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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계경 제9권
3.6. 주품(住品)
1) 보살의 네 가지 깨끗함
보살의 사정(四淨)이란
첫째 신정(身淨)이고, 둘째 연정(緣淨)이며, 셋째 심정(心淨)이고, 넷째 지정(智淨)이다.
영원히 습기(習氣)를 단절하고 청정한 근기를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몸이 자재(自在)함을 얻어서 태어남과 죽음[生滅]에 자유로우면 이것을 신정이라 한다.
신통자재함을 연정이라 한다.
선법을 닦아 마음이 번뇌로부터 떠나면 이것을 심정이라 한다.
모든 법을 알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으며, 자재한 지혜를 얻어서 모든 법행(法行)을 알면 이것을 지정이라 한다.
2) 보살의10력
보살은 이 네 가지의 청정법에 의해서 십력(十力)을 얻는다.
무엇을 십력이라 하는가?
첫째 시처(是處)와 비처(非處)를 아는 것이고,
둘째 모든 업을 아는 힘이며,
셋째 모든 선정과 해탈을 아는 힘이고,
넷째 모든 근(根)의 날카로움과 무딤을 아는 힘이며,
다섯째 모든 중생해(衆生解)를 아는 힘이고,
여섯째 중생계를 아는 힘이며,
일곱째 지극한 곳의 도를 아는 힘이고,
여덟째 과거세(過去世)를 아는 힘이며,
아홉째 천안력(天眼力)이고,
열째 누진력(漏盡力)이다.
① 처ㆍ비처를 아는 힘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은 진실하여 어긋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 如來ㆍ如去)라 한다.
만일 선과(善果)와 불선과(不善果)의 진실인연(眞實因緣)ㆍ진실체(眞實體)ㆍ진실성(眞實性)ㆍ진실주(眞實住)ㆍ진실생(眞實生)을 설하면
이것을 시처(是處)의 선과와 불선과요 인(因)으로 인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고,
이것을 비처(非處)로서 교만한 지혜를 깨뜨리는 것이라 하며,
진실지(眞實智)라 하고, 일체지(一切智)라 하며, 무애지(無礙智)라 하고, 정지(淨智)라 하며, 이만지(離慢智)라 한다.
차례로 셈하므로 제일력(第一力)이라 하고,
위가 없으므로 일체행(一切行)이라 하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모든 악마를 깨뜨리므로 힘[力]이라 하고,
진실로 장엄하여 자재함을 얻으므로 구족(具足)이라 이름하며,
능히 모든 공포를 깨뜨리므로 열반이라 이름하고,
팔정도(八正道)의 인(因)을 인하여 모든 고뇌를 깨뜨리므로 무상(無上)이라 이름하며,
법대로 안주하므로 진실이라 하고,
스스로 청정한 법을 얻어서 중생을 연민하여 풀어 설하므로 범륜(梵輪)이라 한다.
범륜은 여래(如來)라 이름하며,
여래는 청량(淸凉)이라 이름하며,
청량은 계(戒)라 이름한다.
청정한 계를 받아 지키어 계대로 설하면
이것을 청정한 정설(正說)ㆍ실설(實說)ㆍ이익설(利益說)ㆍ광대설(廣大說)ㆍ무애설(無礙說)ㆍ일체설(一切說)ㆍ필경설(畢竟說)ㆍ무상설(無上說)ㆍ무루설(無漏說)ㆍ무위설(無爲說)ㆍ외설(外說)ㆍ현전설(現前說)이라 이름한다.
이런 관계로 대사자후(大師子吼)라 이름하고, 선력방편(善力方便)이라고 이름하며, 진실인(眞實因)이라고 이름한다.
② 업을 아는 힘
진실의 인연으로 해서 진실의 과(果)를 얻는다.
이른바 인과(人果)ㆍ천과(天果) 및 무상과(無上果)이다.
무상과이므로 무상(無上)이라 한다.
만일 업을 짓고 나서 얻는 과를 증장하면 과거라 하며,
업을 짓고 나서 과보를 받지 않더라도 역시 과거라 한다.
