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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8권
9. 수다라품(修多羅品)[2], 3계, 12연기법
[3계]
【문】세존께서는 계(界)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답】
스무 가지를 욕계라 말하고
색계는 혹은 열여섯 가지며
무색계에는 네 가지 있으니
그 처소의 차례로 말한다.
‘스무 가지를 욕계라 말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팔대지옥(八大地獄)과 축생과 아귀와 사천하(四天下)와 육욕천(六欲天)등 이 스무 가지를 욕계(欲界)라 한다는 것이다.
‘색계는 혹은 열여섯 가지’라 한 것은, 이른바 범신(梵身)ㆍ범부루(梵富樓)ㆍ소광(少光)ㆍ무량광(無量光)ㆍ광음(光音)ㆍ소정(少淨)ㆍ무량정(無量淨)ㆍ변정(遍淨)ㆍ무음(無陰)ㆍ복생(福生)ㆍ과실(果實)ㆍ무번(無煩)ㆍ무열(無熱)ㆍ선견(善見)ㆍ선현(善現)ㆍ색구경(色究竟) 등 이 열여섯 곳을 색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열일곱 곳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니, 앞의 열 여섯 및 대범(大梵)이 그것이다.
그 곳의 중생들은 색신(色身)을 받으며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도 아니고 두 번째 세계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색계라고 한다.
‘무색계는 네 가지 있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공처(空處)ㆍ식처(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이곳에서는 중생들이 색신(色身)을 받지 않으며, 또한 색욕을 떠난 까닭에 무색계라 부르는 것이다.
【문】어찌하여 삼계를 내세우는가?
애착이 끊어지기 때문인가, 처소 때문인가?
만약 애착심이 끊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아홉 가지 세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욕계의 애착을 끊음은 욕계에 속하고, 이와 같이 초선(初禪)의 경지에서 비상비비상처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또 만약 처소 때문에 삼계를 건립한다고 한다면 마땅히 사십가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답】총체적으로 말할 때에는 애착심을 끊는 까닭에 삼계를 말하게 된다.
즉 욕계의 애착을 끊음은 욕계에 속하고,
마찬가지로 색계의 애착을 끊음은 색계에 속하고
무색계의 애착을 끊음은 무색계에 속하는 것이다.
욕계는 산란한[不定] 까닭에 하나의 번뇌이며,
색계ㆍ무색계는 마음이 집중된[定] 곳인 까닭에 번뇌가 아닌 것이다.
【문】어찌하여 계(界) 즉 세계를 내세우는가?
【답】그 처한 장소를 차례로 설명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낮은 곳으로부터 차례로 위로 올라간다. 곧 가장 아래는 무택지옥(無擇地獄)이며 다음은 대열지옥(大熱地獄)이니, 이와 같이 해서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게 된다. 이 색구경천 위에 다시 무택지옥이 있으며, 차례로 색구경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만약 하나의 욕계의 욕망에서 벗어난다면 곧 일체의 욕계의 욕망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만약 초선에서 신족통을 얻게 되면 능히 하나의 욕계 및 하나의 범세(梵世)에 이를 수 있다.
다시 여기에 두루 그 옆에 다른 세계를 세우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칠식주(七識住)]
【문】세존께서는 칠식주(七識住)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인가?
【답】
선취(善趣)의 욕계에 있는 것과
색계의 세 경지가 있다.
무색의 세 곳도 역시 그러한데
이것을 식주(識住)라 한다.
욕계의 선취(善趣)36)인 천ㆍ인간과 색계에서의 앞의 세 경지와 무색계에서의 앞의 세 경지, 이 일곱 경지를 식주(識住)37)라 말한다.
유색의 중생은 색신을 성취한다.
‘종종의 몸’이란 종종의 형태이며 ‘종종의 상(想)’이란 고ㆍ낙ㆍ불고불락의 상(想)으로,
이것을 최조의 식주[初識住]라 부른다.
다음 ‘종종의 몸’이란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일상(一想)’이란 오염된 생각이다.
