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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6권
11. 빈천부(貧賤部)
[여기엔 다섯 가지의 연(緣)이 있음〕
11.1. 술의연(述意緣)
대개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은 모두 과거의 업을 따르고 득실(得失)과 유무(有無)는 다 옛날의 행위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과거의 인(因)들 알고자 하면
마땅히 현재의 과보를 보고
미래의 과보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현재의 원인을 관찰하라.
그런 까닭에 원헌(原憲)의 집과 금루(黔婁)의 방은 새끼로 얽은 문지도리에 항아리 같은 창문이라서 비단과 먼지조차 막을 수 없었고, 거적문과 쑥대사립문이라서 서리와 이슬도 막지 못했다. 혹은 볏짚을 엮어 자리를 만들고 때로는 연잎을 마름질하여 옷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팔꿈치를 가리려면 곧 두 소매가 다 뚫렸고 실로 꿰매려면 두 옷깃이 모두 해어졌다. 입과 배는 안읍(安邑)에서 도움을 받아야 했고 잠자고 머무는 일은 영대(靈臺)에 의탁해 있어야 했다. 머리에는 십 년 묵은 갓을 썼고 몸에는 백 번 기운 누더기를 걸쳤다.
고향에는 이미 밭도 집도 없는데 낙양(洛陽:서울)에도 또한 주인이 없었으며, 낭탕(浪宕)하게 시절을 따르고 할 일 없이 세월만 보냈다. 비록 영첩(靈輒)이 예상(翳桑)에서 피폐하였음을 부끄러워하였으나 이내 백이(伯夷)가 곧 수양산(首陽山)의 괴로움을 이룬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갖옷이 전혀 없거늘 어찌 양춘(陽春)을 맞을 것이며, 한 되의 쌀도 없는데 무엇으로 이 해를 넘기겠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은 다 지난 날에 보시를 행하지 않고 항상 쌓아 둔 채 인색했기 때문에 이런 과보를 불러 하루 아침에 갑자기 다한 것이니, 그런 까닭에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보시해야 할 것이다.
11.2. 인증연(引證緣)
『등지경(燈指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난하고 궁색한 것은 지옥에 비유할 만하다.
의지할 곳을 잃고 깃들어 의탁할 곳이 없으며, 근심하는 마음의 불꽃은 왕성하고 수심에 쌓인 몸은 초췌하게 타오른다. 화색(華色)마저 이미 잃었으니 얼굴 모습 더욱 누추하기만 하다.
신체는 여위어 기갈(飢渴)에 사그러져 녹아 버리고 눈은 움푹 파이고 모든 뼈마디는 겉으로 드러나며, 엷은 피부는 주름살뿐이요 힘줄마저 드러났다.
머리털은 쑥대처럼 뒤엉키고 손발은 가늘어지며, 얼굴빛은 쑥처럼 파리하고 온몸은 쭈글쭈글하다.
게다가 의상(衣裳)마저 없으니 쓰레기 더미에 이르러 더러운 헝겁을 주워 이리저리 꿰매어 입으면 겨우 형상은 가리지만 사지는 빨갛게 드러난다.
앉고 누울 자리도 없어 쓰레기 더미에 비스듬히 누워 있으면 모든 친한 친구듣이 보고도 모르는 체한다.
이 거리 저 거리 돌아다니면서 밥을 빌면 마치 주린 까마귀와 같고, 아는 친구를 찾아가 밥을 빌어볼까 하면 문지기가 가로막고 들여보내지 않는다.
가만히 틈을 살피다가 재빨리 들어가면 다시 욕을 퍼부으며 내쫓고, 집 주인이 나와 매를 가하려 하면 곱사등이처럼 몸을 굽혀 두번 세번 절하며 사죄하지만, 집 주인은 경멸하면서 조금도 돌봐주지 않는다.
설령 집 안에 들어가더라도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미 서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또 자리도 내주지 않는다.
