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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10여년 전 인드라망지에 6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입니다.
마을이 진보다
1. 마을을 그리며
수년 전 나는 경기도 화성군 비봉에서 호박농사를 지었다.
내가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권유가 마침 고마웠다. 단호박과 맷돌호박 3천 주를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친구도 초보농민이어서, 아마 마을 분들이 따뜻하게 도와주지 않았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비닐하우스 안에 한 달 이상 우리 묘판을 매일 관리해주신 친구의 대부(代父)님이나 트랙터로 밭을 만들어주신 앞집 아저씨가 없었다면, 시작부터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도 그 분들이 한창 바쁠 때는 같이 도와드리기도 하고, 친구가 양계(유정란)를 하고 있으니까 계분(鷄糞)을 나눠드리기도 했지만, 우리가 받는 도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봄 서로 나누고 베풀면서, 우리는 항상 계산하고 손익을 따지는 삶 너머 우리 모두가 정말로 바라고 있는 인정을 느끼곤 했다.
어느 날 친구와 둘이서 호박 순치기를 하고 있는데, 앞집 아주머니께서 쟁반에 무엇을 담아 오셨다. 새참을 내오신 것이다. 그 전날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하셨다며 소주 한 병하고 노지에서 재배한 딸기를 함께 내오셨다.
처음에는 아침이니까 딱 술을 한 잔만 하자고 했는데, 안주도 좋았지만 그 인정에 취해서 마시다 보니 한 병을 다 비웠다. 술도 알맞게 취하다 보니 호박 순치기는 잠깐 제쳐두고 밭두둑에 앉아서 친구와 함께 우리가 그리고 만들려고 하는 마을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그러나 항상 이렇게 유쾌한 기분 속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애호박 한 상자(20개)를 600원(상자값이 300원)에 팔아야 하는 신씨 아저씨의 이야기나, 잘 지은 알타리무를 그냥 로타리 해야겠다는 앞집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꾸려나가야 할 살림살이, 아이들의 학비, 영농자금에 대한 걱정들(사실 이게 다 ‘돈’ 걱정이다)과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농업을 하려고 할 때 노동의 힘듦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즉 돈 걱정과 노동의 힘듦이 해결되면 아마 사람들은 누구나 농업, 특히 유기농업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떻게 하면 돈 걱정하지 않고, 일에 치이지 않고, 이웃과 따뜻한 인정을 나누며, 자연이 주는 은혜를 만끽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누구나 다 원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한다면 그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고 생각한다.
돈 걱정 없이 살려면
‘돈’ 걱정 없이 살려면 돈을 충분히 벌든가, 아니면 삶의 동기와 욕구의 질이 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극단적인 양자택일로 되기 쉬운데, 그러면 어느 쪽도 진정한 행복의 길은 아니게 된다.
‘돈’만 풍족하면 행복하다거나, ‘마음’만 풍족하면 행복하다거나 하는 것은 실제와 맞지 않다. ‘충분히’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아무리 벌고 벌어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끝없는 부족감 속에서 산다. ‘이웃과 함께’, ‘자연과 함께’ 자족할 수 있는 물질의 적정한 수준은 삶의 동기와 욕구의 질이 변할 때 비로소 새롭게 보여 온다.
또 한편 아무리 의식(意識)이 중요하다 해도 보편적인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물질적 수요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쾌적한 모습이 아니다. ‘돈’과 ‘물질’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 하는 것은 지금의 시대에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나타내는 척도로 되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을 말한다면, 돈에 대해서 적대적이어서도 안 되고, 돈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도 안 된다고 본다. 돈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며, 돈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인간이 나타내갈 본연의 모습을 포기하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 시대에 돈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재앙으로도 되고 있다.
