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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흑인 여성의 용기(로자파크스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 1955)
링컨의 역사적 노예해방 선언이 있은 지 1세기가 지났지만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처지는 사실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물론 경제적 형편은 전반적으로 좀 나아졌으나 사회적 차별은 여전했다. 특히 남부에서 흑인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백인들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백인들과는 다른 학교에 다녀야 했고, 공공장소에서는 백인들로부터 따로 서 있어야 했다. 버스를 탈 때에는 뒷문을 이용해야 했고, 공원의 수도꼬지는 백인과 흑인용이 구분되어 있었다. 화장실이 따로 되어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트루먼 대통령은 법무성에서 시민권을 다루는 권한을 강화 시키고, 1948년에는 군에서의 흑백 차별을 공식적으로 금지 시켰다. 아이제하워 대통령도 전임자를 이어받아 군대 내 흑백 차별 완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흑백 문제에 관한 그의 임기 중 최대 업적은 대법원의 한 판결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1954년 대법원은 공립학교 내 인종차별 문제에 관한 ‘브라운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을 심리하게 되었다. 1950년대 민권운동의 가장 큰 사건으로 간주되는 이 사안에 관하여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공립학교 내 흑백차별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흑백문제에 관해 50년 이상 표준적 관례로 이용되어온 1896년의 ‘프래시 대 퍼커슨 사건’의 판결을 뒤집는 것이었다. 프래시 대 퍼커슨 사건은 흑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차별이 아닌 구별일 뿐이며 평등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이른바 ‘구별되지만 평등이다’는 원칙으로서 흑인 차별이 위헌이 아님을 밝힌 유명한 판례이다.
플레시 대 퍼커슨의 판례의 번복을 발표하면서 얼 워런 대법원장은 흑백의 공공 교육시설이 따로 되어 있는 것은 명백히 위헌이라고 말하고, 모든 주가 빠른 시일 내에 이를 시정할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학생 실어 나르기’가 일부 주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흑인 또는 백인 밀집지역으로부터 학생들을 타 지역의 백인 또는 흑인 학교로 실어 날라 한 교실에서 흑인 과 백인 학생들이 같이 앉아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남부의 주들은 법원의 이러한 결정과 명령을 무시했다. 아이젠아워 대통령 역시 법이 수백 년의 관습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대법원의 명에 불복하는 주정부에 특별한 압력도 가하지 않았다. 195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흑백 통합학교를 다닌 흑인 아동들은 전체의 1%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흑인 인권 신장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1957년에 제정된 시민권 규약은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과 투표행의를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방해하는 관리들에게 법무장관이 이의 시정을 위한 강제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동 법에 의거 법무성 산하에 흑인 인권신장과 흑백 차별 철폐 문제를 다루는 시민권 위원회 실무 담당부서가 설치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흑인들 사이에도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 스스로 나서고 수백 년 된 흑백 차별의 사회적 관습에 용기 있게 도전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로자 파크스라는 한 여인의 용기 있는 행동은 1960년대 절정을 이룬 흑인 인권운동의 선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로자 파크스가 살던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는 오랫동안 버스의 좌석이 흑백으로 나뉘어 있었다. 1955년 12월 1일 한 버스에 올라탄 로자 파크스는 백인만 앉을 수 있는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운전사와 승객들이 자리를 옮기라고 말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로자 파크스는 곧 경찰에 체포되었다.
때마침 흑인 인권 신장 문제가 민감한 사안으로 떠오른 시점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파장을 몰고 왔다. 곳곳에서 로자 파크스의 행동을 지지하고 흑백 차별의 철폐를 외치는 시위와 항의가 잇달았다. 몽고메리 거주 흑인들은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의 지도아래 시내버스 안타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흑인들이 시내버스 타기를 거부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내와 교외를 걸어가는 모습이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와 흑인민권 운동가들이 로자 파크스 사건을 법의 심판대로 끌고 갔다. 이 미묘한 사건에 대해 연방 대법원은 1년 후 버스 내에서의 흑백 구별이 위헌이라고 선고했다. 흑인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지금까지 난공불낙으로 여겨졌던 인종 차별의벽이 자신들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노력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노력을 성공적으로 이끈 킹 목사가 하루아침에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고, 그를 중심으로 196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 신장 운동의 거센 물결이 일어 흑인 지위향상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모든 것이 로자 파크스라는 한 여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개인의 작은 용기가 때로는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뒤바꿀 수 있는 위대한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2) 위기일발 핵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1962)
1960년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은 하나의 작은 혁명이었다.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인기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노회한 정치가, 그리고 그들이 하는 낡은 정치는 조금씩 싫증을 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로운 개척정신(New Frontier)을 외치는 젊고 잘 생긴 대통령 후보에 미국인들은 열광했고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 역시 미국의 정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능력을 의심받게 한 의외의 사건이 발생했다.
