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이 필요해
김일광
“아, 아아. 일어나기 싫어.”
“꼬끼오, 꼬꼬꼭. 꼬끼오 꼬꼬꼭!”
알람이 10분 넘게 외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으르렁, 으르렁. 부글부글. 막 소릴 지려는데.
“마리야! 일어나야지.”
‘헛!’
엄마가 아니고 할머니!
‘아, 참! 엄마가 오늘 새벽 일찍 필리핀 출장 간다고, 할머니가 오셨지.’
짜증이 스르르 사라졌다. 부스스 일어나서 부엌으로 나갔다. 할머니가 달걀 스크램블을 만들고 있었다.
“어서 씻고 와.”
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목욕탕으로 갔다. 머리를 흔들어 잠을 쫓았다. 거울을 보며 뾰로통 토라진 얼굴, 콧등에 주름을 만들어 괴물 얼굴, 눈과 입을 크게 만들어 ‘어흥’ 무서운 얼굴, 활짝 웃는 예쁜 얼굴, … 잠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해? 시간이 자꾸 달아나는데.”
‘그렇지, 학교 가야지.’
엄마였으면 한 번 쯤 징징댔을 텐데. 물풍선처럼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였기에 참고 있지만 기분은 뒤죽박죽이었다.
“자, 우리 마리, 스크럼불 먹어요.”
내 기분처럼 마구 헝클어진 달걀. 졸음을 잔뜩 얹어서 한 마디 했다.
“할머니, 스크럼불이 아니라 스크램블이야.”
“그래. 스크램블.”
한 입 넣었다. 아, 부드럽다.
“어때?”
할머니가 내 말을 기다리며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내 엄지를 치켜세웠다.
“최고야! 할머니 스크램블 최고야.”
엄마가 만든 것은 좀 딱딱한데 할머니가 만든 것은 참 부드러웠다. 그냥 스르르 넘어갔다. 기분이 좋아지는 맛, 할머니가 주문을 외운 게 틀림없다.
“할머니, 주문 아니, 스크램블 만드는 법 엄마에게 좀 가르쳐 줘. 엄마가 만든 것은 영 아니야.”
할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내가 한 입 더 먹을 때까지 잠잠히 있었다.
“엄마가 못 하는 게 아니라 바빠서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그런 거야. 출근 준비하랴, 너 등교 챙기랴, 후닥후닥 하다 보니 그렇지.”
‘할머니는 또 엄마 편.’
그렇지만 나는 ‘아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스크램블을 넘겼다. 이 맛, 주문이 들어간 게 분명하다.
할머니가 가방을 메고 먼저 현관을 나섰다.
“우리 마리 등교 준비에 거침없네. 할머니가 도와 줄 것도 없어. 이렇게 잘 하는데 엄마는 왜 등교할 때마다 전쟁이라고 할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침마다 그 말을 내게 퍼부었으니까.
“현관 번호 외웠지?”
“그러음. 아직은 기억력 생생해.”
할머니는 나에게 안심하라며 집게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했다.
“아참! 할머니 무릎 아프잖아. 계단, 조심, 조심.”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되돌아와서 할머니 앞을 막았다. 할머니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딛고 있었다.
“먼저 내려가 있어. 따라갈게.”
“아니야. 할머니 보호해야 돼.”
할머니는 허리를 펴며 ‘허허’ 한 번 웃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 발 내딛고, 따라 딛고, 하나 둘, 하나 둘. 옆 난간을 잡아야지.”
할머니도 ‘하나 둘, 하나 둘’ 따라 걷다가 멈춰 섰다.
“먼저 내려가. 할머니가 조심조심 내려갈게.”
“그럴까?”
계단을 통 통 통 뛰어 내려갔다. ‘열려라 참깨’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 비!’
빗길을 걸어가야 하다니, 짜증이 스르르 일었다.
“비 오네. 우산을 가져 와야겠네.”
할머니가 우산을 가지러 가려고 하였다. 재빨리 할머니를 말렸다.
“무릎, 무릎. 여기서 기다려. 내 후딱 갔다 올게.”
계단을 후다다다 뛰어올랐다.
“할머니는 가벼운 우산, 나는 무지개 우산.”
할머니에게 우산을 건넸다.