지금 시대에 돈은 사람의 에너지가 집약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다. 열심히 벌어서 자기 집을 장만하려는 젊고 가난한 부부의 소박한 꿈이 그곳에 있다. 자식에게는 보다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부모의 간절한 소망이 그곳에 있다. 자본주의는 해방된 개인이 ‘자신의 생명력을 자신을 위해 쓰려고’ 하는 지금 인류의 일반적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가장 보편적인 시스템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돈은 재앙으로 되고 있다. 최근에 카드 빚 때문에 빚어지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범죄의 대부분은 ‘돈’이 원인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 존경받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파렴치한으로 전락하는 것도 ‘돈’ 때문인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부정․부패․비리가 돈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아름답게 살아보려는 꿈이 좌절되는 것도 돈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제 ‘돈’의 주술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상당한 정도로 사회적 자유와 평등, 물질적 풍요가 이루어진 지금이야말로 ‘돈과 이기주의의 결합’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원적 해법이 요구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면 이제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진실한 진보주의자라면 물신과 이기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물신과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의식혁명이 사회 전체의 진보를 이끌어가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실한 삶, 진실한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상생과 조화’를 먼저 자신 안에서 실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지금은 사회나 국가 전체의 시스템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것이 시대에 안 맞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마을 만들기’가 횡적 네트워크로 이루어질 수 있는 좋은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을 생각할 때 첫 번째로 그려지는 것은, 돈의 유용성을 잘 활용하지만 돈이 아니라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이 우선하는 그런 모습이다. 꼭 필요한 물질적 수요에 궁핍하지 않으면서, 삶의 동기와 욕구의 질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되는 그런 마을을 만들 수 없을까. 나로서는 좋은 생산, 좋은 유통, 좋은 소비, 좋은 욕구 등에 관한 여러가지 방도가 생각나지만,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혜와 힘과 돈을 모아 연구하고 실천해갔으면 좋겠다.
노동이 즐거움으로 되려면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과학과 깨끗한 기술(기계화․자동화․약품의 개발을 포함), 노동관(勞動觀)의 변혁, 협업과 분업의 이점 등이 그것이다. 나는 여기서는 주로 협동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같이 일하면 일의 능률도 오르고 일이 재미있어진다. 능률이 오르니까 재미있어지고, 재미있어지니까 능률이 오른다.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쉽지 않다. 사람들은 협동의 이점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동업’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동업을 해서 실패한 경험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차라리 혼자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혼자 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농사를, 더구나 새로 귀농하는 사람들이 혼자 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실패하지 않고 동업하는 길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동업이 힘든 원인을 잘 보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같이 일할 때 느끼는 부자유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생각이나 일하는 방식이 자기하고 다를 때 느껴지는 부자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가령 ‘호박 순치기’를 할 때 친구하고 나하고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그럴 때 내가 ‘이런 방식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을 때 그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면 뭔가 부자유감이 생긴다. 그런데 잘 보면 거꾸로 내가 나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생각은 그렇게 돌려보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말을 안 해본다. 그래도 마음속에 뭔가 부자유감이 있다. 이런 부자유감 없이 서로 소통할 수 없을까. 가장 좋은 방법을 서로가 부자유감 없이 찾을 수 없을까.
요즘 마음공부를 위한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정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반들이 부자유감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동시에 같이 일하는 현장이야말로 가장 좋은 마음공부의 도량(道場)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쉽지는 않지만 요즘 하루 한 가지씩 자기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려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무리하게 가깝게 하려 하지 않고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 협동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그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에서가 아니라 지금의 사람의 실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거리’라는 말은 차가운 느낌이 나니까 ‘따뜻한 간격’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은 이 적절한 거리를 통해서 누구하고나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만 그 거리를 고정시키거나 점차 거리가 멀어지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것으로 자각하면 좋을 것 같다.
비봉 농장에 친구의 친척 되시는 분이 함께 계셨는데, 이 분은 언제나 혼자서 일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보면 같이 협동하고 있었다. 마을을 그릴 때 떠오르는 모습은 이렇듯 각자가 충분히 개인의 공간을 가진 가운데 협동하는 모습인 것이다. 사람 사이의 거리도 사람들의 의식의 실태에 맞게, 서로 비난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으면서 점차 가까워지는 쪽으로 변해간다면 좋지 않을까.
우선 이 두 가지, 즉 마음의 부자유를 해소하려는 노력과 사람들 사이의 적정한 거리(따뜻한 간격)가 잘 조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이 될 때, 함께 하는 삶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생활문화를 꽃피워갈 수 있을 것이다.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이상으로 내가 그리는 ‘좋은 마을’을 꿈꾸어보았다. 혼자 꾸면 꿈에 그치지만 여럿이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좋은 마을’은 도시의 아파트촌이나 공장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농촌과 도시에서 이런 마을들의 네트워크가 광범하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신날까.
문득 자연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농사가 짓고 싶어진 샐러리맨이 6개월이나 1년 직장에 휴가를 내고 작은 손가방 하나 들고 가서 살 수 있는 곳, 도시의 불빛과 문화가 그리워진 농촌 청년이 한 1년 맘놓고 도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 도시 아이들에게는 방학이 기다려지는 고향 마을이고, 나이 들어서는 마음놓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곳, 농촌의 부모가 자녀를 마음놓고 도시로 유학 보낼 수 있는 곳, 그곳에 가면 어디나 내 집이 있는 이런 마을들의 네트워크 - 이것이 내가 그려보는 인드라망(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 세계관의 모습 - 편집자 주)이다.
