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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0권
11. 번뇌론[3]
11.8. 교만품(憍慢品)
[문] 이미 세 가지 번뇌는 바로 생사의 근본임을 설명하였다.
다시 또 다른 것이 있는가, 없는가?
[답] 있다. 난체하는 것[慢]이라 한다.
[문] 무엇을 난체하는 것이라 하는가?
[답] 삿된 마음으로써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을 난체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난체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만일 낮은 데서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을 난체한다고 한다면 동등한 데서 동등하다고 헤아림도 역시 난체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상(相)을 취하는 나라는 마음의 허물이 있기 때문에 동등한 데서 자기가 높은 체하는 것을 크게 난체하는 것이[大慢]라고 하며,
보다 나은 데서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을 더 잘난 체(慢慢)한다고 하며,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나라는 상을 취하면 젠체한다(我慢)라고 한다.
젠체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상(相)을 보이는 것과 상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상을 보인다 함은 바로 범부의 젠체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물질이 곧 나라고 보는 것과,
물질을 소유한 것이 나라고 보는 것과
나의 안에서 물질을 보는 것과,
물질 중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내지 식도 다 그와 같아서 이 스무 가지를 보이기 때문에 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배울 것이 있는 사람[學人]이 젠체하는 것으로서,
장로(長老) 차마가(差摩伽)가 말한
“물질이 곧 나라고 말하지 않으며,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식도 곧 나라고 말하지도 않으며,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만이 아만(我慢)과 아욕(我欲)과 아사(我使)가 있어서 아직 끊지 못하고,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을 젠체한다라고 한다”고 함과 같다.
만일 수다원 등의 모든 과위[果]의 공덕을 아직 얻지 못하고서 스스로 “얻었노라”고 말하면 그것을 뛰어난 체[增上慢]라고 한다.
[문] 아직 얻지 못했으면서 무엇 때문에 얻었다는 마음을 내는 것인가?
[답] 선정을 익히는 중에 조그마한 맛을 얻었기 때문에 번뇌를 막아 마음 가운데서 작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이러한 교만을 내는 것이다.
또는 듣고 생각하고 닦는 힘으로 항상 어진 스승을 가까이 하고 멀리 여윔의 행을 즐기다가 조금 다섯 가지 쌓임의 모양을 알았기 때문에 수다원 등의 과위의 생각을 내면 뛰어난 체라고 한다.
[문] 뛰어난 체하는 것에는 어떠한 허물들이 있는가?
[답] 그는 근심하고 괴로워해야 된다.
마치 경전 중에서 만일 비구로서
“나는 의심을 끊고 도를 얻었노라”고 하면
바로 그의 앞에서 매우 깊은 인연과 출세간의 법을 연설해야 한다.
만일 이 비구가 실로 도를 얻지 못했다면 이 법문을 들을 때에 곧 뉘우치고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이 뛰어난 체를 끊어야 한다.
또 뛰어난 체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부처님ㆍ세존의 큰 자비 있는 이조차도 오히려 버리고 멀리하면서 설법을 해주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끊어야 한다.
또 뛰어난 체하는 사람은 삿된 법에 머무르기 때문에 진실한 공덕이 없음은 마치 장사꾼이 큰 바다에 깊숙이 들어가서 가짜 진주 만을 탐내는 것과 같다.
이 사람도 그러하여 부처님의 법 바다에 들어가서 조그마한 선정의 기쁨[禪悅]을 얻고서 “진실한 도”라고 생각하며 탐착을 낸다.
또 뛰어난 체하는 사람은 나중 늙어 죽을 때까지도 도를 얻게 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진실한 지혜를 힘써 구해야 한다.
또 뛰어난 체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이익도 잃고 또한 어리석음을 더 보태는 것이니, 실로 얻지 못한 것을 망상으로 얻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그의 몸을 속이지 말고 빨리 버려야 한다.
아주 훌륭한 사람에게 자기가 조금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모자란 체[不如慢]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한편으로 높은 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의 몸을 낮추는 것이다.
사람이 덕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높은 체하면 사만[邪慢]이라 하며,
또 나쁜 법으로써 스스로 높은 하면 그 역시 사만이라 한다.
만일 어진 사람이거나 존대할 만한 분에게 예배 공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오만(傲慢)이라 한다.
이러한 것들을 난체[憍慢]하는 모양이라 한다.
[문] 난체하는 것은 어떻게 하여 생기는가?
