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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출현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역사사건이다.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는 그 힘들고 어려운 나날에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항일구국투쟁을 기세 드높이 진행하면서 세인들이 괄목할만한 수많은 역사적 편장들을 엮어놓았다.
2016년은 중한 두 나라 인사들이 상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결성한 연합단체- 『신아동제사(新亞東濟社)』가 설립된 지 104주년(1912년)이 되는 해다. 그 후 1919년 초부터 1921년 사이 상해, 장사, 안경, 무한, 광주 등 지에서 신규식, 이유필, 조상섭, 여운형, 김홍서를 비롯한 한인 지사들이 중국공산당 조기 활동가들인 모택동, 하숙형, 주검추(周劍秋), 황종한(黃宗漢), 등중하(鄧中夏), 운대영(惲代英) 등과 손을 잡고 반일을 목적으로 한『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중·한 수교보다 반세기(1942년) 앞서 설립이 된『중한문화협회』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볼 때 중한수교 24 주년에 즈음하여『中國에서의 白凡 金九』를 출판하게 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한국의 민족수령인 김구에 대해 쓴 책이 10 여 권이 넘는 줄로 알지만 중국조선족의 시각으로 백범 김구를 다룬 책은 한 권도 없었다. 김구는 독립투쟁 생애에서 거의 27년 세월을 중국에서 보냈고 또 이때가 김구가 가장 휘황한 업적을 이룬 시기였기에 김구의 독립투쟁사 기술에서 응당히 중국에서의 27년에 큰 무게를 두어야 한다. 하지만 전에 한국에서 김구를 다룬 책들은 거개가 1919년 3.1운동 전과 1945년 귀국한 후의 사실들만 대량으로 소개하고 중국에서의 사실들은 극히 적은 분량으로 다루어 퍽 유감이었는데 이번에 장편실화소설 『中國에서의 白凡 金九』가 출판되면서 그 유감이 풀리게 되었다.
『中國에서의 白凡 金九』는 피나는 각고 끝에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의 기초를 닦아준 사람이 고 김운룡 소설가다. 고 金雲龍 선생은 소설가이자 사학가였다. 선생은 통화시정부에서 정협위원으로 있을 때부터 김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혁명가의 후손이다. 하기에 누구보다도 중국에서의 조선민족들의 독립투쟁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품어왔다.
고 김운용 선생은 역사를 통해 중한 두 나라 인민의 우의를 증진시키려고 작심하고 1998년에 중문으로 『金九評傳』을 내놓았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장장 25년간 상해, 중경, 남경, 항주, 무한, 소주, 가흥, 서안, 유주, 광주, 기강, 진강 일대를 전전하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중 많은 자료들이 역사의 베일에 가려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고 김운용 선생은 2005년에 간암으로 사망했는데 사망 직전에 문학지기인 김용운 평론가를 보고 『金九評傳』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아달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에서의 白凡 김구』의 바통이 김용운 평론가에 의해 이어지게 되었다. 김용운 선생은 『金九評傳』을 번역한 다음 한국에 수차 드나들며 한국의 출파사들과 연락하였고 중국의 조선문 출판사들과도 상담하였으나 모두 두터운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주요한 까닭은 이념에 있었다. 한국에서는 임시정부와 공산당과의 관계를 문제시했고 중국에서는 한국임시정부와 장개석, 국민당과의 관계를 문제시했다. 분명 역사에 있는 사실 그대로인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부하였다. 이에 김용운 선생은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김용운 선생은 단념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 세상에다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진실하게 알리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번역 과정에서 실증자료가 결핍하고 누락된 역사가 두루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역사사명감을 안고 누락된 자료들을 구하고 보충을 하면서 재창작에 돌입했다. 그 시간이 옹근 2년 반이 걸렸다. 작자는 진실한 사실에 문학적 성분을 가미하여 원래 30 여만 자에 달하던 『金九評傳』을 70만자 분량의 장편실화소설 『中國에서의 白凡 金九』로 탈바꿈 시켰다. 역사를 진실하게 반영하고 신빙성을 기하고자 5 백 여 개의 각주(脚注)를 달았고 백 여 장의 사진을 첨부하였다(후에 출판사 측에서 사진을 싣는 것에 대해 異意를 제출함으로 사진을 넣지 못했고 각주가 소설형식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작자가 빼버렸다).
재창작 과정에 연변인민출판사 상해 지사장 김창석 선생의 도움이 컸다. 그는 저자에게 김구 주석과 대한민국역사, 한국독립투사들에 대해 연구가 깊은 상해 복단대학 세쥔메이(謝俊美), 스웬화(石源華) 교수와 화동사법대학 쑤즈량(蘇智良) 등 교수들의 다년간의 연구 성과들을 제공하여 주었다.
본서는 아래와 같은 특점을 갖고 있다.
첫째: 이 책은 김구 개인의 역사를 초월하여 한국임시정부의 역사로 되고 있다. 이 책에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의 김구의 독립투쟁사가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임시정부의 파란만장한 발자취가 진실하고 생동하게 그려져 있어 이 한권의 책으로 한국임시정부의 어제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둘째: 이 책에는 한국독립투사들의 군상이 집약되어 있다. 김구를 주축으로 하면서 한국독립투쟁사에서 혁혁한 위훈을 남긴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상용, 안창호, 신규식, 조소앙, 노백린, 김약산, 김규식, 엄항섭, 박찬익, 이봉창, 윤봉길, 나석주, 김상옥 등 인물들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소개되고 있어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투쟁사를 요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셋째: 이 책에는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환난지우로 동고동락해온 중국 국민당 계열의 손중산, 장개석, 손과, 저보성, 진기미, 주가화, 오철성,장치중, 송교인 등 유명인사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계열의 모택동, 주은래, 동필무, 하숙형, 진담추, 운대영, 황종한, 등중하 등 유명인사들이 등장하며 조선공산주의자계열의 김산, 김약산, 김규광, 석정, 무정, 김두봉, 박효삼 등 인물들까지도 등장하여 당시 한국임시정부와 국민당괴의 관계, 한국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 한국독립투사들과 중국 혁명가들과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넷째: 이 책은 처음으로 『중한호조사』와 『중한문화협회』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1921년에 중한 두 나라 인민들의 공동항일을 목적으로 성립된 『중한호조사』는 사실상 한국의 독립지사들을 도와주는 단체였다. 모택동이 발기하고 참여한 『중한호조사』는 가장 먼저 성립된 단체로서 본보기 역할을 했다.
1942 년도에 성립된 『중한문화협회』는 본래의 함의를 훨씬 초월하여 중국의 항일투쟁과 한국의 독립투쟁을 연계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하면서 거대한 파워를 발휘하였다. 항일전쟁 후기에 한국임시정부의 중요한 사건들이 거의 모두 『중한문화협회』를 통해 진행되었다. 『중한문화협회』는 중한 두 나라 인민의 우의와 연합항일의 역사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기록이다. 독자들은 『中國에서의 白凡 金九』를 통해 항일전쟁 당시 한국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정부와의 관계, 한국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역사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항일전쟁 당시 한중 두 나라 인민들은 환난지우로 어깨 겯고 함께 혈전을 하면서 두터운 우의를 쌓아왔다. 손중산과 장개석 국민정부는 물질적으로 한국의 독립투쟁을 도왔고, 중국공산당은 정신적으로 한국의 독립투쟁을 지지하고 도왔다. 중경에 있던 『신화일보』는 수시로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성과를 알렸고 한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한국의 반일지사들은 방대한 무장 대오를 건립하고 일제와 싸웠을 뿐만 아니라 팔로군과 국민당군대에 들어가 훌륭하게 싸웠다. 이 책은 중한지사들 지간의 개인적인 우의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예하면 신규식과 손중산, 신규식과 진기미, 송교인과의 우정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본서가 향후 중한 두 나라 인민들의 유대를 굳히고 우의를 더 돈독히 하는 데서도 큰 작용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훌륭한 책을 만들어준 작자에게 뜨거운 축하와 감사를 드린다.