아직 업을 짓지 않았으나 지으려고 하며, 아직 과를 얻지 않았으나 얻고자 하면 이것을 미래라 하며,
이미 지은 업에 대해 아직 과보를 얻지 않았으며, 과보를 얻은 업이 이미 멸해서 지나가 버렸으면 이것을 현재라 한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업에 세 가지가 있으니, 몸ㆍ입ㆍ뜻의 과를 말한다.
몸ㆍ입ㆍ뜻의 과는 어느 곳에서든 몸ㆍ입ㆍ뜻의 선업(善業)을 지으면 이곳에서 과를 얻고,
어느 곳에서나 몸ㆍ입ㆍ뜻의 악업(惡業)을 지으면 이곳에서 과를 얻는다.
이것을 시처(是處)라 한다.
순일(純一)하고 선(善)한 업은 악과(惡果)를 얻지 않는데 이것을 비처(非處)라 이름한다.
선하지 못한 악업은 선과(善果)를 얻지 못하는데 이것을 비처라 이름한다.
인업(人業)은 지옥의 과보를 받지 않는데 이것을 비처라 이름한다.
지옥의 업은 인보(人報)를 받지 않는데 이것을 비처라 이름한다.
다만 능히 신계(身戒)와 심혜(心慧)를 닦는 것을 제외하고 지옥의 과보를 인간이 가벼이 받으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지옥보(地獄報)라 이름하며,
인간이 가벼이 받으므로 인과(人果)라 이름하는 바,
이것을 시처비처(是處非處)라 이름한다.
③ 선정과 해탈을 아는 힘
사선(四禪)ㆍ팔해탈(八解脫) 같은 법은 자재(自在)하게 수득(修得)한다. 자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여래께서 언제나 삼매에 계시면서 법을 설할 때에 범천왕(梵天王) 등은 다만 소리만 듣고 모습[貌]은 보지 못한다.
이러한 선정과 해탈에 두 가지의 번뇌가 있으니,
얻기 전에는 얻고자 하여 걱정하고
얻은 뒤에는 후퇴하여 물러나거나 잃게 되지는 않을까를 걱정하는 것이다.
여래가 이와 같은 두 가지 걱정을 끊어버리고 나면 크게 자재함을 얻어서 모든 중생들 마음의 온갖 생각들을 안다.
그러나 비록 분명하게 깨달아 알더라도 마음으로 집착하여 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구족하게 수행하여 얻고자 하면 곧 얻고, 크게 얻고, 쉽게 얻어서, 얻은 뒤에는 후퇴하여 물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제삼의 선정해탈력(禪定解脫力)이라 한다.
④ 모든 근의 날카로움과 무딤을 아는 힘
신(信) 등의 오근(五根)에 상ㆍ중ㆍ하가 있음을 안다.
들음을 따라 생기는 것과 바르게 사유하여 생기는 것을 근력(根力)이라 이름한다.
상ㆍ중ㆍ하의 욕망을 아는 것을 해력(解力)이라 이름한다.
⑤ 중생해를 아는 힘
갖가지 성(性)인 성문성(聲聞性)ㆍ연각성ㆍ여래성ㆍ중생탐성(衆生貪性) 내지 팔만 사천의 번뇌성을 아는 것을 제오력(第五力)이라 이름한다.
⑥ 중생계를 아는 힘
번뇌를 인하여 갖가지 세계의 몸을 얻게 됨을 아는 것을 제육력(第六力)이라 이름한다.
⑦ 지극한 곳의 도를 아는 힘
모든 번뇌에 각기 대치(對治)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고,
모든 유(有)에도 역시 각기 대치하는 길이 있음을 알며,
모든 악과 잘못된 견해를 깨뜨리는 대치를 알 경우,
이것을 지처도력(至處道力)이라 이름한다.
⑧ 과거세를 아는 힘
사방의 갖가지 중생들의 갖가지 명자(名字)들을 분명하게 안다.
과거의 중생은 여덟 가지를 생각하는데
첫째 이름[名]이고, 둘째 생(生)이며, 셋째 성(姓)이며, 넷째 음식[食]이며, 다섯째 고락(苦樂)을 받는 것이며, 여섯째 목숨[壽]이며, 일곱째 머묾[住]이며, 여덟째 목숨이 끊어지는[命終] 것이다.
