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물가로 접어들기 위해 동편으로 꺾어돌자 그림자가 발 앞으로 앞서가 누웠는데, 제법 길었다. 발바닥이 여기저기 부르터서 한발 한발 떼어놓을 때마다 쓰라리고 아픈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물가 사철나무 그늘엔 몇몇 동네 아주머니들이 철푸덕 주저앉아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얼레, 아까먹새 떠났던 순임이가 웬일여?"
옆집 사는 여산댁이 눈살을 짓고 말했다.
"하이고오, 저년 똥고집, 말도 말어."
손사래를 치면서 두레박줄 잡을 손을 재게 놀리는 것은 강경에서부터 마을까지 내내 앞장서 걸어온 영순이 어머니였다. 강경 역전에다가 영순이를 떼어놓고 오는 것이 서러웠던지, 아니면 끝끝내 몽니라도 부리듯이 따라붙은 순임이가 미웠던지, 영순이 어머니는 짱짱한 이십리 길을 한번도 쉬지 않고 내처 걸어온 것이었다. 발이 부르트고 땀에 전 속적삼이 살가죽에 붙어 있기론 순임이나 영순이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 벌컥벌컥 우물물을 한참이나 들이마신 영순이 어머니가 두레박을 순임이에게 내던지듯이 건네주었다.
"아따 이년, 낙태한 고양이상 그만 허고 물이나 처먹어."
"쯧쯧쯧, 끝끝내 여길 못 뜨고 어린게 뙤약볕 밑에서 오고가고 사십리 길을 걸었네그랴. 눈구녁은 퉁퉁 붓고 새카맣게 쪼그라든 것이 에이구, 애상스러운 것."
"말도 말어."
영순이 어머니가 여산댁 옆에 아예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조년이 원체 말이 h고, 어린것이 동상들 봐야지, 물 길어야지, 살림허야지, 그러고도 유난스런 즈 엄니 지청구는 혼자 다 듣는 게 불쌍혀서, 가라고 대처에 나가서 팔자 한번 고쳐보라고 그렇게 종주먹을 들이댔건만, 말로는 다 못혀. 고집 고집 저런 쇠고집은 보다 보다 첨이랑게. 갱갱이 다 갈 때까지 울고, 역전마당에서는 퍼대고 앉아 울고, 다른 애들보다 좀 못나 봬도 성미가 무시근혀서 그렇다고만 여겼는디, 쇠고집도 그냥저냥 쇠고집이 아녀. 보다 보다 못헌 상진이 아부지가 날보고 데불고 가라 혔다면 말 다 혔지 뭐. 그나저나 니 엄니 속터져 기함허고 죽는 꼴 또 워떻게 본다냐?"
"즈 엄니, 삯메기 나가고 h을 틴디."
삯메기 나가고 없다는 말에 발이 떨어졌다.
"남산만헌 배를 허고 삯메기를 나가다니 징상허네 잉."
영순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뒤꼭지를 따라왔다. 굳게 다져진 고샅 황톳길은 불볕에 달궈져 끓는 무솥의 소두방 뚜껑 매한가지였다. 찢어진 신발 한짝은 벗어서 보퉁이에 묶어놨으므로 물집까지 벌써 터져버린 맨발바닥은 밟을 때마다 단근질을 받는 듯 진저리가 쳐지곤 했다. 네살배기 월자가 토방 밑에 나자빠져 앙앙거리며 울고 있었고, 셋째 순실이는 외돌아앉아 어디서 따왔는지 덜 익은 앵두를 아그작아그작 씹고 있었다.
"워째 동상을 울리고 지랄여!"
순실이는 그러나 핀둥이를 먹고도 태연자약했다. 집안도 온통 난장질을 해놔서 엉망진창이었다. 너무도 먼 길을 가슴 졸이며 걸은 뒤끝이라서 다리가 떨리고 눈앞이 회똑회똑했지만 순임은 주저앉아 숨돌릴 짬도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와 집안꼴을 보면 순실이가 무엇보다 요절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손으론 연신 툇마루에 나와 있는 반짇고리며, 노오라기며, 달창난 옹망추니 숟가락 따위를 줍고, 또다른 한손으로, 더더욱 서럽게 울면서 품속으로 달려드는 월자를 추슬러안았다. 흙을 주워먹었는지 눈물과 콧물로 맥질이 되다시피 한 월자의 입가엔 흙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우지 마. 성이 밥 끓여줄겨."
보퉁이를 헤집자 주먹밥이 나왔다.
