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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의 행단 호텔
호텔 현관에 행단유풍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호텔의 좌벽에 붙은 행단도를 자세히 보면 붉은 살구꽃이 피어난 것을 볼 수 있고,
제자들 중에는 거문고를 들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광(匡) 지역 사람들이 공자를 향하여 더욱 급박하게 포위망을 좁혀오자
제자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문왕은 이미 돌아가셧으나 문은 여기에 있지 않은가(斯文在玆)?
하늘이 이 문(文: 각주-문은 주대의 예악제도로서 문화의 도통을 의미한다. 공자 자신이 그 문화의 도통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을 없애려고 하셨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이 문을 전승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
......
공자는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다.
공자는 제자들과 큰 나무 아래에서 예의에 대해서 강습하였다.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 하였고, 그 나무도 뽑아 버렸다.
이에 공자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말했다.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이을 사명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공자가 정 나라에 갔는데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서 홀로 성곽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에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요(陶-고요皐陶)와 닮았고,
그 어깨는 자산과 닮았어요.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임금보다 3촌이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이 이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고하였다.
공자는 흔쾌히 웃으며 말하였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고 하였다는데, 그것은 정말 그랬었지! 그랬었구말구!"
......
진 나라는 항상 침공을 당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단지 일을 함에는 소홀함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취성이 있고, 그들은 초지를 잊지 않고 있다."
이에 공자는 진나라를 떠났다.
......
공자가 사양자에게 거문고 타기를 배웠는데 열흘 동안 진전이 없었다.
사양자가 말하였다.
"이제는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이미 그 곡조는 익혔으나 아직 그 연주하는 기법은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사양자 말했다.
"이제는 그 연주하는 기법을 익혔으니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그 곡조의 뜻을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사양자가 말하였다.
"이제는 곡조의 뜻을 익혔으니 다른 곡조를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이 곡중 사람의 사람됨을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공자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깊이 생각하였고,
또 유쾌하게 원대한 뜻을 바라보게 되었다.
공자가 말했다.
"이제야 나는 그 곡중 사람의 인품을 알겠습니다.
피부는 검고, 키는 크며, 눈은 빛나고, 멀리 바라보는데
마치 사방의 제후국을 다스리는 것 같으니,
이는 문왕이 아니면 그 누구겠습니까!"
사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을 하며 말하였다.
"원래 나의 은사님께서도 이것은 '문왕조(文王操)'라고 이르셨습니다."
......
공자의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여 예악은 폐지되었고, 시詩와 서書가 흩어졌다.
이에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하여 서전의 편차를 정하되, ......
공자가 노나라의 태사太師에게 말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은 이해할 수 있다.
연주를 시작할 때에는 5음이 조화를 이루고,
그 다음으로는 청순하고 잘 어울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여운을 남김으로써 비로소 한 곡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
비로소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와 송이 각기 제자리를 찾았다."
......
이렇게 정리한 305편의 시에 공자는 모두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부름으로써
소韶, 무武, 아雅, 송頌의 음악에 맞추려고 하였다.
예와 악이 이로부터 회복되어 서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六藝가 완성되었다.
공자는 시, 서, 예, 악을 교재로 삼아 가르쳤는데, 제자가 3,000명에 이르렀고,
그중 육예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사기>> <공자세가>(정범진 외 옮김, 까치)
지난달에 그리워하던 공자님의 묘소와 사당에 참배하고,
숭산 아래 호텔에서 공자님이 배운 중국의 가얏고, 고쟁(古箏)을 난생 처음 만났다.
손가락으로 한 번 줄을 퉁기자
우리의 가야금보다 더 영롱한 울림이 내 마음에 여울졌다.
귀국하면 가야금을 꼭 한 번 배우고 싶었다.
당나라 시인, 시의 왕 또는 시의 악마, 향산사 곁에 잠든 백거이의 묘소도 방문했다.
공자님 사당, 대성전에서 본 청나라 황제가 쓴
시서예악 아름다운 편액이 첫눈에 반갑고 인상 깊었다.
오늘, 성대한 홀에서 축가를 부르는 대구 큰 이모의 손자 혼례에 다녀오니
그제께 주문한 고쟁이 배달되어 왔다.
비록 싸구려(243,340원)이지만 백거이의 시,
야쟁(夜箏)이 새겨져 있어서 더욱 애정이 간다.
앵초 선생님께 꼬박 두 해 동안 시조창, 열두 곡을 모두 배웠고, 거기서 아내도 만났다.
이젠 고인이 된 함동정월 여사가 연주하는 최옥산류 가야금산조를 지극히 사랑한다.
하지만, 악기라곤 연주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고, 악기 조율은 꿈도 꾸지 못하는 내가
아무런 설명서도 없는 채로 철로된 21현의 고쟁 줄 걸기를 혼자서 하였다.
줄을 너무 팽팽하게 조이다가 그만 16번째 줄이 뚝! 끊어진다.
새 악기를 받자말자 한 번 퉁겨보지도 못하고 못쓰게 되다니!
허망하고, 진땀나고, 허탈하고,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잡아함경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부처님이, 발바닥에 피가 철철 나도록 두타행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비구 이십억이가 집으로 돌아가 안락하게 사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며
수행에 회의를 가지는 그의 마음을 꿰뚫고서
가르침을 준다.
너는 출가하기 전에 거문고를 아주 잘 탔다고 들었다.
거문고 줄을 팽팽히 조이면 소리가 잘 나더냐? 아닙니다.
그러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아닙니다.
이십억이야! 거문고 줄을 알맞게 조율해야 음이 제대로 나는 것과 같이
수행도 몸을 너무 핍박하거나, 너무 게을러서도 않된다.
수행자는 극단에 떨어지지 말고 중도를 취해야 한다.
며칠 전에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
(열두 줄 가야금을 안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왕이 된 원성왕릉이 학교 곁에 있다.)의 음악선생님이
고장나서 버리는 가야금을,
내가 좋아한다고 주워오더니만,
갑자기 우리집에 한중의 전통 악기,
고(가얏고, 거문고, 일본에서는 고토라고 한다. )가 나란히 시집왔다.
천만다행히도 고쟁의 줄은 인터넷 쇼핑으로 쉽게 구하였고,
고장난 가야금은 수리가 가능하다고 한다.
고쟁의 명곡, 높은 산 흐르는 물(高山流水),
영화 첨밀밀에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타이완의 요절한 여가수,
등려군이 부른 달빛은 내 마음(月亮代標我的心)과
함동정월이 연주하는 최옥산류 가야금산조를
춘설이 잦은 오늘 흠상하고 싶다.
옛 사람들이 즐겨듣던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를 들으리라.
*양춘곡: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보이는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로, 지음(知音)의 노래를 뜻한다.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다음으로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고, 다음으로 〈양춘백설가〉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던바, 곡조가 더욱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 한다. 《文選 卷45》
자줏빛 소매, 붉은 거문고 줄,
밝은 달 아래
스스로 타며 혼자 감격해
고개 떨구었다.
