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김 응 숙
불을 댕긴다. 자궁처럼 둥글고 깊은 어둠에 섬광이 인다. 아궁이 속이 환해지더니 이내 푸른 꽃잎 같은 불꽃들이 일렁인다. 후끈, 끼쳐오는 열기가 앞으로의 치열한 여정을 예고하는 듯하다.
어느덧 만개한 불꽃들은 가마솥의 검은 배를 핥기 시작한다. 푸른 혀뿌리를 들썩이며 붉은 혓바닥을 둥글게 말아 올린다. 가마솥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부드럽지만 가혹한 이 애무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 속에 품은 뼈들을 낱낱이 고아 한 솥 가득 뿌연 정수를 뽑아 올릴 때까지 가마솥을 달구고 또 달굴 것이다. 마치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지난한 산통처럼.
가마솥은 십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궁이의 거센 열기를 시종 침묵으로 받아낸 솥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우물처럼 보인다. 시퍼렇게 날이 선 세상살이에 가슴이 시린 날이면 정갈한 행주로 그의 등을 닦고 또 닦았다. 마음의 생채기에 굳은살이 박이고 새살이 돋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그의 한결같은 동행이 눈물겹다.
불꽃이 맹열해진다. 반쯤 물이 들어 있는 솥 안쪽으로 땀방울 같은 기포가 맺힌다. 이 험난한 여정에 기꺼이 동참하겠노라고 가마솥이 보내는 무언의 신호이다. 이제 기포들은 수면으로 떠올라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다. 물은 맑고 차가운 그의 본성을 기포에 실어 흔적도 없이 바람으로 날려야 한다. 그 상실감으로 절절이 끓어올라야 한다. 주어지는 현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끌어안기 위한 통과의례이다. 마침내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만 할 때가 된 것이다.
대야에 담가놓은 뼈에서는 선홍색의 핏물이 우러나와 잉크처럼 번진다. 뜨거운 삶으로부터 표표히 돌아선 뼈의 주인들을 기리기 위해 물속에서 피는 붉은 연꽃 같다. 꺽쇠처럼 꺾여 불가해한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뼈들은 이른 아침에 배달기사가 가져다 준 것이다. 갈색 포대에 담겨 도축장에서 이곳까지 한 시간여를 실려 왔다. 아니다. 이 뼈들은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왔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가죽을 벗고 살점마저 저민 채 이 속에 이르렀다. 그 아득한 거리는 얼마쯤 되는 것일까.
가마솥에서 물이 끓는다. 거꾸로 솟아오르는 폭포수처럼 하얀 김을 쏟아낸다. 뚜껑을 열고 뼈를 건져 끓는 물속에 넣는다. 파도가 일 듯 물이 출렁이며 일순 김이 잦아든다. 뼈를 다 넣고 나니 가마솥이 그득하다. 다시 뚜껑을 닫고, 가마솥의 열기가 손뚜껑에 얹혀 있는 세월의 무게를 들어 올리 때까지 기다린다. 첫 숨을 한 줄기 봉수대 연기처럼 피워 올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로소 커피 한 잔을 마실 여유가 생긴다.
나는 유독 낯가림이 심하였다. 누군가와 마주칠까 봐 발밑만 보고 걸어다녔다. 행여 불편한 사람이라도 만날라치면 먼 길이라도 둘러서 가곤 했다. 어려서 부모를 떠나 가시둥지에 의탁했던 시절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뛰어넘지 못할 아득한 거리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으로 그 강을 건널 수 있을지 알지 못하였다. 타인의 기슭에 쉬이 가 닿을 수 없는 절망감이 외로움으로 배어들었다. 그 외로움을 끌어안고 소라 고동처럼 내 안에 나를 가두었다. 그리고 그 안온함에 스스로를 길들이는 생활은 결혼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무를 흔드는 비바람처럼 현실이라는 광풍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IMF라는 경제 위기의 그늘은 예외 없이 우리 가정에도 짙게 드리웠다. 더는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며 애써 위안하는 생활은 썩어가는 나무뿌리처럼 현실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자기 합리화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오직 마주치며 헤쳐 나가는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주하고픈 미련이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았지만 이번만큼은 기어코 맞부딪쳐 보리라고 다짐하였다.
불꽃이 가마솥을 달구듯 십 년 동안의 세월이 나를 달구었다. 발바닥으로부터 시작된 열기는 가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돌이켜보건대 나에게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당연히 내 몫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아집과 편견을 기포처럼 날려 보내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나는 내가 아닌 것들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마솥처럼 절절이 끓었다.
다시 가마솥이 끓는다. 거품이 인다. 거품은 여러 불순물들을 띄워 올리며 부글거린다. 고운 채로 거품을 걷어낸다. 이번에는 뭉텅뭉텅 선지가 뜬다. 울혈이다. 뼈 마디마디에서 미처 삭이지 못한 감정들이 응고되어 떠오른다. 그것도 건져낸다. 자기기만과 어설픈 허세로 겉돌던 기름도 분리해 떠낸다. 여러 번 반복해서 말끔히 제거한다. 마치 연민인양 뼈를 싸고 있던 조금의 살점과 연골이 벗겨진다. 자욱한 김 속에서 드러나는 둥근 뻐가 사리처럼 하얗게 빛난다. 마침내 뽀얀 국물이 우러나오기 시작한다.
한 모금 머금고 맛을 음미해본다. 맵고 짠 세파에 전 혀를 위로하고 시고 떫은 온갖 상처로 해진 입안의 점막들을 어루만진다. 육신의 속내에까지 스미어 보이지 않는 균열들을 메우고 마른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는 헛헛한 심장을 부드럽게 진정시킨다. 흐르는 대로 감싸고 고이는 대로 메우는 진국의 참맛이다.
첫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다. 새벽 노동으로 허기가 진 중년의 사내다. 튼실한 뚝배기에 약간의 고기와 진국을 담고 파를 송송 띄운다. 이 국밥은 그에게로 가서 다시 뼈가 되어 고단한 그의 삶을 굳건히 떠받칠 것이다. 허리를 펴고 창가에 선다. 세월을 건너온 바람 한 줄기가 살갑게 어깨를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