기차를 기다린다고 역전 변소간 뒤꼍 그늘에 앉아 있을 때, 상진이 아버지를 뒤따라온 어떤 아주머니가 함지박에 담아내온 주먹밥이었다. 아무리 서러워 눈물 마르지 않을망정, 소금물로 쥐어 무친 그까짓 주먹밥 하나쯤이야 울음 새로도 게눈 감추듯 먹을 수 있지만, 쌀과 보리가 어상반하게 섞인 주먹밥을 받고 보자, 먹고 싶기는커녕 어머니와 어린 월자가 먼저 떠올라 보퉁이 안에 잽싸게 집어넣은 것이었다. 아침녘 깻묵죽 한그릇 먹은 것이야 물론 온데간데없고, 시시각각 뱃속이 짚불 꺼지듯 내려앉아 배가 등가죽에 붙었으나, 순임은 참고 참았다. 식구들이 쌀알 맛본 것이 언제던가. 경성 가는 기차를 타도 그렇고 안 타도 그렇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두고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쌀밥덩어리를 두꺼비 파리 채먹듯 하고 말면, 그게 어디 사람 도리냐 한 것이었다. 주먹밥을 본 월자가 울음을 뚝 끊었고, 순실이는 아예 허기진 강아지가 물개똥에 덤비듯 덤벼들었다.
"안되야."
순임은 얼른 주먹밥을 쥐고 몸을 돌렸다.
"엄니도 잡숴야 헌게로 끓일 거여. 성이 후딱 끓여서 줄 팅게 쬐메만 지달려."
"물 쬐끔만 붓고 끓여, 성."
순실이가 생침을 삼키면서 정지간으로 뒤쫓아 들어왔다. 어머니까지 한대접씩 곡기를 하려면 최소한 물을 세 대접은 부어야 했다. 겉은 땟국물이 잔뜻 묻은 주먹밥을 무쇠솥에 넣고 물을 붓는데, 순실이는 벌써부터 아궁이에 불을 붙인다 어쩐다 새실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자알 왔지.
순임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없으면 사철 남의 집 종살이하듯 이집 저집 허드렛일 도맡아 하고 다니는 어머니 대신 누가 있어 어린 순실이 월자의 피죽이라도 쑤어먹이겠느냐 했다. 더구나 어머니는 곧 아이를 또 낳을 것이었다. 언감생심 끼니마다 고기 넣은 미역국을 끓이진 못할망정, 어디서든 보리쌀 됫박이라도 빌어다가 밥하고 국 끓여 올려야 할 것은 순임이 자신밖에 없었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순명이만이라도 강경역에 두고 온 것은 잘한 일이다 싶었다. 하나는 대처로 가고 또 하나는 남고, 이렇게저렇게 따져 아귀 맞춰보면 어머니도 결국은 자신을 옆에 두는 게 낫다는 걸 곧 알아차리게 될 터였다. 그까짓 것, 어머니한테 끄덩이를 잡히고 옴씰하도록 쥐어박힌 게 어디 한두번이던가.
"성, 방직공장 워찌 안 갔어?"
"느그덜 보고 잡허 안 갔지."
"갱갱이 가서 뭐 봤댜?"
"기차 봤지. 아따, 엄청 큰 그것이 지네맹키로 시커멓게 허고 앞을 달음박질허는디, 성 간 통째로 떨어질 뻔혔어. 기차가 지나가믄 땅이 막 울려야. 칼 찬 일본 순사덜이 수백수천…… 떼로 달음박질허면 아마 그럴까 몰러."
"칼 찬 순사도 많이 본겨?"
"봤당게."
"무섭지?"
"으응 그냥 그려……"
세 자매가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아궁이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뜨거운 불기에 통통 살찐 이들이 순실이 월자 앞섶으로 빨빨거리고 기어나왔다. 뵈는 대로 잡아서 엄지손톱 사이에 넣고 톡, 톡, 눌러 죽이는데 너무 곤해서 막 잠이 쏟아졌다. 어느 집에선가 방정맞게 낮닭이 울고 있었다. 졸음을 못 이기고 부지깽이 붙안은 채로 몇차례 머리를 끄덕이고 앉았는데, 누가 사립문 부리나케 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정지간에 여산댁이 나타났다.
"순임아, 순임아!"
여산댁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이구 이것아, 후딱 뒤란으로 나가서 워디 숨어라 잉. 니 엄니가 너 왔단 말 듣고 시방 쌔근발딱 쫓아들어오고 있응게. 호맹이까지 들고 있어 이것아. 일내기 전에 싸게, 싸게싸게 일어서라 잉. 얼렁 일어서서 하여튼지간에 내빼랑게 그러네."
철버덩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구나 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온몸이 사시나무같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 도무지 앉은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 기차처럼, 한달음박질에 내달아온 어머니가 정지간을 가로막는 여산댁을 홱 밀어낸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월자가 경기하듯이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낸 것과 어머니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끄덩이가 잡힌 순임이의 몸이 질질 끌려나와 정지간 앞으로 내팽개쳐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썩을년, 오살년!"
어머니의 목소리는 가히 쇳소리였다.
"못 가고 올 것이믄…… 동상도 데불고 올 것이지…… 애새깽이 씻기다 쥑일 년이 이년이지…… 세상에…… 세상에 이 멍청헌 년아, 워찌 어린 동상을 두고 혼자 온단 말이냐. 이…… 이…… 밥통 같은 썩을년, 이 미련퉁이 맷가마리야…… 그 어린 걸 혼자 도둑년 맹글 심보로…… 거기 놔두고…… 성이라는 것이…… 발이 떨어지데?"
우박처럼 부지깽이가 온몸에 떨어졌다.