손가락 따라 흐느껴 울던 소리
멈춰진 곳에
사무치게 묻어나는 깊은 정
겹겹이도 쌓이네.
-백낙천, 밤에 듣는 고쟁 소리(夜箏)
공자님 사당, 대성전
대성전을 참배하고서
고등학교 이하년 겨울방학 앞두고 자취방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공자님 사당에 갓 쓰고 도포입은 수 많은 선비들의 말석에 엎드려 함께
참배하는 꿈을 꾸고 살아난 실존적 경험이 있다.
그 때 이후로 언젠가 한 번 태산을 오르고,
곡부에 와서 공자님 사당에 참배하고픈 소망을 품고 살았다.
대성전의 웅장한 석주들
대성전 안의 공자상
닫집 위에 사문재자, 만세사표라는 액자가 보인다.
행단, 공자님이 제자들을 살구나무 아래서 지도하였다.
행단 좌우에 잎이 진 나무들이 살구나무로 보인다.
은행나무는 아니다.
The terrace was built in Song Dynasty, and apricot trees were planted here,
(단은 송 나라 시대에 지었는데 여기에 살구나무들을 심었으며,)
the pavilion was built on the site of the terrace in the Jin Dynasty and rebuilt in the Ming Dynasty.
(정자는 금 나라 시대에 단 터에 지었는데 명 나라 시대에 다시 지었다.)
금의 당회영이 쓴 글씨(행단 안에 세워져 있다)
건륭제의 행단찬 비
杏壇贊 행단찬
憶惜緇帷詩書授受與有榮焉
기억하자니, 그 옛적 공자께서 임유의 숲, 행단에서
제자들에게 시(악), 서(예)를 가르치신 그 교육활동이 활발하였다.
軼桃轢柳博厚高明亦曰悠久
복사꽃 지고 버들이 푸르러며 세월은 변하지만 넓고 두터운 땅의 덕과
높고 밝은 하늘의 덕과 같은 공자님의 가르침은 유구하다.
萬世受治杏林何有
만세토록 세상을 다스리는 법도의 가르침을 받을
살구나무 숲은 어디에 있는가?
御筆
청 건륭황제 어필.
황제가 살구나무라고 인식하기에
그와 짝하여 복숭아꽃, 버드나무를 언급한 것입니다.
행림은 그러니 당연히 살구나무 숲으로 번역해야겠지요
孔子游乎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
공자는 우거진 숲 속을 지나다가 살구나무가 있는 높고 평탄한 곳에 앉아서 쉬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노래를 하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안동림 역주, <<장자>> <어부>)
공자가 제자들과 강학(講學)했던 행단(杏壇)에 나무만 울창하게 우거진 것에 대한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행(杏)을 은행나무로 간주하고 이 나무를 많이 심었던 데에 반해 중국에서는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다. 행단(杏壇)의 고사는 “공자가 치유(緇帷)의 숲 속에서 노닐며, 행단(杏壇)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나니,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 어부(漁父)의 말에서 유래한다.
(한국고전번역원 간이집 신사행록의 시, (베이징)국학(성균관)을 관광하다의 역주).
시에서 행단에 측백나무가 우거져 있다고 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중앙에 행단(杏壇, 싱탄)이 있다. 행단은 2층 헐산식 지붕이고 황색 기와를 얹었다. 단 앞에 금나라 때 만든 석재 향로가 있으며 단 내에는 청나라 건륭황제 고종이 쓰고 세운 행단찬(杏壇贊) 비가 있다. 공자는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대문헌의 정리와 후세교육에 마지막 남은 열정을 바쳤는데 바로 이 행단이 중심활동구역이었다. 송나라 진종 천희 2년(1018)에 대성전을 북쪽으로 옮겨 확장하면서 원래 공자고택의 교수당이었던 이 터에 단을 만들고 살구나무를 심어 행단이라 했는데 금나라 시대에 비로소 단 위에 건축물을 세우고 승안(承安)무오년(1198)에 공자의 후손들이 당대의 문필가 당회영(黨懷英)의 글씨로 비를 세웠다고 한다. 공자가 여기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진리를 강론하며 고전을 정리했다고 하여‘행단예악(杏壇禮樂)’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고사를 떠올릴 늙은 나무는 없고 어린 살구나무 두 그루가 마당에 서있다. (이재수, 삼공견문기).
은행(銀杏)나무가 아니라 글자대로 살구나무라고 하였다.
공자세가에는 공자님이 송나라에서 큰 나무 아래서 교육을 하였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무슨 나무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문묘, 서원, 사찰, 마을 등에 은행나무가 많고, 성균관대와 일본 도쿄대의 뱃지에 은행나무잎이 나온다.
영국의 식물학자 피터 크레인에 따르면 은행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고
공룡이 멸종한 뒤에 멸종위기종이었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인위적으로 은행나무를 보호하여 번식된 나무라고 한다.
행단의 행은 은행나무인가? 살구나무인가?
인터넷을 검색하니 은행나무설과 살구나무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박상진 경북대 교수는 나무의 성질로 보건대,
행단의 나무는 살구나무보다 은행나무이었을 것으로 여겼다.
역사학자로 나무에 얽힌 문화사 전문가인 강판권 계명대 교수는 살구나무라고 한다.
나카무라 고이치(中村公一),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에 행단의 유래를 이렇게 말한다.
"한 나라 명제가 공자 구택을 방문하여 교수당敎授堂 터에 대전大殿을 세웠고,
송 나라 건흥 연간(1022)에 대전을 뒤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살구나무를 심고 흙단을 쌓았다.
금 나라 학자 당회영黨懷英이 방문하여 행단이라는 두 글자의 비를 세운 것이 행단이란 명칭의 유래이다.
중국에서는 살구나무를 급제화라고 하는데, 이는 당나라의 과거제도와 연관 있다.
살구꽃이 핀 정원에서 급제자 연회가 열렸는데 이를 행연이라고 하였다.
-경북환경연수원 숲 해설가협의회 이정웅 강사의 글, <행단의 나무는 은행일까, 살구나무일까>
행단의 나무는 살구나무라고 보아야 한다.
송 나라 건흥 연간에 공자 후손 공도보孔道輔가 사당 앞에 단을 만들고
둘레에 살구나무를 심고서 행단이라 이름을 붙였다.
금나라 학사 당회영黨懷英이 행단 두 글자의 비를 세웠다.
....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행단변증설, 정선의 그림, 행단고슬에는 은행나무라고 한다.