[답] 모든 쌓임의 진실한 모양을 알지 못하면 난체가 생긴다.
마치 경전의 말씀에
“사람이 덧없는 물질을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것은 상이요, 이것은 중이요, 이것은 하이다’라 하면
이 사람은 바로 사실대로의 모양을 모르기 때문이니, 내지 식까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함과 같다.
만일 쌓임의 모양을 알면 난체가 없다.
또 몸과 생각을 잘 닦으면 난체가 없으리니
마치 소가 뿔을 믿을 때는 사납고 날뛰다가 만일 그 뿔이 없어지면 그럴 수 없음과 같다.
몸은 깨끗하지 못하여 아홉 구멍에서는 나쁜 것이 흐르는데 지혜 있는 사람으로서야 어찌 이런 것을 믿고 스스로 높은 체하겠는가?
이러한 따위로써 몸의 인연을 생각하면 바로 난체가 없어진다.
또 슬기로운 이로서, 모든 중생이 가난하거나 넉넉하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간에 다 뼈와 살과 힘줄과 맥과 오장과 똥오줌 등의 더러운 것이 화합하여 몸을 이루었고 똑같이 나고 늙고 병들어서 죽으며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이 있고
또한 탐냄과 성냄 등의 모든 번뇌와 죄 짓고 복 짓는 모든 업과 그리고 지옥 등의 나쁜 갈래가 있음을 알면
어떻게 난체하는[마음을]일으키겠는가?
또 안팎의 마음의 인연으로부터 생김을 보고 생각생각에 사라짐을 알면, 난체하는[마음이] 없어진다.
또 공한 마음을 잘 닦으면 난체하는[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형상을 따르기 때문에 교만이 생기는 것인데, 만일 형상이 없으면 어디에[의지해서] 난체하는[마음을] 일으키겠는가?
또 지혜 있는 이가 진실로 계행 등의 공덕이 있으면 난체하는[마음을] 내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계행 등의 공덕은 모두 모든 번뇌를 다하기 때문이다. 설사 공덕이 없을지라도 지혜 있는 이로서야 어찌 없는 일 안에서 난체하는[마음을] 일으키겠는가?
또 무상하다는 등의 형상을 관찰하면 교만을 제거한다.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이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부정한 물질에 대해 난체하겠는가?
[문] 난체함에는 어떠한 허물들이 있는가?
[답] 난체함으로부터 몸이 있고 몸으로부터 온갖 고통이 생긴다.
마치 경전 중에서
“만일 나의 제자로서 사실대로 난체하는 모습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에게 수기(受記)하기를 ‘장차 아무 곳에 태어나니라’고 하겠다”고 하심과 같다.
아직 남은 교만이 있어서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온갖 번뇌는 다 모양을 취함에 따르게 된다. 나는 이 모양 중에서도 큰 것이다. 그러므로 난체함으로부터 몸이 잇는 줄 알 것이다.
또 이 난체하는 것은 곧 어리석음에 속한다. 왜냐하면 눈은 물질을 봄으로써 “내가 본다”고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이 난체하는 것은 도리를 따라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갖 세간이 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면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난체하겠는가?
그러므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보다도 가장 도리가 없다.
또 난체함으로부터 업을 일으키면 날카롭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는 것이니, 탐착이 깊기 때문이다. 탐욕으로부터 업을 일으켜도 이와 같을 수는 없다.
또 난체하는 그 힘 때문에 탐냄 따위가 치솟는 것이니, 곧 이 탐냄은 씨족 등의 교만과 합해지면 더욱 자라고 더욱 왕성하다.
또 젠체하는 인연으로 비천한 집에 태어나고 또한 사자나 범이나 이리로 나며, 이 인연으로부터 지옥에 떨어진다. 난체함에는 이와 같은 한량없는 허물들이 있다.
[문] 어떠한 것을 난체함이 많은 모양이라 하는가?
[답] 그 사람의 집착하는 바가 견고해서 같이 말하기조차 어려우며,
공경하는 마음이 없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적으며
제멋대로 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큰 체하여서 가르치기 어려우며,
온갖 얇고 적은 것을 스스로 많은 양하며, 남을 경멸하기를 좋아하는 따위이니,
이런 허물들은 제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난체하지 않아야 하리니, 이 난체하는 것은 온갖 공덕을 부수고서 생기기 때문이다.