옆으로 쓰러져 몸을 불에 탄 개가죽같이 오므려 안고 있는데도 어깨 허리 등짝 할 것 없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멍석 두들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매도 매거니와 오갈이 들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어머니 부지깽이에 오늘 맞아죽는구나 하는데, 그래도 용하게 귓구멍 쑤시고 들어와 속깊이 박히는 말 한마디는, 그 어린걸 거기 놔두고…… 성이라는 것이…… 발이 떨어지데,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뜻밖에 자신이 돌아온 걸 잡뜨리는 게 아니라 순명이만 놔두고 혼자 돌아온 것을 잡뜨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린것 죽이겄어."
여산댁이 한사코 어머니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지발…… 고정혀. 순임이 엄니, 고정허랑게."
소씨름하듯 엉켜 있던 여산댁과 어머니가 함께 토방 밑으로 쓰러질 때 누군가 순임의 어깨를 잡아 잽싸게 일으켰다. 영순이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버르적버르적 다시 부지깽이를 들고 일어서는 것을 팔 벌려 막아서면서 영순이 어머니는 연신 순임을 향해 밖으로 도망치라고 턱짓을 했다. 실기죽거리는 걸음새로 순임이 고샅으로 빠져나왔다.
"순임이 울어쌓는 게 안돼 봬서 내가 오자고 한겨."
영순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 밖으로 들렸다.
"날 봐서라도 잉, 참어 참어. 아따메, 큰딸년은 살림 밑천 아닝게비. 갸 집에 h어봐. 우선 당장 해산바라지 누가 있어 헐겨? 물은 누가 길어다 먹고? 생각을 혀봐. 차라리 잘된겨. 아따, 내가 순임이 데려오믄 상 받을 줄 알었는디 웬 날벼락이랴. 한 년은 나가 벌고 한 년은 살림허고, 안성맞춤인겨. 한 이태만 있으믄 순실이도 보낼 수 있을 거고……"
"우리 순명이…… 그 어린걸 두고……"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울음에 잠겨 간신히 들렸다.
순임은 비틀거리며 솔밭으로 나왔다. 까막까치들이 소나무 위에 앉아 있다가 홰를 치고 날아올랐다. 땟국 전 치맛단은 어머니 손에 붙잡혀 드르륵 터져 있었고 댕기머리는 산발해 올라갔는데, 물집들이 터져나간 한쪽 발은 맨살갗에 신발도 없었다. 울음이 복받치긴 했지만 말라붙었는지 어쨌는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소나무 밑의 토끼풀밭에 앉아 있으려니까 비로소 오갈이 좀 풀리면서 고향마을을 동그라미의 가운데 둔 듯 멀리 휘돌아져 나간 둑길이 보였다.
아주 길고 긴 낮이었다.
많이 서쪽으로 기울었다곤 하지만 성긴 새털구름 너머에 떠 있는 해는 아직도 그 빛살이 짱짱했다. 정말 깐깐오월의 오후였다. 둑방 끝엔 올 때 갈 때 목을 축였던 신리마을 어귀의 우물 옆 느티나무가 아스라했고, 그 너머 강경 쪽 하늘은 뿌옇게 운무 같은 게 끼어 있었다.
갔다올 거유, 엄니.
그런 말이 순임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왔다.
역에서 상진이 아버지와 째보아저씨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들은 바로는 다른 동네에서 모집한 처자들이 모두 모여야 기차를 탄다고 했다. 상진이 아버지 같은 몇몇 사람들이 근동으로 흩어져 처자들을 데리러 갔는가 보았다. 순명이가 타고 떠날 기차가 아직 안 왔을 수도 있었고, 어떤 다른 마을에서 구한 처자들이 아직 강경까지 당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왜 순명이의 생각을 어머니처럼 못했는지, 역시 나는 소죽은 귀신이구나, 했다. 저 뙤약볕 아래의 먼 둑길을 다시 간다는 게 생각만으로도 죽을 맛이지만, 가다가 쓰러져 죽거나 어머니 부지깽이에 맞아 죽거나 매일반인 노릇이었다. 차라리 순명이를 데리러 가다가 죽는 것이, 혼백이 된다고 해도 원망(願望)이 적을 터였다. 어찌 어머니의 속깊은 뜻도 모르고, 그나마 순명이는 떠나게 되었으니 어머니의 반분은 풀릴 거라고, 칠푼이처럼 데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이녀르 새, 새대가리……
순임은 제 손으로 이마를 쿡쿡 쥐어박았다.