1961년 4월 케네디는 공산주의자 카스트로가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쿠바에 대한 은밀한 침공계획을 허락했다. 이른바 피크만 사건으로 불리는 이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고, 케네디 행정부는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더불어 미소 관계가 이 사건으로 크게 악화되었다. 1961년 6월에 있었던 케네디와 흐르시초프의 회담에서 흐루시초프가 보여준 위협적 태도는 이들의 사이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소련이 쿠바에 장거리 공격용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 한 1962년 10월에 최악의 사태로 발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10월 어느 날 케네디 대통령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국가 안전보장 보좌관 멕조지 번디가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CIA 정보를 알렸다. 소련의 그러한 움직임은 당시 몇 주일동안 정가와 언론에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번디가 가져온 CIA 항공사진에는 미사일 기지의 여러 시설물과 건설장비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전문가들은 일주일 내에 그 기지가 작동 가능하며, 이는 미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날 오전 케네디 대통령은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서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비롯한 대다수 참모들이 소련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들여오지 못하도록 해군력을 동원해 쿠바 해안을 봉쇄할 것을 건의했다. 이는 미국 해군이 소련 선박을 정지시켜 무기 탑재여부를 검색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경우에 따라 심각한 무력 충돌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케네디는 전쟁의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뒷마당에 소련이 핵무기를 설치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10월 22일 케네디는 방송을 통해 쿠바를 봉쇄할 것을 전 세계에 알렸다.
소련은 당황했다. 미국이 반발할 것을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즉각적으로 대응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련 정부는 쿠바의 미사일 기지는 방어용일 뿐이며 공격용 장거리 미사일이나 핵무기가 이곳에 배치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러는 동안에도 기지 건설은 가속화 되었고 핵무기를 탑재한 것으로 의심되는 소련의 선박이 쿠바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어 감에 따라 군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10월 16일 쿠바를 향해 항진하던 소련 선단이 속도를 늦추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돌았다. 그러나 미사일 건설 공사는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같은 날 T,V 뉴스에서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약속만 한다면 소련은 기지 건설을 포기할 것이라는 소련정부의 비공식 발표가 보도되었다. 뉴스 방영 2시간 후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으로부터 케네디 대통령에게 전보가 날아들었다. 여기서 미국이 쿠바의 항구 봉쇄를 해제하고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소련도 쿠바에서 손을 뗄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다음날 두 번째 전보가 도착했다. 소련이 쿠바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터키 내 나토 군사기지를 철수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케네디는 그러한 소련의 압력에 절대 굴복할 수 없다고 생각 쿠바 봉쇄와 미사일 기지에 대한 정찰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이 와중에 미국의 정찰기 한 대가 쿠바 상고에서 격추되고 핵무기를 탑재한 것으로 여겨지는 소련 선박이 봉쇄망을 치고 있는 미 해군 함정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바야흐로 미, 소간 무력 충돌이 경각으로 다가왔다.
정부 내 강경론자들이 소련의 도발을 기다릴 것도 없이 미국이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선제공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한 케네디 대통령은 이런 건의를 묵살하고 소련과 최후의 담판을 시도했다. 미국의 입장은 두 개의 전문 중 첫 번째 전문에서 제시된 조건만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케네디 대통령의 전문이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전달되었다.
공은 이제 소련에게 넘어갔다.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여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전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강경하게 나가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야 할 것인가, 결국 흐루시초프는 굴복했다. 10월 28일 흐루시초프는 쿠바 미사일 기지의 폐쇄와 소련 무기의 철수를 약속하고 미국 관리들이 기지 폐쇄상황을 감시하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약속대로 기지 내 미사일 시설들이 제거되고 미국의 쿠바 해상봉쇄도 해제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2주간의 핵전쟁 위기가 무사히 해소되었다.