연변대학 박사지도 교수, 문예비평가 우상렬
2016년 3월 8일
지은 이의 말
『中國에서의 白凡 金九』는 4년 전에 응당 세상에 나갔어야 했지만 이런 저린 원인으로 오늘에야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되었다. 본 서의 기본 바탕은 고 김운용 선생이 1999년에 출간한 중문판 인물전기 『金九評傳』이다. 원래는 고인의 유언을 받들어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기로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中國에서의 白凡 金九』로 얼굴을 달리하게 되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역사사실들이 누락되었음을 발견하고 근 2년 반의 시간을 들여 자료를 찾아 보충, 보완하고 문학적 가공을 하여 원래 30 여 만자이던『金九評傳』이 70여 만자 분량의 장편실화소설 『中國에서의 白凡 金九』로 거듭 났다.
본 서는 문학성을 가미했지만 기본상 역사사실에 충실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본래는 신빙성에 기하고자 5 백 여 개의 각주를 달았고 근 백 여장의 사진을 싣자고 하다가 이런 저런 원인으로 하여 그만 두었다.
본 서는 김구를 비롯한 여러 독립투사들의 빛나는 투쟁업적과 한국임시정부가 걸어온 파란만장한 발자취들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을 사명감으로 삼았으며 한국임시정부와 국민당정부와의 관계, 한국임시정부와 공상당과의 관계, 그리고 중국의 항일투사들과 한국(조선)독립투사들 사이에 맺어진 두터운 우의도 여실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한권의 책이 금후 한국의 독립일투쟁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중한우의를 돈독히 하는 교량으로 된다면 그 이상의 바람이 없겠다.
천당에 계신 고 김운용 선생께 엎드려 감사를 드리고 명복을 빈다.
자료제공에 큰 힘이 되어 주신 연변일보사 상해지사장 김창석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졸고의 연재를 선뜻이 응낙해 주신 <송화강> 잡지자의 구용기 사장님과 이호원 주필님을 비롯한 전체 임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한권의 미비한 책을 삼가 중한 수교 26 주년 헌례작으로 바치는 바다.
20016년 3월 15일 연길에서
김용운
제1부 망명의 풍우 속에서
3.1 운동 후 김구는 아름다운 조국을 몰래 떠나 중국 상해로 갔다. 이때로부터 중국에서의 김구의 파란만장한 27년의 망명생애와 독립투쟁이 시작된다……
망명의 길에 오르다
기원 1919 년 4월 2일 새벽 사리원 역전, 여명을 앞둔 하늘에 신기한 모습이 나타난다. 짙은 회색빛 하늘이 자기의 멸망이 달갑지 않아 광명의 도래를 막으려고 최후의 발악을 한다. 그러나 하얀 아침 햇살이 날카로운 비수마냥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을 뚫으며 전진한다. 고요한 이른 새벽의 하늘에서 광명과 암흑이 처절한 박투를 벌이고 있다.
희미한 새벽빛을 헤치며 건실하고 거쿨진 사나이가 날랜 걸음으로 플랫폼에 들어선다. 그 사나이는 기민한 눈초리로 사위를 불러본 후 두 손으로 콧수염을 쓰다듬는다.
이 사나이가 바로 일본 헌병들이 눈에 쌍불을 켜고 엄밀히 감시하고 있는 김구다.
사진(김구)
한 달 전, 상해에 있는 『신한청년당』[1]에서 파리, 서시베리아, 일본, 한국에 여러 명의 대표들을 파견해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는 독립지사들을 상하이에 불러다 개국대사를 상론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김구가 중국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일본침략자들을 타격하려는 분노의 불길이 망국노를 원치 않는 모든 한국인들의 심장에서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하다면 김구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 방기동(白雲 坊基洞)에서 출생하였다. 그해에 대한제국정부와 일본이 『한일병자수호조약(韓日丙子守護條約)』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었다.
김구의 아명은 김창암(金昌岩)이고, 청년시기의 이름은 김창수(金昌洙)다. 김구는 안동김씨 신라경순왕의 33대 후손이며 고려 원종 때의 명장 충열공 김방경(金方慶)의 21대 후예로 명문가의 후손이다. 그 후 11대 선조인 김자점(金自點)이 역적죄로 몰려 멸문지환을 당하게 되자 가솔을 끌고 도망쳐온 곳이 해주 백운 방기동(白雲 坊基洞)이다. 이 때로부터 김 씨 가문은 평민으로 전락되었다. 김구 부친의 이름은 김순영(金淳永)이고, 모친은 현풍(玄風)곽 씨며 이름은 낙원(樂園)이다. 김순영은 비록 소작농이지만 지난날의 휘황한 가문의 역사가 있는지라 양반들한테 굴하지 않고 늘 반항하였다. 김순영의 굴강하고 호매하며 강호의 협객 같은 성격이 김구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빈곤하고 청고한 가정에서 자라난 김구는 공부에 남달리 열중하여 9세에 천자문을 떼었다. 어릴 적 구의 갈망은 평민의 지위를 개변하는 것이었다. 평민의 지위를 개변하자면 진사시험에 합격되어야 했다. 김구가 아버지한테 학당에 가겠다고 요구하여 먼저 마을에서 꾸리는 평민학교에서 이생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3개월 후에는 신존위(信尊位)의 집에 가서 공부하였다. 17세 되던 해에는 정문재(鄭文哉) 선생에게서 『대고풍(大古風)』, 『십팔구(十八句)』, 『당시(唐詩)』, 『대학(大學)』, 『통감(通監)』등을 공부했다.
17세 때에 정문재 선생의 지도로 해주임시경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사실 부패한 이조통치 하에서 공정한 과거시험은 존재를 감춘지가 오랬다. 돈만 있으면 합격될 수 있었던 썩어빠진 세상, 속이 텅 빈 부잣집 자녀들이 거액의 돈을 먹이고 진사에 급제하는 사례가 그 당시에 비일비재였다. 가난한 김구는 암흑한 시대가 주는 운명의 희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구가 낙방했지만 아버지는 책망하는 대신 다른 공부를 하라고 권하였다.
“너 그러면 풍수지리 공부나 관상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들의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락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 김구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꼼짝하지 않고 공부했다.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자기 상(相)의 길흉을 연구하였다. 자기 얼굴을 아무리 관찰하여 보아도 귀격(貴格)이나 부격(富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賤格), 빈격(貧格), 흉격(凶格) 뿐이었다.
김구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그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 것이 『마의상서』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며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니라.”(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김구는 이 구절을 보고 장차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하고 결심했다.
활명철학(活名哲學)에서 벗어난 김구는 병서를 읽기 시작했다. 『손자병법(孫子兵法)』, 『오기자(吳起子)』, 『삼전(三田)』, 『육도(六韜)』 등에 나오는 병가의 묘략을 보니 금시 눈이 확 뜨이는 것 같았다. 김구는 병서를 보면서 신념을 굳혔다. 그때 시대의 풍운이 험악하였다. 17세의 김구는 시대의 물결에 뛰어들어 어떤 큰일을 하고 싶었다.[3]
1893년에 오응선(吳膺善)을 만나 그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하고 이때로부터 김창수라고 불렀다. 입도 후, 황해도 15명 도유(道儒) 중의 한 사람으로 선거되어 충청도에 가 대도주 해월(海月) 선생을 배알하고 접주(接主: 한 접의 수령) 칙지를 받았다.
이듬해 황해도 동학당이 경군(京軍:서울군대), 왜군과 싸울 때 김구가 선봉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패하여 회학동(回學洞)으로 철수하였다. 얼마 후,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李東燁)부대와 큰 마찰이 생겨 치열한 싸움 끝에 김창수의 동학당이 전멸하였다. 김창수는 3개 월 간 피난했다. 김창수는 또 한 번 좌절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19세의 젊은이, 김구의 투쟁의지는 더욱 앙양되었다.
