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삼국지 [13]
소서노 왕후의 진노 ③
“도읍은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용이하되 외적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또한 배후에 인근 백성이 먹고살 만큼 식량을 생산할 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아리수를 통해 다른 지역과 교류할 수 있고, 높은 산을 등지고 있어 외적이 함부로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남쪽의 들판은 백성이 풍족하게 지낼 만큼 곡식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여러 고을을 보았지만 이보다 나은 곳은 없었습니다.
” 마려가 열변을 토하자, 온조도 동조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이런 곳이라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다른 신하들도 흡족한 표정으로 주변의 풍광을 둘러보고 있었다.
왕후 역시 마음을 정한 듯 별말이 없었다. 비류는 눈앞의 안위만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고구려를 떠날 때의 강단과 포부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적당한 곳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안타깝고 슬펐다.
“나는 이곳을 떠나 미추홀로 가겠다.”
그의 선언에 놀라 신하들이 결사반대하고 나섰지만, 비류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소서노는 누구보다 아들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의 뜻을 존중했다.
온조 일행과 헤어진 비류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로 돌아갔다.
그는 일단 인근 읍락을 돌며 토호(土豪)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은 대부분 한나라와 고구려·부여·삼한 등에 소금을 내다 팔아 부를 축적한 상인이었다.
소금을 넘기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받아 다른 지역에 내다 파는 중계무역은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줬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각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그중에는 제법 규모가 큰 선단을 거느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비류가 미추홀에 당도했을 때는 토호끼리 이익을 두고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토착 세력인 진묵과 한나라에서 건너와 정착한 허도는 사이가 좋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양쪽의 힘이 엇비슷해서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비류는 먼저 진묵을 찾아갔다. 그를 맞이한 진묵에게선 대상다운 기품이 흘렀다.
“어인 일로 오셨소?”“당신에게 큰 이득을 주려 하오.” 비류의 당당한 태도에 진묵은 호기심이 생겼다.
“뉘시기에 불쑥 나타나 이익을 주겠다고 하시는 거요?”
비류는 진묵의 눈을 응시했다.
“나는 고구려의 왕자 비류라 하오. 국왕의 명을 받들어 이곳으로 내려왔소.”
진묵은 고구려 상인들과도 종종 거래했기에 내부 사정을 소상히 알았다.
이번에 동부여에서 온 왕자가 태자로 책봉되고, 왕후의 소생인 왕자들이 졸본을 떠났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하명이 있으셨습니까?” 진묵은 걱정이 앞섰다.
왕위 계승에서 밀린 왕자들이 분가하여 내려온 것이라면 아리수 지역의 세력 재편은 불가피했다.
“이 지역 읍락의 거수들을 만나 뵙고 우호를 다지라 하셨소. 당분간은 이 지역에 머물며 거수들을 찾아뵐 계획이오. 오늘은 그 첫걸음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대행수를 찾아뵌 거요.” 비류의 의도는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와 맞설지 손을 잡을지 결정해야 했다. 진묵의 판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즘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은 나쁠 게 없었다.
비류 세력을 잘만 이용하면 숙적인 허도를 무너뜨리고 지역의 패권을 잡을 수도 있었다.
“고구려와 우의를 나누는 일은 우리로서도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진묵은 비류를 환대하며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비류는 허도를 찾아갔다.
그 역시 비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행보에 적극 힘을 보태기로 했다.
그렇게 두 세력의 알력을 교묘히 이용하는 한편, 주변의 읍락을 돌아다니며 힘을 키웠다.
새롭게 터전을 닦은 비류는 차츰 세력권을 넓혀 미추홀 일대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몇 해가 지나자 비류는 염전과 독자적인 교역로를 갖게 되었다.
그는 교역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주변의 작은 고을들을 흡수했다. 얼마 안 가 진묵과 허도를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진묵과 허도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미추홀 일대는 비류의 세상이었다. 살고자 한다면 비류에게 복속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