저 범신천(梵身天)에 처음 태어나는 자는 ‘나는 대범천을 따라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하고,
대범천은 ‘나는 능히 그를 태어나게 했도다’라고 생각한다.
귀하고 천한 장소인 까닭에 그리고 각관(覺觀)을 지닌 식신(識身)인 까닭에 범천에는 종종의 몸이 있으니,
이것을 두 번째 식주[第二識住]라 한다.
‘일신(一身)’이란 색신형처(色身形處)의 양(量)이 동등함을 말하며
‘종종상(種種想)’이란 낙 및 불고불락상을 말한다.
근본지는 희근(喜根)으로, 피로하고 싫어지면 권속인 사근(捨根)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사(捨)에서 피곤하고 싫어지면 희근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것을 세 번째 식주[第三識住]라 한다.
‘일신(一身)ㆍ일상(一想)’이라고 했는데,
일신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일상이란 낙(樂)을 말한다.
이것을 네 번째 식주[第四識住]라 한다.
‘무색의 중생’이란 색신을 성취하지 않는다. 색욕을 떠나는 까닭이다.
또 ‘일체의 색상을 건넌다’라고 한 것은 그 행이 색을 벗어난 까닭에 그처럼 말하는 것이니, 색에 대한 생각은 안식과 상응하는 까닭이다.
가령 초선(初禪)의 욕망을 벗어나게 되면 욕망과 애착을 수반한 행을 건너게 되며,
제4선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면 색계의 행을 행하는 영역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유대상(有對想)을 멸한다’라고 말하니, [대상이 있는 세계는] 다섯 가지 식신(識身)과 상응하는 까닭이다.
‘종종상을 염(念)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그 갖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제4선의 경지는 곧 잘 흩어져서 갖가지 입(入)을 연하게 되는 까닭이니, 만약 오염된 생각일 경우 열 가지 입(入)을 연하고 오염되지 않은 생각일 경우 십이입(十二入)을 연한다.
[무색은] 욕망이 마음을 휘젓고 어지럽히는 일에서 벗어난 까닭에 염(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량(無量)’이란 무량한 행인 까닭이니, 방편으로 공입(空入)을 사유한다.
공삼매[空正受]인 까닭에 공처입(空處入)이라 말한다.
‘공처입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그 경지에서의 사음(四陰)을 얻어 성취함을 말하니,
이것을 다섯 번째 식주[第五識住]라 부른다.
방편으로 식입식처(識入識處)를 사유하면,
이것을 여섯 번째 식주[第六識住]라 부른다.
그리고 무량행은 자분(自分)이 아닌 까닭에 무소유처(無所有處)라고 하니,
이것을 일곱 번째 식주[第七識住]라 부른다.
【문】무엇 때문에 일곱 식주(識住)를 세우는가?
【답】만약 인식이 어떤 경지에서 즐거이 머무는 까닭에 식주(識住)라고 말한다.
악도(惡道)에서는 괴로움으로 핍박받는 까닭에 인식이 즐거이 머물지 못한다.
또한 정거천(淨居天)은 열반으로 향하는 까닭에 인식이 즐거이 머물지 못한다. 무상천(無想天)의 중생들은 무심하기 때문이다.
또 나머지 제4선(禪)의 경지에서는 중생들이 혹은 무색계를 구하기도 하고 혹은 정거천을 구하기도 하고 혹은 무상천을 구하는 까닭에 인식은 즐거이 머물지 못한다.
또한 제일유(第一有)는 그 경계가 민첩하고 빠른 곳이 아닌 까닭에 식이 즐거이 머물지 못한다.
다시 또한 그러한 곳들에는 인식을 허무는 법이 존재하는 까닭에 식주(識住)로 세우지 않는다.
곧, 악도(惡道)에서는 고근(苦根)으로 허물어지고 제4선에서는 무상삼매(無想三昧)로 허물어지며 제일유에서는 멸진삼매로 허물어지는 까닭에 식주(識住)로 세우지 않는 것이다.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九衆生居]]
【문】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九衆生居]란 어떤 것인가?