김창수는 갈 곳이 없어 잠시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安泰勛) 진사 댁에 의탁했다. 안진사는 흉금이 넓고 문무가 겸전하고 묘략이 과인했다. 그의 큰 아들 안중근(安重根)은 훗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김창수는 안진사에게서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때 17세 되는 안중근과도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 기간에 김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었으니 곧 학자 고능선(高能善)이다. 고능선은 김구를 혁명의 길로 인도한 계몽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은 민족절개를 갖고 있는 이 학자는 김구에게 고금중외 위인들의 성공담을 들려주었고 대장부의 풍도와 견정성, 과단성을 가르쳤으며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김구가 그 어디로 가든지 고 선생의 가르침이 늘 귓가에 종소리마냥 쟁쟁히 울리면서 그를 깨우쳐 주고 앞으로 떠밀었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거나 망해 보지 않은 나라란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에도 거룩하게 망하는 경우가 있고 부끄럽게 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경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이와는 달리 백성이 서로 분열하여 싸우다 망하는 것은 부끄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일본의 세력이 전국에 뻗치고 대궐 안에까지 침입하여 그들 마음대로 대신들까지도 좌우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는 그들의 속국이 아니 무엇이랴! 만고에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報國)만이 남아있을 뿐이다.”[4]
김구는 고 선생의 이 말씀을 항상 좌우명으로 삼았다.
어느 한 번 안악(安岳)에서 40리 떨어진 치하포(鴟河浦)에서 우연히 백성으로 변장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士田讓亮)라는 자를 만나 김구가 분김에 맨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김구는 담대하게도 큰 종이에다 “국모를 위해 복수했다”는 글을 쓰고 그 밑에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버젓이 제 이름을 밝혀 보란 듯이 거리에 있는 담에 붙였다. 김구는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고종의 특명으로 사형집행이 중지되고 후에 탈옥하였다.
이전의 김구는 개인영웅주의로 항일을 하는 열혈의 청년이었다.
김구는 옥중에서 생사를 뒷전에 놓고 일심으로 독서에 열중했다. 감옥에서 『진서신사(秦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志)』 등 많은 책들을 통독하였다. 그 와중에 초보적으로 서방국가의 산업혁명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씨 조선왕조가 망한 것이 낙후와 무지, 부패와 빈곤 때문이라는 것도 일게 되었다.
김구는 월옥에 성공한 후 망명의 길에 올랐다. 마곡사(麻谷寺)에서 머리 깎고 중이 되기도 했고 28세 때에는 안악 장연공립학교에서 교장에 임하기도 했다. 여러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반일투쟁을 진행하였다. 1909년에 안중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 되고 1911년에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 사건에 연류 되어 15년형에 언도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을 때 김홍량[5]을 살리기 위해 심문 때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김홍량에게 유리한 말을 했고 속으로 “거북(龜-김구)은 진흙 속에 빠질 테니 기러기(鴻-홍량)는 바다 위를 날으라(龜沒泥中鴻飛海外)고 중얼거렸다.”[6] 그는 일제의 통치에서 이탈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구(九)로 고쳤고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의 비천한 백정(白丁)과 범인(凡人)들이 모두 나라를 사랑하자는 뜻에서 서 호를 『백범(白凡 』이라고 지었다.
정작 중국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스승 고능선 선생의 말씀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안진사 댁에 있을 때의 어느 날, 김구가 스승을 보고 물었다.
“선생님, 망해가는 이 나라를 구할 방법은 없을까요?”
그때 선생이 이렇게 대답했다.
“청국이 일본에 패했으니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국에 가서 그 국정을 살피고 그 나라의 인물들과도 교우(交友)를 맺어 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7]
김구는 선생의 말씀에 따라 얼마 후, 중국의 실정을 요해하려고 압록강을 건넜고 청나라 장교의 소개로 삼도구에서 의병장 김이언(金利彦)을 만나 고산리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허니 김구로 말하면 중국에 두 번째로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걸음은 전과는 달랐다. 이번의 상해 행은 김구의 인생을 바꾸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멀리서부터 기차가 굴러오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
[주]
[1] 1918년 8월 상해에서 김규식, 여운형, 서병호 등이 창립한 한인 청년 독립운동 단체.
[2] 김홍랑[金鴻亮]: 일제 강점기 교육가. 애국계몽운동가. 양산학교, 양산중학교 교장. 만주에 무관학교 군자금 모금. 만주 안동현에 무역회사를 세우고 독립기지건설을 지원.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됐다가 해방 전 친일행위가 드러나 2011년에 훈장 취소.
[3] 아이템북스『백범일지』44쪽. 이하 이 책에서의『백범일지』의 인용은 아이템북스.
[4] 『백범일지』45쪽
[5] 『백범일지』65쪽
[6] 『백범일지』184쪽
[7] 『백범일지』66쪽
가슴을 저미는 비장한 추억
기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승객들이 적지 않았다. 대개가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농민 차림의 옷을 입고 허리에 수건을 찬 김구가 태연자약하게 차에 올랐다. 12분 후, 기차가 북쪽을 향해 움직였다.
태양이 얼굴을 내 밀고 면면한 군산과 푸른 시내 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농가들을 비추고 있다. 창밖의 풍경이 언뜰언뜰 눈앞을 스쳐 지난다. 얼마나 아름다운 강산인가. 그러나 김구는 오늘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떠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망해가는 조국이여! 저주로운 일제여! 이 시각, 김구의 가슴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정감이 세찬 파도처럼 굽이쳤다. 그 것은 망명자의 슬픔과 혁명자의 강개한 투지가 반죽된 미묘한 감정이었다.
김구는 격정을 참지 못해 시 한수를 지어 조용히 읊었다.
이 땅을 떠나는 망명자의 부끄러움이여
하늘을 우러르니 슬픔이 한량없구나.
울려 하여도 눈물이 마른 것을
비애 속에서 호탕하게 전가(戰歌) 부르노라
차 안에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김구는 깊은 생각에 골몰하다보니 처음엔 그들의 이야기에 유의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열을 올렸다. 목소리마다 흥분과 격동에 젖어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그들이 모두 3.1만세 사건을 화두에 올리고 있었다. 평안도 금천에서 어느 날 만세를 불렀다느니, 황해도 풍산에서 모 일에 만세를 불렀다느니 …… 하는 말들이 말짱 3.1만세다. 한 사람은 흥분한 목소리로 “우린 희생하지 않고도 독립할 수 있소. 우린 이미 독립했소. 다만 일본 놈들이 아직 철거하지 않았을 뿐이요. 전국 민중이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만세를 높이 부르면 왜놈들이 놀라 제 나라로 도망 칠 것이요.” 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또 한 사람은 “낡은 시대를 결속 짓는 사람이 영웅이고 새 시대에 항거하면 미친놈이요. 만세를 높이 외치면 왜놈들이 스스로 물러갈 것이요.” 하고 맛 장구를 쳤다. 김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야말로 이상주의자가 아니면 미친 사람들인 것이었다.
김구의 눈앞에 비장한 화폭들이 하나하나 펼쳐졌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 전 세계를 놀랜 3.1운동이 폭발하였다.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을 말한다. 기미년에 일어났기에 일명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르며 북한에서는 3.1인민봉기라고 한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정전협정에 조인하여 제 1차 세계대전이 결속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권을 발표하였고 파리에서 평화회가 열렸다. 이런 대 기후를 맞아 권상윤(權相允), 송진우(宋鎭禹), 최린(崔麟) 등 3인이 천주교 제 3교주 손병희(孫秉熙)[1]와 함께 다음과 같은 방침을 확정하였다.
1)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전 민족과 전 세계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2) 일본정부의 귀족원과 중의원에 국권반환서(國權返還書)를 제출한다.
3) 파리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와 윌슨 대통령에게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한다.[2]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사망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인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고종의 죽음이 도화선으로 되어 조선국내에서 독립운동이 폭발했다. 최남선(崔南善)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이어 『독립선언』서명운동이 전개되었다. 2월 8일, 동경 유학생 최팔용(崔八鏞), 이광수(李光洙) 등이 『조선청년독립당』을 조직하고. 도쿄에서 집회를 가졌다. 집회에 참가한 인원이 무려 600 명, 최팔용(崔八鏞)이 『선언서』와『결의서』를 선 독하고 조선독립의 정의성과 필연성을 천명하였다.