음식을 조금 줄 때도 밥그릇에 던져주며 배불리 먹게 주지도 않는다. 혹 큰 잔치가 있어서 남는 음식을 벌고자 해도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고 도리어 쫓아낸다.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은 비유하면 마치 나무에 꽃이 없어 벌들이 멀리 떠나가고 서리 맞은 풀잎은 저절로 말라서 말리며,
마른 못에 기러기가 놀지 않고 불에 탄 숲에 사슴들이 오지 않으며,
추수가 끝난 받에 이삭 줍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오늘날 가난하고 궁색하여 과거 부유하게 살 때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부질없는 말일 뿐인데 누가 그 말을 믿으려고 하겠는가?
또 나의 가난하고 궁색함으로 말미암아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니,
비유하면 마지 넓은 들이 불에 타버린 것과 같아서 아무도 반가워하고 좋아하지 않고,
마른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의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서리 맞은 모종 같아서 버려두고 거두는 사람이 없고,
사람을 해치는 독사와 같아 모두 멀리 떠나며,
독이 섞인 음식과 같아 아무도 맛보려는 사람이 없다.
마치 쓸쓸한 공동묘지와 같아서 아무도 가는 사람이 없고,
냄새나는 변소와 같아 냄새나고 더러운 것만 가득 쌓이며,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처럼 남의 미움과 천대를 받는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다른 이들은 그르다고 하고,
어쩌다 선한 업을 지으면 다른 이들은 야비하다 하며,
행동이 민첩하면 경망스럽다고 미워하고,
또한 행동을 느리게 하면 너무 무겁고 정직한 체한다고 하며,
설령 다시 찬탄하면 사람들은 아첨하려 칭찬한다 하고,
만약 칭찬하지 않으면 또한 비방하면서 말하기를
‘이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좋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일 또 남을 가르치면 이것을 거짓이라 하고
만약 자세히 설명하면 사람들이 말이 많다고 하며,
만약 묵묵히 말이 없으면 사람들은 상황을 숨긴다 하고
만약 정직하게 말을 하면 다시 거칠고 사납다고 한다.
만약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면 또한 아첨하고 왜곡되다 말하고
자주 친근히 하고 붙임성이 있으면 다시 현혹시킨다고 하며,
만약 친근히 하지 않고 붙임성이 없으면 다시 교만하다 하고
만약 다른 사람의 말을 순종하면 다른 이의 마음을 사취(詐取)한다 하며,
그렇다고 따르고 순종하지 않으면 또한 제멋대로 한다고 말한다.
또 내 뜻을 굽혀 그의 요구를 들어주면 비천하다 꾸짖고
만약 뜻을 굽히지 않으면 이 가난한 사람이 오히려 제 자신만 믿는다고 말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대할라치면 그들은 어리석어 꺼리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만약 스스로 단속하면 공연히 청렴한 체하고 거짓으로 스스로 단정하고 확실한 체한다고 하며,
만약 또 즐거워하고 호탕하면 그들은 방종하여 형상이 꼭 미친 사람 같다고 하고
만약 또 근심하거나 슬퍼하면 독기를 머금고 조금도 기쁜 마음이 없다고 한다.
만약 남의 말을 듣고 극진하지 못한 점에 있어서 그를 위해 판단하고 해석하면 그 명취(命趣)를 말하면서 어리석은 게 지혜로운 체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하고,
만약 또 잠자코 있으면 다시 미련하여 도리를 알지 못한다고 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희론(戲論)하기라도 하면 죄와 복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무엇을 구하는 것이 있으면 구차하게 얻으려고만 하고 염치를 모른다 하고
만약 구하는 것이 없으면 지금은 비록 구하지 않지만 나중에 큰 것을 얻기 바란다고 말하며,
만약 경서(經書)의 말을 인용하면 또한 거짓으로 총명한 체한다 하고
만약 언어가 질박하고 검소하면 다시 소원하고 우둔하다고 꺼리며,
만약 사실을 공정하게 논하면 또한 떼를 쓴다 말하고
만약 사사로이 은밀하게 바른 말로 일러주면 모함하고 아첨한다고 말한다.
