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용 시 5편
-바람 한 점 손에 쥐고
-여울목
-휠체어를 밀며
-야단법석
-굴비
-작품 해설
-시작노트
-약력
-사진
바람 한 점 손에 쥐고
류 인 명
도솔천
내원궁에 올라 좌선에 들었다
부처는 없고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건
바로 나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사의
할喝……
일체의 인연법은
꿈과 환상 물거품과 그림자 같고
이슬과 번개 같거늘
아직도
붙들고 있는 그놈이
무엇인가
내려오는 길
바람 한 점 손에 꼬옥 쥐어본다.
여울목
류 인 명
여울목에서
문득, 지나온 길 뒤돌아본다
천년을 살 것처럼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내 발자국
세월의 훈장만 늘었다
나를 모르고
나를 오르고자 했던
그 산
세상사 오욕칠정이
바람인 것을
굽이굽이 실개천 따라
밖으로만 소리를 들추어내며 흘러온
하얀 부스러기들
이젠
내 안의 과녁을 집중하는 강물로 흐르고
흐르다가
그날이 오면
나를 완성하리라.
휠체어를 밀며
류 인 명
정형외과 605호실
한 여인의 잃어버린 세월을 밀고 간다
활짝
피지 않은 꽃봉오리 하나
거미줄에 묶여
오직
한 남자를 치다꺼리하다 작아진
그 세월이
마른 집단보다
더 가볍다
바람이 불면 떠나야 할
이 순례의 길
그 오랜 세월
참 많이도 부딪치며 하나 되며
그렇게 흘러온 물결
굽이굽이 서러워서
마디마디 서러워서
나 뉘우치는 마음으로 그녀의 등을 밀면
아내는 나를 끌고 간다.
굴비
류 인 명
법성포에 갔다
먼 고향
칠산바다를 무리지어 다니다가
줄줄이 엮인 채
해풍에 풍장되고 있는
저 굴비들
점심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본다
비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그 속에서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묻기에
묵묵부답
염치없이 네 살점을 발라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야단법석
류 인 명
누가 저
너른 연못에다 환히 등불을 밝혔는가
무명을 밝히는
자비의 등
저 영롱한 연꽃들의
향기를 보라
작은 물방울 하나도
탐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밀어내는
청빈의 지혜를
세속의
온갖 애욕이 너를
유혹해도
오탁에
물들지 않고
벼랑 끝에 절 한 채 지어
불 밝혔나니
덕진 연못
그곳은 묵언 설법을 하는 야단법석이다.
무명無明으로부터 진여眞如를 지향하는 반추의 고백록
양 병 호(시인, 전북대 국문학과 교수)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과 수시로 맞닥뜨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은 사실 살아오면서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의도적으로 유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류인명 시인의 시집 ⟪바람 한 점 손에 쥐고⟫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사색과 삶에 대한 인생론적 사유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명상을 다루고 있는 이 시집은 미래의 삶을 위한 이정표에 방점이 놓인다기보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정리하고 나아가 집약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시인은 늘그막에 이르러 자신의 과거 체험과 이력과 기억을 시의 질료로 삼아 존재의 비밀과 인생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자세를 보인다. 특히 지나온 삶의 갈피를 뒤적여 삶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러한 성찰과 명상을 작시하는 작업에는 후회와 반성의 태도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삶의 편린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고 위약한 자에게 조촐한 위안이 되었던 사건이나 상황을 추억이라는 흐뭇한 정서로 직조하기도 한다. 특히 이 시집은 시인의 생체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어 고백하는 어조가 두드러지고 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언명한 바 있다. 이 말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의 사유작용이 상대적 존재인 인간의 존재 이유임을 함축한다. 인간은 관습과 정형에 의한 사유의 틀을 벗어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사색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인간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존재가 되기 위하여 부단히 성찰의 내공을 쌓아야 한다. 이는 바람직한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류인명 시인은 이러한 시인의 사명에 투철한 자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실존하는 현실은 부조리와 불합리가 온전한 삶의 영위를 방해하는 상황이다.
네덜란드의 문화 이론가인 호이징가는 말했다. “인간은 힘들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워하고 혼란스러운 현재에 대한 절망과 아픔이 깊을수록 새로움에 대한 동경이 점점 격렬해진다.”고
이 말을 류 시인에게 적용하면 그는 과거 삶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성격을 반추함으로써 인생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무명無明으로부터 벗어나 환한 삶의 진여眞如와 만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불교에서 무명은 산스크리트어의 아비다(avidya)를 번역한 말로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무지의 상태를 일컫는다.
진여는 우주 만유의 보편한 본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 무차별한 절대의 진리이다. 이는 다른 사상체계의 도道 혹은 이데아(idea)와 상응한다.
류 시인은 과거 삶의 무명에 대한 천착을 통해 진여를 추구하는 시 세계를 의도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시의 상상력이 불교의 사유체계에 크게 힘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작시 행위를 통해 자아의 존재론적 내면 성찰과 삶에 대한 인생론적 탐구를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미래를 향한 자아의 수련과 지나온 삶에 대한 정갈한 정리를 획득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그는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修身의 차원에서 작시 행위의 목적을 두고 있기도 하다. 그의 시의 일정 부분이 유교의 강령에 크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시의 발생과 상상력은 불교와 유교의 사유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시작노트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라고 말한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시인은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내 인생 2막에 들어 신은 내게 시인의 손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0년 나는 멈추지 않고 시를 썼다. 그러나 나는 말을 부릴 줄 몰라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쓰지 못하고 남의 말만 기웃거리다 노을 앞에 섰다. 자괴감마저 든다.
선가禪家에서 말은 똥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좋은 시는 말을 최대한 줄이고 울림은 최대한 증폭시키는 파급력이 있어야 한다는 시론에 공감한다.
요즘처럼 말의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백 편의 시보다 백 사람에게 읽히는 한 편의 시가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공자는⟪시경⟫에 있는 삼백 편의 시를 한 마디로 “생각에 거짓됨이 없다”는 “시 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詩 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 했는데 그 의미를 곰곰이 새겨보면 시를 쓰는 일도 마음을 닦는 선禪수행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인생 8부 능선에서 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아직도 시다운 시 한 편 써보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덧붙이고 싶다. 안으로 칩거하며 나의 상처를 치유하듯 타인의 아픔을 달래주는 시 한 편 남기고 나를 완성하리라. 그런 시를 통해서 시인은 부활하고 영원히 사는 것이기에……
약력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전북지방경찰청에서 정년퇴임(33년)
*2006년 ⟪한국 시⟫로 등단
*시집
<바람의 길> <둥지에 부는 바람> <바람 한 점 손에 쥐고>
등이 있음
*수상
대통령 근정포장 등 다수
대한문학상, 온글문학상, 경찰문예대전 입상
*문단 활동
전북문협 이사, 전북시인협회 상임이사, 표현문학 자문이사,
부안문협 감사, 온글문학 운영위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