선언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1. 본 단은 한일합병이 우리민족의 뜻이 아니라 일본의 강박에 의한 것이며 우리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소란 하는 것이라고 보기에 우리민족은 독립을 주장한다.
2. 본 단은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고 일본의회와 정부에서 우리민족의 운명을 결정해 달라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3. 본 단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채택한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하여 우리도 마땅히 민족자결권을 가져야 한다고 인정한다. 우리는 주일(駐日) 각국 대사와 공사들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귀국에 전달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또 2 명의 대표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 요구를 전달할 것이다.
4. 만약 이상의 요구가 불행히 실패할 경우 우리민족은 일본과 영원히 혈전을 벌일 것이며 이로 인해 빚어지는 일체 엄중한 후과에 대해 우리민족은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3]
동경 조선유학생들의 행동이 조선 국내를 뒤흔들었다.
손병희를 위수로 한 민족주의자들이 급히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예 일에 거행하기로 했던 시위행진을 3월 1일로 고치고 선언서 낭독지점을 탑골공원으로 정한다.
2) 전국 동포들에게 통지하여 전국이 일치하게 시위행진을 한다.
3) 최남선이 집필한 『독립선언서』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에서 책임지고 2만 천장을 찍으며 손병희 등 33인이 서명한다.
3월 1일,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 29명이 탑골공원에서 집회에 참가하였다.
선언문의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우리 조국은 독립하려 하고 우리 민족은 자유를 찾으려고 한다. 이에 우리는 세계만방에다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명하는 바이다. 아울러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민족자존의 정권을 지켜줄 것을 부탁한다…… 오! 우리가 고통에서 해탈하는 길, 우리가 위협에서 벗어나는 길, 우리 자손만대에게 행복을 넘겨주는 길은 오직 독립뿐이어 늘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로다.[4]
선언문은 마지막에 3가지 공약을 정하였다.
1. 우리들의 행위는 정의와 인도주의와 생존을 위한 것이므로 반드시 자유정신을 발양하여야 하며 배타감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최후의 일인이 최후의 시각까지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발표하여야 한다.
3. 일체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며 시종 광명정대하게 진행해야 한다.[5]
그러나 적들은 정의자의 정의로운 목소리를 공명정대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를 즐기는 살인귀들은 자기들의 본성을 잊지 않고 죽음과 피로 정의의 민중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기원 1919년 3월 1일, 봄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르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맑고 푸르고 아름다운 하늘 밑에서 전대미문의 피비린 대학살이 감행되었다.
그 날 점심 때, 민족대표 손병희 등 29인(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수(吉善殊) 등 4명은 지방에 있어 미처 참가하지 못했음)이 서울 태화관(太和館: 명월관이라고도 함)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치르고 모두들 조용히 『독립선언문』을 낭독할 오후 두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시가 거의 되자 최린이 태화관의 주인을 시켜 총독부에다 전화를 걸어 “우리 전체 민족독립단 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선독하는 활동을 거행한다.”고 알리게 하였다. 그러나 십분도 안 되어 180 명의 일본 경찰이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용운이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문』을 이미 선독한 뒤였다. 하여 그들은 채포되면서도 모두들 얼굴에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 시각, 탑골공원에 운집한 5천 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의식을 거행할 시각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 팔각정 상공에 10년 간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하늘높이 휘날렸다. 격동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33명의 대표가 도착하지 않으니(그들은 이미 태화관에서 체포되었음) 경신학교(儆新學校) 졸업생인 정재용(鄭在鏞)이 2,600 여명이 서명한《독립선언문》 을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독립만세!”의 외침이 우뢰 소리마냥 울려 퍼지고 선언서와 작은 태극기들이 하늘에 흩날렸다. 사람들은 기쁨과 흥분을 참지 못해 선 자리에서 마구 뜀질하였다. 만세소리, 만세소리…… 만세소리가 끊임없이 터졌다. 그 외침은 독립과 자유를 목마르게 바라던 2천만 민중의 함성이었다. 이때에 모인 군중이 만 명을 넘었다. 이들의 힘찬 외침은 한강의 노한 파도소리를 방불케 하였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시위행진을 하였다. 한 갈래는 창교와 남대문을 지나 곧추 프랑스 영사관으로 향했고 다른 한 갈래는 대한문을 지나 미국 대사관으로 전진했다. 시위행진은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고종을 추모하는 국장활동이 한국 민중이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혁명운동으로 변해버렸다. 일본총독부가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총독 나가다니가와(長谷川)가 전국에 계엄령을 반포하고 군대, 경찰 헌병을 동원하여 대 도살의 참극을 빚어냈다. 33명의 민족대표도 모두 체포되었다.
그러나 자유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압제할 수 없다.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분노한 민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성세 호대한 시위행진을 하였다. 놈들의 칼에 찍혀 죽고 총에 맞아 죽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어린 학생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헌병이 그의 오른 손을 자르니 왼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헌병이 왼손을 자르니 그래도 계속 만세를 불렀다. 헌병이 그의 입에 날창을 찌를 때까지 소년은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장렬히 희생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이 3일간 계속되었다. 3일 동안에 7천 5백 명이 피살되고 15,600 이 부상당하고 46,900 이 감옥에 갇혔다. 모든 감옥이 혁명자들로 넘쳐났다.[6]
3.1운동은 전 세계에다 2천만 한국 민중이 결코 양처럼 순한 민족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김구도 이번의 대혁명에서 많은 교육과 계발을 받았다. 김구는 후에 《3.1혁명정신을 발양하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3.1정신을 천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네 가지를 포함시켜야 한다.
첫째는 자존(自存)과 공존(共存)의 정신이다. 독립문 선언에 이런 구절이 있다.〈우리 조국은 독립하려고 하고 우리 민족은 자유를 찾으려고 한다. 이에 우리는 세계만방에다 인류 평등의 대의를 천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들에게도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원히 지켜주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우리 한민족에게 자존과 공존의 위대한 정신이 있었기에 5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다. 또 이런 정신이 있기에 오늘 우리 혁명자들이 망국의 한을 씻으려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잔혹한 왜놈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민주와 단결이다. 3.1혁명 때 33인의 민족대표들은 정치주장과 종교, 신앙, 계급이 달랐지만 긴밀하게 합작하여 전대미문의 대혁명을 영도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민주를 고도로 발휘하고 참답게 단결한 보기가 된다.
셋째는 절개와 도의정신이다. 한 민족이 이 세상에서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강포에 굴하지 않는 민족절개와 인(仁)과 (義)를 위해 목숨도 선뜻이 바칠 수 있는 민족도의가 있어야 한다. 3.1운동은 바로 이런 정신의 기초에서 발동되었고 그 정신이 훌륭하게 발양되었다.
넷째로는 자신감과 자존정신이다. 한 민족에게 자신감과 자존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민족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우리 한민족은 5천년의 자랑찬 역사를 창조한 민족이며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우수한 민족이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자신력과 자존심의 주요 바탕이다. 이런 민족정신이 3.1운동에서 훌륭히 나타났다.”
위에서 열거한 자존과 공존, 민주와 단결, 절개와 도의, 자신감과 자존심은 3.1혁명정신의 전부의 내용이다. 또 이것은 우리민족이 소유한 우수한 문화전통이기도 한다.[7]
김구가 총결한 3.1대혁명정신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김구의 이론기초로 될 뿐 아니라 김구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중요한 표징이기도 하다.
김구는 이런 사상을 가지고 상해로 행했다. 떠들썩하던 차안이 조용해졌다. 김구는 지난날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멀리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미구에 기차가 신의주에 도착했다.
[주]
[1] 손병희(孫秉熙 ): 민족대표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1861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 1922 년 사망. 본관은 밀양. 초명 응구(應九), 호 의암(義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 『韓國 3.1獨立運動小史』, 1946년, 重慶.
[3] 朴殷植『韓國 獨立運動史』 하편 제13쪽, 1920년 상해 프랑스조계지 維新社 발행.
[4] 朴殷植『韓國 獨立運動史』 하편 제13쪽, 1920년 상해 프랑스조계지 維新社 발행.
