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책가방 이창숙
할아버지의 사랑법
(『샛강 아이』 2판,류선열 지음,양장본 푸른책들 ,2008년)
할아버지의 구구법
내 나이 아홉일 땐
할아버지가 계셨지.
무척 날 귀여워해 주시던.
흰 수염에
돋보기 안경
이마엔 깊은 주름살
모두들 쩔쩔맸지
호령을 하실 때면.
언제이던가, 구구를 못 외워 매를 맞고 오던 날, 우는 나를 어르시며 말씀하셨지.
“얘야, 오늘부터 할애비랑 같이 구구를 외워 보자.”
그 날부터 우리는 사랑방에 마주앉아 구구단을 외웠어.
칠은 이십 일.
삼 팔은 이십 팔.
삼
내 실력이야 뻔했지, 틀리기 일쑤였으니까.
꿀밤을 한 대 맞고, 다시 외워야 해.
삼 칠은 이십 일.
삼 팔은 이십 팔.
할아버지도 별 수 없으셨어. 난 코를 실룩거리며 할아버지가 틀리기만을 재고 있다가 잽싸게 꿀밤을 날렸지. 얼마나 신이 나던지!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그토록 어렵던 구구를 닷새 만에 다 외워 버렸다는 점이야. 할아버지는 이레 걸렸지.
이제 나도 철이 들어
겨우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도 됐지만
대견하게 보아 주실 할아버지는
이미 계시지 않아.
내 나이 아홉일 땐
할아버지가 계셨지.
구구도 잘 모르시던.
(『샛강 아이』류선열 지음, 푸른책들, 2008년) 78~80쪽
동화를 쓰면서도 동시를 쓰면서도 나는 한 번도 필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샛강아이』를 보다가 눈이 번쩍 뜨여 당장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이 절판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시집을 통째로 옮겨 적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권정생 선생님이나 임길택 선생님의 시보다 『샛강아이』를 읽으며 더 가슴에 금이 많이 갔다.
산이 울면, 참새잡이, 진눈깨비, 여름방학, 호랑이 사냥법 등 내 마음을 흔드는 시가 많았는데 특히 이 시 ‘할아버지 구구법’을 읽다가 나는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우리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친구들이 떠올라 한없는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100세가 되도록 장수한 증조할아버지는 오로지 우리 큰오빠 밖에 몰랐다. 어쩌다 우리 아버지가 큰오빠를 혼내기라도 할라치면 그 즉시 숟가락을 내던지고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신경질이 나서 니가 걔를 혼내는 게지, 끙.”
“어휴, 할아버지.”
아버지는 억울해하며 혼내던 오빠를 슬그머니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신이 시집오면서 친정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할머니가 평생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아마도 ‘딸년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내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며 할머니 같은 여자 때문에 남녀평등이 안 되는 거라고 했을 때 할머니는 “남녀평등? 개떡 같은 소리 다 듣겠네. 남녀가 어떻게 평등하다냐?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지.” 라며 콧방귀를 꼈다. 할머니는 우리 작은오빠를 끼고 살았고 젊은 엄마 아버지는 일을 해야했고 나는 할아버지 차지가 됐다. 할아버지는 술을 엄청 좋아해서 나를 두고 자주 술집에를 다녔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혼자 아랫집으로 놀러갔다가 그 집 낮은 우물에 빠졌다. 마침 닭모이 주러 나왔던 아랫집 할머니가 물에 빠진 나를 건져 들쳐 업고 달려오며 애기가 죽었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고 축 늘어진 나를 보고 우리 식구는 한꺼번에 울기 시작했다.
모두들 일가친척인, 들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할아버지는 내 바지를 벗겨 똥구멍을 살펴보고 짐 실을 때 소 등에 얹는 길마를 가져다가 나를 ∩자로 엎어놨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는 살아나지 않았고 코끝에 손가락을 대 봐도 숨 쉬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 친구인 읍내 홍의사가 왔지만 고개를 저었다. 날이 저물어 엄마 아버지는 나를 껴안고 누웠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이 어린것을 땅에 묻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엄마는 기가 막혔다. 엄마는 울다울다 지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누가 뽀시락거리며 엄마 가슴을헤쳤다. 한참을 정신없이 젖을 먹고 난 나는 그대로 잠이 들어 다음 날 저녁까지 내쳐 잤다고 한다. 내가 죽다 살아난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술집에도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알코올에 노출되었으니 지금 내가 술을 못 끊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친구네였던 술집에 가면 늘 할아버지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나한테 안주를 집어 줬고 걸어오느라 고단한데다 따뜻한 곳에 있다 보면 나른해져서 어느 새 나는 쓰러져 잠이 들고 술 취한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나를 두고 집으로 갔다. 자다 너무 더워 일어나면 컴컴하고 낯선 방안 풍경과 우리 집과는 다른 냄새, 다른 공기 때문에 왈칵 두려움이 몰려왔다. 왕 울음을 터뜨리면 문이 벌컥 열리고 안을 들여다보던 할아버지친구가 “쯧쯧, 이 친구 또 애기를 두고 갔네. 조금만 기다려라.” 했다.
