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수동 새터마을 이야기
(욱수동 봉암골 들머리, 덕원고 MBC 불광사 식당촌 마을의 본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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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이면 뚜꺼비 산란 장소로 이름 난 이곳, 마을의 지명은 “새터마을”입니다. 뚜꺼비 산란장은 마을에 바짝 붙어있는 망월지 못입니다(현재 불광사 앞 저수지).
새터마을의 유래는 본동인 욱수동에서 터가 새로 생겼다는 뜻입니다. 봉암골에서 흘러내리는 욱수천은 원래 이곳에 오면 두 갈래로 갈라져 동쪽은 경산 정평동으로 서쪽은 매호동으로 흘렀습니다. 그런데 욱수천의 범람으로 논 밭의 침수 피해가 잦아서 마을 위쪽에 둑을 쌓아 욱수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만 흐르게 했습니다. 그 후 이곳은 하천부지가 되었고, 흙으로 메워서 새 땅이 생겼기 때문에 "새터"라고 불렀습니다.
새터마을은 지금 상태로 개발되기 전부터 지적도를 보면 위치 파악이 쉽지 않을만큼 복잡합니다. 그 이유는 마을 상부 지역(공영 주차장 부근)은 예로부터 욱수천의 범람으로 인해 지형이 자주 바뀌고, 여기에 망월지 축조로 대부분 지역이 유지로 편입되어 변했으며, 길과 수로를 새로 내다보니 지적도와 실제 모습이 다르게 표기되고 있습니다. 봉암길 일부는 원래는 이 천 때문에 새터마을 뒤쪽인 산 밑(기슭)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망월지 공사 후 현재의 위치로 바뀌어지고, 지금은 공영 주차장 개설과 더불어 도로가 넓어졌습니다.
새터마을은 봉암골 사람들에게는 나들목과 쉼터의 역할을 했습니다. 봉암골 아이들 등교길은 물론이고 어른들이 볼일이나 시장보러 오갈 때면 이 마을을 지나야 하는데 이 때 마을에 들러서 목을 추기며 쉬어가곤 했습니다. 특히 새터마을은 봉암골 사람들에게 우편물을 전달하는 중개지 역할을 했습니다. 우편 배달부가 봉암골은 길이 멀고 험하기 때문에 배달할 편지가 있으면 그 편지를 담배집을 했던 새터마을 박씨집에 맡겨두고 갑니다. 그러면 봉암골 사람들이 시장에 갔다 오거나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이 편지를 우체통에서 찾아 집집이 전달하여 줍니다. 그제서야 봉암골 사람들은 편지를 반갑게 받아 봅니다.
봉암골 왕래는 새터마을에서 세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 바로 내려가면 이웃 동네(욱수 본동, 신매동, 매호동, 사월동)이고, 경산 읍내로 시장 보러 가려면 강천지 못 쪽(덕원고 기숙사)으로 가서 옥산동 길로 가고, 초등학교 등교 길과 면사무소(시지동주민센터) 볼일은 망월지 못둑길을 따라 사직단고개(사직당메기)를 넘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새터마을은 중심지(448번지) 주위로 16~18호 정도가 정겹게 살았는데 특히 최씨 일가가 많이 살아서 일명 “최씨 동네(최씨 집성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새터마을은 1970년을 전후하여 최씨가 9가구, 서씨 2가구, 금씨, 박씨, 송씨, 서씨, 양씨, 전씨, 배씨 등이 각각 1가구씩 살았습니다.
지금은 이곳에 오면 학교와 방송국, 사찰 등 대형 건물이 먼저 눈에 뜨이고, 신축 건물과 식당촌, 주차장과 자동차 통행, 봉암누리길 산책과 약수터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지만, 2000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전통적인 농촌마을에 정겨운 시골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새터마을의 위치를 설명하면 마을 동쪽은 성암산과 응지산 자락을 너머 옛 압독국 본거지였던 압량들과 경산시가 있고, 남쪽은 삼한시대의 자산성과 약수터가 있는 망월, 북쪽은 삼한시대 유적이 대량 발굴된 욱수들(현 아파트 단지)에 저수지(새터못, 뒷뜰못, 샘못, 안못, 모산골못, 사월못)가 많고, 망월지 못둑에서 보면 금호강 건너편인 반야월이 보였습니다. 저수지는 경산쪽으로도 강천지, 중산지, 태평지가 있었고, 경산지역 중산 옥산 정평동 농지는 여기서 보를 설치하여 저수한 욱수천 물로 농사를 짓습니다. 그래서 새터마을은 욱수천 물을 10여개의 저수지로 나누어 공급하는 수자원 분배지 역할도 했습니다.
앞으로는 맑은 욱수천이 흐르고, 그 천을 따라 봉암골이 선돌까지 6Km 정도 길게 이어지며, 서북쪽 삼삼동에는 삼한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천제단(지금은 중국식 명칭인 사직단)이 있습니다.
삼삼동은 주위에 유적 발굴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부터 촌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삼동은 주위에 산이 세개라서 삼산(三山)이라고 했거나 아니면 천제단에서 올린 삼신제(三神)에서 '삼신동'이 나중에 "삼산동"으로 변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삼삼동은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는 천제단(사직단)을 비롯하여 주위에 유물 매장지가 많았음을 볼 때 우리의 옛 역사, 특히 삼한시대의 압독국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로 보입니다.
북동쪽으로는 역시 삼한시대 압독국에 적이 침입하면 봉화를 올려 자산성에 소식을 알리던 성동 고산(성산봉대) 정상이 바로 보입니다. 욱수천의 일부는 원래 마을 앞에서 욱수동 서편으로 갈라지며 매호동으로 흘렀지만, 지금은 욱수동 동편에서 정평동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욱수들에서 발견된 고유적 지역은 원래 삼한시대의 취락지구로 추정되며, 욱수천의 대범람으로 마을 전체가 유실되면서 그 흔적은 유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최씨 집성촌 거주민 소개>
육지댁, 태산댁, 평지댁, 최용수, 최복이, 최학서, 최정현, 최외덕, 최사기 (9가구)
첫댓글 새터의 추억들
새터는 추억이 많다
청소년 때 나는 많이 돌아 다녔다 어디에 뭐하러 갔을까... 왜-왜-왜-
경산농촌지도소 경산도서관(예대원 씨) 마을문고 책읽기운동 ( 이영호 씨) , 안양에 있었던 한국농촌문화연구회(회장 김일주) 수원아카데미하우스 (강원용 목사님 ) 카톨릭농민회 등 사회활동을 하면서 집에 올때는 늘 신매동에 내려 새터까지 와서는 밤이면 늘 발길이 새터에 사는 최학서 친구집으로 간다
왜냐구 ... 밤길이 무서워서다 친구집에 불이 없으면 무서운 밤길을 혼자 걸어와야 했다
그 친구집이 지금은 절터로 변하였으니 사라진 모습들이 아쉬울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