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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4권
4. 변연기품(辯緣起品)③
4.3. 12연기(緣起)에 따른 윤회전생[1]
1) 12지(支)의 3세 양중(兩重)의 인과
① 총설
[태] 내외에 존재하는 갈랄람(羯剌藍) 등과 종자[種] 등에 관한 도리와 그것의 인과상속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인과상속을] 설하여 바로 연기(緣起)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기는 그 상(相)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와 같은 온갖 연기는
12지(支)로서, 3제(際)이니
전제와 후제는 각기 2지이며
중제는 원만한 자에 따를 경우 8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연기에는 오로지 12지(支)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무엇을 일컬어 연기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1)
그렇지만 계경 중에서는 연기에 대해 분별하면서 혹 어떤 때에는 12지를 갖추어 설하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승의공계경(勝義空契經)』등에서 설한 바와 같다.2)
혹은 11지를 설하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지사(智事)』 등의 경이 바로 그러하다.
혹은 오로지 10지만을 설하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성유경(城喩經)』등의 경우가 그러하다.3)
혹은 다시 9지를 설하기도 하였으니, 『대연기경(大緣起經)』중에서 설한 바와 같다.4)
혹은 8지가 존재한다고 설하기도 하였으니, 계경에서
“온갖 사문이나 혹은 바라문으로서 [이와 같은] 온갖 법성 등을 참답게 알지 못하는 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5)
이렇듯 설하는 바에 따라 온갖 차별이 있으니, 어떠한 이유에서 본론(本論)의 설과 계경 사이에 그토록 차이가 있는 것인가?
논(論)은 법성(法性)에 따른 것이지만 경(經)은 교화하는 방식[化宜]에 따른 것이니, 그래서 계경 중에서는 연기를 분별하면서 교화할 이의 근기에 따라 다르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논(論)은 요의(了義)이나 경(經)은 불요의이다.
혹은 논에서는 유정과 무정 모두에 대해 설하였던 것이지만, 계경에서는 다만 유정수에 근거하여 설하였을 뿐이다.
즉 유정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염오와 청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6) 부처님께서는 유정을 위하여 이 두 가지를 개현(開顯)하였으니, 부처님께서는 다만 이 일을 위해 세간에 출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계경 중에서는 다만 유정에 근거하여 크나큰 의리(義利)를 성립시키기 위해 [여러 종류의]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였던 것이다.
[연기의] 온갖 지분 중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차별적인 뜻이 있지만,
지금 여기서는 바야흐로 3생(生:과거생ㆍ현재생ㆍ미래생)의 분위(分位)로서 무간으로 상속함에 따라 12지(支)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간략히 분별하리라.
[12지란] 첫 번째는 무명(無明)이며, 두 번째는 행(行)이며, 세 번째는 식(識)이며, 네 번째는 명색(名色)이며, 다섯 번째는 6처(處)이며, 여섯 번째는 촉(觸)이며, 일곱 번째는 수(受)이며, 여덟 번째는 애(愛)이며, 아홉 번째는 취(取)이며, 열 번째는 유(有)이며, 열한 번째는 생(生)이며, 열두 번째는 노사(老死)이다.
그리고 3제(際)라고 하는 말은,
첫 번째는 전제(前際)이고, 두 번째는 후제(後際)이며, 세 번째는 중제(中際)이니, 바로 과거ㆍ미래와 아울러 현재의 3생을 말한다.
어떻게 12지를 3제에 건립한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전제와 후제에 각기 2지를 설정하고, 중제에 8지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12지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즉 무명과 ‘행’은 전제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는 말하자면 과거의 생이다.
생과 노사는 후제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는 말하자면 미래의 생이다.
그 밖의 나머지 8지는 중제에 존재하는 것이니, 이는 말하자면 현재의 생이다.
그리고 [이러한 8지 중에서] 전제의 두 원인에 의해 초래된 5지는 결과이고, 후제의 두 결과에 근거[待]가 된 3지는 원인이다.7)
그렇지만 모든 이의 일생이 다 이러한 8지를 갖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본송에서] ‘원만한 자에 따를 경우에는 [중제에] 8지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다.