중국의 문헌인 사문유취, 연감유함, 시학전서 등과
우리나라 민요 꽃노래, 심청전 화초가 사설(칠십제자 강론하니 행단춘풍에 살구꽃),
변강쇠가에 '살구나무 베자하니 공부자의 강단',
공자성적도 행단예악 그림에는 살구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로보면 살구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희, <<꽃으로보는 한국문화(3)>>
행단(杏壇)의 살구나무와 은행나무
행단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을 이른다. 글자 그대로 나지막한 단을 쌓고 ‘행(杏)나무’ 몇 그루를 심어서 만든 전용 야외 강단이다.
행을 옥편에서 찾아보면 살구나무와 은행나무를 동시에 나타내는 글자로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행단에 심겨진 영광의 나무가 이 두 나무 중 어느 것인지를 두고, 옛 사람들은 물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행단에는 은행나무를 심어왔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중종 14년(1519) 윤탁(尹倬)이 강당 아래에 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명륜당 뜰의 은행나무(文杏)가 바로 이것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오늘날 서울 명륜당에 있는 이 은행나무가 대표적인 행단의 나무이며,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공자 사당이 있는 곳에는 대부분 은행나무가 심겨져 있다.
행단의 은행나무 심기를 두고 조선중기의 문신 이수광이 그의 저서 <지붕유설>에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공자가 행단에 앉아 있다’고 하였는데, 사문류취(事文類聚)란 책을 보니, ‘행(杏)은 홍행(紅杏)이다’라는 구절이 있고, 강희맹의 시에도 ‘단 위의 붉은 행화는 반이나 떨어졌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 행을 은행나무로 의심하는데 그것은 살구나무의 잘못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또 정약용의 <아언각비>에 ’우리나라 사람이 잘못 알아 공자의 사당 뒤에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을 상징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중국의 행단 유적지에는 살구나무도 은행나무도 심겨져있지 않다고 하니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 두 나무의 자람 특성을 가지고 행단에 어느 나무가 심어졌을 것인지를 알아보자.
살구나무는 이른 봄 다른 나무보다 먼저, 그것도 잎도 피기 전에 꽃부터 피우고 바로 열매를 맺어 6월이면 벌써 노랗게 익어 땅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한 해 동안 살구나무가 해야 할 임무는 이렇게 일찌감치 끝내버린다. 이후는 잎이 활력을 잃고 병들어 지저분해 지며 벌레가 먹기도 한다. 또 널찍한 그늘을 만들 만큼의 아름드리로 자라지도 않으며 수명도 그리 길지 않다. 이런 특성으로 보아 살구나무는 행단의 나무로서 적합한 나무가 아니다. 공자가 행단에다 제자를 모아놓고 글을 가르칠 때는 더위를 피할 그늘이 필요한 계절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늦봄에서 초가을에 해당하며 이때의 살구나무는 그늘나무로서 역할이 어렵고, 크게 자라지 않은 것도 역시 행단의 나무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반면에 은행나무는 행단의 나무로서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봄에 잎사귀가 새로 돋아 어울리기 시작하여 그늘이 꼭 필요한 여름이면 무성한 잎을 충분히 펼쳐준다. 더욱이 은행나무에는 벌레가 덤벼들지 않아 나무를 그늘 삼아 담론을 펴기에 적당하며 오래살고 크게 자라 넓은 공간을 마련해준다. 은행열매는 가을에 들어 행단에서의 강의가 필요 없을 때쯤에나 익으니, 고약한 냄새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아예 열매가 달리지 않은 수나무만 골라 심어도 된다. 명륜당 4그루의 은행나무가 모두 수나무인 것은 좋은 예다.
행단에 무슨 나무를 심었을 것인지는 공자님의 일생과 업적을 알아보는데 별로 주요하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헌기록으로 밝히지 못하는 사실을 이렇게 과학적인 접근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일은 고전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월간 에세이 2003년 02월호>
황사와 살구나무 글쓴이: 강판권 계명대 교수 황사의 계절이다. 황사는 중국 북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황하 상류지대의 흙먼지가 강한 상승기류를 타고 3000∼5000m 상공으로 올라가 초속 30m 정도의 편서풍을 타고 우리나라까지 날아오는 현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황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사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황사를 '흙이 비처럼 떨어진다'는 뜻의 ‘우토(雨土)’, 혹은 ‘토우(土雨)’라 적고 '흙비'라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토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太宗) 6년(1406) 동북면 단주에 14일 동안 흙비가 내렸다는 기사이다. 이처럼 황사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봄철에 겪어야 하는 현상 중 하나이다. 중국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역사적으로 이해해야만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다. 황사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숲의 제거이다. 중국 황토고원의 경우 은나라 시대에는 80%이상이 숲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 농지 개발 등으로 울창한 숲은 사라졌다. 중국의 황사 현상은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이 숲을 제거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황사의 원인이 숲의 제거였다면 황사 문제의 해결 방법도 숲일 수밖에 없다. 현재 중국에서 황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토고원을 비롯한 곳곳에 숲을 조성하고 있지만, 숲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듯이, 숲도 결코 하루아침에 조성할 수 없다. 그런데 숲을 제거하는 것보다 숲을 조성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무는 순식간에 밸 수 있지만, 나무가 자라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황토고원에 심고 있는 나무 중 하나는 살구나무이다. 장미과의 살구나무는 중국 명대 이시진의「본초강목」에도 ‘행’을 살구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지만 은행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행’은 분명히 살구나무지만, 우리나라에 따르면 ‘개를 죽인다(殺狗)’는 뜻이다. 살구나무는 「논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으로 유명한 나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살구나무를 의미하는 ‘행’을 살구나무 외에 은행나무로 이해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도 ‘행’을 살구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지만 은행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행’은 분명히 살구나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격의과정에서 은행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황토고원에 살구나무를 심은 것은 건조한 곳에서도 잘 살기 때문이다. 살구나무의 꽃은 고향과 낭만의 상징이다. 홍난파 작곡, 이원수 작사의 「고향의 봄」에도 ‘행’을 살구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지만 은행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행’은 분명히 살구나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살구꽃이 고향을, 중국 당나라 두목의 「청명」 시에서는 ‘술집’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특히 살구꽃이 피는 마을, 즉 행화촌을 ‘술집’이라 부르는 이유도 두목의 시 덕분이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살구나무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나무이다. 살구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호랑이도 물리칠 수 있었다. 살구나무는 매화와 비슷한 시기에 꽃이 피고, 열매도 닮아서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간혹 살구열매를 매실로 착각한다. 살구의 열매를 ‘행인(杏仁)’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이 바로 씨앗을 의미한다. 씨앗은 생명을 만드는 종자이다. 인은 사람의 몸에 있는 착한 성품과 같다. 착한 성품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다. 착한 성품을 밖으로 드러내기만 하면 이 세상은 살구꽃처럼 아름답다.
대성전에서 본 시서예악 편액.
청나라 황제, 건륭제 아니면 옹정제가 참배하고 내린 것이다.
공자님 묘소에 참배하고
점심 먹은 궐리빈사.