“우리 마리, 고, 마, 워.”
우산을 펼치며 할머니가 웃었다. 그 사이에 짜증은 간곳없이 사라졌다.
차들이 젖은 도로 위를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끌면서 지나갔다. 길을 건너자 젤라또 가게가 마주 섰다. 단골 젤라또 가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주차장도 닫혀 있었다.
“참새 방앗간! 올 때 꼭 들러야지.”
할머니가 장난치듯 말했다. 그러나 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 커서 젤라또 가게 할까?”
할머니가 재미있다는 듯 돌아보았다.
“왜?”
“으음 …. 나만의 젤라또를 만들고 싶어.”
“어떤?”
나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딸기 맛, 바닐라 맛, 그런 게 아니라 이건 비밀인데,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젤라또, 주문을 알아낸 뒤에 밝혀야 한다. 아직은 비밀.
“할머니, 노랑머리 언니가 마…, 아니 주인이고, 납작모자 언니는 알바인가 봐.”
마법을 쓴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으응! 어떻게 알았어. 물어봤어?”
“아니, 예리한 나의 눈!”
할머니가 ‘그래, 어디 그 예리하게 관찰한 걸 말해 봐.’ 라는 눈빛을 보냈다.
“납작모자 언니는 그냥 ‘뭐 드릴까요?’ 그러고는 달라는 것만 딱 주거든, 그런데 노랑머리 언니는 ‘아유 예쁜 친구 방가, 방가. 오늘은 뭘 주문할까?’ 주문! 내가 바닐라 맛이라고 하면 딸기 맛도 덤으로 준다고.”
그럴 때마다 살짝 들렸다. ‘기분 좋아지는 맛이어라.’ 주문을 얹어주었다. 정말 그 젤라또를 한 입 먹으면 내 몸이 팔랑팔랑, 기분은 달콤 달콤해 졌다.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마리를 귀엽게 본 거겠지.”
“아니야. 주인이니까 서비스도 팍팍 줄 수 있는 거야. 또 맛이 달라 …….”
가게 주차장에는 차 대신 늘 빗자루가 구석에 서 있다. 틀림없다. 그 수상한 빗자루. 노랑머리 언니 출퇴근 모습을 보지 않아서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래, 노랑머리 언니 마법 주문을 오늘 안으로 꼭 알아낼 거다.
큰 길로 나왔다. 큰길을 따라 달려온 바람이 우산을 흔들었다.
“아이구나, 바람까지 부네.”
할머니 우산이 후딱 뒤집어져 날아가려고 했다. 할머니가 우산에 매달려 비틀거렸다. 그런데도 가방부터 꼭 끌어안았다. 나는 얼른 할머니에게 우산을 씌웠다. 그 사이에 할머니는 우산을 제대로 고쳐 잡았다.
“아유, 날아갈 뻔 했네.”
‘아참! 엄마는 하필 비 오는 날 출장 갈 게 뭐람.’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그게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괜찮아. 할머닌 괜찮아. 이것 봐 가방도 멀쩡해.”
할머니는 진짜 괜찮다며 흠뻑 젖은 얼굴을 활짝 펴보였다.
할머니에게 미안했다.
“할머니, 비 맞지 않는 길로 가.”
“그런 길이 있어?”
“지하철역 안으로 가. 비 맞지 않고 학교 근처까지 갈 수 있어.”
할머니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아유 똑똑한 우리 마리.”
할머니가 멘 가방을 받아 메고는 할머니 팔을 부축하여 지하철역 7번 출구 계단을 내려갔다.
“참 마술 같네, 이런 길도 있고.”
할머니는 빗물을 훔치며 역 안을 둘러보았다.
나는 앞서서 지하철 통로를 지나 9번 출구로 향했다.
“할머니, 엄마는 비행기 탔을까?”
“버얼써 탔을 거야. 지금쯤 날아가고 있겠지.”
“비행기는 비와도 괜찮지?”
“그러음, 비행기는 구름 위로 날잖아.”
“아, 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행기를 탄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가 걱정 돼?”
할머니가 ‘네 마음 다 안다.’ 는 얼굴로 나와 눈을 맞추었다.
“엄마도 널 걱정하고 있을 거야.”
