마도조 도코카이에 소개를 받고 나면 그 장래의 회원, 또는 장래의 부회원은 등록서를 적성하고, 켄도수련 이전에 입회비등을 포함한 다른 관련 신청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새로운 회원이나 부회원을 소개하는 회원은 회원증에 서명하고 개인 씰을 달고 회원서약에 서명하여 새 회원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의 인품을 증명해야 합니다.
노마도조 도코카이는 회비납부/ 회원자격 서류 작성이나 회원자격 기간등에 불성실하면 언제라도 개인의 회원자격을 거부하거나 취소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비
1. 입회비: 3,000 엔
2. 연회비, 정회원: 12,000 엔; 부회원: 10,000 엔
3. 모든 회비는 선불임.
멤버십 종류
1. 한시範師 나 8단 이상의 상위 회원분들과 88세 이상의 회원분들은 년회비를 내시고 켄도와 노마도조에
많은 기여를 하셔야 합니다.
2. 7단 이하의 선생님들과 정회원은 년회비 만2천엔을 내십니다.
3. 부회원은 년회비로 만엔을 내거나 노마도조의 유지 관리를 위해 보조금으로 그 이상을 냅니다.
노마도조에서 켄도수련 시 규칙 사항
회원의 초대손님을 포함한 모든 회원은 노마도조 입구에 있는 '방문록'에 서명하여야 합니다.
수련에 참가하는 모든 이는 자신의 이름과 소속이 적힌 명패를 착용해야 합니다(예를 들어, 클럽 이름이나 지역).
회원들은 도장을 들어오고 나갈 때 반드시 사범님들께 예를 표해야 합니다.
수련 도중에, 회원들은 정중하고 절도 있는 예법으로 동료 회원들과 방문객들을 대해야 합니다.
흡연은 수련이 끝나고 지정된 장소 이외에는 금지되어 있고, 선임 회원의 입회하에만 가능합니다.
주인의 허가 없이 다른 회원의 호구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노마도조에 보관해 두는 호구장비는 지정된 장소에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회원들은 노마도조를 깔끔하게 관리해야 하고, 결함이나 손상, 파손된 곳을 발견하면 즉시 책임자에게 이를 알려야 합니다.
정기 아침수련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7시부터 8시까지 입니다.(토요일과 일요일 수련 또는 "휴일 수련" 또한 있습니다.)
회원들은 늦게 도착한 합당한 이유가 없는 한 늦어도 아침 7시반 전까지는 도복으로 갈아 입으시고 수련준비가 되어 있거나 수련을 시작하고 있어야 합니다.
8시 이후의 수련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8시반 이후의 부가적인 수련을 하시려면 노마도조 도코카이의 의장이나 노마도조 관리자의 하가를 얻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회원들은 12월 말에서 1월 초까지의 새해연휴를 제외하고는 매일 수련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회원은 아침 9시 이전에 노마도조를 떠나야 합니다. 규정 시간 이외에 노마도조의 입장이나 켄도수련은 허가하지 않습니다.
차를 가지고 오시는 회원은 질서정연하게 주차를 하시고 주차권은 반드시 잘 보이게 해두십시오.
회원과 준회원,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노마도조 도쿠카이의 임원과 노마도조 관리자와 보조자 그리고 코단샤 주식회사는 수련 중 상해나 노마도조 방문 시에 일어나는 재물상의 피해나 손실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시고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회원과 준회원의 건의사항이나 불만사항은 글로 작성을 하여 노마도조 도쿠카이 임원이나 노마도조 관리자에게 전달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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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노마도조의 사진들인데,
이제는 그 모습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는 근대 검도의 요람이었던 노마도조(野間道場) 를 그리며,..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코단샤 노마도조(講談社 野間道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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