마을을 가운뎃점으로 놓으려는 듯, 먼 서편의 야산 밑으로 한껏 당겨져 흐르는 둑길보다 아예 다리가 놓인 신리마을 느티나무를 겨냥하고 들을 건너 논틀밭틀 따라가면 좀더 빠를 터였다. 들 가운데 학교가 있는 선돌마을이 있으나 직선으로 내달으면 선돌마을을 오른편에 비켜두고 곧바로 느티나무에 당도할 수 있었다. 터진 치맛단을 여며 질끈 붙잡고 순임은 솔밭 사잇길을 지나 이내 밭두둑에 자리잡은 상엿집 앞을 스쳐갔다. 강씨네 보리밭에 겉보리가 잔뜩 패어 있었다. 순임은 겉보리를 양손으로 훑어서 앞니로 다빡다빡 까먹으며 걸었다. 한쪽 발은 맨발이었으나 차라리 질경이며 토끼풀이며 독새풀이 잔뜩 자라고 있는 논두렁길이 훨씬 나았다. 보퉁이를 쌌던 백목보자기를 얼결에 들고 나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집 터진 자리가 워낙 쓰라렸기 때문에 순임은 보자기로 발을 동여매고 걸었다. 강씨네 보리밭 둔덕을 내려서자 끝간데없이 논이었다. 본래 고향집 부근의 논들은 물둠벙이라서 장마가 오면 하얗게 들물이 차 농사를 망치곤 하는 곳이지만, 봄가뭄 끝이라서 논바닥 물조차 째잴째잴했다. 메뚜기들이 순임의 걷는 서슬에 놀라 푸륵푸르륵, 한참 벼가 자라고 있는 논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독새풀씨와 피씨를 훑으러 순명이와 함께 선돌마을 너머까지도 가본 일이 있었다. 독새풀씨나 피씨를 훑어다가 죽을 끓이면, 맛은 없더라도 오늘 먹은 콩깻묵죽처럼 냄새가 나지 않아 좋았다. 순명이를 데려오면 독새풀씨와 피씨를 훑으러 나가기 전까지, 이쪽 들에 나와 메뚜기랑 우렁이도 잡고 나물도 캘 것이다. 순명이는 들판에만 나오면 만날 한다는 말이, 이르&게 들판 넓은디 워째 우리 집만 논이 h어, 하고 이퉁을 부리지만, 순임은 논이야 있든 없든 봄녘 들 가운데 나오면 공연히 속이 쫙 열리는 듯 마음이 안온해졌다. 아침저녁 샛바람이라도 스리슬슬 불었다 하면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부딪쳐 수런대는 소리를 냈고, 토끼풀들은 발랑발랑 까뒤집히기 일쑤일 뿐 아니라, 비름 쇠귀나물 질경이 수뤼나물 쑥부쟁이 씀바귀 애기마름 쇠별꽃, 온갖 먹어도 좋은 풀들이 생긋거리고 웃는 듯 손짓하는 듯 다가서는 것이었다. 늘 허기가 져도 봄들에 나오기만 하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순명이는 워낙 암팡져서 나물을 캐기보다 메뚜기를 쫓아다니거나 논둑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한 자는 됨직한 움지를 잡아내거나 하고 놀고, 순임이는 옆에 낀 소쿠리에다 한나절도 안돼 소복하게 나물을 캐담았다. 안 먹어본 풀이 없었다. 쇠별꽃은 이름이 별처럼 이뻐서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꿈같이 좋았다. 쇠귀나물은 된장에 무쳐서 먹으니 좋고, 씀바귀는 장아찌를 담가 먹으니 좋고, 쑥부쟁이 오이풀 어린 잎들은 전을 부쳐 먹고, 냉이는 국 끓여 먹고, 민들레 지칭개 질경이 모싯대잎은 무쳐서도 먹고 고추장에 맨살로 찍어서도 먹고 전을 부쳐서도 먹었다. 한번은 수로에 난 미나리 비슷한 풀을 미나리로 알고 생으로 고추장에 찍어 먹고서 죽다 말고 살아난 일도 있었다. 독미나리라고 했다. 그러나 들이 풍성하기로는 가을이 물론 으뜸이었다. 나락이 영글기 시작하면 들은 황금색으로 꽉찼다. 바람이 불면 황금색 물결이 빈자리 한 군데 없이 녹진하게 출렁거리고, 새떼들은 연신 뜰먹이면서 날아오르며, 들판 너머 성동벌판 가로질러가는 기차는 아스라이 멀었다. 이상한 일은 지금 같은 보릿고개의 들녘에 섰을 때보다 나락이라도 여기저기 훑어먹을 수 있는 가을녘의 황금들판에 섰을 때 더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허기만 지는 게 아니라 뭔지 모르게 속창아리가 휑뎅그렁 열리는 것 같아 때로 순임은 눈두렁에 쭈그려앉아 혼자 소리죽여 울곤 했다. 이렇게 들판 넓은데 왜 우리 집만 논이 없냐 하던 순명이의 말이, 속새로 쐐기같이 박혀오는 것도 가을이었다.
지발 순, 순명아. 성이 간게로 그냥 있어 잉.
순임은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걸었다.
논두렁길이 멀리 돌면 벼포기 사이로 질러서 가고 도랑이 나오면 아랫도리를 적시고 건넜다. 헌 살강 같은 발은 너무 얼얼해서 아픈지 어쩐지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굳이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순명이 때문에, 아니 자기 자신 때문에 반드시 순명이를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라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이 너른 들판에서 순명이가 없으면 누가 메뚜기를 잡고 움지를 잡고 미꾸라지를 잡겠는가. 자신이 나물을 캐고 순명이가 미꾸라지나 메뚜기를 잡아야 이쪽 귀 저쪽 귀가 딱 맞아 안성맞춤이 될 것이었다. 가다가 쓰러져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순명이를 만나지 않고선 죽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질병이 나는지 눈앞이 가물가물한데, 그러나 사방 천지에 꽉차서 손 들까불며 성, 서엉, 하고 불러대는 순명이가 있으니 발걸음을 종내 멈출 수가 없었다.