[5] 朴殷植『韓國 獨立運動史』하편 제13쪽, 1920년 상해 프랑스조계지 維新社 발행.
[6] 朴殷植『韓國 獨立運動史』하편 제13쪽, 1920년 상해 프랑스조계지 維新社 발행.
[7] 김구,『3.1운동 정신을 발양하자』, 『신화일보』, 1942년 3월 1일.
안동에서 상해로
800리 도도한 압록강이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안도(安圖), 임강(臨江), 집안(輯安), 관전(寬甸), 봉성(鳳城)을 거쳐 안동과 신의주 사이를 지나 황해로 흘러든다.
옛 도읍 안동은 한중 두 나라 인민이 우호적 내왕을 하는 교통요로였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 한 이후 단동은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유랑민들이 중국을 들어가는 문호로 되었다. 일찍 이상용(李相龍), 김동삼(金東三)이 안동을 거쳐 길림성 통화(通化) 일대에 들어갔다. 1911년에 《신민회》 간부 이동녕(李東寧)과 그의 가솔, 이회영(李會榮)의 6형제와 가솔 40여인이 안동을 거쳐 서간도 삼원포(三源浦)로 갔다. 1919년 3월 2일, 김지환(金地煥)이 두 통의 격문과 10장의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비밀리에 안동에 와 김병농(金炳穠)에게 주었고 김병농이 그 것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김구는 안동에 오기 전에 안동에 비밀연락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변성명하고 좁쌀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연락소를 찾았다. 7일 후 최석순(崔析淳)과 연락이 되었다. 최석순은 안동에서 일본경찰의 신분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구에게 상해로 가는 망명자들과 연계를 맺어주었다.
안동의 중국인은 낯선 김구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다. 그를 본 중국인들이 미소를 띠고 인사했다. 아마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운명 탓이리라. 김구는 중국인들과 마음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24년 전, 도보로 통화(通化), 환인(桓仁)일대를 돌아다닐 때 한 중국인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이가 어린 청나라의 군관이었다. 김구가 그 젊은 군관에게 길을 물었다. 말을 모르니 여행노선도를 꺼내 보이고 번역해 달라고 했다. 그 젊은 군관이 한 절반 쯤 보다가 갑자기 방성대곡했다. 김구가 크게 놀라 글을 써서 연고를 물으니 군관이 손가락으로 “왜놈과 나는 불공대천지수(痛彼倭敵我 不共戴天之讎)다.”라는 글을 가리켰다. 잠시 진정되자 “당신은 왜서 일본 놈들과 원수로 되었습니까?”라고 썼다. 김구가 필을 받아들고 “일본은 임신년부터 우리 한인들의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전 번 달에는 우리의 국모를 태워 죽였다.”고 썼다. 젊은 군관이 자기의 내력을 글로 썼다. 알고 보니 청일전쟁 때 평양전역에서 사망한 청군 장령 서옥생(徐玉生)의 아들이었다. 왜놈에 대한 공통한 증오가 순식간에 그들을 친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당장에서 결의형제를 맺었다.[1] 오늘 당시의 그 젊은 군관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만날 방법이 없다.
안동의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한국인들을 이해해 주었다. 거리에서 만난 낯선 얼굴들에서도 그런 감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반일투쟁에서 중국은 가장 믿을만한 벗이었다. 전에 고능선 선생이 김구를 보고 “한국의 중요한 인물들이 마땅히 청나라에 가서 그 곳의 국정과 실력을 조사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우호관계를 건립하고 다시 일어날 준비를 하여야 한다. 두 나라가 서로 지원하면 복국의 기회가 올 것이다.”[2]라고 말한바 있다.
고능선이 이 말을 한지가 어언 24년이 된다. 망국을 전후하여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중국 동북과 관내 각 지방으로 갔다.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이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고 이듬해 또 통화현 하니하(哈泥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꾸렸으며 이동휘(李東輝)가 길림성 왕청현 나자구(羅子溝)에서 무관학교를 꾸렸다. 1919년까지 동북에서 선후하여 대한독립단,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40여개의 독립군이 건립되어 일군과 싸웠다. 그중에서 홍범도(洪範圖), 차도선(車道善), 최동진(崔東鎭), 양하청(梁河淸) 등이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에서 일군과 혈전을 벌였다.
“오늘 나도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열토(熱土)를 밟았구나.” 김구가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압록강의 파도처럼 오래 동안 평정되지 않았다. 문득 독립운동가 이상용(李相龍)이 8년 전인 1911년 1월 27일, 중국으로 망명할 때 압록강을 건너며 읊었던 비장한 시구가 떠올랐다.
朔風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이누나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옥토 삼천리와 백성의 극락 같은 母國
지금은 누구의 차지되었는가?
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보냐
집을 나선지 한 달도 못되어
압록강을 건넜으니
누가 나의 길을 더디게 할까보냐
나는 호연히 떠나노라[3]
지금 이 시각, 김구의 심정이 곧 8년 전의 이상용의 심정 그대로였다.
4월 9일, 15명의 망명자들을 태운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윤선이 상해로 떠났다.
3.1독립만세 이후 상해는 한국 해외독립운동의 성지로 되었다. 『신한청년당』의 제의로 한국 국내, 일본 동경, 서 시베리아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운집하여 견강한 영도집단을 건립하고 국내외의 반일애국역량을 통일하여 정치투쟁과 무장투쟁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한편 이런 과정을 통해 국제상의 동정과 지지를 받으려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한국임시정부가 서 시베리아나 중국 동북에 자리 잡지 않고 굳이 상해를 선택했는가?
서 시베리아에 50 여만 명의 한인교포들이 살고 있지만 1918년에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였고 꼴챠크 군대(소비에트정부를 반대하는 군대)가 한국인의 독립활동을 진압하였다. 거기는 교통도 불편하였다.
동북 삼성에 한인교포가 200 만 살고 있고 국내와 강 하나를 사이 두고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동북이 가장 적지라고 할 만하지만 당시 단기서(段祺瑞) 군벌정부가 일본정부와 『중일공동방적군사협정(中日共同防敵軍事協定)』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근거하여 일본은 방적(防敵)을 구실로 마음대로 중국동북에 진입하여 군사 설비를 이용할 수 있었고 중국이 군수품을 남만철로를 통해 운수할 경우 반드시 일본 측이 책임지게 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동북에서의 일본세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중국관원들은 일본의 사촉을 받고 한국의 혁명자들을 체포하여 일본에 넘겼고 한국독립을 선전하는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거기에 비해 상해는 동방의 명주로 교통도 편리하고 한인교포들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일본의 세력이 아직 상해에까지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 이래로 망국에 실의를 느낀 정치가들과 영락한 상인들이 잇따라 상해로 왔다. 안중근도 뜻이 같은 동지를 찾으려고 상해에서 조선왕조의 고관에 있었던 민영익(閔泳翊)과 부상(富商) 서상근(徐相根)을 만난 적이 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후 상해로 오는 한인들의 수가 급증하였다. 1918년 8월,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장덕수(張德秀), 선우혁(鮮于赫), 김철(金澈), 조동우(趙東祐) 등 150 여명의 혁명가들이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건립하였다. 그 해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대표로 선거하여 파리 평화회의에 참가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김구도 이 당의 당원이 되었다. 『신한청년당』의 세력과 영향력이 나날이 커갔다.
1919년 3월 초, 각지에 파견되었던 『신한청년당』의 특파원들이 육속 상해로 돌아왔다. 특파원들의 통지를 받고 국내에서 선우혁, 김철, 서병호(徐炳浩), 현순(玄楯), 최창식(崔昌植), 여운형(呂運亨) 등이 상해로 왔고 서 시베리아에서 이동녕, 이시영(李時榮), 조완구(趙玩九), 조성환(曺成煥), 김동삼(金東三) 등 30 여인이 상해로 왔다. 일본에서는 이광수(李光洙) 등이 왔다. ……대한민국을 건립할 준비 사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4월 8일, 이춘숙(李春塾)과 이규갑(李奎甲)이 서울임시정부 명단과 헌법초안을 가지고 상해로 왔다. 상해의 독립지사들이 임시정부를 건립할 일을 두고 상논 하였다. 『신한청년당』에서 현순을 총무로 선거하고 프랑스조계지 보창로 329호에 독립사무소를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건립 사업이 본격화 되었다.