11.9. 의품(疑品)
[논자(論者)의 말]
의심이라 함은 진실한 법안에서 마음이 결정하지 못함을 말한 것인데,
“해탈이 있는가, 해탈이 없는가, 착함과 착하지 않음이 있는가, 없는가, 삼보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이것을 의심이라고 한다.
[문] 만일 나무 그루터기에 의심을 내면서 “그루터기냐 사람이냐”고 하고
흙덩이에 의심을 내면서 “흙덩이냐 비둘기냐”고 하고
벌[蜂]에 의심을 내면서 “벌이냐 염부과(閻浮果)냐”고 하고
뱀에 의심을 내면서 “뱀이냐 밧줄이냐”고 하고,
아지랑이에 의심을 내면서 “햇빛이냐 물이냐”고 하는
이러한 의심들은 안식으로 인하여 생긴다.
소리에서도 의심을 내되 “공작새의 소리냐 사람이 내는 소리냐”고 하며,
향기에서도 의심을 내되 “우발라(憂鉢羅)향이냐 화향(和香)이냐”고 하며
맛에서도 의심을 내되 “고기 맛이냐 고기 맛 비슷한 것이냐”고 하며,
닿임에서도 의심을 내되 “생명주[生繒]냐누인 명주냐”고 하며
의식이면 가지가지로 의심을 내면서 “이 법은 타라표(陀羅驃)가 있느냐 구나(求那)만이냐? 신(神)이 있느냐 신이 없느냐”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의심인가 아닌가?
[답] 만일 그루터기냐, 사람이냐? 하는 따위의 의심이 번뇌가 아니라면 이것은 후생 몸의 인연은 될 수 없는 것이니, 샘이 다한 사람도 이러한 의심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 이 의심은 어째서 생기는가?
[답] 두 가지 법을 보고 듣고 하여 알고 있기 때문에 의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먼저 두 가지의 서 있는 물체로서 한 가지 그루터기였고 한 가지는 사람이었음을 보았었다.
그 다음에 멀리 떨어져서 사람과 비슷한 물체를 보면 그것이 그루터기인가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흙 따위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를 들었다는 것도
만일 죄와 복이 후생에 있다는 말을 들었고 또한 없다는 말을 들었으면 그 때문에 의심이 생긴다.
두 가지를 안다는 것도
하늘이 큰 비를 내리면 도랑이 넘쳐흐르는 것과, 물을 가로막을 때에도 도랑물은 넘쳐흐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며,
하늘에서 비가 오려하면 개미들은 먼저 알[卵]을 옮겨가는 것과, 사람이 땅을 파면 역시 알을 옮겨가는 것과 같은 것이며,
공작(孔雀)의 울음을 사람도 시늉을 내는 실지의 일을 보기도 하엿고, 병(甁)과 같은 진실하지 못한 일을 보기도 하였고,
불을 쥐고 돌림[旋火輪]과 같은 실지의 일을 보지 못하기도 하였고, 나무뿌리[樹根]나 땅속의 물[地下水]과 같은 현실이 아닌 일을 또한 볼 수 없기도 하였고
두 번째의 머리와 세 번째의 손과 같은 이러한 두 종류의 일들을 보고 들어서 알기 때문에 의심을 낸다.
또 자세히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을 내는 것이니, 마치 멀음[遠] 등의 여덟 가지 인연과 같다.
또 두 가지의 믿음 때문에 의심이 생기는 것이니,
어떤 사람은 “내생이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 할 적에
두 사람을 다 같이 믿는다면 이 때문에 의심이 생긴다.
또 의심할 만한 일에서 다른 모양을 보지 못하면 그 때문에 의심이 생기지만
만일 다른 모양을 보면 이런 의심은 없게 된다.
[문] 무엇을 다른 모양을 본다고 하는가?
[답] 보고 듣고 알아서 결정하기 때문에 의심이 없다.
불법 안에서 몸소 법의 참된 모양을 증득하는 때에는 마침내 의심이 없어진다.
마치 보살이 도량에 앉을 때에
“정진하는 바라문에게 깊은 법이 앞에 나타나게 되면 모든 인연의 다함으로 의심의 그물이 이내 끊어져 없어진다”고 함과 같다.
또 도리에 맞는 지혜를 얻으면 그 의심은 끊어지며,
지혜 있는 사람이
“지어감[行]의 인은 식(識)에 반연한다”고 함을 들으면
곧 결정코 나고 죽는 것이 끝이 없었음을 아는 것과 같은 일들이다.