2. 좋은 욕구
그동안 집에서 농장까지 자동차로 다녔다. 그런데 농장을 가려면 국도에서 갈라져 약 3킬로미터 정도 차 한 대 정도만 다닐 수 있는 길을 올라가야 한다. 내가 출퇴근(?)하는 시간이 그 마을 사람들과 반대라서 처음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내 운전 경력이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제일 서툰 것이 후진이라서 좁은 길에서 만났을 때 교행(郊行)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기우였다. 군데군데 교행할 수 있는 장소에서 서로 기다려주는 모습, 지나치면서 서로 손을 흔들어주거나 목례하는 모습들이 하루 일과를 상쾌하게 시작하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상대를 배려하는 행위를 하면 받는 쪽도 유쾌하지만, 하는 쪽은 더 유쾌한 것 같다. 더구나 올라갈 때, 같은 방향인 사람을 함께 태우고 가면 두 사람 다 뭔가 뿌듯하다.
나는 운전하는 사람에게 있어 길이야말로 도(道)를 닦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를 하려고 할 때 자리를 내주면 즐거워진다. 좌회전하려고 기다리는 차를 위해 잠시 정지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일대가 밝은 에너지로 변한다.
물론 운전하다 보면 얌체를 만나서 화가 나는 경우도 있고, 끼어들기 힘들어서 조바심 나는 경우도 있고, 시간은 급한데 도로가 정체될 때 짜증이 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때야말로 진짜 도를 깨칠(?) 때이다. 사람마다 방식은 다르겠지만 이때야말로 화가 나지 않는 상태로 되는 가장 좋은 연습장인 것이다. 이것을 의식하고 하다 보면 자기로부터 밝은 에너지가 나가고 그것이 조금이나마 도로의 질서를 바꾸고 있다는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전에 일체(一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전을 하다가 불현듯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운전을 잘 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살려준 덕분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문득 얻었던 경험이 있다. 전에는 길에 서 있는 교통경찰을 보면 왠지 마음이 뜨끔했는데, ‘아! 저 사람이 나를 살려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사람이 그렇게 정답게 다가올 수 없었다.
나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때가 많다. 어찌 보면 인간에게 특유한 숭고본능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가 세상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좋은 마을’은 ‘좋은 욕구’로부터
‘좋은 마을’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좋은 욕구’다.
욕구는 인간의 가장 심층의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 머리로 생각하는 표층의식이 아니라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를 결정하는 의식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하고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경우에, 잘 보면 숨기고 싶어하는 속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욕구라고 생각한다.
이성(理性)으로 생각하는 의식의 변화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머리로는 생각을 하는데 실천이 잘 안 된다’고 자책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 엄격한 것이다. 머리로 생각을 내는 것만 해도 의식의 대단한 진화라고 생각한다. 불경(佛經)에도 마음을 내는 데 2겁(怯, 천지가 개벽하여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을 말함 - 편집자주), 그것을 체득하는 데 3겁(怯)이 걸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의식의 실태를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한다.
‘이성적 사고’와 ‘심층의 욕구’(또는 습(習))의 괴리에 대해서 그렇게 괴로워할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의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괴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이다. 어느 쪽으로 일치시키려고 하는가 하는 방향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옳은 길인가 하는 판단이 서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오랫동안 거쳐온 동물적 본능에 지게 되면 ‘인격의 분열’로 괴로움을 겪게 된다. 나는 머리로 마음을 내서 점차 욕구 그 자체의 질이 변해가는 것이 사람의 의식이 진화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그 과정이 순방향(順方向)으로 되면 건강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건강한 것이다.
어떻든 좋은 마을을 생각할 때 나에게 시스템이나 물질적 조건보다 ‘의식’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내 자신의 성향도 있겠지만, 나름대로는 그동안의 인간의 역사나 자신이 경험해온 세계를 통해 분명히 보이는 것이 있다.