원만한 자란 어떠한 자를 말하는 것인가?
지분[支]에 결여됨이 없는 자를 말한다.
혹은 원만한 혹(惑,즉 번뇌)과 업(業)에 의해 초래된 자이니, 이를테면 이전(전생)의 증상(增上)의 혹과 업에 의해 인기된(태어난) 이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뜻은, 보특가라로서 모든 단계[位]를 거친 이를 ‘원만한 자’라고 일컬은 것으로,8) 중간에 요절한 이[中夭]나 색ㆍ무색계의 보특가라는 ‘원만한 자’가 아니니, 갈랄람 등의 온갖 상태를 결여하였기 때이다.
세존께서도 다만 욕계의 일부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12지를 갖추었다고 말하였으니,
예컨대 『대연기경(大緣起經)』 중에서
“부처님께서 아난타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식(識)이 만약 입태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증성 광대해 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증성 광대해질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한 바와 같다.9)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보특가라가 바로 이전 생에 무명과 ‘행’을 지었다면 현재 생에 ‘식’ 등의 5지를 모두 초래하게 될 것이며,
다시 현재 생에서 애ㆍ취ㆍ유를 지었다면 바로 다음 세에 ‘생’ 등의 2지를 초래하게 되는 것으로,
이 계경은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일체의 모든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연기의] 모든 지분(즉 12지)을 설정하였다면, 바로 잡란(雜亂)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그러한 보특가라가
혹 현재 생의 5지를 가질지라도 그것은 이전 생의 무명과 ‘행’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있으며,
아울러 바로 다음 세의 ‘생’과 노사의 지분도 현재 생의 애ㆍ취ㆍ유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그러한 경우가 다 이 경의 뜻만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10)
그렇지만 결과와 원인이 서로 떨어져 격절(隔絶)되어 있다 하여 그것이 원인에 의해 초래되고 결과를 일으키는데 어떠한 공능도 없다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
② 12지의 2세 양중의 인과
연기의 [12]지는 간략히 오로지 전제(前際)와 후제(後際)의 둘로 나누기도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7지와 5지를 결과와 원인으로 하여 인과관계로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원인과 결과가 되는 5지와 7지에서 원인을 원인에 포섭시키고 결과를 결과에 포섭시켰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현재의 애ㆍ취는 바로 과거의 무명에 포섭되며,
현재의 ‘유’는 바로 과거의 ‘행’에 포섭된다.
또한 현재세의 ‘식’은 바로 미래의 ‘생’에 포섭되며,
그 밖의 현재의 4지(명색ㆍ6처ㆍ촉ㆍ수)는 바로 당래(미래)의 노사에 포섭되니,
이것을 ‘인과의 이분(二分)의 차별’이라 이름한다.11)
2) 12지(支)에 대한 해명
3제(際)에 걸쳐 12지를 건립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를테면 무명ㆍ행……(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어떤 법을 일컬어 무명이라 한 것이며, 나아가 어떤 법을 일컬어 노사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숙생에서의 번뇌의 상태[惑位]가 ‘무명’이며
숙생의 온갖 업을 ‘행’이라 이름한다.
‘식’은 바로 결생(結生)의 온이며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이 ‘명색’이다.
안(眼) 등의 근이 생겨나면서부터
세 가지의 화합 이전이 ‘6처’이며
3수(受)의 원인이 다름에 대해
아직 요지(了知)하지 못한 것을 ‘촉’이라 이름한다.
음애(婬愛)가 생겨나기 이전이 ‘수’이며
물건[資具]을 탐하는 것과 음애가 ‘애’이며
온갖 경계를 획득하기 위하여
두루 추구하는 것을 ‘취’라고 이름한다.
‘유’란 말하자면 바로 당유(當有)의 과보를
능히 견인하는 업을 짓는 것이고
당유를 맺는 것을 ‘생’이라 이름하며
당래 수(受)에 이르기까지가 ‘노사’이다.
① 무명(無明)
논하여 말하겠다.