공자님 마을은 대궐처럼 웅장하게 성역화되었기에 궐리라 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꿈에도 성인의 마을, 궐리를 그리워하여
궐리도 그림을 보고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청나라 황제부터 현대 중국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세계의 명사들이 다녀간 궐리 호텔, 식당.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추로지향이라는 휘호를 선물한
공자 후손 공덕성이 남긴 족자(복사본)가 걸려 있었다.
공자님 마을 길가의 기념품 가게에 걸린 공자님상.
당나라 제일의 화가, 오도자가 그린 선사공자행교상(근본 스승, 공자님이 가르침을 베푸시는 모습).
아래와 같은 화상찬이 적혀있다.
덕은 천지와 나란하시고 덕모천지(德(人+牟)天地)
도는 고금에 으뜸이시며 도관고금(道冠古今)
육경을 정리하시고 산술육경(刪述六經)
만대에 법도를 드리우셨다. 수헌만세(垂憲萬世)
공자님 마을, 궐리의 난전에 파는 기념품, 훈.
살 때부터 포장지가 없어서 걱정하였는데,
옷으로 둘둘말아서 가방에 넣었는데, 충격으로 주둥이가 깨져서 애석하다.
이런 아름다운 악기를 길거리 난전에서 몇 푼에 살 수 있다는 것이
역시나, 예악으로 주대의 태평성대를 회복하시려 한 공자님 마을 답다.
인디언 악기, 오카리나처럼 흙으로 빚은
중국, 한국의 전통 악기, 훈(塤, 壎). 8음 중 토부의 공명 악기.
17~18세기 영천의 대학자 훈수훈수(塤叟) 정만양, 지수(篪叟) 정규양 형제는
훈과 지(篪)가 화음을 이루듯이 형제 우애가 깊었다.
명도 정호, 이천 정이 형제처럼
갈암 이현일로부터 영남퇴계학의 학통을 이은 두 분 형제에게
제자였던 포항 기계의 용와 이홍리 선생이 훈지양선생어록을 편찬하였다.
예와 악은 유학의 핵심 커리큘럼.
훈
훈(壎)이라고도 쓰며 점토를 구워서 만든다. 중국 고대 토기시대의 유물이며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원시적인 악기로 한국에는 1116년(고려 예종 11) 중국 송나라에서 들어왔다. 저울추 ·계란 ·공 등 여러 가지 모양의 것이 있으나 한국의 훈은 저울추 모양에 속한다. 지공(指孔)은 앞에 3개, 뒤에 2개가 있으며 취구(吹口)는 상단에 있다. 음넓이는 황종(黃鐘:C)에서 응종(應鐘:B)까지인 12음을 내며 반규법(半竅法:반만 구멍을 막는 지법)을 사용한다. 음색은 어두운 편이며 낮고 부드러운 소리를 지녔다. 문묘제례악에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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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篪)
아악기(雅樂器)이다.『시경』소아(小雅)에 중국 고대 악기로 “백씨(伯氏)는 훈(壎)을 불고 중씨(仲氏)는 지(耔)를 분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훈·지의 합주는 형제의 우애에 비유한 말이다. 이같이 훈과 지는 잘 조화되고 항상 같이 편성되는 악기이다.
1116년(예종 11)에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이 들어올 때 지도 훈과 기타 다른 아악기와 함께 들어왔으나, 이보다 앞서 삼국 시대에 백제악에 이미 사용되던 악기이다.
『신당서(新唐書)』에도 고려기(高麗伎 : 高句麗伎)에 의취적(義觜笛)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와 의취적은 같은 악기이다. 의취적은 의취(義觜), 즉 따로 만든 부리인 취구(吹口)를 꽂아서 부는 형태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의 아래끝은 적(篴)과 같이 대마디 밖으로 자른 다음 십자공(十字孔)을 뚫고, 지공(指孔)은 모두 다섯개로서, 제1공은 뒤에 있고, 제2·3·4·5공은 앞에 있다.
아악기이기 때문에 12율4청성(十二律四淸聲)을 가지고 있고 반규법(半竅法)을 사용함으로써 16반음을 낸다. 현재 문묘제례악의 등가와 헌가에 편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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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화 백자의 원료인 청화(靑華, 코발트 물감)는 회회청이라고 하였다.
명나라에서 회회족(이슬람교-회교-청진교를 믿는 신강지방 위그르족 회글족) 특산품인
청화를 수입하여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뒤에 국산인 토청도 썼다.
시안 회족 거리에서 기념품으로 산 청화백자 북마크에도
여색보다 배우기를 더 좋아한 호학의 성인, 공자상이 상감되어 있다.
궐리 앞 길거리 기념품 가게에서 부채에 붓글씨를 쓰는 노인.
소림사가 있는 등봉시의 호텔 식당에서 난생 처음으로 본 중국의 전통악기.
이름을 몰랐는데, 악보책을 보니 고쟁이라고 하였다.
철선으로 된 21현. 퉁기니 영롱한 소리가 여울졌다.
연주를 들으며 느긋이 식사를 하지 못하여 아쉽다.
자개와 옻칠로 장식한 아주 고급 고쟁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여 우리집에 배달된 싸구려 고쟁(古箏-중국말로 구정).
고쟁 옆면에 새겨진 천진원운(인공에 물들지 않은 자연의 근원적인 울림). 글씨가 조잡하다.
고쟁 제조 공장이 밀집해 있는 중국양주(揚州)삼월(三月)민족악기공장에서 생산한 제품. 고쟁의 머리에는 10대 고쟁 명곡의 제목인, 고산유수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 인터넷에 접속하면 이 곡을 들을 수 있다.
나는 언제 배워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을런지!?
고산류수 곡 감상과 해석 사이트 주소:
꼭 감상하여 보시길!
http://www.guzheng.cn/tv/shangxi/20120210/1174.shtml#v_main
중국 양주의 어떤 욕심 많은 사람이 높은 벼슬을 하고
십만 냥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신선경에 들고 싶다고 하는
허황된 소망을 말한 것과 내 꿈은 같은 것일까?
고쟁의 꼬리에 백거이의 시, 야쟁이 새겨져 있다.
나전칠기로 화려하고 진기하게 장식하지 않고 조잡하지만
그래도 문기가 있어서 마음에 든다.
백거이가 삶의 덧없음을 절감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만년에 머물렀던 낙양 룽먼 이수 가의 고찰, 향산사. 옛 모습은 없고 청대의 건물이 있다. 백거이는 자신의 호를 향산거사라고 하였고, 향산사에 무덤이 있다.
향산사 아래 이수에 놓인 다리, 풍경이 좋다. 건너편 절벽에 그 유명한 룽먼석굴사원이 조성되어 있다.
룽먼석굴사원 봉선사의 노사나대불
측천무후의 얼굴이 모델이라고 한다.
신라의 원측 스님은 측천무후의 귀의를 받았다.