물질․사회제도․의식은 개인과 사회와 인류가 진화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류를 진화시켜왔지만, 그 상호작용의 양태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서로 다르다. 동시대인 경우에도 사회에 따라서는 크게 다른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민족이라도 남북한이 크게 다르고, 한국 사회 안에서도 농촌과 도시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절대빈곤과 전제나 독재 아래 있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먼저 개개인의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적․물적 토대를 변혁하는 것이 일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산업화․민주화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행복한 사회가 오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화’라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화’를 인간 중심적 가치 추구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깨뜨리는 원인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인간화’는 물신의 지배와 이기적 원자화(原子化)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과의 진정한 조화를 위해 자연의 한 구성요소인 인간으로서 준비해야 할 몫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올바른 물질생활과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물질이나 시스템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작용의 양태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적어도 ‘좋은 마을’이라는 보다 진화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의식, 특히 심층의 욕구가 진화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욕구’는 행복해지기 위한 욕구
‘좋은 욕구’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 추구에 순행(順行)하는 욕구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되는 자유욕구를 특히 말하고 싶다. 이 자유욕구야말로 인간이 이 지상에 출현해온 이래 역사를 추동해온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자연의 제약이나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에서 인류는 많은 성과들을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부자유가 발생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욕구는 작동한다.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발전시킨 물질문명이 자연 생태계와의 부조화를 발생시키면 이번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으게 된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억제되거나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커지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제도를 변화시켜왔다. 그런데 이 두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뒤처진 부문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분야가 아닐까 한다.
지구 어디에서나 걸어다니면서 서로 얼굴을 보고 통화할 수 있게 된 인간이 가장 가까운 가족과도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인류의 현주소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이 마음의 부자유를 해결해야 한다. 물질적 생산력과 사회적 자유․평등이 상당히 진척된 그동안의 역사적 축적이야말로 보통의 사람들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단히 좋은 환경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제 이 마음의 분야가 나아가지 않으면 현재 봉착하고 있는 자연과의 부조화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점점 더 적은 인원이 지구 전체의 수요를 넘어서는 생산을 할 수 있게 된다(이미 그것이 시작되었고, 점점 가속화할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 즉 지구 한쪽의 풍요와 다른 한쪽의 기아, IMF 사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세계적 범위에서의 대량실업, 부정과 부패, 약자(노인을 포함)들의 어려운 삶, 새로운 세계 독재체제의 위험, 자연 생태계의 파괴 등이 지금의 사회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약육강식의 인간 이전의 자연 질서로 돌아가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 이후의 새로운 질서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중심적 가치체계와 소유의식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류 존속의 조건으로 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음’에 대해서는 인류의 선각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밝혀놓은 것이 있다. 다만 이런 자유에의 길이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과정들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석가는 마음의 부자유를 탐․진․치(貪嗔痴)라고 너무나 명료하게 지적하셨다. 이러한 부자유를 인류가 보편적으로 넘어 설 수 있는 물질적․사회적 조건들을 만들어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한다.
나는 21세기의 의식혁명은 인간의 자유욕구가 바로 이 마음의 삼독(三毒)으로부터 자유스럽고 싶어하는 욕구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화[嗔]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탐욕[貪]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또 이 ‘나’가 독립적으로 불변하는 실체라는 어리석음[痴]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얼마나 자유로운가! 정말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면 이런 사람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람으로 되고 싶은 욕구, 나는 그것이 ‘좋은 욕구’라고 생각한다.
구체적 삶 속에 회향
인간의 자유욕구 가운데서 ‘마음의 자유’에 눈이 돌려지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흐름으로 존재하지만, 이것이 극단에 흘러 모든 것을 ‘마음’ 하나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게 된다. 이것은 물질생활(자연과의 관계)과 사회 시스템(사람과의 관계)에 회향될 때 비로소 진실하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사회적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 마음의 변혁을 이루는 쉬운 길일 수 있는 것이다. ‘에고로부터 자유’를 관념 자체로 해결하는 것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에 의해서 훨씬 쉽게 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좋은 마을’을 그려볼 때 지금의 여러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면 ‘시스템으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마음이 나아가 시스템을 변화시켜가는 것’이 진화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순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는 마을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아마도 지금의 우리들 실태에서 보면 가족 단위의 개별경영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물론 그보다 더 나아간 경영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은 말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보다 사람의 냄새가 나는 마을, 산업사회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 이후의 마을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두 가지를 제안해보고 싶다.