다시 여섯 가지를 생각하는데
첫째 명자(名字)이고, 둘째 찰리(刹利) 등의 종성(種姓)이며, 셋째 친족과 부모이고, 넷째 음식이며, 다섯째 빈부(貧富)이고, 여섯째 수요(壽夭)이다.
이것을 제팔력(第八力)이라 한다.
⑨ 천안력
천행(天行)을 사선(四禪)이라 하는데,
사선과(四禪果)를 얻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라 이름하며,
순선과(淳善果)를 구족하게 획득하기 때문에 청정(淸淨)이라 이름한다.
밝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과인안(過人眼)이라 이름하며, 유욕계천안(有欲界天眼)이라 이름한다.
비록 이름은 같으나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천안으로 아는 자는 중생의 타락을 보게 되는데 타락은 천(天)이라 이름하며, 또한 타락을 인사(人死)라 이름한다.
생(生)을 중음(中陰)이라 한다.
중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선(善)이고, 둘째는 불선(不善)이다.
불선한 중음은 색깔이 마치 검은 누갈(褐: 모직물) 같아서 어두운 밤에는 청정한 눈이라야 볼 수 있다. 청정한 천안(天眼)이 중음을 보면 색깔이 역시 이와 같다.
선중음(善中陰)은 색깔이 마치 바라나(婆羅) 여인의 옷과 같아서 달이 밝을 때에는 청정한 눈이라야 볼 수 있다.
청정한 천안이 중음의 색깔을 보는 것 역시 이와 같다.
검은 색을 한 자는 하행중생(下行衆生)이라 이름하고,
흰 색을 한 자는 상행(上行)중생이라 이름한다.
몸ㆍ입ㆍ뜻의 악업(惡業)의 인연으로 해서 하행이라 이름하며,
몸ㆍ입ㆍ뜻의 선업의 인연으로 하여 상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악업(惡業)은 잘못된 견해라 이름한다.
잘못된 견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환이 가능한 것[可轉]이고,
둘째는 전환이 불가능한 것[不可轉]이다.
인과(因果)를 비방하고 성인(聖人)이 없다고 말하면 전환이 불가능하다 하고 인(因)이 아닌 것을 인으로 보고 과(果)가 아닌 것을 과로 보면 전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기 때문에 악업은 잘못된 견해라 이름하고, 선업은 바른 견해[正見]라 이름한다.
네 가지 진리[四諦]를 비방하지 않고 선업과 악업에 대한 참된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선업을 정견이라 이름한다.
악업의 인연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는데 과보 받기를 즐겨하지 않으므로 지옥이라 이름한다. 악업에 방일(放逸)하면 기필코 날개를 달고 지옥으로 날아 떨어질 것이다.
인과를 분명히 보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다.
선업의 인연은 악사(惡死)를 지나 즐겨 과보를 받아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몸을 받는다.
정견(正見)으로 해서 선한 존재[善有]로 태어나는 것이다.
선한 존재[有]로 태어난 자를 사람과 하늘이라 이름하고 확실하게 분명히 보기 때문에 천안(天眼)이라 한다.
어떤 것이 선유(善有)인가?
선인연(善因緣)으로 하여 선과(善果)를 얻으면 이것을 선유라 이름하며, 이것을 제구력(第九力)이라 이름한다.
신계(身戒)와 심혜(心慧)를 닦는 인연으로 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번뇌를 끊음으로 하여 무루(無漏)의 신계와 심혜를 얻는다.
⑩ 누진력
번뇌가 없는 신계와 심혜에 두 가지가 있으니,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이다.
이 두 도로 인하여 마음이 해탈을 얻고 지혜가 해탈을 얻는다.
마음과 지혜의 해탈을 얻음으로 하여 능히 신통(神通)을 보여서 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을 제십력(第十力)이라 한다.
십력(十力)의 보살은 성(性)을 알고 분별을 알며,
자상(自相)ㆍ공상(共相)ㆍ불공상(不共相)을 알고, 평등을 알며,
업을 알고, 차례를 알며, 훌륭함과 훌륭하지 못함을 안다.
보살은 능히 이와 같은 일곱 가지의 일을 안다.