정토종의 근본 사찰의 하나인
향적사에 대탑이 있는 선도대사가
이 봉선사 대불 조성의 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향산사에서
향산사 경내의 백거이(백낙천) 묘
무덤 가에 피어난 랍매 꽃가지를 올렸다.
향산사 구로당의 백거이 상
백거이 무덤 가에 세워진 그의 대표시, 비파행을 표현한 그림 비석.
고쟁에 새겨진 백거이의 시, 야쟁은 비파행을 응축한 것이라고 한다.
백거이의 또 다른 대표작, 장한가는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표현하였다.
백거이의 시는 쉬워서 당시 민중들도 모두 따라 읊었다.
신라 상인들도 백거이 시집을 당에서 수입해 왔다고 한다.
그의 시는 비단길 들머리의 신장성 위그르족 사회, 신라는 물론이고
특히 일본인들의 시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白居易 - '琵琶行'
비파행병서(琵琶行 幷序)
元和十年, 予左遷九江郡司馬. 明年秋, 送客湓浦口. 聞舟中夜彈琵琶者, 聽其音錚錚然有京都聲. 問其人, 本長安倡女. 嘗學琵琶於穆曹二善才, 年長色衰, 委身爲賈人婦. 遂命酒, 使快彈數曲. 曲罷憫然. 自敍少小時歡樂事, 今漂淪憔悴, 轉徒於江湖間. 予出官二年, 恬然自安, 感斯人言, 是夕始覺有遷謫意. 因爲長句, 歌以贈之, 凡六百一十二言, 命曰 <琵琶行>.
琵琶行을 지으며 序文을 쓰다
원화 10 년에 나는 구강군사마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가을 손님을 배웅하러 분포강(湓浦江) 포구에 나갔다가, 배 속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들었다. 쟁쟁(錚錚)하게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니 전에 서울(京都)에서 듣던 소리였다. 그 사람을 찾아보니 원래 장안에서 노래하던 여자였는데, 일찍이 유명한 穆, 曹 두 선생에게서 비파를 배운 비파의 고수였다고 한다.
나이 들어 모습이 쇠퇴하게 되자 장사꾼에게 시집가서 의지하게 된 것이라 한다. 끝내 술상을 차리게 하고 몇 곡 청해 들었는데, 연주를 끝내고 참담해 졌다. 젊고 예뻤을 시절엔 웃고 즐기기만 하다가 이제는 시골구석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나(백거이)도 이 시골로 쫓겨 온지 2년, 스스로 편안하게 마음먹으려 했지만, 오늘 밤 이 여인의 말에 끝내 감격해서 비로소 멀리 귀양살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긴 長句의 노래를 지어 이 여인에게 보낸다. 모두 612 字인데, <琵琶行> 이라 부른다.
제1단 심양강 나루에 울려퍼진 천하절창 비파소리
潯陽江頭夜送客(심양강두야송객) : 심양강 어구에서 밤에 손님을 보내려니
楓葉荻花秋瑟瑟(풍엽적화추슬슬) : 단풍잎, 갈대꽃 흔들리는 가을이 쓸쓸하다.
主人下馬客在船(주인하마객재선) :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손에 오르며
擧酒欲飮無管絃(거주욕음무관현) : 술잔 마시려니 음악이 없다.
酒不成歡慘將別(주불성환참장별) : 취기가 오르지도 않았는데 슬픈 이별하려니
別時茫茫江浸月(별시망망강침월) : 이별의 시간, 망망한 강에 달빛이 젖어든다.
忽聞水上琵琶聲(홀문수상비파성) : 문득 강 위로 들리는 비파소리
主人忘歸客不發(주인망귀객불발) : 주인은 돌아갈 생각 잊고 손은 떠나지 못한다.
尋聲暗問彈者誰(심성암문탄자수) : 소리를 찾아 비파 타는 사람 누구인지 물어도
琵琶聲停欲語遲(비파성정욕어지) : 비파소리는 그쳤는데 말을 하려니 말소리 더디다.
移船相近邀相見(이선상근요상견) : 배를 옮겨 가까이 다가가 서로 마주 보고
添酒回燈重開宴(첨주회등중개연) : 술을 더하고 등불을 밝혀 다시 술자리를 열었다.
千呼萬喚始出來(천호만환시출래) : 천만 번을 불러서야 비로소 나왔는데
猶抱琵琶半遮面(유포비파반차면) : 여전히 얼굴 반쯤 가린 채로 비파를 끼고 있었다.
轉軸撥絃三兩聲(전축발현삼량성) : 축을 조이고 현을 퉁겨 두세 번 소리 내고는
未成曲調先有情(미성곡조선유정) : 곡조도 타기 전에 정이 먼저 이는구나.
絃絃掩抑聲聲思(현현엄억성성사) : 줄을 누르고 퉁길 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소리
似訴平生不得志(사소평생부득지) : 평생 이루지 못한 정을 하소연하는 듯.
低眉信手續續彈(저미신수속속탄) : 고개 숙이고 손끝을 따라 이어지는 연주
說盡心中無限事(설진심중무한사) : 가슴 속에 서린 끝없는 사연을 털어놓은 듯.
輕攏慢撚撥復挑(경롱만연발부도) : 가볍게 누르고 살짝 비틀었다 다시 퉁긴다.
初爲霓裳後六絃(초위예상후육현) : 먼저 예상곡을 연주하고 뒤에 육요를 연주한다.
大絃嘈嘈如急雨(대현조조여급우) : 큰 줄에서는 소나기처럼 세찬 소리 나고
小絃切切如私語(소현절절여사어) : 작은 현에서는 절절한 속삭임 같다.
嘈嘈切切錯雜彈(조조절절착잡탄) : 세차기도 하고 절절하기도 한 온갖 소리
大珠小珠落玉盤(대주소주락옥반) : 크고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
閑關鶯語花底滑(한관앵어화저활) : 한가한 대문 안 꾀꼬리 소리 꽃가지 아래 매끄럽고
幽咽泉流水下灘(유열천류수하탄) : 흐느끼듯 흐르는 샘물이 여울로 떨어진다.
水泉冷澁絃凝絶(수성냉삽현응절) : 물줄기 얼어붙듯이 현이 얼어붙으며 소리는 끊어지고
凝絶不通聲暫歇(응절불통성잠헐) : 얼어붙은 듯 끊어진 소리, 점점 사라진다.
別有幽愁暗恨生(별유유수암한생) : 따로 그윽한 슬픔, 남모르는 한이 되살아나는듯
此時無聲勝有聲(차시무성승유성) : 이러한 때는 비파소리 울릴 때보다 더 좋았다.
銀甁乍破水漿迸(은병사파수장병) : 은병이 깨어져 물중기가 치솟듯
鐵騎突出刀鎗鳴(철기돌출도쟁명) : 철마가 뛰어오르고 칼과 창이 부딪치듯.