【답】
제1유(第一有)와 무상천
이를 중생거(衆生居)라 하며
유루의 네 가지 음
이를 네 가지 식주(識住)라 한다.
‘유정천과 무상천 이를 중생거(衆生居)라 한다’고 했는데,
앞에서 말한 일곱 식주 및 무상천과 제일유, 이것을 아홉 중생거(九衆生居)라 말한다.
【문】어째서 악도(惡道)는 중생거라 말하지 않는가?
【답】즐겁게 머물 곳이 아닌 까닭에, 고통이 많은 까닭에 즐겁게 머물지 못한다. 또한 정거천은 빠르게 열반으로 향하는 곳이기 때문에 즐겁게 머무는 곳이 되지 못하며, 그 밖에 제4선(禪)의 경우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네 가지 식주[四識住]]
【문】네 가지 식주[四識住]란 무엇을 말하는가?
【답】이른바 유루의 사음(四陰) 이것을 네 가지 식주라 한다.
식음(識陰)을 제외한 나머지 유루의 사음(四陰)38)을 식주라 말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생범주의 음을 식주(識住)라고 말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의(依)ㆍ행(行)ㆍ연(緣)ㆍ상응(相應)ㆍ분(分)의 뜻이 있는 까닭에 주(住)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의(依)란 인식이 의지하는 바이고 연(緣)이란 능연(能緣)이지 소연(所緣)은 아니다.
분(分)이란 범음으로는 하바타야(何婆他耶)라 하는데 ‘흘러 쏟아져 들어온다[流注]’는 뜻이다.
즉 생명을 부여받아 태분(胎分)이 상속되는 것을 말하니, 비록 과거와 미래는 중생의 범주가 아니라고 해도 또한 이 다섯 가지 뜻이 있는 까닭에 식주(識住)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무루법도 역시 식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오염된 식을 허무는 까닭에 식주라고 세우지 않는 것이다.
식음(識陰)은 식주가 아니다. 둘은 같은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고 앞뒤로 일어나지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자성을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39)
자기 영역[自分]의 식은 자기 영역의 음(陰)에 머문다. 즉 욕계의 식은 욕계의 음에 머무니, 이와 같이 모든 경계가 비슷하게 전개되어 세계가 다르지 않고 경지가 다르지 않고 몸이 다르지 않다.
【문】왜 자기 영역의 음을 식주(識住)라고 말하며 자기 영역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가?
【답】자기 영역의 음(陰)이 식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문】자기 영역이 아닌 심음(心陰) 및 비심음(非心陰)을 어찌하여 식주(識住)라 하는가다른 경계에 마음이 머물 때 그것을 자분이 아닌 심음이라 하고 무심법(無心法)에 머물 때 그것을 비심음(非心陰)이라 한다?
【답】모습[相]을 얻은 까닭에 그것도 역시 식이 머무는 모습을 성취한다.
만약 여기에서 자기 영역의 식이 생긴다면 그것은 곧 따라 일어난다.40)
거기에 식주의 뜻이 있어도 중간의 인연이 장애하는 까닭에 식은 생기지 않게 된다. 이것은 식주가 비분(非分)이 되는 것은 아니다.41)
[연기(緣起)]
【문】세존께서는 연기(緣起)42)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는 어떤 특징[相]이 있는가?
[연기의 지분]
【답】
번뇌와 업과 일
그것들이 차례로 생기나니
여기에 지분이 있어
중생들 모두가 생겨남을 알아야 한다.
세 갈래 연기의 지분이 있으니, 번뇌43)와 업44)과 일45)이 그것이다.
이 번뇌와 업과 일이 각각 생겨남에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연기의 지분[緣起支]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연기의 지분임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갈래의 건립이
이른바 중생의 수생(受生)이다.
과거의 두 요소와 미래도 그러하고
중간은 여덟 가지라고 설한다.
‘이 모든 갈래의 건립이 중생들의 수생(受生)이다’라고 한 것은 이 세 가지로 갈래의 연기(緣起)에서 열두 지분[十二支]을 말한 것이다.
【문】이것이란 어떤 것인가?