성을 안다는 것은 십력의 성이 곧 오근(五根)의 성인 것이다.
지혜가 많기 때문에 지성(智性)이라 이름하고 처(處)와 비처(非處)를 안다고 말하지, 처와 비처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진(漏盡: 번뇌의 단절)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와 같다.
분별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시간을 분별하는 것이고,
둘째는 행(行)을 분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십력은 능히 모든 시간을 안다. 이른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이다. 이것을 시간을 분별한다고 이름한다.
십력은 능히 모든 시방 세계의 한량없는 번뇌의 대치(對治)를 안다. 이것을 행을 분별한다고 이름한다.
십력은 능히 모든 색상(色相)을 안다. 이것을 자상이라 이름한다.
색의 무상함과 내지 모든 법이 무상함을 알 경우, 이것을 공상이라 이름하고 이것을 자상과 공상을 분별한다고 한다.
불공(不共)이란 십력이 모든 성문이나 연각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가 함께 십력을 얻으면, 이것을 평등(平等)이라 이름한다.
업을 안다는 것은 처비처(處非處)를 아는 힘이 인(因)을 실로 인으로 알고, 과(果)를 실로 과로 아는 것으로서, 이것은 제이력(第二力)이다.
여래는 자업(自業)의 과보를 분명하게 알고, 또한 중생들이 소유한 업과(業果)를 안다. 선정과 해탈의 힘에 인하기 때문이다.
여래는 세 가지의 시현(示現)을 얻어서 능히 중생을 조복하며,
근기를 아는 힘으로 인하여 중생들이 하(下)ㆍ중(中)ㆍ상(上)근기인가를 분명히 알고, 근기를 알기 때문에 그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한다.
해력(解力)을 인하여 여래가 모든 중생의 선성(善性)과 악성(惡性)을 알아서 악성을 제거하고 선성을 가르친다.
세계력(世界力)을 앎으로 인하여 여래는 항상 세간의 법을 행하면서도 그 세간의 법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
세계를 알기 때문에 중생계를 알고,
중생계를 알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 마음에 따라, 그들의 번뇌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
3) 처음에 중생을 설법에 들게 하는 법
여래는 어떻게 하여 처음에 중생을 가르쳐서 불법에 들게 하는가?
여래가 만일 처음에 성문보살을 가르쳐서 불법에 들게 할 경우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여, 너는 응당 깊은 즐거움으로 적정(寂靜)하고 고즈넉하고 한적한 곳에 홀로 처하여 수행하여야 한다.
네가 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가 너를 위하여 말해준 이름과, 내지 여러 스승님이나 화상(和上)이 말해준 이름들을 지극한 마음으로 살펴보아라.
부모나 스승들이나 화상들이 말해준 나의 이러한 이름들이 안팎의 육입(六入: 六根과 六境)에 있는가, 없는가?
선남자여, 네가 만일 안팎의 제입(諸入)으로부터 떠나서 모든 존재[有]를 보지 않는다면, 너는 그때 진실한 지혜를 얻어서 이 따위의 이름들은 거짓이요 참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법 또한 참이 아니며 이름 또한 참이 아니다. 이름이나 법이 참이 아닌데 여기에 어떻게 교만함이 생기겠는가?
선남자여, 너는 이때 다시 눈[眼]과 눈이라는 이름을 관찰하여 보라.
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름이고, 둘째는 유포(流布)이다.
눈의 이름이 눈은 아니고, 눈의 모양[相]도 눈은 아니다.
만약 어떤 물건을 두고 눈이라 이름한다면 그런 물건은 역시 없다.
만일 실제로 눈이 있다면 그 이름 또한 실제일 것이다.
만일에 진실한 것이라면 중생이 태어날 때 저절로 알 것이기 때문에 가르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아직 가르치지 않고도 아는 자는 보지 못했다.
이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이름도 진실이 아니고 사물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에 대한 인식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질 때 안팎의 제입(諸入)에 대한 집착은 끊어지고,
이러한 안팎의 제입에 대한 집착을 끊음으로 해서 모든 법상(法相)을 단절하고 모든 법상을 단절함으로 해서 모든 법의 성(性)을 진정으로 안다.