쓰스스슥.
물뱀 한마리가 재빨리 논두렁을 넘어갔다.
4
강경역에 당도했을 땐 해가 기우뚱 미루나무 밑동 쪽으로 내려박히고 있었다. 순임은 순전히 동냥아치 꼴이 되어 어질병에 걸린 듯 비칠비칠 걸어서 주먹밥을 나눠받던 변소 뒤편으로 갔는데, 그곳엔 황아장수 두엇이 모로 포개져 낮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순, 순명아……"
소리보다 참았던 울음이 또 복받쳐나왔다.
역 앞은 강초시 어른네 바깥마당보다 널따란 마당을 중심으로 상밥집과 술막과 황아전과 대장간과 개고기를 파는 군치리 따위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서쪽 끝으론 일장기를 높이 올린 지서가 있었다. 역마당엔 한낮보다 오히려 사람이 많아져서 마치 난장이라도 선 듯했다. 바꿈질을 하러 나온 사람도 여럿 있었고 바리나무를 실은 소달구지도 있었고, 엄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마병장수와 땜장이도 있었다. 장사치에 비해 손님이 될 만한 사람은 오히려 손가락을 꼽을 정도여서 금 치는 사람도 없고 흥정하는 곳도 뵈지 않았다. 순임은 역사(驛舍) 안은 물론 역마당 곳곳을 절룩이면서 샅샅이 돌았다. 술막과 상밥집을 기웃기웃하는데 보따리를 싸고 있던 늙수그레한 마병장수가 물었다.
"뉠 찾는디 그릏게 울어쌓냐."
"순, 순명이라고 지 동상인듀, 열, 열두살 먹었유. 아까먹새는…… 우리 동네 지지배덜이…… 죄다…… 저짝에 모여 있었는디……"
"경성방직공장으로 팔려가는 것덜 말이냐?"
"예, 아저씨……"
그 대목에서 울음이 뚝 그쳤다.
마병장수 아저씨가 지서 쪽으로 턱짓을 했다. 경성 가는 기차를 타고 순명이가 그예 떠났으면 모질게 맘먹고 차라리 수문다리에서 치마폭 뒤집어쓴 채 물귀신이라도 되리라 작심하고 있던 터였다. 순명이를 보내고서야, 어머니가 어찌할망정, 스스로 가슴팍에 대못 하나 실하게 박힐 테니 무슨 까들막거릴 일이 있다고 시시때때 풀떼죽이나 깻묵죽이라도 숟가락질할 것인가. 철없는 순명이야 삼세끼 밥 주고 다달이 돈도 주고 한다는 상진이 아버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까들막 나서 예까지 왔다지만, 지난 설에 왔다 간 분숙이 둘째언니의 분통같이 희고 해골처럼 마른 몰골로 보건대, 쌀밥에 고기반찬은 고사하고 냄새나는 깻묵죽도 못 얻어먹는 푼수다 이거였다. 어른들 말로는 공장 다니다가 폐병인가 뭔가, 암튼 분숙이 둘째언니는 죽을병에 걸렸다고 했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이제 와서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서 뒤로 가믄 개구녕이 있응게."
마병장수는 눅눅하게 토를 달았다.
"개구녕 지나갖고 쑥 들어가믄 곳간차 멫개 나올 팅게로, 거그 찾아봐라 잉. 얼핏 듣자 헝게 묄 사람덜이 아직 들 모였는갑더라. 감독인가 뭣인가 허는 사람이 그리 몰아넣는 걸 내 눈으로 봤다. 행여 한놈이래도 맘 변혀서 삼십육계 놓을까 허고 수쓰고 자빠졌더라만……"
마병장수의 뒷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지서 뒤편으로 나가자 철조망 사이로 붓꽃들이 흐벅지게 피어 있었다. 사금파리에 발이 찔렸는지 철조망 개구멍으로 허리 굽혀 들어가고 보니 발가락 사이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곳간차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안에 들자마자 저것이 곳간차로구나, 대뜸 눈치가 가는 시커먼 것들이 여럿 잇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순임이 서엉!"
몇발짝 떼어놓지도 않았는데 순명이 소리가 났다.
곳간차 바닥에 이리 엎어지고 저리 널브러져 잠든 사람들을 얼핏 보았다고 느낀 순간, 또랑한 순명이가 제 언니를 먼저 발견하곤 잽싸게 달려나오는 것이었다. 움 안에서 떡을 받은 것 같아 또 눈물이 나왔다. 순임이가 행여 누가 볼세라 순명이 손을 다잡아쥐고 다짜고짜 개구멍으로 끌고 나오는데, 기적소리가 쇳소리로 울리더니 검은 연기를 포악스럽게 내뿜으면서 기차가 역 안으로 쑤욱 들어섰다. 경성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차가 도착한 것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순임은 죽어라 순명이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고서 왁살스럽게 역마당까지 끌고 나왔다.