【답】과거의 두 가지 요소와 미래도 두 가지 중간은 여덟 가지라고 말하게 된다.
그가 과거에 태어났을 때의 모든 번뇌의 갈래를 무명(無明)이라 말하며
또 과거에 태어났을 때에 지은 업을 행(行)이라고 말한다.
현재로 상속된 것을 식(識)이라 하니,
그것이 상속되고 난 뒤 6입(入)의 영역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을 명색(名色)이라 한다.
모든 근(根)이 가득해진 부분을 6입(入)46)이라 한다.
아직은 괴로움이나 즐거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분별할 수 없는 채 근(根)ㆍ진(塵)ㆍ식(識)이 화합함을 촉(觸)이라 한다.
괴롭고 즐거운 경계를 분별하면서도 번뇌의 경계를 분별할 수 없는 것을 수(受)라 한다.
즐거운 느낌[樂受]과 사랑할 만한 것과 사랑스럽지 못한 것에 대해 혹은 벗어나고 혹은 만나 어리석은 애착이 생기는 것을 애(愛)라 한다.
현재 광범위하게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취(取)라 하며,
다시 후유(後有)를 낳는 것을 유(有)라 한다.
현재에 종자가 있어 미래의 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미래의 음이 익어가는 것을 노(老)라 하며 미래에 음을 버리게 되는 것을 사(死)라 한다.
세 가지 유지(有支)는 번뇌이고
두 가지는 업이며 일곱 가지는 일이다.
일곱 가지는 앞의 유지라고 이름하고
다섯 가지는 후분(後分)이라 말한다.
‘세 가지 유지(有支)는 번뇌이고 두 가지는 업이며 일곱 가지는 일이다’라고 한 것은
무명과 애(愛) 및 취(取)의 세 가지 유지는 곧 번뇌임을 말한 것이다.
행과 유(有)의 두 지분은 업이고, 나머지 지분은 일(事)이라고 말한다.
‘일곱 가지는 앞의 유지라고 이름하고 다섯 가지는 후분(後分)이라 말한다’고 했는데,
무명에서 수(受)에 이르기까지의 일곱 지분은 이것을 전연기(前緣起)라 부르고,
나머지 다섯 가지 지분은 후연기(後緣起)라 부름을 알아야 한다.
앞의 지분 중 다섯을 과(果)라고 말하고
나머지 둘은 곧 인(因)이라고 한다.
뒷의 지분중 셋을 인이라 말하고
나머지 둘은 곧 과라고 한다.
전연기 중 식(識)에서 수(受)에 이르기까지는 과이고, 무명과 행(行)은 인이다.
후연기 중 앞의 세 지분을 인이라 하고, 뒤의 두 지분을 과라고 한다.
[지분의 합침]
【문】지분이 앞뒤로 전전하면서 합쳐질 수도 있는가?
【답】있다.
【문】그것은 어떤 것인가?
【답】
앞의 어리석음[癡]은 후의 애(愛)와 취(取)가 되니
행(行)과 유가 합쳐지는 것 또한 그렇다.
명색(名色)과 입(入)과 촉(觸)ㆍ수(受)
이를 노(老)ㆍ사(死)와 같다 하는데
이른바 최초 수생(受生)의 식은
곧 미래의 생(生)이 된다.
[지분의 상호 포섭]
【문】이미 지분이 앞뒤로 전전하면서 서로 포섭하는 일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답】
번뇌는 번뇌와 업을 일어나게 하고
그 업이 전개되서 일을 일으킨다.
일은 또한 일을 낳으며
또한 번뇌를 낳는다.
번뇌에 연해 번뇌가 생기는 경우란, 이른바 애(愛)에 연해 취를 낳는 경우이다.
번뇌에 연해 업이 생기는 경우란, 이른바 취에 연해 유를 낳는 경우이다.
업에 연해 일이 생기는 경우란, 이른바 유(有)에 연해 생(生)을 낳는 경우이다.
일에 연해 일이 생기는 경우란, 이른바 생에 연해 노ㆍ사를 낳는 경우이다.
