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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8권
17. 도섭품 ②[1]
[6바라밀의 차별]
[釋] 이미 여섯 가지 바라밀을 닦아 익힘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여섯 가지의 바라밀의 차별에 각자 여섯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자기 성품이요, 둘째는 인(因)이요, 셋째는 과(果)요, 넷째는 업이요, 다섯째는 서로 응함이요, 여섯째는 품류(品類)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그에게 보시함과 함께 생각함과
두 가지가 이루어짐과 또한 두 가지를 포섭함과
함께 인색하지 않음에 머물기 때문과
법의 보시와 재산 보시와 두려움 없음의 셋이다.
[釋] 이 게송은 보시 바라밀의 여섯 가지의 뜻을 밝힌 것이다.
‘그에게 보시한다’고 함은 이는 보시의 자기 성품이니 자기의 물건으로써 모든 받는 이에게 베풀기 때문이다.
‘함께 생각한다’고 함은 보시의 인이니 탐함이 없는 선근으로 말미암아 생각과 더불어 함께 나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이루어진다’고 함은 보시의 과보이니 재물이 성취되고 몸이 성취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몸이 성취된다고 말한 것은 갖추어 목숨 등의 다섯 가지의 일을 섭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일은 경에서 설한 먹을 것을 베푸는 등의 다섯 가지의 일로서,
첫째는 목숨을 얻고, 둘째는 모습을 얻고, 셋째는 힘을 얻고, 넷째는 즐거움을 얻고, 다섯째는 변재(辯才)를 얻는다고 함이 그것이다.
‘두 가지를 포섭한다’고 함은 보시의 업이니 자기와 남이라는 두 가지를 섭수함이 만족하고 큰 보리가 만족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함께 인색하지 않음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함은 보시의 서로 응함이니 구족하게 인색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머물기 때문이다.
‘법과 재물과 무외(無畏)의 세 가지’라 함은 보시의 품류이며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시(法施)요, 둘째는 재시(財施)요, 셋째는 무외시(無畏施)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뜻을 지혜 있는 자는 마땅히 익힐 줄 알아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여섯 가지의 지(支)와 유(有)의 변(邊)을 멸함과
착한 길과 가짐 등과
복의 무더기가 구족하기 때문과
두 가지의 득이 두 가지가 된다.
[釋] 이 게송은 계 바라밀의 여섯 가지 뜻을 밝힌 것이다.
‘여섯 가지의 지(支)’라고 함은 계의 자기 성품이니, 구족계(具足戒)에 머묾으로써 학(學)을 받아서 여러 학이 구족하기 때문이다.
‘유(有)의 변(邊)을 멸한다’고 함은 계(戒)의 인(因)이다. 멸한다고 함은 곧 열반이니, 열반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유의 변을 건너서 계의 행함을 받기 때문이다.
‘착한 길’이라고 함은 계의 과보이니, 착한 길과 뉘우치지 않음 등의 차례의 다섯 가지 심주(心住)를 계로 인하여 얻기 때문이다.
‘가짐 등’이라 함은 계의 업이며 계에는 세 가지의 능함이 있다. 첫째는 능지(能持)이니 능히 일체 공덕을 마음대로 가짐으로 말미암아 대지(大地)와 같기 때문이요, 둘째는 능정(能頂)이니 능히 모든 번뇌의 불을 그치게 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셋째는 무외(無畏)이니 능히 일체 두렵고 미움 등의 모든 죄의 연기(緣起)를 일으키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온갖 죄를 일으킴을 두려워하겠는가?
‘복의 무더기가 구족하기 때문’이라 함은 계와 서로 응하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몸과 입과 뜻의 업이 다 착한 행을 행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득(得)이 두 가지가 된다’고 함은 계의 품류이다. 두 가지의 득이라 함은 이른바 수득(受得)과 법득(法得)이다. 수득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보호에 포섭되고, 법득은 선(禪)의 보호와 무류(無流)의 보호에 포섭된다.
게송으로 말한다.
갚지 아니함과 참음과 지(智)의 성품과
큰 자비와 법에 의지함과
다섯 가지의 덕과 두 가지의 이익과
구족하고 뛰어남과 그 세 가지이다.
[釋] 이 게송은 인욕 바라밀의 여섯 가지의 뜻을 밝힌 것이다.
‘갚지 아니함과 참음과 지의 성품’이라고 함은 인욕의 자기 성품이니,
첫째는 갚지 아니함이요, 둘째는 참음이요, 셋째는 지이다. 이 셋은 순서대로 세 가지 인욕의 자기 성품이다.
갚지 않는다고 함은 남의 헐뜯음을 참는 자기 성품이다.
참음이라 함은 괴로움을 편히 여기는 데 참는 자기 성품이다.
지(智)라 함은 법을 관찰하는 데 참는 자기 성품이다.