……
이런 정황을 김구는 상해에 와서야 자상히 알게 되었다.
4월 13일, 김구가 탄 배가 드디어 상해 황포부두에 도착하였다.
[주]
[1] 『백범일지』, 73쪽.
[2] 『백범일지』, 66쪽.
[3] 『石洲遺稿』, 고려대출판사, 1973년, p25.
임정 초기,
상해 독립운동의 대 기후
상해는 이미 꽃이 만개한 봄이었다. 화사한 봄기운이 이 거대한 국제도시를 더욱 활기에 넘치게 하였다. 황포부두에는 각양각색의 기발을 올린 외국상선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김구는 상해의 번화함에 놀랐다. 책자와 소문을 통해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상해가 이토록 크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경성은 상해에 비하면 시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라가 발전하자면 문을 열고 서방을 따라 배워야겠구나.”
김구는 국제도시 상해의 얼굴을 보면서 조선의 쇄국정책의 폐단을 새삼스레 통감하였다.
김구 일행은 공승리(公昇里) 15호 있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이 여관은 한국인이 경영하고 있었다.
국제 모험가들의 낙원인 이 대도시에 자그마한 한인세계도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애국지식분자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삶을 위해 보금자리를 찾는 한편 고심참담하게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신규식이 『한국 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의 마음은 죽지 않았다. 우리 대한이 비록 망했지만 내 마음은 대한과 함께 있다. 나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이다.”[1]
신규식의 이 말은 당시 상해에 와 있던 많은 애국지사들의 속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규식은 1912년에 무창기의에 참가하였고 그 후, 상해에서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命憙), 조소앙(趙素昻), 박찬익(朴贊翊), 민필호(閔弼鎬)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설립했고 유럽과 미국에 분사도 두었는데 회원이 300명 되었다. 『동제사』는 3.1운동 이후, 중국의 혁명인사들인 송교인(宋敎仁), 진기미(陳其美, 진영사(陳英士)라고도 함), 호한민(胡漢民)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설립했다.
김구는 한인여관에서 하루 묵으면서 여관주인으로부터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이동녕(李東寧), 이광수(李光洙), 김홍서(金弘瑞 ), 서병호(徐丙浩), 김보연(金寶淵) 등이 모두 상해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무등 기뻐했다. 김보연은 김두원(金斗元)의 맏아들로 몇 년 전에 아내를 데리고 상해로 왔다.
김두원은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소문이 난 사람이어서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두원은 원산항의 소금장수였다. 동해안일대를 오가며 소금장수를 하다가 일본인 가무라(木村源一郞) 형제에게 소금 1088섬을 절취 당했다. 이에 김두원이 일본정부에 소금 값을 물어내라고 집요하게 탄핵하여 한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1903년 김두원은 일본공사관 앞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를 만나 “너희 나라는 백성들에게 도둑질을 그렇게 가르치느냐?” 하면서 인력거를 쓰러뜨리고 물매를 안겼다. 또한 조선총독부 외무대신이며 친일파인 박제준(朴濟俊)을 만나 “지금 서울에 호랑이가 없거늘 무엇이 무서워 총칼을 찬 순사와 일본인 헌병대를 앞뒤에 달고 다니느냐?” 하고 꾸짖었다. 그는 1920년까지 집요하게 소금 값을 물어내라고 일본정부를 탄원해 수태 구금당하기도 했다. 소금 값을 받아냈다는 역사기재는 없지만 일본인과 친일파들에게 한국인의 기개와 끈기를 보여주었다.
김구는 또 그가 상해에 오기 전인 4월 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상해한국임시정부의 성립은 한국독립투쟁이 새로운 역사시기에 진입했음을 표징 한다.
4월 10일 오전 10시, 손정도와 이광수의 제의로 프랑스조계지 신부로(神父路) 22호에서 각지에서 온 한국인대표대회를 열고 건국대사를 상의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29명이었다. 그들로는 현순(玄楯), 손정도(孫貞道), 신익희(申翼熙),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이광수(李光洙), 최근우(崔勤愚), 백남토(白南土), 조소앙(趙素昻), 김대지(金大地), 남형우(南亨佑),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時榮), 이동녕(李東寧), 조완구(趙婉九), 신채호(申采浩), 김철(金徹), 선우혁(鮮于赫), 한진교, 태희창, 신철, 이한근, 신석우, 조동진, 조동우, 여운형, 현창운, 김동삼 등이었다. 대회에서 임시헌장을 통과하고 임시의정원을 건립하였다. 이동녕이 제1기 의정원 의장으로 손정도가 부의장으로 선거되고 이광수와 백남토가 서기로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하고 1919년을 대한민국원년으로 확정하였다. 나라 체재는 민주공화국으로 한다고 밝혔다. 회의에서는 또 국무위원을 선거하였다. 이승만이 국무총리, 안창호가 내무총장, 김규식이 외무총장, 최재형이 재무총장, 신석우가 교통총장, 이동휘가 군무총장, 이시영이 법무총장으로 선출되고 국무원 비서장에 조소앙이 선출되었다. 이승만의 국무총리 직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특히 단재 신채호[2]가 이승만의 위임통치에 대해 지대한 분노를 표시했다. 누군가 미국의 이승만 박사가 임시정부 수반으로 적격이라고 말하자 신채호가 풀쩍 뛰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인데 무슨 말씀이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는데 그쳤지만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들고 나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고 흉계를 꾸미고 있는데 어찌 우리의 대표로 나설 수 있단 말이요?”라고 흥분하여 말하고 단연 자리를 차고 퇴장하였다.[3]
회의에서는 임시의정원의 명의로 전체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정식으로 대한민국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하고 국민들이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하였다. 동시에 임시헌장과 선서문 강령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다.
제2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정원의 결의에 따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민중들은 남녀의 귀천이나 빈부의 차이가 없이 일률로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이 민중들은 신앙,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서신, 주거와 이주 밑 인신 자유가 있다.
제5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제6조. 대한민국 국민들은 교육을 받고 세금을 내며 병역에 참가할 의무가 있다.
제7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하느님의 의지를 받들어 세계에다 건국정신을 발휘하며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기여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사형법과 기생제도를 폐지한다.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가 회복된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대한민국 원년 4월 29일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임시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청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4]
선서문
우리의 존경하고 친애하는 2천만 동포들이여! 단기(檀紀) 4253년(1919년) 3.1일, 우리민족이 독립을 선포한 날, 남녀노소, 일체 계급, 모든 종교파벌들이 단결하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일본의 비인도적인 폭행에 맞서면서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호소하였다. 지금 전 세계가 우리를 동정하고 지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전 민족이 오매불망 바라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마침내 성립되었음을 장중히 선포한다. 정부와 국민은 동심협력하여 조국광복의 사명을 완성하여야 한다.
국민들이여 일어나 싸우자! 우리가 흘리는 피가 자손만대의 자유와 행복의 길을 개척해 줄 것이며 국권을 회복하는 기초로 될 것이다. 우리들은 정의와 인도주의로 일본과 싸울 것이다. 일본의 야만적은 폭행이 감화되는 그날까지 싸울 것이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5]
이 선서문은 “국가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애국주의 정신은 잘 체현되었지만 광복을 위한 정확한 정치노선이 언급되지 않았다. 정의와 인도주의로 일본의 야만적인 폭행을 감화시키겠다고 함으로써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민족해방투쟁법칙을 위반하였다. 민족해방투쟁은 반드시 정치투쟁과 무장투쟁을 결합하여야 한다.
강령
1. 민족평등, 국가평등, 인류평등의 대의를 천명한다.
2. 국제도덕에 기초하여 외국인이 생명, 재산을 보호한다.
3. 일체 정치범을 특사한다.
4. 외국인에 대한 권익과 의무는 국제간의 협정과 조약에 준한다.