[문] 의심에는 어떠한 허물이 잇는가?
[답] 의심이 많은 사람이면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일을 다 성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의심을 품은 사람은 사업을 일으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일으킨다 하여도 미약하기 때문에 성취할 수 없다.
또 경전 중에서
“의심은 곧 마음의 그루터기[蘗]이다.
‘마치 거친 밭에 그루터기가 많기 때문에 다른 풀도 돋아날 수 없음과 같나니, 더군다나 벼 등의 곡식이겠느냐’고 함과 같이
마음도 그와 같아서 의심의 뿌리에 무너뜨려져서 삿된 일 조차도 결정할 수 없거늘 하물며 바른 결정이겠느냐”고 함과 같다.
또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의심은 어둠의 더미라 한다.
어둠의 더미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과거의 어둠 더미와 미래의 어둠 더미와 현재의 어둠 더미이다.
이 어둠의 더미는 바로 모든 나라는 소견이 생기는 곳이니라”고 하였다.
또 이 사람은 설사 선정의 마음을 얻는다 하여도 그것은 삿된 선정이며, 만일 부처님의 법을 여의면 바른 선정을 말할 수 있는 이가 없다.
또 대다수의 중생은 의심을 품고 죽게 되는데 마치 아타가(阿咤伽) 등의 다섯 가지 신통 지닌 신선들도 역시 의심을 품고서 죽은 것과 같다.
또 이 의심하는 사람은 설사 보시 등의 복덕을 짓는다 하여 과보가 없거나 혹은 조금의 과보를 얻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복의 업은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이 사람의 마음은 항상 의심 때문에 흐려져 있으므로 선한 복이 없게 된다.
또 경전 중에서
“의심을 품고 보시하면 변두리 땅에 나는 과보를 받느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의심이 많은 사람은 일정한 마음을 지닐 수 없어서 때에 따라 손수 주면서도 갖가지 공경하는 마음을 낼 수 없으므로 변두리 땅에서 조그마한 과보를 받는 것이 마치 파야수(波耶綏) 등의 조그마한 임금과 같기 때문이다.
[문] 이러한 의심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은 심수(心數)의 법이라 하며, 모든 심수의 법은 생각 생각에 생멸하기 때문이다.
설사 옳다 할지라도 의심은 아니요, 그르다 할지라도 의심은 아니다.
하나의 마음에서는 옳은 것이 있거나 그른 것이 있거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없는 줄을 알겠다.
[답] 나는 생각생각마다 의심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요,
결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서로 이어감을 의심이라 한다.
그때의 마음은 바로 그루터기인가, 바로 사람인가를 결정하여 알지 못한다.
이것이 서로 이어가면서 마음은 믿지 않기 때문에 흐려지며,
또 삿된 소견 때문에 믿지 않는다 하면 의심이 때로는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한다.
이 믿지 않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심으로부터 생기며,
둘째는 삿된 소견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의심으로부터 생기면 가볍지만 삿된 소견으로부터 생기면 무겁다.
믿음에는 또한 두 가지이니
첫째는 바른 소견으로부터 생기며,
둘째는 듣는 때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바른 소견으로부터 생기는 믿음은 견고하고 듣는대로부터 생기는 마음은 그와 같지 못하다.
11.10. 신견품(身見品)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의 나라는 마음을 몸에 대한 소견[身見]이라 한다.
실로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섯 가지 쌓임을 반연한다고 하고
다섯 가지 쌓임을 몸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소견을 내는 것을 몸에 대한 소견이라 한다.
나 없음[無我]의 가운데서 나라는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소견이라 한다.
[문]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나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무슨 잘못이 있는가?
병 등의 물질도 제각기 제 모양이 있어서 그 안에서도 잘못이 없음과 같이 나라는 것도 그와 같다.
또 쌓임을 떠나서 나라는 것이 있다면 그야말로 잘못이 있어야 된다.
[답] 아무리 쌓임을 여의지 아니하고 나를 말한다 할지라도 이것 또한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여러 외도들은 말하기를
“나는 바로 항상 한 것이니, 금생에 업을 일으켜서 나중에 보를 받기 때문이다”고 한다.
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다섯 가지 쌓임은 이것이 항상 하여야 한다.
또 나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나를 하나로 삼는데 그렇다면 다섯 가지 쌓임도 이는 하나이어야 하리니 이것을 허물이라 한다.