모든 법의 성[一切法性]이란 진실이 아닌 것은 어떤 모양[相貌]이 없음을 말한다.
선남자여, 이러한 관점을 가지게 될 때, 모든 지혜[一切智]를 얻고 싶고,
초선천(初禪天)에서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까지를 얻고 싶으며,
성행(性行)에서 여래행(如來行)까지를 얻고 싶으며,
보살지(菩薩地)의 육통(六通)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싶은 것이다.
이 모두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제육력(第六力)이라 이름한다.
지처도력(至處道力)을 인하여 진실한 도와 진실하지 못한 도를 아는 바, 진실하지 못한 도를 깨뜨리고 진실한 도를 보여준다.
숙명력(宿命力)으로 인하여 중생들이 고통을 받음을 알고, 알고 나면 생사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또한 중생에게 가르쳐서 생사를 즐거워하지 말고 항상하다는 견해[常見]를 깨뜨리게 한다.
천안력(天眼力)으로 인하여 남들에게 기별(記: 수행자가 미래에 成佛할 것에 대한 개별적ㆍ구체적인 예언)을 주고 단견(斷見: 死後의 身心이 空無로 돌아간다고 보는 妄見)을 끊어버린다.
누진력(漏盡力)으로 인하여 여래는 자신이 이미 해탈을 얻었음을 스스로 알아서 능히 중생이 여래가 아닌 것을 보고 진실한 여래라고 말하는 것을 깨뜨리며,
사문(沙門)이 아닌 것을 보고 진짜 사문이라 하고, 바라문이 아닌 자를 보고 진짜 바라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깨뜨린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이 십력(十力)도 동시에 얻는다.
4) 일의 차례
어떤 것을 일러 차례[次第]가 있다고 말하는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처음으로 인과를 본다. 그러므로 첫 이름을 처비처력(處非處力)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인과를 누가 받아서 짓는 것인가 하는 것을 업력(業力)이라 이름한다.
업을 깨뜨리기 위해 선정을 닦으며, 중생들이 누가 능히 수행을 하고 누가 수행을 하지 못하는가를 알기 위해 제근(諸根)을 관찰한다.
근(根)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ㆍ중ㆍ상을 말하며 이것을 중생성(衆生性)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제오력(第五力)이라 한다.
성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고 청정하지 못함을 아는데 이것을 세계라 이름한다.
청정한 마음과 청정하지 못한 마음의 인연을 알고자 하기 때문에 지처도(至處道)를 안다.
이러한 도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끊는데 이것을 숙명천안력(宿命天眼力)이라 이름한다.
두 소견이 단절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구히 끝나는데 누진력(漏盡力)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차례라 이름한다.
또 차례가 있으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처음에는 먼저 시처비처(是處非處)를 보고 다음에 세간의 업을 본다.
세간의 업을 깨뜨리므로 해서 선정과 해탈을 보며, 이어서 중생이 능히 도를 닦는지 닦지 못하는지를 본다.
다음에는 천안(天眼)으로 모든 중생들의 모든 근기의 예리함과 무딤[利鈍]을 본다.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먼저 말한 것과 같다.
또 차례가 있으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시처비처를 보며, 십이인연이 어떻게 하여 나왔는가를 본다.
이 때문에 업을 본다. 중생의 모든 업은 수보(受報)가 있기도 하고 수보가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천안으로 어떤 것인가를 본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법계(法界)를 본다.
이것을 해(解)라 한다. 법계와 세계는 차별이 없다.
조복(調伏)하기 어려움과 조복하기 쉬움을 알고 싶기 때문에 숙명(宿命)을 알고,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알기 위해 근기의 예리함과 둔함을 아는 것이다.
안 뒤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을 설한다. 이것을 지처도(至處道)라 이름한다.
도력(道力)으로 모든 번뇌를 끊는 것을 누진력(漏盡力)이라 이름한다.
5) 처비처력과 업력의 차이
처비처력(處非處力)과 업력(業力)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선업과 악업에 따라 선과(善果)와 악과가 있음을 분명히 아는 것을 시처비처력이라 이름하며,
지은 자는 받게 되어 있고 짓지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을 업력이라 이름한다.