그 때쯤 비틀거리며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애기는 어쨌냐는 말에 “아차차, 애기를 두고 왔네.”하며 다시 찾으러 가겠다고 돌아서고 아버지는 자신이 가서 데리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을 것이다. 아버지 등에 업혀 오는 길에 보는 별과 달은 언제나 차게 반짝였다.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것은 내가 네 살 쯤 되었을 때였다. 오른 쪽이 마비되어 얼굴이 일그러졌는데 어린 나는 할아버지만 보면 얼굴을 찡그리고 목소리도 이상하고 침도 흘린다며 몇 번이고 꾸짖었다고 한다. 갑자기 한 쪽이 마비된 할아버지는 자신이 이제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고 한탄했고 불 때는 일 같은 쉬운 일만은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변소에 빠질까봐 어른들은 내게 마당 끝에 있는 잿더미에서 똥을 누라고 했는데 다 누고난 뒤에 할아버지를 부르면 달려와 똥꼬를 닦아줬다. 그 날도 할아버지를 불렀지만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 할아버지는 웬일인지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오지 않자 나는 좀 서운했던 것 같다. 잿더미에서 바깥마당을 가로질러 엉거주춤 걸어오자니 슬슬 화가 났겠지. 할아버지 앞에 가서 뒤 돌아 발목을 잡고 엉덩이를 쳐들고 똥꼬를 닦아달라고 기다리는데 할아버지는 조끼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는 다리 아파 죽겠으니 빨리 해달라고 칭얼거리다 강력히 항의하려고 돌아선다는 것이 그만 비틀, 활활 타는 아궁이 속으로 빠져 버렸다. 할아버지는 놀라 나를 꺼내려고 했지만 손만 덜덜 떨리고 힘이 없어 꺼낼 수 없었다. 소리도 안 나오고 활활 타는 보리짚대에서 옮겨 붙은 불은 점점 나를 집어 삼키고.
“으으으으, 어.”
할아버지는 괴성을 지르며 부지깽이로 소죽솥 뚜껑을 왼손으로 죽을힘을 다해 두드렸고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버지가 나를 건져 몸에 붙은 불을 껐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홀라당 타버렸고 엄마가 만들어준 간따꾸도 시커멓게 타고 얼굴은 만지면 살점이 묻어나올 정도로 화상을 입은 채 나는 기절했다. 할아버지는 대성통곡을 하고 마당에 주저앉았고 아버지는 홍의사에게 바람처럼 달려가고 마을 사람들은 애기가 불에 탔다는 소문을 듣고 또 모두 몰려왔다. 홍의사가 우리 집에 머물면서 나를 치료할 동안 할아버지는 곡기를 끊고 드러누워 눈물만 흘렸고 덩달아 증조할아버지도 드러눕고 마을 사람들은 줄초상 나게 생겼다고 교대로 들락거렸다. 홍의사는 우리 할아버지 손을 잡고 “내가 자네 손녀딸 꼭 살려낼 테니 걱정 말게.”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해야 했다.
그 뒤 나는 절대로 햇빛을 쪼이면 안 된다는 엄명 아래 깜깜한 방에서 오랫동안 나오지도 못했는데 온 얼굴에 수포가 생겼다가 터져 문둥병 환자처럼 딱지가 앉았다가 차츰 새살이 나오면서 다행히 나았다. 할아버지도 술을 끊고 약을 꾸준히 복용한 덕분인지 조금씩 마비가 풀렸다. 나는 우물에 빠진 아이에서 아궁이에 빠진 아이로 별명이 바뀌었다. 술집에서 할아버지 친구들이 “얘가 우물에 빠졌던 그 앤가?”하면 할아버지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불 탄 애는 얘 아우인가?” 하면 할아버지는 “아녀. 것도 얘지.” 하며 그 때 얘기를 언제까지고 하는 거다. 내가 조금 더 커서 막 뛰어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집안으로 들어오면 할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이렇게 감쪽같이 고쳐 놨어. 홍의사 그 사람이.” 하며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며, 6․ 25 때 월남했지만 남쪽에서는 의사 면허가 없어 곤궁과 치욕 속에 살다 먼저 세상 떠난 불운한 친구를 오래도록 추억하는 것이었다.
이창숙 <동시마중> 12호로 등단했습니다.
『매』, 『무옥이』, 『개고생』, 『조선의 수학자 홍정하』』 등의 책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