또 나라 하는 바로 이것이 잘못이다.
왜냐하면 나라는 마음 때문에 내 것[我所]이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있기 때문에 탐냄과 성냄 등의 온갖 번뇌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알아라. 나라는 마음은 바로 번뇌가 생기는 고장이다.
또 이 사람이 비록 쌓임을 여의지 않고 나를 말한다 하나
쌓임의 모양을 취함으로써 공(空)을 수행하지 아니하며
공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를 내고
번뇌로부터는 업을 내며
업으로부터는 괴로움을 내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 생사는 계속되어 끊어지지 않는다.
또 이 사람은 나를 헤아리기 때문에 오히려 몸과 머리와 눈과 손발을 거칠게 분별하게 되지도 못하거늘 하물며 모든 쌓임을 분별하겠는가?
“나는 하나이고, 나는 항상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분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공에 들겠는가?
또 만일 나를 본다면 열반을 두려워하게 될 터이니 나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경전 중에서
“범부는 공과 나 없음을 듣고 큰 두려움을 내나니, 나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도무지 얻을 바가 없다”고 함과 같다.
그와 같이 범부는 부서럼 난 야간(野干)의 몸까지 탐욕을 내면서도 열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일 공의 지혜를 얻으면 다시는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우파사나경(憂波斯那經)에서
“청정하게 계행을 지닌 사람은 여덟 가지 거룩한 도[八聖道]를 잘 닦은지라 목숨을 마칠 때에 마음이 기쁘기가 마치 독약 그릇을 부수는 것과 같다고 함과 같다.
또 나가 있다고 말하면 바로 삿된 소견에 떨어진다. 만일 나가 항상하다면 고통과 쾌락도 변하지 않을 것이요, 변하지 않는다면 죄와 복도 없으리라.
또 나가 무상하다면 내생이 없고 저절로 해탈하여 죄도 복도 없으리니, 그러므로 몸에 대한 소견은 아주 무거운 죄인 줄 알 것이다.
또 몸에 대한 소견을 심히 어리석음이라 한다. 모든 범부는 저마다 몸에 대한 소견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서 깊이 존재[有]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사에 왕래하나, 만일 나 없음을 보면 왕래는 끊어진다.
[문] 만일 다섯 가지 쌓임에 나가 없다면, 중생은 어찌하여 그 안에서 나라는 소견을 내는가?
[답] 만일 인간과 천상의 남자와 여자의 이름과 모양을 들으면 망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바로 나라는 마음을 낸다.
또한 인(因)이 아닌데 인에 비슷하기 때문에 나라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른바
“만일 나가 없으면 무엇이 괴로움과 즐거움과 위의와 언어를 느끼며 죄와 복의 업을 일으키어 과보를 받겠는가”고 한다.
또 끝없는 생사에서 오랜 세월동안 나라는 모양을 쌓은지라 그 병 등의 모양과 같게 됨을 이루었고 그 때문에 나라는 마음을 낸다.
또 모든 수음[受陰] 중에서 나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요, 느끼지 않는 가운데서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느낌은 나라는 마음을 내는 처소”라고 여긴다. 그 중에 나라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온갖 처소에서 나라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리석기 때문에 나라는 마음을 냄은 마치 장님이 기와와 돌을 얻어서는 금과 옥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과 같다.
또 이 사람은 아직 공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지 못한지라 어리석기 때문에 나라고 보는 것이 마치 눈 흘림과 꿈과 건달바성(乾闥婆城)과 불 바퀴[火輪] 따위에서 있다는 생각을 내는 것과 같다.
[문] 현재에 보건대, 물질로 이루어진 신체의 터럭과 손톱 발톱 등의 모든 부분이 각기 다르거늘 어떻게 지혜가 있는 사람이 이것으로써 나를 삼겠는가?
[답] 어떤 사람은
“신(神)은 보리와 같고, 개자(芥子)와 같은 것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데, 바라문의 신은 희고 찰리의 신은 누렇고 비사의 신은 빨갛고 수타라의 신은 검다”고 본다.
또 위타(韋陀) 중에서 말하기를
“우주가 처음 성립 될[冥初] 때에 대장부의 신(神)은 마치 빛깔이 햇빛과 같았었다.
만일 사람이 이것을 알면 생사를 건너며 다시는 그 밖의 도리는 없다”고 하였다.