숙생(宿生) 중의 온갖 번뇌의 상태로부터 금생에 그 결과가 익을 때까지의 상태[의 5온]을 총칭하여 ‘무명(無明,avidyā)’이라고 한다.
어떠한 까닭에서 번뇌를 총칭하여 ‘무명’이라는 말로 설하게 된 것인가?
후유(後有)를 견인하는 행(行)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업은 혹(惑: 번뇌)에 의해 일어나 능히 후유를 견인하는 것으로, 혹이 없이 업만 존재하는 경우에는 후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후유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12)
[다시 말해] 온갖 ‘행’이 생겨날 때, 탐 등[의 번뇌]는 그것에 대해 모두 작용을 가지며, 그러한 ‘행’이 일어나는 상태에서는 결정코 무명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이라는 말로 번뇌를 총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오로지 전생(前生)의 혹(번뇌) 만을 총칭하여 무명이라 하고, 금생의 혹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인가?
오로지 전생의 혹만이 무명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탐 등의 번뇌가 아직 결과를 획득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세력이 감소하는 일이 없어 명리(明利)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결과를 이미 획득하였다면, 취과(取果)와 여과(與果)의 작용이 감소하여 명리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무명은 설혹 그 세력이 감손(減損)되지 않았을 때라도 역시 명리하지 않으니, 그것은 현행할 때조차도 역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전생의 온갖 혹은 금생에 이르러 이미 그 결과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세력이 감손되어 그 상이 명리하지 않으며, 이 같은 점에서 무명의 품류와 유사하기 때문에 오로지 전세의 혹만을 무명이라는 말로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행’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동일하게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어떤 개념[名想]을 일시 설정하는 것은 오로지 동류에 대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② 행(行)
숙생(宿生) 중의 복업(福業) 등의 상태로부터 금생에 그 결과가 익을 때까지의 상태를 총칭하여 ‘행(行,saṃskāra)’이라고 하는데, [본송] 첫 구에서의 ‘상태’라고 하는 말은 [이하] 노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 적용된다].13) 그리고 복업 등의 온갖 업의 상(相)에 대해서는 「변업품(辯業品)」중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리라.14)
어떠한 연유에서 유독 이러한 숙생의 업만을 ‘행’이라 이름하게 된 것인가?
명칭은 뜻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 뜻이 어떠한가?
이를테면 중연(衆緣)의 화합에 근거하여 이미 일어난 것, 혹은 전전(展轉)하는 세력이 화합하여 이미 생겨난 것이다.
또는 능히 연이 되어 결과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는 것, 혹은 이것이 화합하여 능히 결과에 대해 연이 되는 것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행’이라는 명칭에 수반된 실제적인 뜻이다.
즉 숙생 중에 [지은] 업의 과보가 금생에 익는 것은 ‘행’의 상이 원만하기 때문으로, 그래서 [숙생의 업만을] 유독 ‘행’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당래(미래)의 과보를 낳을 업에 대해서는 이미 부정[遮]한 셈이니(다시 말해 미래세의 ‘생’을 낳을 업에 대해서는 ‘행’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니), 그러한 업의 과보는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으로, 그 상이 아직 원만하지 않아 ‘행’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15)
어찌 일체[의 원인(이숙인을 비롯한 6因)]도 이미 자신의 결과를 낳았다[與]고 하지 않겠는가?
이숙인 자체도 다 이러한 [여과(與果)의] 상을 갖추고 있어 [‘행’이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일체[의 원인]에 대해서도 모두 ‘행’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체 원인의] [법]체[體]는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비업(非業)과 업으로서 앞서 생겨나 이미 결과를 획득한 것을 말한다.