曲終收撥當心畫(곡종수발당심화) : 곡이 끝나자 채를 뽑아 비파중심을 획 그으니
四絃一聲如裂帛(사현일성여열백) : 비단이 찢어지듯 네 현에서 한꺼번에 소리를 낸다.
東船西舫悄無言(동선서방초무언) : 동쪽 배, 서쪽 배 사람들 모두 할 말을 잊고
唯見江心秋月白(유견강심추월백) : 강 가운데서 밝은 가을 달만 바라 볼 뿐이다.
제2단 늙은 창부의 회상과 하소연
沈吟收撥揷絃中(침음수발삽현중) : 침울하게 채를 거두어 줄에 꽃고
整頓衣裳起劍容(정돈의상기검용) : 옷차람을 정돈하고 일어나 얼굴을 가다듬었다.
自言本是京城女(자언본시경성녀) :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장안 여자로
家在蝦蟇陵下住(가재하마릉하주) : 하마릉 아래에 살았었는데
十三學得琵琶成(십삼학득비파성) : 열세 살에 비파를 익혔고
名屬敎坊第一部(명속교방제일부) : 저의 이름은 교방의 제1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曲罷常敎善才服(곡파상교선재복) : 한 곡조 타면 스승들도 탄복하고
粧成每被秋娘妬(장성매피추낭투) : 몸치장하면 기녀들의 질투도 받았습니다.
五陵年少爭纏頭(오릉년소쟁전두) : 오릉의 청년들이 다투어 찾아왔고
一曲紅綃不知數(일곡홍초부지수) :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붉은 비단 셀 수 없이 받았습니다.
鈿頭銀蓖擊節粹(전두은비격절수) : 자개 박은 은비녀 장단 맞추다 다 부러지고
血色羅裙飜酒汚(혈색나군번주오) : 붉은 색 비단 치마 술에 얼룩졌습니다.
今年觀笑復明年(금년관소부명년) : 올해도 기뻐서 웃고, 이듬해도 기뻐 웃으며
秋月春風等閒度(추월춘풍등한도) : 가을 달, 봄바람 한가롭게 보냈습니다.
弟走從軍阿姨死(제주종군아이사) : 남동생 싸움터로 가고 양모도 죽고 나니
暮去朝來顔色故(모거조래안색고) : 저녁 가고 아침 오면 얼굴빛도 시들어 갔소.
門前冷落鞍馬稀(문전냉락안마희) : 대문 앞은 말 타고 찾아오는 이 없어 쓸쓸해지고
老大嫁作商人婦(노대가작상인부) : 늙은 이몸 장사치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商人重利輕別離(상인중리경별리) : 장사치는 이속에만 밝고 이별은 가볍게 여기는지라
前月浮梁買茶去(전월부량매다거) :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떠났습니다.
去來江口守空船(거래강구수공선) : 강나루 오가며 빈 배만 지키는데
遶船明月江水寒(요선명월강수한) : 뱃전에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가워
夜深忽夢少年事(야심홀몽소년사) : 깊은 밤에 홀연히 어린 시절을 꿈에서 보니
夢啼粧淚紅闌干(몽제장루홍난간) : 꿈속에서도 서러워 화장한 얼굴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3단 백낙천의 좌천 생활 하소연
我聞琵琶已歎息(아문비파이탄식) : 이미 비파소리에 탄식하는데
又聞此語重喞喞(우문차어중즐즐) : 다시 이야기를 듣고 나니 거듭거듭 탄식이 나온다.
同是天涯淪落人(동시천애륜락인) : 그대와 나 같은 하늘 아래 떠도는 몸으로
相逢何必曾相識(상봉하필증상식) : 이렇게 서로 만나는데 어찌 본디 아는 사이어야 하는가.
我從去年辭帝京(아종거년사제경) : 이 몸은 지난해 장안을 떠나
謫居臥病瀋陽城(적거와병심양성) : 심양으로 귀양와 병들어 누웠다네.
瀋陽地僻無音樂(심양지벽무음악) : 심양은 외진 땅이라
終歲不聞絲竹聲(종세불문사죽성) : 일 년이 다 가도록 음악소리 한 번 듣지 못했다오.
住近湓江地低濕(주근분강지저습) : 사는 곳이 가까운 분강 땅이라, 땅이 낮고 습하여
黃蘆苦竹遶宅生(황로고죽요택생) : 누런 갈대와 마른 대나무만이 집 둘레에 우거져다오.
其間旦暮聞何物(기간단모문하물) : 여기서 아침저녁 무엇을 듣겠는가.
杜鵑啼血猿哀鳴(두견제혈원애명) : 피 토하는 두견새와 애절한 원숭이 울음 소리뿐.
春江花朝秋月夜(춘강화조추월야) : 강가의 꽃이 피는 봄날 아침, 달 뜨는 가을밤
往往取酒還獨傾(왕왕취주환독경) : 때때로 술가져와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豈無山歌與村笛(기무산가여촌적) : 어찌 산촌에 노랫소리, 피리소리 없으련만
嘔啞嘲哳難爲聽(구아조찰난위청) : 벙어리 말 배우고 새 웃음 짓듯 알아듣기 어려워라.
今夜聞君琵琶語(금야문군비파어) : 오늘 밤 그대의 비파소리 들으니
如聽仙樂耳暫明(여청선악이잠명) : 신선의 음악 듣는 듯 귀가 밝아진다.
莫辭更坐彈一曲(막사갱좌탄일곡) :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조 타주시면
爲君飜作琵琶行(위군번작비파행) : 난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다.
제4단 동병상련의 눈물 -화려한 날들은 가고
感我此言良久立(감아차언양구립) : 내 말에 감격하여 한참 서 있더니
却坐促絃絃轉急(각좌촉현현전급) : 다시 앉아 현을 고르고 급히 비파를 탄다.
凄凄不似向前聲(처처불사향전성) : 전보다 더 처연히진 소리에
滿座聞之皆掩泣(만좌문지개엄읍) : 좌중 사람들이 듣고서 모두가 눈을 가리고 운다.
座中泣下誰最多(좌중읍하수최다) : 그중에 누가 자장 많이 눈물 흘렸던가
江州司馬靑衫濕(강주사마청삼습) : 푸른 적삼 눈물에 다 젖은 강주 사마였더라.
<비파행>의 배경이자 현장이던 심양 강가에 당나라 때 강주(江州) 사람들은 비파정(琵琶亭)을 지어 백거이 명작의 산실을 기념했다. 이 비파정은 1천여년 강물을 굽어보며 백거이 문학을 증언하다가 청나라 말기 병란(兵亂)에 소실되었다. 그후 새로 건립한 비파정(琵琶亭)이 양자강 장강대교(長江大橋) 옆에 서있다.