하나는 ‘자유노동’의 실천이다. 말 그대로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 노동이 마을의 생산력의 한 부분으로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대가가 없어서 자유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행위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유형․무형의 부자유가 없는 상태가 아니면 섣불리 시작할 일이 아니다. 자유노동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비난하거나 그 양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공동의 ‘마을지갑’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가족은 각각의 지갑을 갖는다. 그 가운데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하고 남는 것을 ‘마을지갑’에 넣는 것이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의사이다. 유형․무형의 강제나 비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노동보다는 쉬울 수 있는데, 그것은 행위자가 누구인지, 그 액수가 얼마인지를 모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식이 나아가는 것만큼, 마을의 생산력이 나아가는 것만큼 이 지갑은 커질 것이다. 이 자유노동과 마을지갑이 커지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마을의 시스템이 변화되어갈 것이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보다 쉽게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게 될 것이다.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마을들의 네트워크가 하나의 국가 단위, 더 나아가 세계 단위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자유노동’의 수요와 공급을 연결시키는 고도로 발전된 컴퓨터망의 유쾌한 움직임, 풍성한 ‘세계의 지갑’에서 물 흐르듯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는 물자의 흐름을. 사랑과 평화가 강처럼 흐르는 것이다.
3. 좋은 생산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다. 기특(奇特)한 사람이나 가족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에서는 다를 수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에게는 맞는 말이다. 자신의 의․식․주가 안정되었을 때에야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그려볼 때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것이 그 생산력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근원적인 것이 경제 문제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희소성을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화는 유한한데,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 희소성에 대해 두 방향에서 도전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도 생각된다. 하나는 재화를 충분히(물이나 공기처럼 무한에 가깝게) 생산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욕망의 질을 업그레이드하여 궁극적으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두 가지 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길은 평탄한 대로(大路)가 아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희생, 수없이 많은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걸어온 길이었다. 이 길이 험난했던 것은 하나의 길이 아니라 두 개의 다른 길을 통해 진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즉, 현상세계의 변혁과 마음세계의 혁명이 서로 다른 길을 밟아온 것이다.
높은 생산력은 진보의 바탕
이제 우리는 앞이 확 트인 큰 길이 보이는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 그 길은 자본주의라는 분수령을 넘어서야 보이는 길이다. 이 분수령을 넘어서는 길에서 두 길은 하나로 통합될 것이며, 역으로 하나로 통합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분수령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100년 전에 비해 지금의 조건들은 엄청나게 진전되었다. 자세히 분석하는 것은 내 능력에 부치는 일이기도 하고 이 글에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총량면에서 인류의 수요를 넘어서는 생산력, 사회적 자유나 평등에 대한 보편적 합의와 시스템의 발전, 관념계에 있어 신세대의 높은 자유도(自由度) 등은 100년 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새롭게 발생한 험난한 장애물들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당면한 현실적 과제들이긴 하다. 생산력과 자연 생태계의 급증하는 모순, 한 쪽의 잉여와 다른 쪽의 기아가 공존하는 불평등(특히 국가간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삶 속에서 과시하고 지배하려는 욕구(욕구를 업그레이드하는 것과는 반대방향)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문화, 그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왜곡된 자원배분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험난한 과제들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나아갈 수 있다.
나는 그 길이 이미 도달한 성과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인류의 총수요를 넘어서는 생산력이야말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조건으로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높은 생산력은 여전히 ‘좋은 생산’의 가장 우선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농촌에서 좋은 마을을 꿈꿀 때 아마 가장 보편적인 바탕이 되는 생산은 유기농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게 된 배경은 화학비료와 농약 등에 의한 농업혁명이 맬서스(Thomas R. Malthus)의 인구론(식량의 증가가 인구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론)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기농업이라고 해도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농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진전된 과학과 기술을 바탕으로 유기농업의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좀 역설적이지만, 화학비료나 농약 등에 의해서 일반적 수요가 충족되고 있는데도 낮은 생산성과 낮은 소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일반 보편적인 방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풀과 씨름하는 농민의 모습이 과연 아름다운 모습일까. 새벽 별을 보며 나가서 달을 보며 귀가하는 생활이 된다면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길은 아니라고 본다. ‘좋은 생산’은 여전히 높은 생산력을 보장하는 것이며,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리는 생산이다.
친환경 유기농업을 하자고 하는 것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생산을 멀리 하는 것은 그것이 일시적으로 높은 생산력을 나타낼지 몰라도 길게 보면 그것은 생산력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쾌적한 삶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자연과 잘 조화되며, 사람을 사람으로 살리는 높은 생산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마을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기계화, 자동화와 결합된 유기순환농업
농업에서 ‘좋은 생산’이란 우선 두 가지가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땅을 살리고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순환생산이다.