6) 조복 등
불선(不善)한 업을 조복하고자 하여 선정을 닦는다.
조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믿음[信]이고, 둘째는 믿지 않음[不信]이다.
이 때문에 그 근기를 본다.
믿는 마음[信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삼보를 믿는 것이고,
둘째는 마혜수라(摩醯首羅: 外道가 믿는 大自在天)를 믿는 것이다.
이것을 해탈이라 이름한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으니 하ㆍ중ㆍ상을 말한다.
이것을 세계력(世界力)이라 이름한다.
세계를 안 뒤에는 세간의 도와 성문도(聲聞道)ㆍ연각도ㆍ보살도ㆍ불도를 설한다.
이것을 지처도력(至處道力)이라 이름한다.
모든 중생의 선인(善因)과 악인, 무거운 업과 가벼운 업을 관찰한다.
이것을 숙명력(宿命力)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앎으로 인하여 항상하다는 견해[常見]와 단멸한다는 견해[斷見]를 끊는다.
이것을 천안(天眼)이라 이름한다.
진실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원히 끝나는데
이것을 누진력(漏盡力)이라 이름한다.
십력(十力)의 본성은 모두 지성(智性)으로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런데 경계(境界)의 연으로 해서 차별이 있다고 설한다.
사무소외(四無所畏)는 늘 말했던 것과 같다.
7) 중생을 위한 네 가지 설법
여래는 중생을 위하여 다음 네 가지를 설한다.
첫째는 성문의 불공법(不共法)의 해탈이고,
둘째는 성문의 공(共)해탈이며,
셋째는 중생고(衆生苦)의 해탈이고,
넷째는 중생을 위해 고통을 끊고 해탈을 얻기 위하여 대치(對治)를 설하는 것이다.
8) 블공성문
성문불공(聲聞不共)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깨달아 알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법이란 너는 모르는 것이며,
나도 또한 사문ㆍ바라문ㆍ사람ㆍ하늘ㆍ마천(魔天)ㆍ범천(梵天)이 법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고 한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나의 번뇌가 이미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문이나 또는 마천과 범천이 진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너의 번뇌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이미 도를 얻었지만 이 도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또한 모든 사문이나 또는 마천과 범천이 진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너는 아직 도를 얻지 못했으니 이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도의 장애를 설하지만 장애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나도 또한 모든 사문이나 또는 마천과 범천이 진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장애를 설한 것은 장애가 아니라고 말한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과 모든 성문을 위하여 설법한 말씀을 부처님 열반 뒤 결집(結集)할 때에,
성문장(聲聞藏) 속에는 보살이란 이름을 빼고 보살장(菩薩藏) 중에는 보살이란 이름을 두었다.
그래서 방등(方等: 毘佛略, 十二部經의 한 유형, 여기서는 大乘經典)을 보살장이라 한다.
불공성문이란 여래의 삼념처(三念處)를 말하는 것이다.
여래가 법을 설하면 지극한 마음으로 들어서 받아들이고, 마음이 기뻐서 모든 안락을 받으며, 법대로 주(住)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더라도, 부처님은 역시 기뻐하지 않고 사심(捨心)을 닦아서 바른 생각[正念]을 잃지 않으며 방일하지도 않는다.
여래가 법을 설할 때에 이를 믿어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설한 바와 어긋나더라도, 부처님은 역시 성을 내지 않고 근심하거나 고뇌하지 않으며, 사심을 닦아 바른 생각을 잃지 않고 방일하지도 않는다.
여래가 법을 설할 때에 더러는 듣고 더러는 듣지 않더라도, 듣는다 하여 기뻐하지 않으며 듣지 않는다 하여 근심하지 않고, 사심을 닦아 바른 생각을 잃지 않으며 방일하지 않는다.
이것을 삼념처라 한다.
또 성문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삼불호(三不護)를 말한다.
여래는 몸과 입과 명(命)을 보호하지 않는다. 아라한(阿羅漢)이 있어 무기업(無記業)을 기록한다. 생각이나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무기업이란 이름이 돌길라(突吉羅: 몸과 입으로 지은 惡業)이다.
여래는 이미 모든 무기업을 단절하였다.
