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유학자 시암(是菴) 이직현(李直鉉) 선생의
독립운동과 자료에 대하여[7]
2) 대동단 만세운동과 제2의 독립선언서(2)
앞 호의 ‘선언서’에서 계속 이어짐.
어시호(於是乎) 삼월(三月) 일일(一日) 독립(獨立)을 선언(宣言)하고 사월(四月) 십일(十日)에는 정부(政府)를 건설(建設)하였으나 완미(頑迷)한 그 일본(日本)은 시세(時勢)의 추이(推移)를 고려(顧慮)함이 없이 쓸데없는 시랑(豺狼)의 만성(蠻性)을 발휘(發揮)하여 크게 압억(壓抑)을 제 마음대로 하고 백수(白手)인 도중(徒衆)을 총포(銃砲)로 죽이고 성읍촌락(城邑村落)을 폭신(爆燼)하였다. 이 어찌 인류적(人類的) 양심(良心)으로써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냐. 오족(吾族)의 단충열혈(丹忠熱血)은 결(決)코 이 비정리적(非正理的)인 압박(壓迫)에 감축(減縮)되지 않고 더욱 정의인도(正義人道)로서 용왕매진(勇往邁進)함이 있을 뿐, 만일(萬一) 일본(日本)으로 하여금 끝내 이를 회개(悔改)함이 없다면 오족(吾族)은 부득이(不得已) 삼월(三月) 일일(一日)의 공약(公約)에 의(依)하여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대(最大)의 성의(誠意)와 최대(最大)의 노력(努力)으로써 혈전(血戰)함을 사양(辭讓)하지 않을 것임을 자(玆)에 성명(聲明)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원년(元年) 십일월(十一月) 일(日)
대한민족(大韓民族) 대표(代表)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김가진(金嘉鎭), 김협(金協), 양정(楊楨), 이정(李政), 김상설(金商說), 전상무(田相武), 백초월(白初月), 최전구(崔詮九), 장형구(張炯九), 김익하(金益夏), 정설교(鄭卨敎), 이종춘(李鍾春), 김세응(金世應), 정의남(鄭義南), 나창헌(羅昌憲), 한기동(韓基東), 신도안(申道安), 이신애(李信愛), 한일호(韓逸浩), 박정선(朴貞善), 노홍제(魯弘濟), 이진현(李眞鉉), 이내수(李來修), 김병기(金炳起), 이겸용(李謙容), 이설후(李雪吼), 신태연(申泰鍊), 신형철(申瑩澈), 오세덕(吳世悳), 정규식(鄭奎植), 김홍진(金弘鎭), 염광록(廉光祿)」
위의 선언서의 내용은 여기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일제의 잔학성과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언서에서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한 것은 1919년 4월 10일 상해의 임시정부 수립 일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1년으로 명기(命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3․1운동의 공약 3장에 의거하여 이 일을 결행함을 밝힘으로써 3․1 독립선언을 계승한 제2의 독립선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모두 33인으로 3․1 독립선언서의 서명인과 동일한 수로 작성한 것을 보더라도 이 선언서가 3․1운동을 계승한 ‘제2의 독립선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1 독립선언서는 당시에 신문에 수록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의 선언서는 1920년 1월 1일에 독립신문에 실려 보도가 되었다.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위 선언서의 내용을 한문으로 바꾸어 국한문혼용으로 작성되어 있다. 이 기사는 선언서와 내용상에는 크게 차이가 없으나 선언서에서 잘못 인쇄된 서명자의 이름을 정정하고 있다.(다음 호에 계속) <bonwkoo@hanmail.net>
※ 이 글은 《유림신문(儒林新聞, 대구향교 유림신문사 발행), 제12호(2008년 11월 15일 발행 4면)》에 수록된 글입니다. 필자는 구본욱(具本旭: 대구향교 장의掌議)입니다. ‘유림신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제(日帝)가 일어(日語)로 번역하여 내각에 보고한 ‘선언서’
(『조선소요사건』에 수록,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