작은 사람이면 작고 큰 사람이면 커서 몸의 굴속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좌선(坐禪)하는 사람이 광명의 모양을 얻어서 몸속의 신을 보는 것이 마치 깨끗한 구슬속의 오라기와 같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물질을 헤아리면서 나로 삼지만 거칠게 생각하는 사람은
“느낌[受] 이것이 나다. 나무나 돌 따위 안에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니, 느낌이 바로 나인 줄 알 수 있다”고 하며,
중간 정도의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想]이 바로 나다. 괴롭고 즐거움이 비록 허물이기는 하나 오히려 생각 있는 것이 나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고 하며,
세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어감[行]이 곧 나다. 병(甁) 따위의 모양이 비록 허물이기는 하나 오히려 생각함[思]이 있는 것이 나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고 하며 깊고
세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식(識)이 곧 나다. 생각함도 거친 줄을 알아서 이 생각함이 비록 허물이기는 하나 오히려 짐짓 식이 있는 것이 나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
또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나라는 마음을 내는데 이 사람은 느낌 등의 모든 쌓임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과 마음[色心]의 안에서 합하여 나라는 생각을 내는데, 마치 물질 등의 네 가지 법에서 통틀어서 병이라는 생각을 냄과 같다.
물질 등의 차별에는 스무 가지의 구분이 있음으로 물질 그것이 나라고 본다. 왜냐하면 물질이 곧 나이어서 법을 알고 느낌 등은 의지할 바[所依]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느낌 등은 물질에 매어 있기 때문에 물질을 나라고 여긴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느낌 등 안에서 머무름을 보면 느낌 등은 바로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을 의지할 바로 삼음은 마치 허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땅 따위를 의지로 함과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이 스무 가지 구분[三分]은 다 어리석음으로부터 생긴다.
[문] 눈 따위 안에서는 무엇 때문에 나라는 갈래를 말하지 않는가?
[답] 역시 있다.
경전 중에서
“만일 사람이 눈이 곧 나라”고 말하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눈 이것은 생멸하기 때문이다. 만일 눈 이것이 나라고 말하면 나는 곧 나고 없어지고 한다.
또 눈 등은 각기 서로 다른 것이다.
“만일 눈은 나라 하면서 귀 등은 나가 아니다”라고 하면 이것이야 말로 옳지 못하다.
만일 귀 등도 다 나라 한다면, 한 사람에게 많은 나가 있게 된다.
물질들 중에도 여러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에 물질은 나이면서 느낌 등은 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문] 만일 “나가 없다”고 말하면 역시 이것은 삿된 소견이다. 그 일은 어찌 되는가?
[답] 두 가지 진리가 있다.
만일 으뜸가는 진리[第一義諦]로써 말하면 “나가 있다[有我]함은 몸에 대한 소견(身見)이 되거니와
만일 세상 진리로써 말하면 “나가 없다[無我]”함은 바로 삿된 소견이 된다.
만일 “세상 진리이기 때문에 나가 있고, 으뜸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나가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바른 소견[正見]이 된다.
또 으뜸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고
세상 진리이기 때문에 “있다”고 말하면 소견 가운데 떨어지지 아니한다.
이와 같이 있다 없다의 두 가지 말이 여기저기에 다 통함은
마치 범이 어린애를 물어 가는데 만일 급하게 물면 상처가 날 것이요, 느슨하게 물었다가는 잃어버리게 됨과 같다.
이와 같이 결정코 “나가 있다”고 하면 몸에 대한 소견에 떨어지고
결정코 “나가 없다”고 하면 삿된 소견에 떨어진다.
또 지나치거나 모자라다[過不及]고 하면, 둘 다 같이 허물이 있다.
만일 결정코 “없다”고 하면 그것은 지나치는 것이 되고,
만일 결정코 나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모자라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양편의 치우침을 버려야 할지니, 만일 으뜸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없다고 하고 세상 진리이기 때문에 있다”고 하면
양편의 치우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된다고 하였다.
또 부처님의 법은 다투거나 이길 수 없다고 한다.
만일 “으뜸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없다”고 하면 지혜 있는 이도 이기지 못하고,
만일 “세상진리이기 때문에 있다”고 하면 범부도 다투지 못한다.
또 부처님의 법은 청정한 중도이어서 항상함[常]도 아니고, 아주 없음[斷]도 아니라고 한다.
으뜸가는 진리에서는 없기 때문에 항상함이 아니요, 세상 진리에서는 있기 때문에 아주 없음이 아니다.