유기농업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 농업의 장래라고 보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유기농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순환농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축산법이 발전되어야 하며, 이 축산과 작물 경작이 서로 순환되어야 한다. 이 순환의 단위나 범위는 한 농가 단위의 작은 범위로부터 보다 큰 단위 간의 광역순환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는 사람을 살리는 생산이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하여 쾌적한 생산 활동이 되도록 가능한 한 기계화․자동화하고 무공해 약품을 적극적으로 개발 활용하는 것이다(가끔 유기농업을 지향하는 사람들 가운데 기계 사용에 대해서 회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에너지 자원의 고갈이나 공해 발생과 같은 문제는 별도의 테마겠지만). 기계나 약품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사람이 수십 배 수백 배 애를 쓰는 것은 결코 노동의 신성함도 사람을 살리는 길도 아닐 것이다.
유기농업에 대해서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람에게 무리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그 목적하는 바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계를 쓰지 않고, 심지어 동물을 기르고 이용하는 것까지 삼가면서, 즐겁게 노동의 기쁨과 영적인 성숙을 도모하며 살아간다면 일반 보편적인 것과 관계없이 그것은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모습으로는 퇴비 생산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기계화된 순환농업을 그려보자. 대규모의 농업 생산도 유기순환농업으로 할 수 있다는 전망이 생겨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관행농업으로부터 일반 보편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려 하지만 우리가 농업이나 농촌의 생산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1차 산업으로서의 생산력을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요즘은 농축산 가공이 대기업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다품종 소량생산의 경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야가 농민에 의한 농산가공 분야가 아닌가 한다. 다양한 입맛과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과 함께 농민의 마음이 들어 있는 농산가공품이 새로운 유통 시스템을 통해 도시인들의 식탁에 점점 더 많이 공급되는 것을 그려볼 수 있다.
또한 농촌이 도시민들의 마음의 고향이 되도록 농촌과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농촌에서의 가장 고도한 생산력으로 되는 것이다. 농촌이 도시인들의 휴양처 더 나아가 함양처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상업주의가 우선되는 관광 농업이나 펜션 산업만 가지고는 부족할 것이다. 나는 따뜻한 마음, 농심(農心)이 가장 고도의 생산력으로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시대에 농업과 농촌의 선구적인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의식에 부합하는 생산관계
다음으로 ‘좋은 생산’은 ‘좋은 생산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유나 분배의 형태를 기준으로 경영시스템을 나눈다면 개별경영, 협동경영, 무소유경영 등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경영이나 국가경영은 생산 주체들의 동기나 의식에 따라 외적 형태가 유사하다 해도 내용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이윤 동기가 지배적이면(자본가․노동자 공히) 기업경영이라 해도 본질상으로는 개별경영이 더 효율적으로 확대된 모습인 것이다. 국가경영이라 하더라도 그 국가의 성격이나 생산 주체들의 의식에 따라 봉건적 생산관계에서부터 무소유경영에 가까운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인류의 발전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소유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무소유경영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바로 무소유경영이 좋은 생산관계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일반적 의식에 부합되는 생산관계가 좋은 생산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국가 단위나 세계적인 단위로 보다 진보된 생산관계를 인위적으로 추구했지만 실패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심층의 의식에 부합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한다. 생산관계를 바꿔서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의식이 변화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있고, 그 변화 속도 또한 다른 현상의 변화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이다.
일시적이라도 성공한 사례들은 대체로 그 시대 사람들의 심층의식이 욕구하는 것에 일치했을 때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큰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떤 경영 형태가 더 우월한 것인가 하고 따지는 것으로부터 어떤 경영 형태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편하고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명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가로 선택해야 한다. 나는 지금의 조건에서는 개별경영이 사람들의 의식에 일반적으로 부합하는 형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몇 년 전 겨울 설악산에 갔다가 밤새 큰 눈이 왔는데 다음 날 눈길이 위험한 곳마다 스노체인(snow chain)을 파는 차가 와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란 참 편한 시스템이구나’ 하고 느꼈던 적이 있다. 의무나 감시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마음껏 자유롭게 쓰고 싶어하는 지금의 일반적인 욕구와 잘 조화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농촌에서 ‘좋은 마을’을 그려볼 때 우선 가장 좋은 모델로 떠오르는 것은 협동경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은 이런 경영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선 내 자신의 실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자립적이고 자유로운 개별경영이 바탕이 된 ‘좋은 이웃’의 관계이다. 이 좋은 이웃의 관계를 발전시켜가는 것이다. 이 바탕 위에 생산이나 유통에서 서로 협동해가는 것이다. 품앗이나 공동출하, 공동구입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진척될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자유노동’과 ‘마을지갑’ 만들기가 마음이 나아가는 것만큼 확대될 것이다. 그 나아가는 것만큼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변화시킬 수 있는 지점이 오리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개별경영이 오히려 불편하게 되는 시점이 오게 될 것이며, 이때 사람들은 협동경영이나 무소유경영 가운데 자신들이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순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으로 ‘좋은 생산력’과 ‘좋은 생산관계’를 추구한다면 어떤 종류의 무리나 강제도 없어야 할 것이다.