이 비파행 시는 칠언(七言) 87행 609字로 본문이 이루어 젔으며, 제복 비차행(비파행) 3字를 합하여 모두 612자의 글로 이루어 젔는데, 그동안 글자의 첨삭은 없었다고 보여진다. 이 시문을 읽노라면 백낙천만이 쓸 수 있는 문자로 음악을 시각화(視覺化)하면서, 변전하는 운명에의 통곡을 표상하고 인간의 비애를 빼어나게 결정시켰다. 그 후에 이 시는 음악을 문자로 정착시키는 수법의 지침이 되었고, 또 음악 연주자와 시인의 인간관계적 구성을 거쳐 소설과 희곡에 오래도록 제재(題材)를 제공하였다. 서 유럽에서는 《장한가(長恨歌) Everlasting Remorse)》에 대응하는 ‘류트송(Lute Song)’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모란을 사랑하였던, 모란의 도시 낙양의 호텔에 모란꽃이 수 놓인 비단옷을 걸친
당삼채 당나라 미녀상.
양국충의 누이, 경국지색, 귀촉도의 불여귀,
귀비 양씨도 이렇게 생겼을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비만형의 추녀.
복원한 화청궁의 목욕하고 나온 양귀비상.
연못 가운데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너무 서구적인 몸매로 표현하였다.
여산 아래 화청궁에는 지금도 따뜻한 온천물이 솟아나건만,
양귀비는 벽돌무덤 속 한 줌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후세인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장한가 長恨歌-길게 탄식하는 노래
漢皇重色思傾國한 황제 사랑 그리워함에 나라는 기울어가네
御宇多年求不得 오랜 세월 세상을 살펴도 구할 수 없구려.
楊家有女初長成 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으나
養在深閨人未識 깊숙한 규방에서 자라니 누구도 알지 못하나
天生麗質難自棄 타고난 아름다움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 뽑혀 군왕 곁에 있도다.
回眸一笑百媚生 눈웃음 한 번에 모든 애교가 나오니
六宮粉黛無顔色 육궁에 단장한 미녀들의 안색을 가렸다오.
春寒賜浴華淸池 봄 추위에 화청지에서 목욕함을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 매끄러운 온천물에 기름진 때를 씻으니
侍兒扶起嬌無力 시녀들 부축하여 일어나니 아름다움에 당할 힘이 없도다.
始是新承恩澤時 그 때부터 황제 사랑 받기 시작하였네
雲鬢花顔金步搖 구름같은 귀밑머리, 꽃 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 부용휘장 안은 따뜻하여 봄 깊은 밤을 헤아리니
春宵苦短日高起 짧은 밤을 한탄하며 해 높아서 일어나니
從此君王不早朝 이를 좇는 군왕은 이른 조회를 보지 않았고
承歡侍宴無閑暇 총애로 연회에 매이니 한가할 틈 없어
春從春游夜專夜 봄을 좇는 춘정을 즐겨 온밤을 지새우니
後宮佳麗三千人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의 총애가 그녀에 있으니
金屋粧成嬌侍夜 금 같은 방 단장하고 교태로 밤 시중들어
玉樓宴罷醉和春 옥루 잔치 끝나면 춘정을 이루니
姉妹弟兄皆列士 자매와 형제 모두가 열사라.
可憐光彩生門戶 예쁘게 여기 가문에 광채가 나니
遂令天下父母心 이로 하여금 세상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도다.
驪宮高處入靑雲 화청궁 높이 솟아 구름속에 들어 있고
仙樂風飄處處聞 신선의 풍악은 바람 타고 어디서나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 느린 노래 오만한 춤이 비단결과 피리에 맺히니
盡日君王看不足 군왕은 종일 넋 잃고 보아도 부족하도다.
漁陽瞽鼓動地來 돌연 어양 쪽 땅을 울리는 악관의 북소리 들려오니
驚破霓裳羽衣曲 예상우의곡에 깜짝 놀라도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궁궐에 연기 먼지 솟아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수천수만 관군들은 서남으로 가고
翠華搖搖行復止 천자의 기 흔들리며 가다가 서곤 하며
西出都門百餘里 도성문 서쪽 백여리 마외역에는
六軍不發無奈何 육군을 보내지 못해 어찌 할 수 없어
宛轉蛾眉馬前死 미인의 긴 눈썹이 구부러지며 굴러 군마 앞에 죽었네
花鈿委地無人收 땅에 떨 군 꽃비녀 거두는 사람 없고
翠翹金雀玉搔頭 취교, 금작, 옥소두 땅에 흩어졌네
君王掩面救不得 군왕은 얼굴 가린 채 구하지 못하고
回看血淚相和流 차마 돌린 두 눈에 피눈물이 흐르네
黃埃散漫風蕭索 누런 흙먼지 일고 바람 쓸쓸히 부는데
雲棧縈紆登劍閣 구름 걸린 굽은 잔도 검각산을 오르네
峨嵋山下少人行 아미산 아래에는 오가는 이도 드물어
旌旗無光日色薄 천자 깃발 빛을 잃고 햇빛도 희미하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 맑게 흐르고 촉산은 푸르건만
聖主朝朝暮暮情 황제는 아침저녁 양귀비 생각에 잠겨
行宮見月傷心色 행궁에서 보는 달에 마음 절로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들리는 방울소리는 애간장 끊어지는 소리요
天旋地轉回龍馭 천하 정세 변하여 황제 돌아오는 길에
到此躊躇不能去 마외역에 이르러는 걸음 뗄 수 없었네
馬嵬坡下泥土中 말 높은 고래아래 진흙더미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 고운 얼굴 어디 가고 죽은 자리만 남아
君臣相顧盡沾衣 임금 신하 서로 보며 눈물 옷깃 적시네
東望都門信馬歸 동쪽 도성문 향해 말에 길을 맡겨 가니
歸來池苑皆依舊 돌아와 본 황궁의 정원은 변함 없어
太液芙蓉未央柳 태액지의 부용도 미양궁의 버들도
芙蓉如面柳如眉 부용은 양귀비 얼굴 버들은 눈썹
對此如何不淚垂 이들을 대하고 어찌 아니 눈물 드리우리
春風桃李花開日 봄바람에 복숭아며 오얏꽃이 만발하고
秋雨梧桐葉落時 가을비에 젖어 오동잎이 떨어져도
西宮南內多秋草 서궁과 남원에 가을 풀 우거지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쓸지 않으니