비록 그러한 이치가 있을지라도 수승한 것에 대해서만 [‘행’이라] 말한 것이니, 업은 이숙인이 되어 결과를 견인하는데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생에서의 업과 그 결과는 거칠게 나타나 알기 쉽기 때문에, 이에 따라 과거 생의 결과와 [그것의 원인이 된] 업도 능히 믿고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이러한 업(과거생의 업) 만을 유독 ‘행’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비록 일체의 원인으로서 이미 결과를 낳은 것은 모두 ‘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이는 오로지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하는 온갖 이숙인만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행’이라고 하는 명칭이 [일체의 원인에] 두루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과실[不遍相失]은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 생(즉 현생)을 초래하는 숙생 중의 업만을 유독 ‘행’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은 잘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③ 식(識)
모태 등에서 바로 결생(結生)하는 순간의 일 찰나 상태의 5온을 ‘식(識,vijñāna)’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 찰나 중에서는 [5온 중] 식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은 오로지 의식(意識)일 따름이니, 이러한 상태 중에서는 5식의 생연(生緣)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6)
‘식’이란 무슨 뜻인가?
능히 ‘요별(了別)하는 것’을 말하니, 부처님께서 ‘능히 요별하는 것을 식취온(識取蘊)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에서
“나는 끝내 능히 ‘요별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지만,17)
여기서 ‘설하지 않는다[不說]’는 말은 드러내지 않는다[不顯]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의미는 자재(自在)하고 어떠한 연도 갖지 않을[無緣]뿐더러 다른 것에 근거하지 않고서 [그 자체로서] 성취되는 자아(自我)가 ‘요별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지
‘식’이 바로 능히 ‘요별하는 것’의 자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승의공경(勝義空經)』에서 별도의 작자를 부정하고서 제행(諸行) 자체가 바로 작자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18)
④ 명색(名色)
결생하는 순간의 식 이후와 6처가 생겨나기 전의 중간의 온갖 상태[의 5온]을 총칭하여 ‘명색(名色,nāma rūpa)’이라고 한다.19)
이미 신(身)과 의(意)의 2처(處: 色과 名)는 이미 생겨나 있으니, 어찌 마땅히 ‘이것(명색)은 4처가 생겨나기 전에 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힐난은 그렇지가 않으니, [식과 명색의 단계에서는] 아직 원만하거나 수승[圓勝]하지 않기 때문이다.20)
즉 앞의 두 단계에서는 처(處)[의 작용]이 감소하여 저열하지만, 6처의 단계 중에서는 ‘처’[의 작용]이 원만하고 수승한 것이다.
또한 6처의 단계에서 신(身)ㆍ의(意)의 2근은 비로소 완전한 상태[全分]를 획득하여 현행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6처의] 지분[支]으로 전개하는 단계에서 비로소 남ㆍ여의 근을 획득하며, 이때 온갖 식신(識身)이 모두 다 바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신처와 의처는 6처의 단계 중에서 [법체와 작용이] 비로소 완전한 상태로 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6처가 생겨나기 이전을 명색의 상태라고 설하게 된 것이니, 이러한 설은 참으로 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⑤ 6처(處)
안ㆍ이ㆍ비ㆍ설의 4근이 생겨난 때로부터 세 가지(根ㆍ境ㆍ識)가 화합하기 이전까지를 설하여 ‘6처(處,ṣad-āyatana)’라고 이름한다.
다시 말해 명색 이후 6처는 이미 생겨났지만, 근(根)ㆍ경(境)ㆍ식(識)이 아직 함께 화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6처가] 하ㆍ중ㆍ상품의 순서로 점차 증장하는 이러한 단계를 전체적으로 ‘6처’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6처만이 존재할 뿐] 온갖 식은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찌 ‘세 가지가 아직 함께 화합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어떠한 단계에서도 의식(意識)이 생겨나지 않는 일은 없으며, 명색의 단계에서는 신식도 역시 일어나는데, 하물며 6처의 단계에서는 어떠할 것인가?