4. 좋은 유통
다음에 이야기하는 예는 실제는 아니다.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례에 약간의 희망사항을 덧붙인 것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진달래마을의 예
진달래마을, 아침 8시.
갑동 씨는 마을 공용의 탑차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생산물들을 확인해서 싣는다. 일반 채소나 달걀은 개별 농가가 생산한 것이지만, 햄 소시지나 된장 같은 생산자협동조합이 만든 것도 있다. 오늘은 1주일에 한 번 인근의 광주시에 있는 이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은 개나리 아파트를 찾는 날. 한 시간 정도 물건을 실은 다음 9시에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광주를 향해 상쾌한 기분으로 출발한다.
갑동 씨는 갓 결혼한 35세의 청년으로, 그 자신 양계(유정란)를 약 3,000수 하면서 1주일에 한 번 이 일을 하고 있다. 오늘 하루 닭은 호박농사를 짓는 이웃의 을동 아저씨가 보아주기로 하고 있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개나리 아파트에 도착하니 아파트 부녀회 회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한 시간 정도 반짝 장이 선다. 매주 한 번씩 만나다 보니 한 가족처럼 가까워졌다. 아파트 부녀회도 이 일이 시작되고 나서 훨씬 활기가 넘치고 아파트 공동체 만들기도 탄력이 붙었다고 한다.
한 1년 째 하다 보니 이제 거의 수요-공급이 맞는다. 쌀을 비롯해서 각종 야채와 달걀․햄 소시지․참기름․들기름․된장․고추장 등 일부 육류와 해산물을 빼고는 거의 오늘 장 보는 것으로 식탁이 차려진다. 처음에는 수요-공급이 안 맞아 애를 먹기도 했지만, 근방에 장미마을(해바라기 아파트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과 서로 교환하다 보니 양쪽 다 잘 맞아돌아간다.
진달래마을과 개나리 아파트가 인연이 맺어진 것은 2년 전 유기순환농업 마을로 알려진 이 마을에 아파트 부녀회에서 참관을 오면서부터. 주 5일제가 실시되고 나서부터는 엄마들의 손에 이끌려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마을에 오는 빈도가 늘었고, 방학이면 아이들이 으레 외갓집 가듯이 마을에 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한 1년 하고 나서 오늘 같은 장이 서게 된 것이다.
갑동 씨는 마침 오늘이 생일이라는 부녀회원의 초대를 받아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한다. 집에는 엄마들과 인근에서 자영업을 하는 남편들이 마치 친정 동생처럼 갑동 씨를 기다리고 있다. 서로 1주일간 지낸 이야기, 여자들의 즐거운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두 시쯤 아파트를 나와 근처의 대형 수퍼에 들러 마을 사람들이 부탁한 물건들을 사고 나니 세 시가 조금 지난다. 아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최근 노래가 담긴 음반을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니 네 시 반이 된다. 양계장을 돌아보니 을동이 아저씨가 통로까지 깨끗이 쓸어놓으셨다.
저녁을 먹고 8시에 마을회관에 간다. 결산을 하고 나서, 그날 다녀온 이야기와 아파트 주민들이 전하는 인사들을 나누면서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운다.
마을회관 한 쪽에는 주머니가 하나 매달려 있는데, 이것을 마을 사람들은 ‘마을지갑’이라고 부른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 주머니에 봉투를 넣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갑동 씨의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다.
학면의 예
학면(鶴面) 생산자조합은 서울 서초구의 무등 생활협동조합과 하나의 생산․소비․유통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학면 생산자 조합에는 50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학면 전체 세대주의 60% 가량이다. 이 중에는 개별농도 있고 협동경영을 하는 영농조합들도 있다.