梨園子弟白發新 이원의 자제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椒房阿監靑娥老 양귀비 시중들던 시녀들도 늙었네
夕殿螢飛思悄然 반딧불 나는 저녁 궁궐 더욱 처량하여
孤燈挑盡未成眠 등불 심지 다 타도록 외로이 잠 못 드니
遲遲鍾鼓初長夜 더딘 종과 북소리에 밤이 길다는 것을 알았네
耿耿星河欲曙天 은하수 반짝이며 새벽은 다가오고
鴛鴦瓦冷霜華重 원앙같이 금슬좋은 기와는 차고 서리꽃이 심해지나
翡翠衾寒誰與共 함께 덮을 이 없는 싸늘한 비취금침
悠悠生死別經年 생사를 달리한 지 아득하니 몇 년인가
魂魄不曾來入夢 꿈속에 혼백마저 만나볼 수 없네
臨邛道士鴻都客 임공의 도인이 도성에서 머무는데
能以精誠致魂魄 정성으로 혼백을 불러올 수 있다하니
爲感君王輾轉思 양귀비 그려 잠 못 드는 군왕을 위해
遂敎方士殷勤覓 방사시켜 양귀비 혼백 찾게 하였네
排空馭氣奔如電 허공을 가르고 번개처럼 내달아
升天入地求之遍 하늘 끝에서 땅 속까지 두루 찾아
上窮碧落下黃泉 위로는 벽락 아래로는 황천까지
兩處茫茫皆不見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찾을 길이 없는데
忽聞海上有仙山 홀연 들리는 소문 "바다 위에 선산 있어
山在虛無縹緲間 그 산은 아득한 허공 먼 곳에 있고,
樓閣玲瓏五雲起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이 일어
其中綽約多仙子 그 곳에 아름다운 선녀들이 사는데,
中有一人字玉眞 그 중 옥진이라 하는 선녀 하나 있으니
雪膚花貌參差是 눈같은 피부와 고운 얼굴 그인 것 같다"하네
金闕西廂叩玉扃 황금 대궐 서쪽 방의 옥문을 두드리고
轉敎小玉報雙成 소옥시켜 쌍성에게 알리도록 말 전하니
聞道漢家天子使 한황제의 사자가 왔다는 말 전해 듣고
九華帳里夢魂驚 꿈에 깨어 놀라는 화려한 장막 안의 혼백
攬衣推枕起徘徊 옷을 들고 베개 밀고 일어나 서성이더니
珠箔銀屛迤邐開 길게 이어진 구슬발과 은병풍 열리니
雲髻半偏新睡覺 구름 같은 머리 한쪽으로 드리우고 막 잠에 깬 듯
花冠不整下堂來 머리장식 안 고친 채 당에서 내려오네.
風吹仙袂飄飄擧 바람 부는 대로 소맷자락 나부끼니
猶似霓裳羽衣舞 예상우의무를 추던 그 모습인 듯
玉容寂寞淚欄干 옥 같은 얼굴 수심 젖어 눈물이 난간에 흐르니
梨花一枝春帶雨 활짝 핀 배꽃 한 가지 봄비에 젖은 듯 하구나
含情凝睇謝君王 정어린 눈길 돌려 군왕에게 사뢰니
一別音容兩渺茫 "헤어진 뒤 옥음, 용안 듣고 뵙지 못하여
昭陽殿里恩愛絶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도 끊어지고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에서 보낸 세월이 오래건만
回頭下望人寰處 머리 돌려 저 아래 인간세상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 장안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 먼지 뿐
唯將舊物表深情 장차오래 지닐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니
鈿合金釵寄將去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가지고 가라하네
釵留一股合一扇 비녀는 반 쪽씩 상자는 한 쪽씩
釵擘黃金合分鈿 황금 비녀 토막내고 자개 상자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의 세계 최대 도시였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장안, 낙양으로 낙타떼 몰고 들어온 중앙아시아, 서역의 상인들.
쑨원과 청천백일기.
향산사는 20세기에 들어 국민당 장제스 총통의 별장으로 쓰였다.
향산사의 장개석 송미령 별장 사무실
夜箏
紫袖红弦明月中,自弹自感闇低容。
弦凝指咽声停处,别有深情一万重。
若要把白居易《琵琶行》裁剪为四句一首的绝句,实在叫人无从下手。但是,《琵琶行》作者自己这一首《夜筝》诗,无疑提供了一个很精妙的缩本。
“紫袖”、“红弦”,分别是弹筝人与筝的代称。以“紫袖”代弹者,与以“皓齿”代歌者、“细腰”代舞者(李贺《将进酒》:“皓齿歌、细腰舞”)一样,选词造语甚工。“紫袖红弦”不但暗示出弹筝者的乐妓身分,也描写出其修饰的美好,女子弹筝的形象宛如画出。“明月”点“夜”。“月白风清,如此良夜何?”倘如“举酒欲饮无管弦”,那是不免“醉不成饮”的。读者可以由此联想到浔阳江头那个明月之夜的情景。
次句写到弹筝。连用了两个“自”字,这并不等于说独处(诗题一作“听夜筝”,俨然就有听者在),而是旁若无人的意思。它写出弹筝者已全神倾注于筝乐的情态。“自弹”,是信手弹来,“低眉信手续续弹”,得心应手:“自感”,则见弹奏者完全沉浸在乐曲之中。唯其“自感”,方能感人。“自弹自感”把演奏者灵感到来的一种精神状态写得维妙维肖。旧时乐妓大抵都有一本心酸史,诗中的筝人虽未能象琵琶女那样敛容自陈一番,仅“闇低容”三字,已能使人想象无穷。
音乐之美本在于声,可诗中对筝乐除一个笼统的“弹”字几乎没有正面描写,接下去却集中笔力,写出一个无声的顷刻。这无声是“弦凝”,是乐曲的一个有机组成部分;这无声是“指咽”,是如泣如诉的情绪上升到顶点所起的突变;这无声是“声停”,而不是一味的沉寂。正因为与声情攸关,它才不同于真的无声,因而听者从这里获得的感受是“别有深情一万重”。
诗人就是这样,不仅引导读者发现了奇妙的无声之美(“此时无声胜有声”),更通过这一无声的顷刻去领悟想象那筝曲的全部的美妙。
《夜筝》全力贯注的这一笔,不就是《琵琶行》“冰泉冷涩弦疑绝,疑绝不通声暂歇。别有幽情暗恨生,此时无声胜有声”一节诗句的化用么?
但值得注意的是,《琵琶行》得意的笔墨,是对琶乐本身绘声绘色的铺陈描写,而《夜筝》所取的倒是《琵琶行》中用作陪衬的描写。这又不是偶然的了。清人刘熙载说:“绝句取径深曲”,“正面不写写反面,本面不写写背面、旁面,须如睹影知竿乃妙。”(《艺概》)尤其涉及叙事时,绝句不可能象叙事诗那样把一个事件展开,来一个铺陈始末。因此对素材的剪裁提炼特别重要。诗人在这里对音乐的描写只能取一顷刻,使人从一斑见全豹。而“弦凝指咽声停处”的顷刻,就有丰富的暗示性,它类乎乐谱中一个大有深意的休止符,可以引起读者对“自弹自感”内容的丰富联想。诗从侧面落笔,的确收到了“睹影知竿”的效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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