쿠바 사태는 미국이 국력의 절정에서 전 세계에 미국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앞서 쿠바에서의 군사작전의 실패로 위신을 구겼던 케네디 대통령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그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고 자유, 민주, 인권의 미국적 가치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의 물결이 다시 한 번 전국을 휩쓸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위기가 해소되면서 미소 관계가 오히려 좋아졌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힘의 대결에서 열세를 뼈저리게 절감한 소련은 당분간 대미 강경노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 역시 소련을 상대로 이러한 위험한 도박을 다시는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 백악관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전화, 이른바 ‘핫라인’이 개설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분위기가 10년 후에 데탕트라는 동서 진영 간 부분적 화해로 이어졌음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3) 못 다 핀 미국의 희망, (케네디 암살 1963)
영웅은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더욱 영웅이 된다. 링컨이 그러했고, 미국의 새로운 영웅 케네디가 그랬다. ‘뉴 프런티어’ 곧 새로운 개척정신을 외치며 일약 미국의 희망으로 등장한 케네디는 미처 희망을 펼쳐 보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 온 두 발의 총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1917년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린에서 금융업자 조셉 케네디의 4남 5녀 중 둘째로 태어난 존 F, 케네디는 처음에는 그의 형 조셉 2세에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조셉은 하버드대학과 법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찍부터 정치에 뛰어들어 젊은 나이에 이미 미국을 이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존 역시 형의 뒤를 이어 하버드해학에 진학하여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1940년 대학을 졸업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대독 유화정책을 비판하는 학위논문을 제출했는데, 이 논문은 후일 <왜 영국은 잠들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되어 국제정치학 분야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존은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는데 전투 중 그의 배가 일본군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말았다. 케네디는 등에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무사히 탈출하도록 도와주고 마지막으로 배에서 탈출했다. 이 공로로 그는 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상 치료를 위해 보스턴의 한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역시 공군 장교로 유럽 전투에 참전했던 형 조셉이 폭탄 투하 임무를 수행 중 전사했다. 이제 케네디가의 희망은 동생 존에게 돌아갔다.
1946년 케네디는 보스턴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사람들은 그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보았으나 참모들의 헌신적 도움과 열정적 유세에 힘입어 뜻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52년 35세의 나이로 상원의원에 도전, 공화당의 현역 상원의원 헨리 롯지를 밀어내고 역사상 최연소 상원의원에 이 되었다. 의회에서 그는 빛나는 의정활동으로 실용적 자유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이미 유명 인사가 된 그는 1953년 재크린 부비애라는 미모의 여기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려 다시 한 번 세간의 화재를 불러 일으켰다.
1958년 압도적 표차로 상원의원에 재선된 그는 드디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당시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는 데는 두 가지 장애가 있었다. 하나는 너무 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카롤릭 신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젊고 참신한 면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이어 본선에서도 노회한 공화당 후보 닉슨을 물리치고 미 역사상 최초의 카돌릭교도 대통령,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의 취임 연설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연설이다. “조국이 나에게 무엇을 해 줄지를 묻지 말고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라”라는 구절이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취임연설은 주로 대외 정책에 대한 그의 새로운 계획을 밝히는 데 할애되었다. 취임 후 몇 주일 만에 ‘평화봉사단’과 ‘진보를 위한 동맹’의 창설을 제안했다. 이 둘은 모두 후진국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원조 정책에 관계된 것이다.
피그만 사건은 그에게 일시적이나마 정치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쿠바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하면서 그의 인기는 단숨에 회복되었다. 1963년에는 미국 주도의 핵실험 금지조약을 성사시켰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커지는 인도차이나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외교정책은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그는 국내적으로도 여러 혁신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교육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을 확대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시작했으며 흑인과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한 여러 획기적인 조치들을 단행했다. 여기에 대해 의회가 제동을 걸고 나오자 그는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963년 택사스로 선거 유세 여행은 이런 목적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오후, 택사스 주 댈러스, 무개차를 타고 환호하는 군중 사이를 지나가던 그는 리 오스왈드가 쏜 총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오스왈드는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었으나 이틀 후 그는 또 다른 암살자의 손에 살해되었다.
온 나라, 아니 전 세계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다만 한사람의 젊고 유능한 인물을 잃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 미래에 대한 평화와 진보의 이상을 함께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후 베트남전과 경기 침체의 늪에 빠져들면서 이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사람들의 아쉬움은 더욱 컸다. 그의 동생이자 촉망받는 정치가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형의 뒤를 이어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역시 유세도중 암살자의 손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네 형제 중 막내 테드를 제외한 세 명이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형제, 자매, 조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정치가, 법률가, 사업가 등으로 명성을 쌓았고 사람들은 케네디 가문을 선망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명성 못지않게 각종 사고와 질병 등으로 불행한 삶을 살다 간이들도 많다. 사람들은 이것을 케네디가의 비극이라 불렀다.
그의 암살 직후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설립된 특별조사위원회는 오랜 조사와 심리 끝에 암살자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케네디의 암살에 어떤 음모가 있었다고 믿고 있다. 마피아의 소행이다. 소련의 짓이다, 심지어는 미 중앙정보부(C,I,A)가 개입 돼있다는 등, 오늘날까지도 확인되지 않은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다. 그의 장례식에는 세계의 모든 국가가 조문 대표를 보냈고,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첫댓글 로자 파크스의 이야기,쿠바이야기,케네디대통령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몇년전에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에를 갔을때 오스왈드가 케네디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하여
숨어서 총을 쏜 "Book store 빌딩 3층에 마련된 그당시 상황을 상영하는 짧은 동영상을 보며
재크린 여사가 흉탄을 맞은 케네디를 안고 " Oh No " 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고 그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