"워찌 그려? 워찌 새로 온겨, 성?"
"집에…… 집에 가아!"
"쬐매만 기다리믄 된댜, 인자."
"집에 가아!"
"째보아저씨도 이참에 경성 가겄다고 댕기 맨 아자씨허고 술, 술막에 갔는디 우리덜 보곤 꼼짝 말랬어. 칼 찬 순사가 잡어간다고 혔단 말여."
"집에…… 집에 가야 헌당게."
"뭔 새통빠진 소리여, 시방?"
"엄니가…… 너…… 끌고 오랬어. 안 가믄…… 엄…… 엄니도 죽고…… 나도 고꾸라져 죽어. 우리 식구…… 다 죽는겨."
악에 바친 순임의 눈에 흰자위만 하얗게 올라왔다.
저물녘까지 온종일 걷고 기다린데다가 저물녘이 되니까 숨이 죽어 그런지, 아니면 평소 때와 달리 워낙 살똥스럽게 나오는 제 언니의 서슬에 기가 질렸는지, 순명은 다만 소 뒷걸음질치듯이 뻗대고 설 뿐 뭐라고 더이상 대거리는 하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역사 안에서 쏟아져나오자 파장으로 가던 역마당이 시끌시끌해졌다.
"저거…… 인력거랴, 인력거……"
뻗대던 순임의 눈에 빠짝 생기가 돌았다.
바큇살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인력거에 감색 모자까지 위엄있게 눌러쓴 중년신사가 막 올라타고 있었다. 잡아끌던 순임이와 뻗대던 순명이 사이의 당길힘이 잠깐 느슨해졌을 때, 역사 안에서 제복에 칼까지 찬 일본 순사가 나왔다. 순임과 순명은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것처럼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구척이나 됨직한 꺽다리에다가 얼굴 빛깔은 거무튀튀하고 인중에 물사마귀 하나 터억 찍힌 일본 순사는, 아기까지 둘러업었으나 겨우 순임의 키쯤 될까 말까 한 약삐한 한 여자를 뻣세게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몇몇 조무래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로보오? 도로보오?"
어떤 조무래기는 소리쳐 물었다.
하다못해 바리나무를 실은 소달구지 뒤에라도 숨었어야 할 일인데, 그럴 겨를도 없이 구척 장신의 일본 순사가 하필이면 순임의 옆으로 성큼 다가오는 것이었다. 철커덕철커덕 하고 옆구리 찬 칼고리가 칼집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시커먼 기차가 오는 것 같았다.
"앗찌 이께, 앗찌 이께……"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순임은 코를 맨바닥에 박고서 눈만 가늘게 치뜬 채 오갈이 잔뜩 든 옆눈질로 다가드는 순사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머리끄덩이를 움켜쥐면서 이년, 할 것 같았으나 뜻밖에도 가까워지고 있는 순사의 표정은 심드렁했고, 저리 가라고 조무래기들을 쫓는 손짓도 허랑해 보였다. 끌려가는 키 작은 여자의 눈과 순임의 눈이 딱 맞닥뜨린 것은 순사가 이미 순임의 옆을 지나친 다음이었다. 얼레, 저게 누구여? 말은 그러나 목젖에 걸려 나오지 않고 그대신 몸이 벌떡 들렸다.
"너…… 역시 너, 순임이구나, 순임이."
분숙이 큰언니 분순이였다.
아침녘 우물가에서 만난 똥뀔댁이 쓰윽쓰윽 문질러 닦던 쌀바가지가 눈앞을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얽빼기 분숙이 아버지의 귀빠진 날이라서 큰딸이 저물녘엔 올 것이라던 똥뀔댁의 말 또한 순임은 잊지 않고 있었다. 갸는 꺼먹고무신 같은 건 안 신고 살어,라고 똥뀔댁이 말한 대로 정말 분순이언니는 반주그레한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좀전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려 나오다가 무슨 사단이 났는지 일본 순사에게 덜미를 잡혔는가 보았다. 분순이언니가 일본 순사의 끌힘에 뒤로 뻗대면서 사정하는 푼수로 뭐라고 말했다. 조선말과 왜말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어 순임으로선 시시콜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좃또 맛떼…… 나리, 부탁해유……"
이런 식이었다.
보퉁이를 힘들게 머리에 인 분순이언니의 등에선 어린것이 숨넘어가는 듯, 그러면서 기진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중구난방인 조선말과 왜말을 대강 꿰어보자면 요컨대, 숨넘어가는 듯 울고 있는 어린것 문제였다. 분순이언니는 사뭇 눈물바람을 하면서 한손으론 순임이와 순명을 가리키고 또다른 손으로 아기를 업어 묶은 포대기끈을 허리춤에서 허둥지둥 풀고 있었다. 그 바람에 머리에 인 보퉁이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잡동사니 밑에서 비쭉이 올라온 것은 하얀 무명천이었다.
"야들이 지 동상이랑게유, 동상유."
분순이언니는 허둥허둥 설명했다.
