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마루타 되어
박애란
네 번째 수술을 위하여 다서 입원을 하였다.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수술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열 번 스무 번이라도 수술을 해서 다리를 구부리고 싶다는 심정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첫 번째 수술은 슬 관절에 인공관절을 이식하는 수술이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발병한 골수염, 당시 대구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에서 수술은 받았지만 재활운동과 염증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성장기를 거쳐 이 십대가 되도록 방치하여 처음 수술한 흉터 부위에 다시 재발한 염증은 꽈리만 하게 물집이 차 올랐고 열로 인해 주변도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제야 화급하게 병원을 찾았고 긴 주사기를 물이 찬 부위에 찔러 넣어 물을 빼 내고 항생제 처방을 해 주었다. 그렇게 그 때 그 때 급한 불만 끄며 살아 온 세월이었기에 정작, 더 이상 견디기 힘 들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수술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며 가는 곳 마다 거절을 당했고 병원 문을 나설 때 마다 절망스런 마음에 티끌만한 삶의 희망마저 사그러들었다. 그렇게 죽지 못 해 살아 온 수 십년 세월이 흘러 급기야는 앉을 때나 일어 설 때도 방 안의 장롱 손잡이나 방문 손잡이 등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병원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한 채 그냥 그러다 어느 날엔가 때가 이르면 죽겠거니 하고 체념 아닌 체념을 하며 삶에 대한 의지마저 박약해진 채 고통을 견뎠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 찾아왔다. 내 나이 쉰 두살이 되던 해, 우연찮게 티브이를 통해 알게 된 어느 개인 병원 의사를 통해 총 네 번의 수술을 받아 죽음의 문 턱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생의 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수술실은 사방 차갑고 하얀 벽으로 되어 있고 보이는 것은 수술용 의료기구와 침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한기마저 느껴지는 수술실 침대에 누워있는 그 순간이 내게는 그 어느 때 보다 평안했고 비로소 안식을 얻은 것 같았다. 사는 일에 메달려 한 번도 내 몸을 위하여 그 흔한 온천 한 번, 휴양림으로 힐링 여행 한 번 가 볼 새 없이 숨 가쁘게 살아 온 지난 삶이라서 잠시 후면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며 내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그 지독한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전 단계인 이 시간에, 행복하고 평안한 마음이 드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윽고 수술할 의사 한 명과 두 명의 간호사, 마취의, 마지막으로 원장님이 들어왔다. 수술실은 순식간에 그들 의료진들로 꽉 찬 느낌이다.
허리 부분에 차단막이 가려지고 정맥에 마취제를 주사하는 것으로 수술 준비는 끝났다. 마취가 거의 다 되어 갈 무렵, 잠시 밖에 나갔던 원장님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고 수술실 방문이 닫히고 드디어 본격적인 수술로 돌입했다. 방에는 수술기구 달그락거리는 소리 외에는 의료진들의 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긴장과 고요만이 가득하다. 가끔, 집도의의 가위, 메스, 하는 짧은 주문의 음성만이 방의 정적을 깬다. 수술은 다섯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나는 이 때, 수술로 인한 온갖 소리들을 다 듣게 되었다. 그라인더로 쇠를 깎는 듯한 소리, 그것은 아마 인공괸절 앉힐 자리를 만들기 위해 통 뼈가 되어 위 아래 구분마저 없어진 무릎 부분에 홈을 파는 소리라고 짐작된다. 한 동안 그 소리의 굉음으로 머릿 속이 멍 하더니 이번에는 망치로 어딘가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홈을 판 자리에 인공관절을 박아 넣느라 두드리는 소리인 것 같다. 그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다른 데서 나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 만큼 마취의 효과는 완벽했고 수술로 인한 통증이나 그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참으로 의학 기술의 발달이 놀라울 뿐 이다. 그 외에도 수술기구의 금속성 소리들로 내 두 귀는 예민하게 열려 있었다. 그 날, 그 방에서의 소리들은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나만을 위하여 울리는 천상의 소리, 그렇다, 그것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 한 천상의 소리였다. 드디어 수술이 끝나고 의료진들은 수술실을 나가고 두 명의 간호사들이 마지막 뒷 정리를 하고 이동 침대를 밀고 들어 온 간호사들과 함께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양 쪽 어깨 죽지와 두 다리를 동시에 번쩍, 들어 순발력 있게 이동식 침대로 옮겨 병실로 데려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그 때 마다 진통제 주사에 의지하여 그런데로 견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맞는 진통제 주사도 뼈를 깎은 아픔을 어쩌지는 못 했다. 오죽하면 뼈를 깎는 아픔, 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또 다시 통증이 시작되고 나는 뜨거운 가마 솥 위에 올라 선 것 처럼 펄펄 뛰며 고통스러웠지만 기실은 그것마저도 행복했다.