일에 인연하여 다시 번뇌가 생기는 경우란,
앞에서 말한 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觸受)는 곧 마지막 구성 요소인 노ㆍ사가 되니,
이러한 까닭에 수를 연하여 애를 낳는다고 말하며,
또한 노ㆍ사를 연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무시(無始)의 존재바퀴[有輪]47)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네 종류의 연기]
【문】네 종류의 연기(緣起)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네 종류의 연기인가?
【답】
저 상속전(相續轉)과
찰나와 연박(連縛) 및
앞에서 언급된 분단(分段) 등
이것을 곧 연기(緣起)라 한다.
[상속전(相續轉)]
‘상속전(相續轉)48)’이란 시작이 없다는 뜻이다. 원인과 결과가 전전하면서 서로를 얽어매는 까닭에 이것을 연기의 수레바퀴라 말하니,
마치 둥근 보름달은 그 시초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수다라(修多羅)에서 말하기를
“유(有)와 애(愛)의 본래의 경계는 알 수가 없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응당 무(無)라고 말해야 한다. [시원을] 알 수 없으면서 스스로 존재하고, 존재하면서도 알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말로 설명할 인자(因子)가 없는 까닭에 할말[言說]이 없다고 한다면,
만약에 누눈가가 ‘왜 없는가?’라고 물었을 때, 언설의 인(因)을 허용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 수가 없다’고 말할 경우,
누군가가 ‘왜 알 수 없는가?’라고 물었을 때 곧,
‘그 어떤 이유[何等]도 없다’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마치 보름달의 바퀴 모양은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듯이, 이처럼 인연이 상속하는 연기도 있는 것이다. 결국,
‘만월의 바퀴모양은 그 시원을 알지 못하니, 그런 까닭에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찰나]
한 찰나에 일체의 유지(有支)가 눈앞에 나타나는 까닭에 찰나(刹那)라고 말한다.
마치 『식신론(識身論)』에서 장엄하는 일에 대해
‘무지(無知)한 까닭에 탐욕을 일으킨다’고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무지란 곧 무명(無明)이다.
탐이란 행(行)이다.
어떤 일에 대해 안다는 것이 식(識)이며,
식과 함께 일어나는 네 가지 음[四陰]이 명색(名色)이다.
명색 위에 건립되는 여러 근기(根器)가 6입(入)이며
6입에 집착하는 것이 촉(觸)이다.
촉을 따라 느끼는 것이 수(受)이며
수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애(愛)이다.
이 애착심과 함께 생기는 번뇌[纏]가 취(取)이며,
이 수가 당래(當來)에 낳는 업이 유(有)이다.
미래에 음이 일어나는 것이 생(生)이며,
이 음이 무르익어 가는 까닭에 노(老)가 있게 되고
이 음을 버리게 되는 것이 사(死)이다.
[연박]
곧, 전전해서 서로 얽어매는 까닭에 연박인연(連縛因緣)49)이라 말하니, 인연의 근본이 전전해서 [그 시원이] 아주 멀다는 뜻이다.
비단 이 열두 가지 지분만을 연기(緣起)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
혹은 생하거나 혹은 생겨난 바의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연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나야사(富那耶舍)50) 존자는 말하기를
“혹은 연기하고 있으면서 이미 일어난 연기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미래의 법이 그것이다.
또 이미 일어난 연기이면서 연기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즉 과거ㆍ현재의 세계에서 아라한(阿羅漢)의 목숨이 끝난 5음이 그것이다.
또한 연기하고 있으면서 이미 일어난 연기가 있으니, 즉 현재ㆍ 과거에 있어서 아라한의 목숨이 끝난 뒤의 5음을 제외한 그 밖의 과거ㆍ현재의 법이 그것이다.
연기도 아니고 이미 연기한 것도 아닌 경우가 있으니, 곧 무위법(無爲法)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분단(分段)]
분단된 사이에 얻을 수 있는 까닭에 분단(分段)51)이라 말한다.