어째서인가? 항상 바른 생각[正念]을 닦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마음을 따라 설하며 권속을 가책(呵責)한다. 이른바 거친 말을 몰아내고 마음에 두려움과 어려움이 없음을 더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몸과 입과 명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또 성문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대비(大悲)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다.
여래는 어떤 일을 지으며, 어디에서 지으며, 어떤 인연으로 지으며, 어떻게 지으며, 언제 짓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능히 실제대로 알면 이것을 염심(念心)이라 이름한다.
여래가 어떤 일을 아는가(짓는가) 하는 것은 모든 행(行)을 말하며,
어디에서 짓는가 하는 것은 모든 세계를 말하며,
어떤 인연으로 짓는가 하는 것은 중생을 조복하는 것을 말하며,
어떻게 짓는가 하는 것은 선방편(善方便)을 말하며,
언제 짓는가 하는 것은 모든 시간을 말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여래는 항상 바른 생각[正念]의 마음을 닦는다.
여래 세존은 몸을 움직이든, 눈을 깜박이든, 말을 하든, 길을 걷든, 걸음을 멈추든, 무엇을 짓든 모든 시간 속에서 번뇌의 습기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여래는 영원히 번뇌의 습기(習氣)를 단절하였다고 말한다.
아라한 등은 이러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과는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가 깨달아서 안 것이 세 가지 법모음[法聚: 각종 法門의 纂輯]이다.
그 첫째는 이익을 얻는 이치의 모음[得利益義聚]이고,
둘째는 이익이 아닌 이치의 모음[非利益義聚]이며,
셋째는 이익도 아니고 불이익도 아닌 이치의 모음[非利益非不利益義聚]이다.
여래는 이 세 가지의 모음을 아주 분명하게 안다. 그래서 여래는 모든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백사십 가지의 불공법(不共法)을 성문이나 벽지불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문불공(聲聞不共)이라 한다.
보살행을 행할 때에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얻는다.
그러나 아직 밝고 청정하지는 못하다. 보리수[道樹] 아래 앉아서 스승 없이 삼십칠품을 닦아야만 비로소 밝고 청정함을 얻는다.
9) 보살의 필경지
지위(地位)를 배운 보살은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얻으며,
다음 차례의 이념(二念)은 십력(十力)과 모든 불법 내지 모든 청정한 지혜를 얻는다.
모조리 얻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라 하며, 무애지(無礙智)ㆍ무장지(無障智)ㆍ정지(淨智)ㆍ적정지(寂靜智)ㆍ청정지(淸淨智)ㆍ구족지(具足智)라 한다.
이것을 필경지(畢竟地)라 한다.
모든 보살행과 모든 보살지를 지나서 여래지(如來地)에 들어 여래행을 행하면 무상신(無上身)을 얻어서 보살신(菩薩身)을 바꾸어 영원히 습기를 끊어버리고 필경지에 주(住)한다.
10) 필경지 보살과 부처님의 차이
보살마하살이 불법(佛法)을 보는 것은 마치 나곡(羅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보는 것 같지만,
여래 세존은 전혀 이런 일이 없다. 그래서 청정이라 한다.
필경지에 머무는 보살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멀리서 사물의 색깔[物色]을 보는 것 같지만
모든 부처님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가까이서 사물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필경지의 보살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캄캄한 데서 사물의 색을 보는 것 같지만,
모든 부처님이 불법을 보는 것은 마치 밝은 대낮에 사물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필경보살은 아직 모태(母胎)에서 출생하지 않은 것과 같으나,
여러 부처님 세존은 이미 출생한 것과 같다.
필경보살은 꿈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지만,
여러 부처님 세존은 깨어 있으면서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필경보살은 마치 밝지 않은 등불과 같으나
여러 부처님 세존은 대단히 밝은 등불과 같다.
11) 불사를 짓는 것 아홉 가지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능히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불사(佛事)를 베풀어 짓는다.
불사를 짓는 것에 아홉 가지가 있는데 하나하나의 불사가 능히 한량없는 중생을 크게 이익되게 한다.
아홉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스스로 대장부의 일을 하여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대장부의 일을 믿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의 의혹의 그물을 깨뜨리는 것이다.