[여기서] ‘세 가지가 화합하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은, 그 밖의 식신(識身)도 역시 일어날 수 있지만, 항상 수승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세 가지의 화합’이라는 말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이러한 단계(‘6처’) 중에서는 오로지 6처만이 수승하기 때문에, 6처에 근거하여 [12지의] 단계의 차별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⑥ 촉(觸)
박가범(薄伽梵)께서 설하기를
“근ㆍ경ㆍ식의 세 가지가 함께 화합하는 때를 설하여 ‘촉’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이미 화합하였을지라도] 아직 3수(受: 苦受ㆍ樂受ㆍ捨受)의 원인의 차별을 능히 요별하지 못하며, 다만 세 가지가 함께 화합한 그러한 상태[의 5온]을 일컬어 ‘촉(觸, sparśa)’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촉의 차별적인 뜻에 대해서는 뒤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21)
⑦ 수(受)
3수의 원인의 차별상을 이미 요별하였을지라도 아직 음탐(婬貪)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상태[의 5온]을 ‘수(受,vedanā)’라고 이름한다.
즉 이미 고ㆍ락 등의 연을 능히 요별하였지만 음애(婬愛)가 아직 작용[行]하지 않은 상태[의 5온]을 설하여 ‘수’라고 이름한 것이니, ‘수’에 관한 여러 차별적인 뜻에 대해서도 뒤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22)
⑧ 애(愛)
좋은 물건[資具]을 탐하거나 음애(婬愛)가 현행하였을지라도 아직 널리 추구(追求)하지 않는 이러한 상태[의 5온]을 ‘애(愛,tṛṣṇa)’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좋은 물건’이란 좋은 자재(資財:생활에 쓰이는 물자와 재료)를 말하니, 이를 탐하는 것과 음애하는 것을 총칭하여 ‘애’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애’의 뜻에 대해서는 「수면품」 중에서 널리 분별하는 바와 같다.23)
⑨ 취(取)
마음에 드는[可意] 여러 경계를 획득하기 위해 주변을 마구 치달아 추구하는 이러한 상태[의 5온]을 ‘취(取,upādāna)’라고 이름한다.
‘취’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의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 능히 취착(取著)하는 것이기 때문에 ‘취’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취’란] 바로 온갖 번뇌의 조작상[作相]인 상(想)의 업(業,작용)으로,
이를테면 욕계 계(繫)의 번뇌와 수번뇌(隨煩惱) 중 견(見)을 제외한 것을 ‘욕취’라고 이름하니, 예컨대 마차 등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또한 3계의 4견(見, 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ㆍ견취)을 일컬어 ‘견취’라고 하며,
그 같은 3계의 계금취를 ‘계금취’라고 이름한다.24)
그리고 색ㆍ무색계 계(繫)의 번뇌와 수번뇌 중 오로지 5견(見)을 제외한 것을 일컬어 ‘아어취’라고 하는데,25)
이와 같은 온갖 ‘취’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 중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26)
[나아가] 무명을 세워 별도의 ‘취’로 삼지 않은 것은, 자력무명(自力無明)은 맹리(猛利)하지 않기 때문이며, 아는 성질[解性]이 아니기 때문이며,27) 상응무명(相應無明)은 다른 번뇌의 힘이 능히 취하게 하기 때문이다.28)
또한 그 밖의 다른 견(見)을 떠나 계금취만을 [‘취’로] 설정한 것은 능히 업을 집기(集起)하는(일으키는) 힘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즉 업을 집기한다(일으킨다)는 측면[集業門]에서 그 힘이 [다른] 4견과 동등한데, 이러한 하나의 견(계금취)으로 말미암아 업이 타올라 성도(聖道)와 어긋나게 되고 해탈과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5견 중에] 계금취를 ‘취’라는 명칭으로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29)
온갖 ‘취’라는 말은 ‘집착하여 취[執取]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록 번뇌의 종류가 모두 다 집착하여 취하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두 가지 취(견취와 계금취)는 집착하여 취한다는 뜻이 뛰어나다.
그래서 [5견 중에서] 오로지 이 두 가지만이 ‘취’라는 말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이 두 가지는 다른 [‘견’]보다 더욱 견고하게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도 계금취가 [더욱] 강력하니, 마치 숨겨진 집착[蔽執]의 불길이 타올라 작용하는 것과 같기 때문으로, 바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그 밖의 다른 [4견]과 분리하여 별도의 ‘취’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4견도 모두 다 혜(慧)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에30) 그 밖의 다른 번뇌에 비해 ‘집착하여 취한다’는 뜻이 강한데, 그 밖의 다른 번뇌와 구별하기 위해 4견을 포섭하여 ‘견취(見取)’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5견 이외] 다른 모든 번뇌는 선정의 경지[定地, 색ㆍ무색계]와 선정이 아닌 경지[不定地, 욕계]에 따른 차별이 있기 때문에, 불선과 무기라는 원인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2취(욕취와 아어취)로 설정하게 되었다.