‘큰 자비와 법에 의지한다’고 함은 참는 인이니,
첫째는 큰 자비로 인을 삼고,
둘째는 법을 의지함으로 인을 삼는다.
법을 의지한다고 함은, 이른바 계를 받고 보고 들음이 많은 것이다.
‘다섯 가지의 덕’이라고 함은 참음의 과이니, 경에서 말하기를 참으면 다섯 가지의 과를 얻는다고 하였다.
첫째는 미워하고 질투함이 적음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남의 뜻을 무너뜨리지 않음을 얻는 것이고,
셋째는 기뻐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고,
넷째는 임종할 때에 뉘우치지 않음을 얻는 것이고,
다섯째는 몸이 죽으면 하늘에 태어남을 얻는 것이다.
‘두 가지의 이익’이라 함은 참음의 업이니,
세 가지의 참음으로 말미암기에 능히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두 가지의 업을 짓는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그 두 가지의 뜻인 자기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함을 짓는다’고 하였다.
만일 남이 성냄을 알면 그에게 대해 스스로 쉬는 것이다.
‘구족하고 뛰어나다’고 함은 참음의 서로 응함이다.
행하기 어려운 것을 참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이르며, 가장 뛰어남을 구족한 것을 서로 응한다고 이른다.
경에서 말하기를 참음은 행하기 어려운 최상의 것이라 하였다.
‘그 세 가지’라 함은 참음의 품류이며 사람에게 세 가지의 품류가 있으니,
첫째는 남이 헐뜯는 것을 참음이요,
둘째는 괴로운 것을 편히 여기는 참음이요,
셋째는 법을 관하는 참음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착함에서와 바른 용맹에서와
믿음이 있고 욕망이 있기 때문과
염(念)이 더함과 대치함과
덕을 갖춤의 일곱 가지이다.
[釋] 이 게송은 정진 바라밀의 여섯 가지의 뜻을 밝힌 것이다.
‘착함에서와 바른 용맹’이라고 함은 정진의 자기 성품이다. 다른 업 가운데의 용맹을 막기 때문에 착함이라고 말하고, 외도들의 해탈 가운데의 용맹을 제거하기에 바르다고 말한다.
‘믿음이 있고 욕망이 있다’고 함은 정진의 인이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하여서 정진이 일어남을 얻기 때문이다.
‘염이 더한다’고 함은 정진의 과이니 염(念)과 정(定)들의 공덕이 다시 정진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대치한다’고 함은 정진의 업이니 경 가운데서 말하기를 정진을 일으키는 자는 능히 즐겁게 머묾을 얻어서 온갖 악인 착하지 못한 법에 섞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덕을 갖춘다’고 함은 정진과 서로 응하는 것이니 탐함이 없는 등의 공덕을 갖춤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라 함은 정진의 품류이며 사람에게는 7품(品)의 정진이 있으니,
첫째는 계를 배우는 정진이요,
둘째는 선정을 배우는 정진이요,
셋째는 지혜를 배우는 정진이요,
넷째는 몸의 정진이요,
다섯째는 마음의 정진이요,
여섯째는 끊어짐이 없는 정진이요,
일곱째는 존중의 정진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음이 머물고, 염이 나아가고
즐거움이 생겨나고, 또한 신통과 머묾
모든 법의 상수(上首)
그 종류가 세 가지요, 다시 세 가지이다.
[釋] 이 게송은 참선 바라밀의 여섯 가지의 뜻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머문다’고 함은 선정의 자기 성품이니 마음이 안에 머묾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염(念)이 나아간다’고 함은 선정의 인이니 염이 있기 때문에 인연이 있어서 잊지 아니하고 나아감에 의지한다. 그러기에 선정에서 일어남을 얻는다.
‘즐거움이 난다’고 함은 선정의 과이니 번뇌에서 떠나고 물러서는 방편이어서 떠나는 과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통과 머문다’고 함은 선정의 업이니 신통이라 함은 다섯 가지의 신통을 이르고, 머문다고 함은 세 가지의 머묾을 이른다.
즉 성인에 머물고 하늘에 머물고 범행(梵行)에 머무는 것이니 선정이 능히 다섯 가지의 신통과 세 가지의 머무는 데 다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상수’라 함은 선정이 서로 응하는 것이니 경 가운데서 말하기를 삼마제(三摩提)는 모든 법의 상수라고 하였다.
‘종류가 세 가지요, 다시 세 가지’라고 함은 선정의 품류이며,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세 가지 품이 있으니,
하나는 깨달음이 있고 관이 있는 것과
깨달음은 없고 관이 있는 것과
깨달음도 없고 관도 없는 것의 세 가지 품이요,
또 하나는 기쁨을 함께 하고 즐거움을 함께 하고 버림을 함께 하는 세 가지 품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바로 선택함과 더불어 선정으로 가지는 것과
잘 해탈함과 혜명(慧命)을 말함
모든 법의 상수와
그에게 또한 세 가지가 있다.