"지는 지서로 끌려갈 팅게유, 지발…… 이 어린것은 집으로 보내게 혀주세요. 이러다 어린것 죽겄유. 순, 순임아. 싸게싸게 돌아서라 잉. 업고 가. 가서 엄니…… 울엄니헌티 주고 말혀. 별일 아닌게로 꺽정말라고 허고."
모든 것이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기를 받아업고 포대기끈을 묶으면서 허리를 들었을 땐 이미 분순이언니는 저만큼 지서 앞까지 가 있었다. 어서 가라고, 분순이언니는 필사적으로 손짓을 했다. 뒤쫓아가던 조무래기 한 명이 분순이언니 뒤로 날쌔게 달려들어 얌전하게 내려온 긴 치맛자락을 홱 걷어올렸다. 그 순간, 순임은 분순이언니의 속고쟁이 위로 살짝 드러난 허리춤에 광목이 친친 둘러매어져 있는 걸 보았다. 언뜻 본 것에 불과할지라도 누르께한 흰빛의 그것이 광목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가지고 내려올 광목이 많아 의심받을 것 같아 그중의 일부를 온몸에 친친 두르고 오다가 일본 순사에게 들킨 것이었다.
얽빼기가 뭐허러 경성을 왔다갔다허간디?
어머니는 볼통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방직공장에 가면 광목쪼가리를 훔쳐내는 게 일이라고 했다. 상진이 아버지는 공장 문간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순임이가 여기저기에서 귀동냥한 것을 한묶음으로 꿰어보면, 공장 안에서 먹고 자고 하며 공장 문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는 직공일지라도 한달에 한두 번, 혹은 부모의 면회가 있을 때는 잠시잠시 외출이 허락되는데, 그때마다 가슴과 허리춤과 넓적다리에 공장 안에서 훔친 광목들을 둘러감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문지기들이 몸을 뒤지니까 그것도 모두 상진이 아버지와 짜고 하는 짓이었다. 광목 한 마를 가지고 나오면 삶은 계란 하나와 맞바꾼다고 했다. 아비 없는 자식을 낳고서 공장에서 쫓겨난 분순이언니가 한다는 밥집도 본업은 밥을 파는 게 아니라 직공들이 훔쳐내는 광목을 사고파는 일일 터였다. 어머니는 한바탕 딸자랑을 하고 나가는 똥뀔댁 뒤통수에 혓바닥을 내밀어 뵈고 나서 덧붙여 말했다.
아나, 고게 워디 잘사는 거냐 잉.
어머니의 말은 혼잣소리나 다름없었다.
딸년들을 씨릉등 다 도둑년 맹글고, 그 도둑질헌 거 받어다 살믄서도 쪼쪼허니 턱주가리 들고 다니는 꼴이 증말 사람 말종이 따로 h당게. 워디 도둑년 맹근 거뿐인감? 큰딸년은 알로 까져서 조강지처 둔 놈 씨받아 새깽이 낳았지, 둘째년은 실밥 하도 처묵어서 몹쓸병에 걸렸지, 분숙이 고년도 월매나 성허게 살겄어?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분순이언니가 순사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순명이도 충격을 받았나 보았다. 그게 아니면 순임이의 앙칼진 눈빛에 질려, 내가 안 따라가면 언니가 정말 철다리에 목매달아 죽겠구나 하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읍내를 빠져나와 상업학교 담장을 지나서 철다리 부근에 당도했을 때, 미루나무 밑동에 내려가 있던 해는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새털구름은 제 선홍빛깔에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면서도 빠르게 먹물을 섞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질 것이었다. 온갖 새떼들이 강안의 갈대밭에서 그악스럽게 우짖었다. 앵돌아진 얼굴로 내내 말없이 따라오던 순명이가 갈대밭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돌팔매는 갈대밭까지 가지도 못하고 둑길의 둔덕에 떨어졌다.
"다음이래도 난 방직공장 꼭 갈겨."
혼잣말처럼 하는 순명의 말이 아득히 들렸다.
한걸음 한걸음 떼어놓는 것도 도무지 의식이 없었고, 새소리와 순명의 혼잣말도 귓가에 어른댈 뿐 속으로 박혀오지 않았으며, 놀빛 고운 것 또한 이승의 그것이 아닌 듯 아스라하게 멀었다. 종일 굶고서 육십리 길을 걸었는데 아직도 걸어가야 할 짱짱한 이십리 둑길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기운이 쪽 빠졌는지 앙앙거리고 울지도 못하고 간헐적으로 끙끙대는 어린것까지 업었으니, 갈 길이 곧 지옥길이었다.
그래도 가야 혀.
순임은 꿈인 듯 생시인 듯 생각했다.
눈꺼풀은 자꾸 내려오는데다가, 허리는 끊어지고 다리는 떨리며 발은 헌살강인지라, 허뚱허뚱 걷는 품이 꼭 소경 지팡이 잃고 진창길을 걷는 꼴인데, 그래도 감기는 눈 속에 보일 듯 보일 듯 한 건 고향집 툇마루와 어머니였다. 신령님이 돌보사 다행히 순명이를 붙잡았으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사는 게 워낙 질기고 고단해서 충동적으로 순임이 순명이를 떠나보냈다가, 스스로 후회해 속불이 나서, 만삭의 몸으로 삯메기를 나갔던 어머니로선 순명이까지 데불고 나면 죽었던 나무에 꽃이 핀 듯 할 것이었다.