[문] 만일 법이 으뜸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없다해야 하겠거늘 어찌하여 다시 세상 진리이기 때문에 있다고 하는가?
[답] 온갖 세간의 모든 언설인 이른바 업과 업의 과보거나 속박과 해탈 등은 모두가 어리석음에서 생긴다. 왜냐하면 이 다섯 가지 쌓임은 공하여서 마치 허깨비와 같고 아지랑이 같으면서 서로 이어서 생기기 때문이다.
범부를 제도하려고 수순하면서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범부는 미혹하여 혹은 아주 없음[斷滅]에 떨어질 것이며,
만일 모든 쌓임을 설명하지 않으면 그들을 교화할 수 없을 것이니,
죄와 복 등의 업과 또는 속박이거나 해탈이거나 간에 다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어리석은 말을 부수면 저절로 공에 들게 되리니 그 때엔느 모든 삿된 소견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으뜸가는 진리를 설명하게 된다.
마치 처음에는 몸을 관찰하여 남자거나 여자의 모양을 부수라고 가르치고
다음에는 터럭과 손톱 발톱 등으로 몸의 모습을 분별하여 다섯 가지 쌓임 뿐임을 알게 하고
맨 나중에는 공한 모양으로써 다섯 가지 쌓임의 모양을 없애도록 함과 같은 것이니,
다섯 가지 쌓임의 모양을 없애는 것을 으뜸가는 진리라 한다.
또 만일 세상의 진리이기 때문에 “있다”라고 설명하면 다시 으뜸가는 진리에서의 “없다”함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또 경전 중에서
“만일 모든 법에 제 체성이 없는 줄 알면 바로 공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다섯 가지 쌓임도 없는 것이다.
또 으뜸가는 진리는 공한 것이다.
경전 중에서
“눈 등은 으뜸가는 진리로써는 없고, 세간의 진리로써는 있다”고 하였다.
대공경(大空經) 중에서 말한
“혹은 이것이 늙어 죽음이다 하거나 혹은 이 사람이 늙어 죽는다하거나, 혹은 외도는 몸이 곧 신(神)이라 하거나, 몸 다르고 신 다르다”고 한다면
이 일은 뜻은 하나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다.
만일 “몸이 곧 신이며, 몸 다르고 신 다르다”고 한다면
그는 깨끗한 행을 닦는 사람이 아니다.
만일 이 사람의 늙어 죽는 것을 막으면 곧 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요,
만일 이 늙어 죽음을 막는다면 곧 늙어 죽는 것으로부터 무명까지를 부수는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으뜸가는 진리 중에는 늙어 죽는 따위가 없고,
“나기[生]는 늙어 죽음에 반연한다”고 하면 다 세속의 진리로써 설명한 것이니,
그것을 중도(中道)라 한다.
또 나타경(羅陀經) 중에서
“부처님은 나타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은 흩어져 무너지고 깨지고 찢어지면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게 되나니, 식까지도 역시 그러하다. 마치 돌로 쌓은 벽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게 되면 모든 쌓임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니 역시 으뜸가는 진리에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쌓임의 모양이 있게 됨에 따라 나라는 마음은 끝까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니, 인연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나무가 비록 베어 불태워서 재와 숯이 되었다 하더라도 나무라는 생각은 오히려 따라 다니는데
만일 이 재와 숯이 바람에 불리거나 물에 떠내려가 버리면 나무라는 생각이 사라짐과 같다.
그와 같아서 만일 부수어 찢어지고 흩어지고 무너져서 다섯 가지 쌓임의 모양을 없애면 그 때에는 곧 공의 모양이 구족하다고 한다.
또 경전의 말씀에서
“나타야 너는 중생을 부수어 찢고 흩어 무너뜨리며 분석하여 나타나 있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
이 경전 중에서는
“다섯 가지 쌓임은 무상하여 중생은 공하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요,
무선경(無先經) 중에서는
“다섯 가지 쌓임이 흩어져 사라지면 그것이 법공(法空)이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11.11. 변견품(邊見品)
만일 “모든 법은 아주 없기도 하고 혹은 항상 하기도 한다”고 하면
이것을 치우친 소견[邊見]이라 한다.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나가 아주 없다[斷]고 하거나 항상하다[常]고 하거나 하면 이것을 치우친 소견이라하나 온갖 법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보이는 바깥의 물체는 아주 없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있다는 소견을 항상하다고 하고, 없다는 소견을 아주 없다고 한다”고 하였다.