[釋] 이 게송은 지혜 바라밀의 여섯 가지의 뜻을 밝힌 것이다.
‘바로 선택한다’고 함은 지혜의 자기 성품이다. 삿된 업과 세간의 아는 것의 업을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바로 출세간의 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선정으로 가진다’고 함은 지혜의 인이니 선정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가지고 실답게 법을 알기 때문이다.
‘잘 해탈한다’고 함은 지혜의 과이니 이른바 염오된 데서 해탈을 잘 얻는다. 왜냐하면 세간과 세간을 벗어남과 크게 세간을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바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혜명을 말한다’고 함은 지혜의 업이니 지혜의 목숨과 잘 말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지혜의 목숨이라고 함은 위없는 바른 선택으로써 생명을 삼기 때문이다. 잘 말한다고 함은 바른 법을 바르게 말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상수’라 함은 지혜와 서로 응함이니 경 가운데서 말하기를 반야라는 것은 일체 법 가운데의 최상이라 한 것이다.
‘또한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지혜의 품류이니 사람에게는 세간과 세간을 벗어남과 크게 세간을 벗어나는 세 가지 품이 있어서 바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6바라밀의 섭행]
이미 여섯 가지 바라밀의 차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의 섭행(攝行)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의 희고 청정한 법은
어지러움과 정(定)과 함께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의 바라밀은 종합하여 세 쌍(雙)이니
이 품류가 다 포섭한다.
[釋] ‘일체의 희고 청정한 법’이라 함은 이른바 보시 등의 여러 행법(行法)이니 그 행법이 총섭(摠攝)해서 세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어지러움이요, 둘째는 선정이요, 셋째는 어지러움과 선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어지러운 것이라 함은 앞에 있는 두 바라밀을 섭수한 것이니, 보시 바라밀과 지계 바라밀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정(定)이라 함은 뒤의 두 바라밀을 섭수한 것이니, 그것은 선정 바라밀과 지혜 바라밀은 정하여 있기 때문이요,
어지러움과 정함이 함께 한다고 함은 중간의 두 바라밀을 섭한 것이니, 그것은 인욕 바라밀과 정진 바라밀은 정하기도 하고 정하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6바라밀의 치장]
이미 여섯 가지 바라밀의 섭행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의 치장(治障)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보시 바라밀은 일곱 가지의 집착을 벗어났으니
집착하지 않은 것도 일곱 가지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머지 다섯 가지의 바라밀도
장애를 다스림은 일곱 가지가 다 그러하다.
[釋] ‘보시 바라밀은 일곱 가지의 집착을 벗어났으니 집착하지 않은 것도 일곱 가지로 말한다’고 함은
보시 바라밀에 집착하는 것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재(資財)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는 만완(慢緩)에 집착하는 것이고,
셋째는 편집(偏執)에 집착하는 것이고,
넷째는 보은(報恩)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과보(果報)에 집착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장애(障碍)에 집착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산란(散亂)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장애에 집착한다고 함은, 이른바 보시 바라밀에서 대치하는 탐욕과 수면(隨眠)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산란에 집착한다고 할 때 산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의(下意) 산란이니 소승을 구하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분별(分別) 산란이니 3륜(輪)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보시 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이 일곱 가지의 집착을 멀리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일곱 가지의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머지 다섯 가지의 바라밀도 장애를 다스리는 데 일곱 가지가 다 그러하다고 함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함은
계를 가짐 등의 다섯 가지 바라밀에 또한 각각 일곱 가지의 집착이 있으며,
일곱 가지의 집착을 벗어나기에 또한 각각 일곱 가지의 집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 가운데 차별이 있는 것은 보시 바라밀을 번복시켜서 자재에 집착함을 벗어나게 하고 계를 가짐 등의 다섯 가지 바라밀이 첫 번째의 집착을 벗어나게 한다.
이른바 계를 지킴으로써 계를 파괴하는 집착에서 벗어나고 참음으로써 성내는 집착에서 벗어나며, 정진으로써 게으름의 집착에서 벗어나고 선정으로써 산란(散亂)한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며, 지혜로써 어리석음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한다.
또는 계를 가짐 등으로써 장애의 집착에서 벗어난다고 함은 장애와 수면(隨眠)을 다 끊어 없애기 때문이요,
또는 계를 가짐 등으로써 분별의 집착에서 벗어난다고 함은 그 3륜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6바라밀의 공덕]
이미 여섯 가지 바라밀의 치장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의 공덕에 대해 말하겠다.
이 가운데서 먼저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상 몸과 목숨을 버려서
구하기를 떠나고 남을 애민(哀憫)하기 때문이니
보시로 인하여 보리를 세우고
지혜는 보시를 섭수하여 다함이 없다.
