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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수(伊秉綬, 1754-1815)
자는 조사(組似), 호는 묵경(墨卿)으로
복건영화(福建寧化) 사람이다.
벼슬은 형부주사(刑部主事)에 이르렀으며
특히 양주(揚州)에서 지현(知縣)으로 있을 때는
덕정(德政)을 베풀어 사현사(四賢祠)에
봉입(奉入) 되기도 하였다.
그의 글씨는 뛰어나 향신(向燊) 같은 이는
“묵경(墨卿)의 예서는 한인에 직핍(直逼)하여
등완백도 그 순고(淳古)함에는 못 미친다“라고
평할 정도이다.
그의 공간포백(空間布白)에 대한 감각은 기발하여
신선한 생명감이 있다.
해행은 안법(顔法)으로 썼으며
원경강일(圓勁剛逸)하여
금석기(金石氣)가 있다고 평한다.
특장(特長)인 예서는
<장천비(張遷碑)>, <형방비(衡方碑)> 등에서
득력하여 운필이 엄정하고 간가가 단장하며
웅장하면서 고미(古媚)하다.
묵적이 많이 전하며 모두 기특한 품격이다.
봉입(奉入) ; 받들어 들어가게 함 ?
직핍(直逼) ; 바싹 다가듦
순고(淳古) ; 옛날 사람과 같이 어질고 순하며 인정이 두터움
공간포백(空間布白) ; 쓰지 아니한 빈 칸에 글자와 글자,
행과 행, 그리고 글자와 행이 서로 호응하는 관계
곧 장법(章法)을 말함
안법(顔法) ; 안진경의 필법
원경강일(圓勁剛逸) ; 획이 둥글면서 강하며 굳세고 편안함 ?
금석기(金石氣) ; 쇠와 돌과 같은 거친 느낌이 나는 필치 ?
특장(特長) ; 특별히 뛰어난 장점
단장((端莊) ; 단정하고 장엄함 ?
고미(古媚) ; 예스럽고 예쁨
참고 도판
완원(阮元)
자는 백원(伯元), 호는 운대(芸臺).
연경노인(揅經老人)이다.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운귀총독(雲貴總督).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 등을 역임하였고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으로
비학을 창도(倡導)하였고
북조비판(北朝碑版)을 추중(推重)하였다.
그의 서법을 볼 때 현저한 공적은 없지만
선비답게 쓴 수묵(手墨)에서
순아청고(醇雅淸古)를 읽을 수 있다.
창도(倡導) ; 선도하다. 앞장서서 제창하다.
추중(推重) ; 받들어 존중하다.
수묵(手墨) ; 친필. 진필(眞筆)
순아청고(醇雅淸古) ; 순수하고 고상하며 맑고 예스럽다. ?
참고 도판
진홍수(陳鴻壽, 1768-1822)
자는 자공(子恭), 호는 만생(曼生)으로
절강항주(浙江杭州) 사람이다.
서화를 잘하고 전각에도 뛰어났다.
전예에서 특히 기이한 포백과 체(體)를 이루었다.
행초도 고법을 쫒아 탈속한 듯 청아(淸雅)한
서품(書品)을 이루었다.
참고 도판
포세신(包世臣, 1775-1855)
자는 신백(慎伯), 호는 권옹(倦翁)으로
안휘경현(安徽逕縣) 사람이다.
서법이론가(書法理論家)로 이름 높다.
벼슬은 지현(知縣)에 이르렀고
만년(晩年)에는 강녕(江寧)에 은거하였다.
등석여(鄧石如), 황을생(黃乙生) 등과 토론하면서
글씨의 깊은 맛을 깨달았다.
<<예주쌍즙(藝舟雙楫)>>을 지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북비(北碑)에 치력(致力) 하였으나
그의 이론에 부응한
서품(書品)은 남기지 못하였다.
참고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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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소기(何紹基, 1799-1873)
자는 자정(子貞), 호는 원수(蝯叟)로
호남도주(湖南道州) 사람이다.
벼슬이 사천학정(四川學政)에 이르렀다.
해서는 안로공(顔魯公)을 기조(基調)로 하여
북비를 더한 주경(遒勁)하고 청원(淸遠)한
품격을 이루었다.
행초는 그의 해서에 전의(篆意)를
융합시켜서 원혼(圓渾)하면서도
일기(逸氣)가 넘친다.
비첩을 두루 거쳐서 자성일가(自成一家)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높이 평가되며
그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청원(淸遠) ; 맑고 심오함
전의(篆意) ; 전서체의 느낌이 있음 ?