또 몸이 곧 신(神)이라 하면 아주 없음의 소견이라 하고
몸 다르고 신 다르다고 하면 항상함의 소견이라 한다.
또 죽은 뒤에는 다시 나지 않는다 하면 아주 없음의 소견이요,
죽은 뒤에 도로 난다 하면 항상함의 소견이라 한다.
죽은 뒤에 나기도 하고 나지 않기도 한다 하면,
이 중의 난다는 편을 항상하다고 하고, 나지 않는다는 편을 아주 없음이라 하며 나는 것도 아니요, 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함도 그와 같다.
[문] 이 넷째 번의 것은 소견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답] 이 사람은 세속의 진리에서도 역시 사람[人]과 법(法)이 없다 하기 때문에 소견이라 하는 것이니,
항상함과 무상함과 끝이 있다[邊]와 끝이 없다[無邊] 등의 구절[句]도 역시 그렇다.
또 경전 중에서
“여섯 가지 닿임의 감관[觸入]은 다 사라져서 달리 남은 것이 있으면 곧 항상함이 되고
달리 남은 것이 없으면 곧 아주 없음이 된다”고 하였다.
또 만일 나는 먼저도 났었고 뒤에도 다시 날 것이라고 보면 이것을 항상함의 소견이라 하고
나는 먼저도 나지 않았고 뒤에도 다시 나지 않으리라 하면 그것을 아주 없음의 소견이라 한다.
또 사견경(邪見經)에서
“사람 몸의 일곱 가지 갈래는 땅[地]과 물[水]과 불[火]과 바람[風]과 고통[苦]과 쾌락[樂]과 수명[壽命]인데, 만일 그가 죽을 때에는 네 가지 요소는 근본으로 돌아가고 감관은 허공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칼 수레바퀴[刀輪]로 중생을 살해하여 쌓아 고기더미를 만든다 하여도 살생의 죄는 없다고 하면, 그것을 없음의 소견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범망경(梵網經) 중에서는 아주 없음의 소견에 대한 모양[斷見相]을 설명하였다.
만일 “후세가 있고 짓는 것[作者]이 바로 받는 것[受者]이다고 하면, 그것을 항상함의 소견이라 한다”고 하였다.
[문]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은 어떻게 하여 생기는가?
[답] 어떤 인연으로 죽은 뒤에 도로 난다고 말하는 이 인연에 따르기 때문에 항상하다는 편견을 내며 어떤 인연으로 죽은 뒤에는 다시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 인연에 따르기 때문에 아주 없다는 편견을 낸다.
[문] 이러한 소견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답] 바르게 공을 닦아 익히면 나라는 소견이 없어지고, 나라는 소견이 없기 때문에 바로 두 가지의 뉘우침이 없다.
마치 염마가(炎摩伽) 경에서
“만일 하나하나의 쌓임이 아니라면 화합된 쌓임도 역시 사람이 아니며 쌓임을 여의고도 사람이 아니다. 현재에도 이렇게 될 수가 없거늘 어떻게 아라한은 죽은 뒤에 다시 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이란 얻을 수가 없고 사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나라는 소견이거나 아주 없음과 항상하다는 소견이 역시 다 없다”고 하였다.
또 모든 법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보면 두 가지 치우침이 없다.
또 세간에서의 모이짐을 보면 없다는 소견이 사라지고 세간에서의 사라짐을 보면 있다는 소견이 사라진다고 말함과 같다.
또 중도(中道)를 행하기 때문에 두 가지 치우침[二邊]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서로 이어서 생기는 것을 보면 아주 없음의 소견이 사라지고 생각 생각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 항상하다는 소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다섯 가지 쌓임이 곧 사람이 아니며, 쌓임을 여의고서도 사람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항상함도 아니요, 아주 없음도 아닌 줄 알 것이다.
다른 몸을 받아 나기 때문에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고,
다 같이 중생이기 때문에 다르다 할 수도 없다.
또 다섯 가지 쌓임이 서로 이어가기 때문에 중생의 생사가 있다.
이 안에서는 즉(卽)한다고 말할 수 없음은 그것이 서로 이어가면서 달라지기 때문이며,
또한 다르다고 말할 수 없음은 서로 이어가는 중에서는 동일하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 쌓임으로부터 저 쌓임은 다르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스스로의 계속되는 인연의 힘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아주 없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