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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일본의 조선 (收奪)
일본은 이미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수행을 위하여 약탈을 가속화하여 쌀이나 곡식 따위를 실어내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1904년 6월 조선정부에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전국에 있는 임자가 애매한 땅을 통째로 삼키겠다는 의도였다.
게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을사조약 이듬해인 1906년 한 해만 해도 광업법 공포, 지방행정제도 개편 및 지방관의 징세권 폐지, ‘압록강ㆍ두만강 유역 삼림경영에 관한 협동약관’ 체결 등의 사건들이 있었다.
1906년 6월 공포된 광업법은 기존의 번거로운 채광절차를 정리한 것으로 외국인도 차별 없이 채광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으며, 궁내부 소속의 광산은 농공상부 대신의 허가 없이도 채굴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기할 사항이다. 이 법령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궁내부 소속의 광산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광업권의 대부분이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통감부는 정부를 강압하여 ‘관세관 관제(管稅官 官制)’를 발포, 징세권을 장악했다. 이번 관제에 따라 기존에 지방관이 갖고 있던 징세권은 전면 폐지되고 각 도(道)에 세무감, 세무관, 세무주사를 새로이 파견하여 일선에서 직접 징세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새 관제에 따라 배치된 세무 관리들은 거의 일본인인데다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여 기존 지방관의 반감을 많이 샀다.
1907년에는 이보다 한술 더 떠서 국권침탈을 위한 공작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7년 5월 일제는 친일내각인 이완용 내각을 수립시켰으며 황제의 권한도 대폭 축소시켰다. 이는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런데 다음 달인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The Hague)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이상설(李相卨) 등을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고종에 대해 노골적인 유감을 표명하고 ‘눈엣가시’ 같던 임금을 강제 퇴위시켜 버렸다.
새로이 옹립된 왕은 고종의 아들인 순종(純宗)이었는데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는 모욕을 겪게 된다.
1907년 7월 고종이 쫓겨나고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일본은 ‘정미7조약(한ㆍ일신협약)’을 체결하고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조약에 따르자면 앞으로 한국정부의 법령제정 및 행정처분은 먼저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 차관 임용, 사법권 이양, 군대해산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외에도 사회질서나 풍속을 어지럽히는 신문에 대해 정부가 배포금지, 압수 및 발행정지도 할 수 있는 ‘신문지법(新聞紙法)’이 제정ㆍ공포되었다. 이 법령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언론탄압을 위한 것이며, 1908년에는 해외에서 발간된 신문도 국내치안을 방해한다고 판단될 시 규제할 수 있는 법령으로 개악(改惡)되었다.
1908년 12월 한국 식민통치의 선봉장인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移住)를 위해서 설립된 회사로서 일본농민의 조선 이주와 농민들의 토지 수탈을 위해서 얼마나 맹활약을 했는지, 일제강점기 동안 무식하고 순박한 조선의 농민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악명 높은 회사였다.
또한 1908년 통감부는 삼림법을 발표, 마을 공동 소유의 삼림까지 약탈하였다. 새로 제정된 삼림법 제 19조에 의하면 ‘삼림 및 산야 소유자는 본법 시행일로부터 3년 이내에 면적과 지적도를 첨부하여 농상공부 대신에게 신고하라. 이 기간 내에 제출이 없을 경우에는 국유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삼림이나 산야는 본래 부락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는데 이 한 편의 법령은 이 풍습을 파괴하여 조선의 산야를 방대한 국유림으로 만들어 일본인에게 불하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었다.
특히 임야의 측량은 소유자가 해야 하는 것으로 측량기 값이 비싸고 기술자는 적어 웬만한 땅은 측량비용이 땅값보다 비싸 측량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법령이 시행되자 결국 전국의 삼림이나 임야는 거의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실제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농민의 토지는 이런 식으로 하여 강탈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조선 농민들은 반일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총독부의 법령에 응하지 않아 눈을 뻔히 뜨고도 농토를 뺏긴 경우가 허다하였다.
1909년 4월에는 새 지방비법(地方費法)이 공표되었다. 발표된 지방비법에 따라 연초세, 도장세, 시장세 등 새로운 세목이 증가하자 지방 민중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시장세는 한국의 전통적인 상업체계를 뒤엎고 한국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일제의 침략정책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일본 상인들이 1909년 당시 1,700호에 달하고 이들이 세운 일본인 상가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판에 한국 상인들에게 부과된 각종 세금은 한국 상인들을 고사(枯死)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백성들의 민생고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단발령과 같은 관념적인 문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190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화된 대일(對日) 미곡 수출과 일본산 면제품의 수입은 조선의 경제구조를 왜곡시키고 농촌경제를 파탄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생계를 위협받는 농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궐기나 민중봉기의 형태로 백성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평안도, 함경도 및 전국 각지에서 반대 데모 및 납세거부 투쟁이 일어났으며 일본 순사들을 구타하는 등 일본의 수탈에 저항하였고, 일본은 이에 출판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한국 민중의 궐기와 시위를 탄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