“그럴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심이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음. 걱정하고말고. 또 미안해하고 있을 거야.”
“할머니도 그랬어?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잖아.”
할머니는 설핏 웃으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엄마가 너만 했을 때였어. 학교 가려는데 비가 내렸어. 바람까지 세차게 부는 거야.”
“오늘 같았구나.”
“데려다주어야 할 것 같았어. 그런데 우산이 하나만 보이는 거야. 이곳저곳 찾고 있는 사이에 네 엄마가 혼자 가버린 거야. 학교 가는 길에는 큰 물길이 있었어.”
“물길! 다리가 없었어?”
“다리도 있었지. 그런데 다리로 건너려면 한참을 돌아야 했어.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다 외나무를 걸쳐 두고 건너다녔지. 여느 때는 물이 많지 않았거든.”
“우리 집 앞 횡단보도 같은 거였구나. 여느 때는 차가 많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렇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같은 셈이었지.”
“그런데 비가 오면 제법 물이 많이 흘렀어, 그러니까 위험했어. 반질반질하던 그 다리가 생각난 거야. 정신없이 골목으로 달려 나갔어. 네 엄마가 막 외나무다리 위에 올라서는 거야. 부를 수가 없었어. 그 소리에 돌아보다가 넘어질까 봐. 내 입을 막았어. 너무 조마조마한 거야. ‘아, 제발! 제발 무사히 …….’ 그런데 말이다. 중간쯤에서 우산이 거센 바람을 타고 후루룩 날아올랐어, 네 엄마는 그 우산에 매달리더니 한 팔을 날개처럼 펴고는 ‘포롱 포롱’ 다리를 건너가는 거야.”
“엄마가 날았다고? 새처럼.”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포옥 내쉬었다.
“얼마나 미안하든지. 비가 오는 날이면 그 날 생각이 나. 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가슴이 먹먹해져.”
나는 바로 알아챘다. ‘엄마가 날았다!’ 그것은 마법 주문이야. 엄마의 주문일까, 할머니의 주문일까. 알 수는 없다.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엄마는 참 씩씩했네. 근데 왜 미안해?”
할머니도 무거운 기분을 날려 버리려고 크게 말했다.
“엄마라서 그렇지 안타깝고, 미안하고 ……. 우린 말이다.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생각하고 걱정하며 함께 가는 거야. 엄마는 마리를 걱정하고 마리는 엄마를 생각하고.”
9번 출구가 보였다.
“어! 계단. 할머니 무릎이 아픈데 또 계단인데 어쩌지?”
“올라가는 건 괜찮아. 내려올 때가 힘들지.”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살포시 안았다.
주민 센터까지는 비를 맞지 않았다.
‘아! 이를 어떡해?’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빨리 가는 길은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할머니 아픈 무릎을 생각했다.
“할머니 잠깐. 우린 저쪽으로 가야 해.”
“왜? 아이들은 모두 이쪽으로 가고 있는데.”
할머니가 우산을 펴며 눈을 둥그렇게 했다.
“이쪽은 긴 계단을 내려가야 해. 우린 다른 길로 가.”
할머니는 내 마음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은 조금 더 멀었다. 그러나 계단이 없었다.
“내가 널 데리고 가는지, 네가 날 데리고 가는지 모르겠다.”
슬그머니 할머니가 했던 말을 꺼냈다.
“우린 함께 가는 거잖아.”
할머니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교문이 보였다.
“이따가 몇 시에 오면 돼?”
“으음, 4시 30분, 아니, 아니 4시 20분. 10분 빨리 나올게.”
“10분 빨리? 뭐 하려고?”
“응, 할일이 있어.”
할머니가 내 등을 토닥였다.
“알았어. 이따 만나.”
“할머니 고마워. 오늘 스크램블 최고였어. 또 엄마 이야기도 음 … 좋았어.”
학교 현관에 들어서며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여전히 교문 앞에 있다. 할머니가 높이 손을 흔든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든다.
‘젤라또 가게에서 10분을 끌어야 한다. 그 10분 안에 주문을 알아내야 한다. 할머니가 좋아할 만한 게 어떤 맛일까? 아하, 그래. 녹차 맛이 좋겠다. 마법의 젤라또. 무릎 좋아지는 주문을 외워야지.’(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