5. 조국의 절대적인 독립을 주장한다.
6. 임시정부법령을 위반하는 자는 국적(國賊)으로 인정한다.
대한민국 원년 4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6]
대회에서는 포고문을 각 국 정부 대사관과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또 상해에 있는 《민국일보》(民國日報)와 《무오주보》(戊午週報)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범했지만 우리의 국권은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는 일본의 통치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세계만방에다 우리 나리는 독립하려 하고 우리 민족은 자유로운 민족으로 되려 한다고 수차 알린 바 있다. 오늘 우리는 전 민족의 뜻을 받들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하였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바이다. 우리는 정의와 인도주의를 주장한다. 우방 여러 나라들이 새로 선 우리 정부와 양호한 관계를 맺기를 기대하며 심후한 동정과 우의를 표시할 것이라고 확신한다.[7]
한국임시정부는 성립되자마자 손중산(孫中山)과 중국인민의 지지를 받았다. 1919년 초에 손중산이 이런 귀띔을 한 적이 있다.
“눈앞만 보지 말고 좀 더 멀리를 내다보아야 한다. 만몽(滿蒙: 만주와 몽골)과 고려 두 개 방면을 중시해야 한다. 우선『마관조약(馬關條約)』을 회복시키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여야 한다. 둘째로 21개 매국조약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산동에서의 일제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8]
한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건립된 후 중국민중이 한국독립운동에 실정에 대해 이해가 깊어졌고 일본을 반대하고 한국을 원조하자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중화전국연합회(中華全國聯合會)가 통고를 발표하여 전국 민중이 한인들의 독립투쟁을 원조하라고 호소하였다.
이 문장은 한국독립투쟁의 형세를 이렇게 분석하였다.
전국의 형제자매들은 들을지어다. 조선이 독립을 선포한지 어언 2년여, 그 백절불굴의 투쟁정신이 고금에도 보기 드믄 바 온 세상이 놀라고 있도다. 우리는 인의와 정의를 중히 여기는 민족이도다. 하물며 조선과 우리는 예로부터 형제와 같은 관계가 아니던가. 한인의 독립은 하늘의 뜻으로 그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거니 필연코 현실로 될 것이로다. 고로 이성(理性)이 있는 자들은 마땅히 도와 나서야 할 것이로다. 만약 우리가 공리와 인도주의를 떠나 한인들을 돕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민족의 치욕일 것이요, 스스로 멸망할 위험에 직면할 것이로다……
……전국의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중화민족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반드시 원조하여야 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할 것이로다. 전국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중화민족의 훌륭한 품성을 발휘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힘써 주기를 바라노라. 돕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거니 한국독립을 선양하는 글을 써서 도울 수도 있고 돈으로 도울 수도 있고 혹은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할 수 있고 그 진정서를 또 각국 영사관에 보내 한국의 독립운동의 실태를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독립에 이로운 일이라면 다 한국의 독립을 원조하는 일로 될 것이로다……[9]
그 당시 금방 탄생한 중국공산당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중시하고 동정하였다. 1922년 7월에 소집된 중국공산당제 2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본이 고려인민이 피땀을 착취하고 있는데 그 잔인함과 횡포하기기 이를 데 없다. 대량의 물건을 제 마음대로 들여오고 대량의 물건을 제 마음대로 수출한다. …지금 2천만 고려민중이 아사지경에 빠졌다.… 인도, 애급, 아일랜드. 고려 등 국가들이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시월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조직들이 나타나고 그 기세가 갈수록 커가고 있어 제국주의자들이 심히 불안해하고 있다……[10]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의 각계 민중들이 한국임시정부와 한국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아주 지지하고 관심하였다.
김구의 망명생활은 이러한 대 기후 속에서 시작되었다.
[주]
[1] 신규식 『한국 혼』
[2] 유자명『나의 회억』35-40쪽
[3] 『民國日報』중화민국 8년 4월 22일『戊午週報』 제48호[1919년]
[4] 《民國日報》중화민국 8년5월 2일.
[5] 『民國日報』 중화민국 8년 4월 22일『戊午週報』제48호[1919년]
[6] 『民國日報』중화민국 8년 4월 22일『戊午週報』 제48호 [1919년]
[7] 박은식『한국독립운동혈사』 제108페지
[8] “한인들을 원조할 데 관해 전 국민에게 알리는 글”『民國日報』 1920년 11월 5일
[9] 위홍운(魏弘運)『중국현대사자료선편』 p382-387
[10] 상동
석오 이동녕과
춘원 이광수를 만나다
김구는 상해임시정부가 성립된 후의 정황을 시급히 알고 싶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이동녕과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을 빨리 만나고 싶었다. 김구는 우선 십여 년 간 오매에도 그리던 이동녕부터 만나 보기로 했다.
김보연을 데리고 프랑스 조계지 하비로(霞飛路) 321호로 갔다. 이 건물은 지붕이 뾰족한 이층 양옥이었는데 이동녕의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
김보연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격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석오 선생, 보십시오, 누가 왔는가?!”
이동녕이 목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보다 말고 “오!” 하고 소리쳤다. 김구가 한걸음에 달려가 두 손을 잡고 “석오 형!” 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목이 메여 인차 뒷말을 잇지 못했다. 십여 년간 오매불망하던 두 사나이가 만나니 만감이 교차되어 도대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후에 이동녕이 흥분을 갈앉히고 말했다.
“내가 상해에 온 후 당신 소식을 알아보니 그냥 국내에 있다고 하더구먼. 당신 때문에 무척 걱정했습니다. 끝내 왔으니 참 잘 됐습니다.”
이동녕이 김구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두 사람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1909년, 신민회총부가 서울 총감인 양기탁(梁起鐸)[1]의 집에서 전국간부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일제의 세력이 아직 크게 뻗치지 않은 해외에다 독립기지를 건립하고 무관학교를 꾸려 현대전쟁을 치를 수 있는 독립군을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회의에서는 안창호, 이갑,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유동열, 이종호, 신채호, 조성환, 최석하 등을 해외에 파견하여 이 역사적인 사명을 완성하게 하였다.
후에 이동녕은 이시영의 6형제와 함께 중국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가서 『경학사(耕學社)』[2]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3]를 꾸려 수많은 군사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이국땅에서 십년을 떠돌며 혁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요. 들은데 의하면 동북엔 이미 독립군이 몇 만이나 된다더군요. 당신들 그간 고생 참 많았습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 하기 시작한 이동녕을 보니 김구는 마음이 아파났다.
“망국인에겐 눈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싸움만 있을 뿐이지요. 삼원포에서 석 달 있다가 거기 일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그 곳 일은 이상용 선생에게 맡기고 내 원래의 계획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상우(相禹) 선생과 같이 『권업회(勸業會)』를 꾸리고 청년들을 배양하였습니다. 지금 서 시베리아에 우리 동포가 50 만 가령 살고 동북에는 백만 넘지요.”
이어 이동녕이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자기의 견해를 말했다. “수시로 죽음이 따르는 우리들에게 부귀와 공명 같은 건 초개와도 같은 겁니다. 우리 망명자들이 생각하는 건 오직 조국의 독립뿐이지요. 신규식(申奎植) 선생의 집에 갔다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단군 초상과 한국지도가 있더군요. 선생이 하는 말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단군초상과 한국지도를 앞에 놓고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서 시베리아나 만주를 물론하고 무릇 한인이 거주하는 곳에는 모두 한인학교가 있어 자기의 문화를 배우고 자기의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민족은 절대로 일본에 동화되지 않을 것이며 이런 민족이 있는 나라도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장기적으로 싸우는가 하는 것인데, 내 생각엔 무정부주의나 무정당(無政黨)이 집권한 정권에서 영도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이동녕이 자그마한 책 한권을 내놓았다. 소련시월사회주의 혁명을 소개한 책자였다. 이동녕이 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러시아에서 친히 시월혁명을 목격했습니다. 레닌은 모든 피압박민족과 약소민족은 반드시 단결하여 민족해방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계발을 주는 것 같습니다. 『임시헌법 』에 이러한 점들을 강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동녕은 1869년에 충남 목천에서 출생했고 호는 석오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북간도에 망명하여 용정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였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으며 19010년에 남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녕 등과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군사인재들을 배양하였다. 191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에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외장, 내무총장이 되었다. 1924년에는 국무총리, 27년에는 국무위원주석을 겸임했고 1928년에는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이사장에 피임했다. 35년에는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약하다가 1940년 중경에서 사망했다.