[釋] 이 게송은 보시 바라밀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항상 몸과 목숨을 버린다’고 함은 이른바 모든 보살이 온갖 경우에 자기의 몸과 목숨을 베풀어서 모든 구하는 자에게 주기 때문이다.
‘구함을 떠나고 남을 애민하기 때문’이라 함은 은혜에 보답함과 과보를 좋아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큰 자비를 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보시로 인하여 보리를 세운다’고 함은 이 보시로 인하여서 일체의 중생들을 3승(乘)의 보리로 건립하기 때문이다.
‘지혜가 보시를 섭수하여 다함이 없다’고 함은 이 보시가 분별이 없는 지혜를 섭수함이 되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르며 그 복이 다함없고 다함없게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시 금계(禁戒)와 부지런함을 수호하여
계와 좋은 곳에 남을 여의며
계로 인하여 보리를 세우니
지혜가 계를 섭수하여 다함이 없다.
[釋] 이 게송은 계율을 지키는 바라밀이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항상 금계와 부지런함을 수호한다’고 함은
보살에게 세 무더기의 청정한 계가 있으니,
첫째는 섭율의계(攝律儀戒)요, 둘째는 섭선법계(攝善法戒)요, 셋째는 섭중생계(攝衆生戒)이다.
처음의 계는 금지함으로 체를 삼고,
뒤의 두 계는 부지런하고 용기가 있음으로 체를 삼는다.
여러 보살이 모든 경우에 항상 수호하기 때문이다.
‘계와 좋은 곳에 남을 여읜다’고 함은 이른바 계를 얻는 데 집착하지 아니하고 과보를 사랑함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상 남의 헐뜯음을 참으면서
구함과 두려움과 무능(無能)을 벗어난다.
인욕으로 인하여 보리를 세우니
지혜가 인욕을 포섭하여 다함이 없다.
[釋] 이 게송은 인욕 바라밀이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항상 남의 헐뜯음을 참는다’고 함은 여러 보살들이 모든 경우에 만일 일체의 중생들이 온갖 극히 괴로운 일을 가지고 와서 보살을 헐뜯어도 보살은 다 능히 참고 받기 때문이다.
‘구함과 두려움과 무능을 벗어난다’고 함은 은혜에 보답함을 구하지 아니하고 선취(善趣)에 태어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포외(怖畏)를 위해서 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음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상 맹세코 부지런히 지어서
도적을 죽이는 것을 위없게 여기며
정진으로 인해서 보리를 세우니
지혜가 정진을 포섭하여 다함이 없다.
[釋] 이 게송은 정진 바라밀이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항상 맹세코 부지런히 짓는다’고 함은 여러 보살들이 비교할 수 없이 정진을 닦는 것이다.
정진에는 두 가지의 자기 성품이 있으니,
하나는 큰 서원(誓願)으로 자기 성품을 삼는 것이요,
또 하나는 부지런한 방편으로 자기 성품을 삼는 것이다.
‘도적을 죽이는 것을 위없게 여긴다’고 함은 보살이 정진을 닦는 것은 다만 자기와 남의 번뇌의 도적을 죽여서 위없는 보리를 얻기 위함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상 여러 선정을 익혀서
선정을 버리고 하처(下處)에 난다.
선정으로 인하여 보리를 세우니
지혜가 선정을 섭수하여 다함이 없다.
[釋] 이 게송은 선정 바라밀이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항상 여러 선정을 익힌다’고 함은 모든 보살이 끝없는 삼마제(三摩提)를 섭수하여 닦아 익히기 때문이다.
‘선정을 버리고 하처에 난다’고 함은 위없는 선정에 즐겁게 머묾을 버리고 와서 하열(下劣)한 곳에 태어남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큰 자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항상 참다움과 그 밖의 경계를 요달하여서
부처님께서 끊으시어 오히려 집착하지 않도록 하였다.
지혜로 인하여 보리를 세우니
자비가 지혜를 섭수하여 다함이 없다.
[釋] 이 게송은 지혜 바라밀이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항상 참다움과 그 밖의 경계를 요달한다’고 함에서 참을 요달하는 것은 이른바 제일의제의 평등한 모양으로서 인(人)과 법의 두 가지 무아(無我)의 지혜를 이른 것이다.
그 밖의 경계라는 것은 이른바 끝없는 이름과 모양의 차별을 이른 것이다.
‘부처님께서 끊으시어 오히려 집착하지 않는다’고 함은
부처님께서 끊으셨음은 이른바 열반이니, 여러 보살들이 지혜를 닦을 때에 오히려 부처님의 열반도 집착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생사를 구함이겠는가?
이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은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포섭하였으며, 무여열반의 공덕과 다함없는 지혜 바라문은 큰 자비로써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아 공덕이 다함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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