만약 새옷을 입으면 또한 거짓으로 장엄하여 꾸미는 체한다 말하고
만약 해진 옷을 입으면 다시 못나고 가난하다 말하며,
만약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또한 굶주려셔 음식을 탐한다 말하고
만약 조금 먹으면 사실은 배고프면서 거짓으로 청렴한 체한다 말하며,
만약 경론(經論)에 대하여 말하면 제가 아는 것을 자랑하여 남의 암둔한 단점를 들춰낸다 말하고
그렇다고 결론을 말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무식하여 소먹이는 일꾼이나 삼아야겠다 말하며,
만약 스스로 옛날 사업하던 일을 말하면 허황되게 과장하여 스스로 자랑한다 말하고
만약 그렇다고 잠자코 있으면 문벌이 천박하다고 말한다.
모든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은 행동거지와 말의 행동거지에 다 허물이 있고 부귀한 사람은 어떤 비법(非法)이라도 전혀 허물이나 걱정이 없어서 행동과 수완이 다 옳다고 말한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은 죽은 시체에서 귀신이 일어난 것과 같아 모두가 다 두렵고 무서워하며,
죽은 병에 걸려 치료하기 어려운 것 같고
넓은 들이나 험난한 곳에 물도 풀도 없는 것 같으며,
마치 큰 바다에 떨어져 파도에 떠내려 가는 것 같고
사람이 목을 누르는 것 같아서 숨도 크게 못쉬며,
마치 눈 위에 꺼풀이 씌여 물건이 이르러도 알지 못하고,
또 두터운 때가 끼인 것 같아 씻어버리기 어려우며,
또한 원수의 집과 같아 비록 함께 입고 먹으면서도 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또 뜨거운 여름날 더러운 우물과 같아 사람이 들어가면 곧 기운이 끊기고 깊은 진흙탕에 빠진 것 같아 헤어나지 못하며,
또 산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 나무를 꺾어 떠내려 보내는 것과 같나니,
가난한 사람도 이와 같아서 온갖 어려운 일들이 많느니라.
대체로 부귀한 사람은 좋은 위엄과 덕이 있어서 자태와 용모가 조용하고 도량과 마음이 너그럽고 넓으며,
예의를 다투어 일으키고 능히 지혜와 용기를 내며, 가업(家業)이 날로 더욱 불어나고 권속들도 화목하여 서로 사양하며, 좋은 이름이 멀리까지 퍼진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일체 세간 사람들은 부귀와 영화에도 족히 탐하거나 집착 할 일이 아니요,
모든 사람이나 하늘의 존귀함에 대해서도 꼭 편안하게 즐기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난과 궁핍은 곧 큰 고통의 덩어리이니 가난과 궁핍함을 만약 끊어 버리고자 하면 마땅히 아끼거나 탐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가난과 궁핍함은 매우 큰 괴로움이 된다.’
11.3. 수달연(須達緣)
『잡보장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옛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였다.
수달(須達)장자는 최후에 가난하고 고통스러워 재물이라곤 전혀 없었다. 품팔이를 하여 겨우 쌀 네 되를 구해다가 밥을 지었다. 마침 아나율(阿那律)이 걸식하러 왔는데, 아내는 곧 발우를 가져다가 밥을 가득 담아 주었다.
뒤따라 수보리(須菩提)ㆍ가섭(迦葉)ㆍ목련(目連)ㆍ사리불(舍利弗) 등이 차례로 와서 밥을 빌자 부인은 또 이들의 발우에도 음식을 가득 담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 오셨는데 그 발우에도 밥을 가득 담아 드렸다.
수달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부인에게 밥을 달라고 하자 부인이 말하였다.
‘만약 존자 아나율이 온다면 당신은 혼자서 드시겠습니까, 존자에게 보시하겠습니까?’
수달이 대답하였다.
‘차리리 내가 굶을지언정 마땅히 존자에게 보시할 것입니다.’
아내가 또 말하였다.
‘만약 또 가섭ㆍ대목련ㆍ수보리ㆍ사리불 등과 나아가 부처님께서 오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수달이 또한 아내에게 대답하였다.