그 밖의 결택(決擇)해 보아야 할 점에 대해서는 『순정리론』 제26권에서 [설한 바와] 같다.31)
⑩ 유(有)
바로 이와 같은 ‘취’를 연으로 삼아 마음에 드는 여러 경계대상으로 마구 치달아 추구[馳求]할 때, 필시 결정적으로 당유(當有:미래존재)를 초래하는 업을 견인하여 낳게 된다.
즉 ‘애(愛)’의 힘으로 말미암아 ‘취(取)’가 증성될 때 선ㆍ불선의 여러 경계대상으로 마구 치달아 추구하여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할 만한 다수의 정(淨)ㆍ부정(不淨)의 업을 집적하는데, 이러한 업이 생겨나는 상태[의 5온]을 총칭하여 ‘유(bhāva)’의 지분[有支]이라고 한다.
여기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근거하여 능히 당래(미래)의 과보[當果]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유’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즉 ‘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업유(業有)와 이숙유(異熟有)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여기(12연기 중의 有支)서는 오로지 업유만을 취하니, 당래 ‘생’이라는 과보의 직접적 원인에 대해 분별하고 있기 때문이며, “‘취’를 연으로 하여 ‘유’가 있다”고 계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으로, 오로지 온갖 업유만이 ‘취’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즉 전제(前際)의 ‘행’이 무명을 반연하는 것이듯이, ‘취’를 연으로 하여 후제(後際)의 업유를 낳게 되는 것이다.32)
⑪ 생(生)
[이러한 업유로 말미암아] 바로 생유로 맺어지는 상태[의 5온]을 ‘생(jāti)’의 지분[生支]으로 설정하였다.
이는 곧 이 생 중에서 ‘행(行)’을 연으로 하였기 때문에 최초 결생(結生)하는 상태를 ‘식’의 지분[識支]이라고 이름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내생에서는 ‘유’를 연으로 삼기 때문에 최초 결생하는 상태를 일컬어 ‘생’의 지분이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는 이러한 명칭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즉 현세 [결생하는 상태]에 있어서는 ‘식’의 작용이 분명하며, 미래세 중에서는 ‘생’의 작용이 가장 현저하니, 자신의 작용 중 [가장] 현저한 것에 따라 지분[支]의 명칭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혹은 다른 계경 중에서
“‘생’은 괴롭기 때문에 천취(天趣)라는 후유의 업을 짓고자 하는 자도 ‘생’을 염사(厭捨)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당래의 과보를] ‘생’이라고 설하였다.
혹은 후유의 업은 모두 다 능히 괴로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임을 나타내어 그것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해 ‘생’이라고 설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따라 다른 경에서는
“‘생’ 등의 괴로움이 필경 적멸(寂滅)한 것을 반열반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이라는 말은 당래에 존재할 과보를 나타내는 것이다.
⑫ 노사(老死)
이러한 ‘생’의 지분 이후 당래 ‘수’의 지분[受支]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의 온갖 상태[의 5온]을 전체적으로 ‘노사(老死,jarā-maraṇa)’라고 이름하였다.
이는 즉 현재의 명색ㆍ6처ㆍ촉ㆍ수의 4지(支)와 같은 것으로, 미래생에서 이와 같은 네 단계를 일컬어 ‘노사’라 한 것은 당유(當有,미래존재)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싫어하여 버리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노사’라는 명칭으로써 당래의 과환(過患)을 나타내었던 것이다.33)
그래서 계경에서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5취온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노사가 일어난다는 뜻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의 결택(決擇)해 보아야 할 것은 『순정리론』 제27권에서 [설한 바와] 같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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