두 번째 수술은 고관절에 인공관절을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그런데 수술이 문제가 아니라 수술 후 골반 틀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다리 사이에 사다리 모양의 단단한 틀을 끼워 놓아 움직이지 못 하는 점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진통제 주사로 인해 통증을 많이 못 느꼈지만 차츰 수술 부위와 허리의 통증으로 인한 고통과 불편함이 지긋지긋 하도록 나를 괴롭혔다. 틀을 끼고 있어야 되는 기간은 이 주 간이고 그 동안은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 외에 옆으로 돌아눕거나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밤이면 잠 결에 끼고 있던 틀이 빠져 침대 밑으로 떨어져도 당직 간호사를 부르지 않고 아침까지 그냥 둔다. 단 몇 시간이라도 편한 자세로 누워있고 싶기 때문이다. 누워서 변기에 변을 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수술 후, 일 주일 정도 지나고 부터는 소변 줄을 빼고 자력으로 소변을 봐야 하는데 복부는 팽만해져 조금만 눌러도 소변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데도 누워서는 도저히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병풍을 가져다 두르고 침대 난간을 잡고 일어나 쭈그리고 앉아서야 겨우 소변을 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일 주일이 지나 실 밥은 풀었지만 다리 사이의 틀은 여전히 끼고 있어야 했고 그 이 주간의 시간은 내게 있어서는 가장 길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세 번째 수술은 근육 복원술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수술이었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 수술이 그리 많이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수술한 원장님이 미국에서 다 년간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배워 온 새로운 의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두 번의 대 수술로 인해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고 오랜 항생제 투약으로 인해 나날이 식욕이 떨어져 체력도 많이 소진되어 있는 상태라 연이는 수술이 조금은 버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결사의 각오로 수술 날짜를 잡고 일시 퇴원 하였다가 다시 입원하여 다음 날 수술실로 들어갔다.
애초, 수술로 인해 다리를 구부리기를 바랬다기 보다 그저 통증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그냥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겠기에 더 이상 염증으로 인해 뼈가 녹아 내려 삶의 질이 더 나빠지는, 그래서 차라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처참한 삶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랬을 뿐, 더 이상의 헛된 기대는 없었다.
다리의 가운데 부분이 가늘다 못 해 근육이 완전히 말라 붙어 뼈와 피부가 유착된 상태여서 인공관절 수술만으로는 다리가 구부러지기 어렵다고 한다. 해서, 근육 복원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러니까 네 번의 수술은 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 와 또 다시 통증과의 사투가 시작 되었지만 첫 번째 수술을 하고 병실에 왔을 때 처럼 신음 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았다. 이번 수술은 고 관절에서부터 슬 관절 부위까지 대충 봐도 오십 센티는 실히 되어 보일 만큼 길게 꿰메져 있었다. 오랫동안 근육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피부 밑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필요없는 모세혈관을 다 제거해야 근육이 채워 질 수 있으며 이 때문에 피부 박리술을 하는 것이라고 원장님은 수술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수술로 인해 몹시 지쳐 있었기에 세 번씩이나 수술을 받을 때의 기백과 용기는 어디로 가고 네 번째 수술 때가 임박하자 이 정도면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네 번씩이나 수술을 받아야 하나, 하는 심약한 생각에 나는 또 마지막 수술에 대한 마음의 갈등이 생겼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할 때도 다른 때와는 달리 동의서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지한 나는 섬칫한 마음이 들었다. 내용인즉, 수술 과정에서 대 동맥이 훼손될 수도 있고 병원은 그에 대한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왈칵, 겁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수술을 취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보호자 동의란에 서명 하려고 퇴근 하자마자 부랴부랴 쫒아 온 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기에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하는 심정으로 네 번째 수술에 임하였다.
그 날은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고 팔도 떨렸다. 해서 수술 도중에 팔에 자꾸만 힘이 주어지고 안으로 구부리게 되었다. 팔에 힘 빼라고 간호사가 계속 주의를 주었지만 그건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급기야는 끈으로 팔과 다리를 침대 기둥에 묶어 고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수술은 진행되어 가고 있었지만 정신은 말동말동한 채 두 눈을 멀거니 뜨고 천정을 바라보다가 머리 맡에 주렁주렁 매 달린 여러 가닥의 줄을 세어 보기도 한다. 줄은 모두 네 가닥, 수액이 들어가는 줄, 수혈 주머니를 매단 줄, 검은 액체가 담긴 주머니를 매단 줄 ... 그리고 간호사의 다급한 한 마디,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알지 못 한다. 다만, 뭔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과 그에 따른 불안감이 점점 더 가중되어 가슴을 짓 누른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미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닌 것을, 그렇다면 이 상황을 담대히 받아 들이고 죽던지 살던지 모든 되어지는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자 어차피 수술 받지 못 했더라면 극심한 고통을 견디다 못 해 얼마 살지도 못 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수술로 인한 두려움이 내게는 사치와도 같다. 그래, 그럴바엔 나는 차라리 마루타가 되리라 아직 국내의 정형외과 환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근육 복원술의 성공 사례의 최초의 주인공이 되어 많은 난치성 근육 강직증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니까, 그런 생각들을 하노라니 어느 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마음이 설레었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시이 대위의 부하들에 의해 끌려 온 731 부대의 실험용 마루타가 아니라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삶의 빛을 발견하고 스스로 마루타가 되기로 자청하고 내 발로 걸어 들어 온 이 길이기에 한 치의 두려움도, 후회도 용납되지 않는다. 해서, 나는 지금 그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이고 그 끝은 절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고통에서 해방된 기쁨과 환희만이 있을 뿐이다.
2020.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