‘차라리 내 자신이 굶을지언정 모두 그 분들께 드릴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마침 그 성현들께서 걸식하러 오셔서 음식을 구하기에 가지고 있던 음식을 모조리 다 드렸답니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의 죄는 모조리 없어지고 틀림없이 복덕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 창고를 열자 곡식이며 비단ㆍ음식 따위가 그 안에 가득 들어 있었으며, 그것을 다 쓰면 또 생겨나곤 하였다. 이것이다 그 과보였으니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또 『잡비유경(雜警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수달(須達)장자는 일곱 번 가난했다가 최후에는 너무 극심하게 가난하여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다.
훗날 쓰레기 더미에서 나무로 만든 되[升] 한 개를 주웠는데 그것은 바로 전단향(栴檀香)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 쌀 네 되를 사가지고 와서 부인에게 말하였다.
‘한 되는 몽땅 밥을 지으시오. 나는 가서 채소를 사오겠으니 돌아오면 함께 먹읍시다.’
부처님께서 생각하셨다.
‘꼭 수달을 제도하여 그로 하여금 복이 생겨나게 하리라.’
그리하여 밥이 다 되었을 때쯤에 사리불ㆍ목련ㆍ가섭과 부처님이 차례로 왔으므로 네 되의 쌀로 밥을 지어 차례로 다 보시했다.
그 뒤에 부자가 되어 다시 부처님과 스님을 초청하여 모두 다 공양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설법하시어 도를 얻게 하셨다.
또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에서 말하였다.
“처음에 수달 장자는 집이 가난하여 애타했으나 부처님의 설법에 힘입어 몸과 마음이 깨끗해져 아나함(阿那含)의 도를 증득했다.
그에겐 오직 다섯 푼의 돈이 있었는데 매일 한 푼은 부처님께 보시하고 한 푼은 법에 보시하고 한 푼은 스님께 보시하고 한 푼은 자신이 쓰고 한 푼은 살림 밑천으로 삼있다.
날마다 이렇게 했는데도 항상 한 푼은 남아 있어 끝내 다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곧 다섯 가지 계(戒)를 받고 욕심이 다 끊어졌다.
아내와 딸도 그가 즐거워하는 것을 순종하고 따랐다.
어떤 부인이 미숫가루를 만들기 위해 쌀을 볶다가 잘못해서 불이 나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어 버렸다.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신하를 통해 나라에 칙명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밤에 등불이나 춧불을 켜지 말라.
만일 이 명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금 천 냥을 벌금으로 내게 하리라.’
그 때 수달은 도를 증득하고 집에 있으면서 밤낮으토 좌선(坐禪)하여 선정에 들곤 했다. 그리하여 밤중에 닭이 울 때쯤 등불을 켜고 참신하다가 관리에게 체포되었다. 관리는 왕에게 등불을 켰던 사람이라고 보고하였다.
‘당연히 벌금을 물게 하라.’
수달이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저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백 전이라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그 벌금을 물 수 있겠습니까?’
왕은 진노하여 칙명을 내리면서 수달을 옥에 가두게 했고 문지기를 시켜 지키게 하자 사천왕이 이 사실을 보았다.
초서녁에 사천왕이 내려와서 수달에게 말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돈을 줄테니 그것을 가져다가 왕에게 벌금으로 보내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수달은 사천왕을 위하여 경을 설하고 곧 떠나갔다. 밤중이 되자 천제(天帝:帝釋)가 다시 와서 보았다. 수달이 그를 위해 설법하였고 설법이 끝나자 곧 제석도 거기에서 떠나갔다.
잇달아 새벽이 되자 범천(梵天)이 다시 와서 보았다. 그는 범천을 위해 법을 설하자 범천도 다시 떠나갔다.
그 때 왕은 밤에 하늘을 쳐다보다가 감옥 위의 불빛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왕이 곧바로 사람을 보내 수달에게 가서 말하게 하였다.
‘불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래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을 켰는가?’
수달이 대답하였다.
‘나는 불을 켠 적이 없소. 만약 불을 켰다면 마땅히 연기나 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다시 수달에게 말하였다.