"성, 꽁지따기 허자."
순명이의 말씨가 한결 살가워졌다.
선홍빛이었던 새털구름에 먹물이 듬뿍 섞였다고 느끼자 사위는 이미 어두워졌다. 어둔 하늘 이곳저곳에서 풍, 풍, 풍, 물거품이 올라오듯이 별이 떴다. 서쪽편의 어둠별은 하늘에 암갈색 놀빛의 잔영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함초롬하고 밝았다.
"말꽁지따기 허잖게로, 성. 내가 먼첨 헐겨."
"그려. 혀봐, 작것아."
대거리가 간신히 나왔다.
"아이고 배야."
"무신 배?"
"자루 배."
"무신 자루?"
"업 자루."
"무신 업?"
"질, 질 업."
"무…… 무신…… 무신 질?"
"바누 질."
"무신…… 무신…… 바…… 눌……"
청바눌이라고 순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순명은 토를 달고 나왔다. 무신 청, 딸 청, 무신 딸, 명덕 딸, 무신 명덕, 두루 명덕, 무신 두리, 떡 두리…… 하고 이어질 터였다. 순명은 그러나 제 언니가 너무 지쳐 말대꾸할 힘도 없다는 걸 비로소 간파했는지 명덕 딸, 해야 할 대목에서 불쑥 순임의 앞을 가로막으며 제 등을 돌려대었다. 아기를 제가 업겠다는 것이었다. 별똥별 하나가 고향집 방향으로 길게 졌고, 샛바람이 강안을 부드럽게 쓸면서 둑방길로 올라왔다. 수런수런 갈대들이 저희들끼리 몸 섞는 소리가 났다.
"괜찮어. 너는 쬐…… 쬐깐혀서 못 업어."
"월자도 업었는디 워째 못 업어?"
"냅두랑게. 니가, 니가 성이냐, 내가 성이지."
"싫어. 나도 성 되고 싶어!"
별똥별이 또 졌다. 이번엔 논산 방향으로 뻗은 철롯길 너머로 지는 별똥별이었다. 금강 원류가 그 너머 어디쯤 큰물로 직수굿이 흐르고 있을 터였다. 콩깻묵을 실은, 키가 하늘을 가린다는 일본배가 행여 들어오고 있을까. 순임은 내일 아침엔 콩깻묵죽 대신 쇠별꽃잎과 줄기를 따다 전을 부쳐 순명이에게 먹여야 되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논두렁길로 질러오다가 선돌마을 옆댕이의 수로에 쇠별꽃이 무리져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아두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쇠별꽃잎을 따고, 순명은 미꾸라지를 잡고, 그러다보면 아스라한 둑길 저 끝에 아버지가 새로 산 자전거를 높다랗게 올라타고, 그 바큇살로 아지랑이를 통통 퉁겨내며 돌아올 것만 같았다.
5
비몽사몽 하는데 알싸한 쑥냄새가 났다. 순임은 눈을 뜨지 않고도 발의 물집마다 어머니가 쑥을 찧어 얹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엄니,라고 부르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솔밭 어귀까지 나와 앉아 딸을 기다리고 있던 똥뀔댁이 분순이냐, 하는 소리를 어둠속에서 듣고 그대로 까무러쳐버린 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마트면 큰일날 뻔혔어."
어머니가 도란도란 말했다.
"세상에…… 징허다 징혀. 글쎄 고 어린게 숨통이 왼통 맥혀갖고 다 죽었더랑게. 삼신할매가 돌봐서 죽었다가 살어나긴 혔다만 사람이 워찌 그릏게 살 것이냐. 아, 니가 업고 온 분순이 그녀르 것 새깽이 말여, 하얗게 죽은 애 옷을 벳기고 본게로 그 어린것 가슴패기에다가도 광목을 뚤뚤 말아놨더라 그 말이다. 요즘 같은 불볕에 그릏게 뚤뚤 말아놨응게 애새깽이야 쪄죽을밖에. 내가 미쳤지. 아이고오, 신령님 고맙고…… 고맙고…… 고…… 고마워유……"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억장이 막히는 듯 어머니의 말끝은 까무룩하게 내려앉고, 그 대신 사방에서 개구리가 울기 시작했다. 개구리 초성좋은 저 울음소리 사이로 솥적다 솥적다 하고 우는 새는 아마 소쩍새일까. 순임은 땅끝으로 내려앉는 듯이 잠속으로 내려앉으면서, 오가고 팔십리 길을 걸은 가장 긴 날의 끄트머리에서 아무도 몰래 아름다운 꿈 한자락 꾸고 있었다. 자신이 들 가운데 무리진 쇠별꽃이 되어 순명이 순실이 월자에게 골고루 뜯겨, 순명이 순실이 월자의 나물바구니에 살폿 얹혀지는 꿈이었다.
그날 새벽 어머니가 낳은 아이는 또 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