그가 과거에 태어났을 때 지닌 번뇌의 부분을 무명(無明)이라 하며,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생(生)과 취(趣의 관계]
【문】세존께서는 생(生)과 취(趣)[취는 마땅히 도(到)라고 말해야 한다]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생에 취를 포함되는가? 아니면 취에 생을 포함하는가?
【답】
생(生)에 일체의 취가 포함되지
취에 생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생에는 중음이 늘어나니
취에 포함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곧, 생에 취가 포함되지 취에 생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문】왜 그러한가?
【답】생에는 중음이 늘어난다. 중음(中陰)은 생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즉 어느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 까닭에 취(趣)라고 말하는 데, 중음은 떠나는 것이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취가 아닌 것이다.
‘생(生)’이란 사생(四生)을 말하니, 곧 태생(胎生)52)ㆍ난생(卵生)53)ㆍ습생(濕生)54)ㆍ화생(化生)55)이 그것이다.
욕계에는 사생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는 모두 화생이며,
또한 지옥도 화생이다.
축생에는 사생이 있으며,
아귀는 화생이기는 하고 또한 태생(胎生)이기도 하다.
인간 세계는 사생을 갖추고 있으며
하늘 세계는 화생이다.
따라서 화생이 가장 광범위하다. 완전한 두 개의 취(趣)56)와 세 개의 취57)의 일부분을 갖추고 있는 까닭에 화생이 가장 뛰어난 것이다.
【문】만약 화생이 가장 뛰어나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화생으로 태어나시지 않았는가?
【답】시절이 함께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화생할 시절이 있었다면 부처님께서 나타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실 때에는 화생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은 모든 일에 뛰어나신 분[一切勝]인 까닭이니, 세존 일체승께서 태어나는 종성은 일체중생 가운데 최승에 속한다. [이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게 하려는 까닭이며, 나아가 종성의 고만을 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취(趣)란 오취(五趣)를 말하니, 즉 지옥과 축생과 아귀와 인간 세계와 하늘 세계가 그것이다.
안락할 수 없는 곳이기에 지옥58)이라 하고, 몸을 가로누이고 걸어가기에 축생59)이라 하고, 남으로부터 무언가를 희구하기 때문에 아귀60)라 하고, 마음[意]이 적정한 까닭에 사람61)이라 하고, 광명이 있는 까닭에 하늘62)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아수라(阿修羅)63)를 하늘과 동일한 취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그대는 먼저 하늘 세계에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만약 그렇다면 아수라는 왜 진리[諦]를 밝히지 못하는가?
【답】아첨하는 마음이 밝은 지혜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힘이 센 아귀[大力餓鬼]이니, 하늘 세계에서는 설해지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한다.
【문】만약 그렇다면 제석천(帝釋天)64)은 어찌하여 모습과 습관이 인간과 가깝다고 하는가?
【답】색을 탐하는 까닭이다. 부다(負多)65)ㆍ구반다(究槃茶)66)ㆍ늑차(勒叉)67)도 역시 아귀세계에 속한다. 그리고 긴나라(緊那羅)68)ㆍ비사차(毘舍遮)69)ㆍ혜로바가(醯魯婆迦)ㆍ사라(闍羅)70)ㆍ파구라(頗求羅)는 축생세계에 포섭된다.
【문】세존께서는 여섯 계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떤 것인가?
【답】
이른바 4대종(大種)과
모든 유루의 인식과
또한 공간[色中間相]이니
이 계를 생명의 근본이라 한다.
‘이른바 4대종과 모든 유루의 인식과 공간[色中間相]이다’라고 한 것은, 4대ㆍ오식신(五識身) 및 유루의 의식(意識) 과 색중간상을 말한 것이다. 곧, 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공계의 범주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섯 가지 계[六界]라 한다.
【문】이미 십팔계(十八界)를 말씀하셨거늘, 왜 별도로 육계(六界)를 다시 말하는가?
【답】이 계는 생의 근본이라고 말하니, 이 계를 사부(士夫)의 범주의 건립이라고 말한다. 생명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루법은 육계가운데 세우지 않는 것이다.
4대(大)에 관해서는 계품(界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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