‘초저녁에는 네 개의 불이 있었고 밤중엔 한 개의 불이 있었는데 앞에 불보다 그 크기가 배나 되었으며, 새벽녘엔 또 하나의 불이 있었는데 밤중의 불보다 또 배나 컸었다.
그래도 불을 켜지 않았다고 말하니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란 말이오?’
수달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불이 아니었소. 초저녁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와서 나를 보고 갔고 밤중에는 제석이 와서 나를 보고 갔으며 새벽엔 범천이 와서 나를 보고 갔다오.
그 불은 이 천신들의 몸에서 나온 광명의 불꽃이었을 뿐 사람들의 불이 아니라오’
심부름 온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곧 왕에게 가서 아뢰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마음으로 놀라 털이 곤두섰다.
왕이 곧 말하였다.
〈이 사람은 복덕이 빼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어떻게 그 사람을 헐뜯고 모욕을 줄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곧 심부를꾼에게 칙명을 내렸다.
‘어서 놔주어 돌아가게 하라. 지체하지 말고 즉시 놔주어 돌아가게 하라.’
수달은 감옥에서 풀려나자 곧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배하고 부처님께 법을 들었다.
바사닉왕도 곧 수레를 장엄해 가지고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렀다.
인민들은 왕을 보자 모두 자리를 피해 일어났는데 오직 수달만은 마을 속에 법미(法味)를 간직하고 있었으므로 왕을 보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원한을 품었다.
‘이 사람도 나의 백성이거늘 오만스런 마음을 품고서 나를 업신여겨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왕은 마침내 불쾌한 마음을 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뜻을 아시고 중지한 채 법을 설하지 않으셨다.
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바라옵건대 부디 경법(經法)을 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어찌 설법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성을 내고 원한을 맺어 풀지 않으며, 여색(女色)을 탐하여 음행을 하며, 스스로 뽐내고 공경함이 없으면 그 마음이 더럽고 혼탁하여 미묘한 법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은 바로 왕을 위해 설법할 때가 아닙니다.’
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늘 두 번씩이나 체면이 망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또 성내어 결국 법을 듣지 못하고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는 물러갔다.
밖으로 나와서는 측근 신하에게 칙명을 내렸다.
‘저 사람이 만약 나오거든 곧바로 목을 베어 가지고 오너라.’
이와 같이 말하자 마자 사방에서 호랑이ㆍ이리ㆍ사자 등 모진 짐승들이 나타나 왕의 주위를 에워쌌다.
왕은 이것을 보고 두렵고 무서워서 다시 부처님께로 갔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물으셨다.
‘어째서 다시 오셨습니까?’
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서운 광경을 보고 되돌아왔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을 잘 아십니까?’
왕이 말하였다.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이미 아나함도(阿那含道)를 증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왕은 앉으나 서나 이 사람을 악한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런 것이니 만약 되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대왕은 틀림없이 위험한 일을 당해 전혀 구제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곧 수달을 향하여 참회하고 예를 올린 다음 양가죽 네 장을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는 수달의 앞에서 왕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나의 백성인데도 그와 대면하여 내가 굴욕을 당하고 있으니 진실로 매우 난처한 일입니다.’
수달이 다시 말하였다.
‘내가 가난하고 궁핍한데도 보시를 행한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시라사질(尸羅師質)은 나라의 평정(平正)을 위해 적에게 체포되어 임종하게 되었는데도 거짓말을 범하지 않아 적이 곧 놓아주었으니 이것도 실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늘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시가리(尸迦梨)였습니다. 그는 높은 누각에 누워 있을 적에 천왕의 딸이 왔지만 금계(禁戒)를 지켰기 때문에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 또한 진실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 네 사람은 곧 부처님 앞에서 각각 말씀드리고 나서 게송을 설하였다.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에서는 보시하기 어렵고
호족으로 부자인 사람은 인욕하기 어려우며
위험에 처했을 때엔 계율 지키기 어렵고
한장 젊었을 때엔 음욕 버리기 어렵다.
부처님께서 게송을 마치고 나자 왕과 신민(臣民)들을 모두들 크게 기뻐하면서 예를 올리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