원혼(圓渾) ; 둥글면서도 순수함 ?
일기(逸氣) ; 편안한 기운 ?
자성일가(自成一家) ; 스스로 서예에 있어서 일가를 이룸 ?
참고 도판
조지겸(趙之謙, 1829-1884)
자는 휘숙(撝叔), 호는 비암(悲盦). 무민(無悶)
등을 썼으며 회계(會稽) 사람이다.
벼슬은 지현(知縣)에 그쳤다. 시(詩). 고문(古文).
서화(書畵). 전각(篆刻)에 모두 뛰어난 인물인데
특히 전각은 최고 일류로 친다.
글씨는 처음에는 안로공(顔魯公)을 쓰고
35세 이후에는 북비로 돌아서
역입평출(逆入平出)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특히 해서를 잘 썼는데
북비의 맛을 그대로 취하여 대성하였고,
행초에도 노공과 북위를 참용하여
탁월한 서품을 이루었다.
전예는 등법(鄧法)을 기초로 하여
더욱 색다른 서풍을 창출하였다.
특히 조달(早達)한 사람으로 56세에
죽기 10여 년 전부터 벼슬길에 오르면서
서화를 안 할 것을 맹세하고 거의 절필(絶筆)하였다.
40세를 전후하여 이룬 그 성취는 놀라우며
또한 원숙무애(圓熟無碍)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작가이다.
역입평출(逆入平出) ; 기필할 때에 붓끝이 거슬러 들어가
평평하게 펴서 나오는 필법의 한가지 ?
등법(鄧法) ; 등완백 필법 ?
조달(早達) ; 젊은 나이에 벌써 막힘이 없이 통달함
원숙무애(圓熟無碍) ; 숙달의 경지에 이르러 거리낌이 없음
참고 도판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이름은 준경(俊卿)이고 자는 창석(倉石)인데
후에 창석(昌碩)이라 고쳐 썼다.
호는 부려(缶廬)이다.
절강안고(浙江安告) 사람으로
안동현령(安東縣令)을 지냈다.
시문. 서화. 전각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그의 글씨는
석고(石鼓)와 종정(鐘鼎)의 법으로
특색 있는 필자(筆姿)를 자아내었다.
평생을 석고(石鼓)를 임(臨)한 것으로 유명하다.
행초는 전법(篆法)을 취하여 자가풍을 이루었다.
예서는 전서나 행서에 못 미친다.
석고(石鼓) ; 북과 같은 돌에 글씨를 조각하여 넣은 것
내용이 모두 사냥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를 엽갈(獵碣)이라고 불렀고 통칭
석고 문이라고 하는데 진나라 때의 석각 문자이다
종정(鐘鼎) ; 종과 솥 같은 기구를 만들 때에 그 곳에 새긴 명문을 말함
필자(筆姿) ; 글씨의 형태 ?
참고 도판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자는 장소(長素), 호는 갱생(更生),
천유화인(天游化人)으로 광동남해(廣東南海) 사람이다.
정치사상가(政治思想家)로서
완원. 포세신의 존비설(尊碑說)을 계승하여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을 저술하였다.
그의 글씨는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북위. 석문명(石門銘)을 비롯한 북위 풍을 응용하여
창고질박(蒼古質朴)하며 필원세경(筆圓勢勁)한
풍모를 이루었다.
창고질박(蒼古質朴) ; 오래되어 예스러운 풍치나 모습이 그윽하고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 ?
필원세경(筆圓勢勁) ; 획이 둥글고 힘참 ?
참고 도판
그외 청대 참고 도판
양수경(楊守敬)
행서칠언련(行書七言聯)
양현(楊峴)
예서칠언련(隸書七言聯)
오대징(吳大澂)
전서(篆書) 사곡(四曲) 병풍(屛風)
오양지(吳讓之)
옹동화(翁同和)
해서(楷書) 대련(對聯)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인터넷 사전, 인터넷 참고, 각종 도서
첫댓글 우리 후배들 여전히 잘 지내고 있지 ?
오늘은 금요일 참고 할 서예이론이다.
시간나는대로 읽고
우리후배들 지금의 시간들이
좋은 경험이 되고
건강하게 다시 보기를 바란다.
지난번 올려 준 하전서예 시간표 보고
올 수 있으면 와라
한 강의 당 2명 정도 강의 할 수 있으니
수강 학생이 없는 시간에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오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