셋째는 여래가 십력(十力)을 구족하는 것이다. 십력을 구족하기 때문에 능히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힘이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곧 능히 잘 이해하여 의심을 깨뜨리고 중생을 조복하여 그 잘못된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넷째는 여래가 사무소외를 구족하여 삼보를 믿고, 중생을 조복하여 잘못된 견해를 깨뜨리며, 크게 사자후(師子吼)를 토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여래가 삼념처(三念處)를 구족하여 설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설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리며, 능히 도중(徒衆)을 기르고, 능히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여래가 삼불호법(三不護法)을 구족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고 중생을 조복하며, 밤낮으로 항상 불안(佛眼)으로 모든 중생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곱째는 여래가 대비(大悲)를 구족하고, 찬제(提)바라밀을 구족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어서 안락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여래가 어지럽거나 그릇됨이 없음을 구족하여 염심(念心)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이 없이도 법대로 행하고 법대로 주(住)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조복하고 중생들의 모든 방일함을 깨뜨린다.
아홉째는 여래가 영원히 번뇌의 습기를 단절하여 의법(義法)과 비의법(非義法)ㆍ비의비비의법(非義非非義法)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는 의법을 설하고 비의법과 비의비비의법을 버린다.
여래는 일백사십의 불공법(不共法)을 구족하므로 이와 같은 아홉 가지의 불사를 능히 짓는다.
이것을 여래행(如來行)이라 하며, 이것을 여래지(如來地)라 하며, 이것을 여래 필경지(畢竟地)라 한다.
어째서인가? 여래행ㆍ여래지ㆍ여래필경지를 위하여 한량없는 수의 나유타겁(那由他劫) 동안 보살계를 받고 보살행을 닦았기 때문이다.
필경보살은 능히 한량없고 가이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필경지에 머물게 한다.
여래의 불법은 모두 중생을 위한 것이며 스스로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문이나 연각이 가진 법은 자신의 이익만 위할 뿐 남에게 주는 이익은 적다.
이 때문에 이승(二乘)에는 불공법(不共法)이 없다.
무상(無上)의 불법은 결코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과는 같지 않다.
대비(大悲)가 어지럽거나 그릇됨[錯謬]이 없어 습기를 끊는다. 모든 지혜는 오지삼매(五智三昧)이다.
여래는 모든 불공법을 구족한다. 그래서 무상(無上)이라 한다.
12) 이 경의 공덕
이 경전은 보살의 금계(禁戒)를 풀어 설한 것이며, 보살도(道)ㆍ보살계과(戒果)ㆍ일체보살행ㆍ일체보살계과행(戒果行)을 풀어 설한 것이다.
그래서 보살지(菩薩地)라 하며, 보살장(藏)이라 하며, 보살마이(摩夷: 論藏)라 한다.
모든 대승 경전(大乘經典)의 무애지경(無礙智經)을 섭취한 것이다.
만일 하늘이나 사람이나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 경전을 믿고 받아들여, 설법을 듣고,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고, 널리 설하여, 그 뜻을 분별함을 수행하며, 이를 지키는 자를 보면 공양하고 공경하여 존중하고 찬탄하며, 등촉ㆍ향ㆍ꽃ㆍ기악(伎樂)을 공양한다면,
이런 자는 응당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호념(護念)함을 받고 그 이름이 일컬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공덕이 모여들 것이다.
어째서인가? 보살계의 인연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바, 보살계를 받아 지키어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고 해설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바른 법[正法]은 영원히 머물러 없어지지 않으므로 모든 악한 비구가 차츰 줄어들지만,
만일 보살계가 없다면 모든 악한 비구들이 점차 치성(熾盛)하여 여래의 바른 법이 오래지 않아 없어질 것이다.
이때 우파리(優波離)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파리여, 이 경의 이름을 선계(善戒)라고 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보살지(菩薩地)라 하고, 보살비니마이(菩薩毘尼摩夷)라 하며,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모든 선법(善法)의 근본’이라 하며, ‘안락의 인(因)’이라 하고, ‘모든 바라밀의 모음’이라고 해야 하느니라.”
이때 우파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서 예배하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