이동녕은 일처리가 주밀하며 사람들과 친절하고 남을 돕기 좋아하고 종래로 남과 공을 다투려 하지 않았기에 국내외 동포들이 모두 그를 숭배했다. 그는 이런 고상한 품성으로 김구와 오래 동안 함께 일하면서 친밀한 전우로 되었다.
“우리 조선은 낙후하고 봉폐된 봉건전제국가였습니다. 서방국가들은 100년 전에 벌써 공업혁명을 하였고 19세기 말에는 기술혁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이동녕의 사상에는 비록 봉건제왕시대의 잔여가 얼마간 남아 있었지만 10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상에는 매우 큰 전변이 일어났다.
김구가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전 늘 반성해 보고는 하는데 우리나라가 낙후하고 우리 민족이 약한 원인이 구경 무엇이겠습니까? 절대로 우리 민족이 낙후하고 무능한 민족이여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역사적 원인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이동녕이 임시정부의 건립과정을 소개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국내의 광대한 민중의 요구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나라 체제는 공화제입니다. 비록 망명정부이긴 하지만 전 세계에다 한국이 일본에 먹혀버렸지만 나라는 일본에 삼켜을 당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헌데 수뇌부 구성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뇌자로 될 사람들이 상해에 있는지 없는지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예하면 국무총리 이승만과 내무총장 안창호는 그냥 미국에 있고 외무총장 김규식이 파리 평화회의에 참가하였고 재무총장 최재순은 만주에 있고 교통총장 문창범과 군무총장 이동휘는 여전히 러시아에 있습니다. 다만 법무총장 이시영과 국무비서장 조소앙이 상해에 있을 뿐입니다. 솔직히 말해 임시정부가 지금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김구가 이동녕의 사무실을 나와 보니 가는 비가 솔솔 내리고 있었다. 뭐라고 딱히 찍어 말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을 안고 김구는 발길을 돌려 이광수가 있는 작은 여관으로 갔다.
김구는 이광수를 안지 오래였다. 이광수는 결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이광수는 『조선청년독립단』 창시자 중 한 사람이고 『2.8 독립선언문』을 기초(起草)한 사람이며 상해 임시정부의 창립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하기에 김구가 이광수보다 13년 연상이었지만 아주 존중하였다.
이광수는 1892년 평북도 정주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장백산인(長白山人), 춘원(春園)이다. 1904년 손병희(孫秉熙)의 후원으로 와세다대학 유학 중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회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광수는 독립운동 뿐 아니라 최남선과 함께 신문화운동에서도 앞장섰다. 이광수는 당시의 문단을 뒤흔드는 유명한 작가였다. 1917년, 『매일신문』에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연재하여 당시 국내외 한인들 속에서 이광수의 명망이 아주 높았다. 허니 김구가 어찌 이런 이광수를 존중하지 않겠는가. 김구가 상해에 금방 갔을 때 이광수는 한창 『독립신문』창립 일로 분주히 돌아치고 있었다.
이광수는 한창 글을 쓰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춘원이 그간 잘 지내셨소?”
김구가 문을 떼고 들어서며 인사했다.
“백범 선생님,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항상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여기엔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끝내 쇠창살을 부수고 뛰쳐나왔군요.”
“그렇소. 나도 끝내 자유를 맛보게 되었소. 소문에 의하면 자넨 아주 본때 있게 일을 한다더군. 동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당』을 조직했고 또 이번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데서도 매우 적극적이었고. 자네야말로 문학가이면서 뛰어난 사회 활동가일세.”
“국가의 흥망이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양심 있는 조선인이라면 조국이 가장 곤란한 시기에 뭘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요즘 이백의 시 한 구절을 늘 외웁니다. <봄이 깃드니 물고기와 새도 즐기고 초목도 흥에 겨워 춤을 추노라.> 우리도 역시 봄날인 1919년 3월 1일에 위대한 혁명을 일으켰지요. 오늘 또 자기 민족의 정부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허니 어찌 격동하고 흥분하지 않을소며 투지가 분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의 힘을 보았고 내일의 광명을 보았습니다.”
문인으로서 쉽게 격동하는 사람이지만, 이 시각 이광수는 확실히 시대의 물결에 심심히 감동되고 있었다.
이광수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이야기를 이었다.
“몇 달 전에 북경에 갔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여운 형을 만났습니다. 그를 통해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성립하고 정부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경에 있는 모든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이런 형세를 소개하고 후에 동경에서 비밀 적으로 『조선청년독립당』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왜놈들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실패하고 부득불 저도 상해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광수는 김구에게 자기가 상해로 오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김구가 약간 그늘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와 같은 망명자들에겐 모두 부동한 경력이 있소. 헌데 지금 내가 근심하는 건 후에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요. 지금 상해에 모인 독립 운동가들이 천 여 명이 넘는다고 하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미국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러시아에서 왔고 어떤 이는 만주에서 왔고 어떤 이는 국내에서 왔기에 경력이며 문화영향이며 사상이며 하는 것들이 부동할 것이요. 이 부동함이 금후 마찰과 분열을 초래하여 독립사업에 큰 해를 가져올까봐 걱정이 되는구만.”
김구는 임시정부 초기부터 벌써 금후에 벌어질 소란과 분열의 상황을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김구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 이었다.
“옛 사람이 이르되 일은 사람이 하기에 달렸고 승패는 하늘에 달렸다고 했소. 우리가 합심이 되어 잘 하면 될 것이요. 하지만 돌을 만지면서 강을 건너야 굽은 길을 적게 걸을 수 있소.”
김구의 걱정과는 무관하다는 듯 이광수가 희망에 젖은 목소리로 신이 나서 말했다.
“전 지금은 정치가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전 정치에는 취미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지금 『독립신문』을 꾸리려고 합니다. 신문이 있으면 첫째로 상해임시정부의 대사(大事)들을 수시로 세상에 알릴 수 있고 여려 사람들의 마음을 소통시킬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만주독립군과 국내의 소식을 수시로 보도할 수 있어 여러 사람들의 항일투지를 고무하고 분발시킬 수 있습니다.”
얼마 후에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김규식이 사장을 맡고 이광수가 주간이 되었다.
이광수의 말은 신심과 희망에 차 넘치고 있었다. 김구는 그러한 그가 무등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그로부터 19 년 후, 이광수가 최남선과 함께 황도문화(黃道文化)를 제창하면서 수치스럽게 일제의 주구가 될 줄을.
이광수와 작별하고 대문을 나서니 보슬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잔잔히 내리는 봄비는 약간 차긴 했지만 찬 속에 온유함을 갖고 있는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듯했다. 김구는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 쉬었다.
[참고문서]
[1] 양기탁(梁基鐸): 1871년 평양 출생. 어려서 한학을 공부. 1895년 미국인 게일(Gale.J.s)과 아버지와 함께『한영사전』 편찬. 1908년 안창호(安昌浩), 이회영(李會榮), 김구, 이동휘, 이동녕과 함께 신민회 조직. 1909년 이동녕과 이회영을 만주에 보내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기지 하나를 세우는데 성공함. 1925년 오동진(吳東振), 김동삼(金東三)과 같이 『정의부(正義府)』 조직. 1933년 국무위원으로 선거되어 1935년까지 재임. 1938년 강소성 담양현(潭陽縣)의 고당암(古堂庵)에서 선도하다가 사망.
[2] 『경학사(經學社)』: 신민회 회원들인 이시영. 이회영, 이동녕, 이상용 등이 중국 요녕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세운 독립운동단체.
[3]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이시영,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이상용이 주도하여 중국 통화현(通化縣) 하니하(哈泥河)에 세운 독립군 양성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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