조합원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업농이나 대농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해서 시장에서 대단한 경쟁력을 갖춘 사람들도 있고, 면내의 학교나 의료 생협, 가구 공장에 직장을 갖고 있거나 공무원 등 여러가지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학면 생산자조합은 거의 대부분의 농산물을 유기농으로 생산하여 공급하거나 이를 원료로 가공한 식품들을 도시의 식탁에 올리고 있는데, 된장․청국장과 장아찌류는 인기가 높다. 특히 무말랭이 무침과 고추장아찌는 그 원료의 우수함과 만든 사람의 정성이 합쳐져 가히 예술품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가공 분야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이점을 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생산자가 자기 이름을 반드시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학면 생산자조합의 조합원들은 유통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든 정성을 생산에 전념한다. 이것이 무등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들과 마음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1년에 두 번 만나 축제를 같이 하는데, 특히 가을의 수확제는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이때는 조합원 비조합원 구분하지 않고 인근의 다른 면 사람들도 함께 즐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마음 쓰는 것이 있다면 같은 생산자들끼리 어떻게 하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서로의 이익이나 의견의 다름을 어떻게 조화시켜나갈 것인가를 서로 마음을 다해 함께 탐구하고 실천한다. 특히 작물이나 가공품의 선정이라든가 품질에 대한 이견의 조정이 어려웠지만 조합의 시스템을 꾸준히 개선하고 조합의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써 상당한 정도 해결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역시 한사람 한사람이 목전의 이익을 넘어설 수 있는 의식혁명이 중요하고, 시스템보다도 상생과 협동의 문화가 보다 근원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보다 근원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자체로 의식개혁의 프로그램을 운영해보자는 의견이 나와서 ‘일단 한 번 해보자’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진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고 있다.
갑순 씨는 생산자조합에서 무등 생활협동조합과 일상적인 연락업무를 맡고 있는 실무자다. 여러가지 상대 쪽의 제안(더러 항의도 있지만)을 받아서 그것을 이쪽에 전달하고 그 결과를 알리는 일과 이쪽의 제안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마을 참관이나 공동의 행사를 준비하는 일도 맡고 있다.
무등 쪽의 상대역은 을순 씨가 맡고 있는데 같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자기 쪽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자신들을 발견하면서 자신들이 왜 이 일에 뛰어 들었나 하는 반성이 누가 먼저랄 것이 없게 생겼다는 것이 이 도농 공동체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이 서로 전화하는 것을 옆에서 보노라면 누가 어느 쪽의 실무자인가를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시장을 넘어
농업에 관한 한 시장에 맡겨서만은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시장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이후’의 질서를 농업과 농촌 분야에서 먼저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농업 생산과 농민의 삶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난 번 WTO 회의에서 우리의 농민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던져 말하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그 점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국제 자유무역 질서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그 자유무역 질서에 역행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유시장 질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을지 모르고, 적어도 농업 문제만은 자유무역의 예외로 하자는 이야기는 지금의 국제질서 속에서는 현실성이 약해 보인다. 그러나 자유무역이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실이 있어야 한다.
만일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하게 나타나는 사회라면 경제적 약자에 속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국가 이익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신념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 특히 자유무역으로 이익을 많이 보는 계층이 그 이익을 경제적 약자 그 중에서도 자유무역에 의해 가장 피해를 보는 농민들에게 나눌 수 있는 사회경제적 시스템과 의식을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농민들을 도시의 차디찬 아스팔트나 이름 모를 외국의 도시에 내몰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라 안에서 여러가지 방향의 자조 노력(국가․농협․농민 등)이 냉엄한 국제 환경에서 우리의 농업, 농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본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시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즉 시장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시장의 틈새 속에서 시장을 넘어서는 질서가 얼마나 자랄 수 있느냐에 앞으로 우리 농업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시장 질서를 무시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시장을 넘어선다는 것은 결국 두 길을 함께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시장에서의 경쟁력으로 살아남아 번영하는 길과 시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수입자유화의 물결은 시장질서 안에서 우리 농업을 구조조정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냉혹하게 진행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쟁력을 갖춘 대농이나 기업농이 출현할 것이다. 아마도 많은 농민들이 농업을 떠나게 될 것이다(이미 고령화된 농촌의 일부는 농민들의 자연 수명과 함께 해체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연 조건은 경쟁력을 갖춘 대농이나 기업농에 맡겨서만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 단위의 중소농이 살아남아서 번영하는 것이 우리의 경우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식량 안보(자주성)의 면에서도 중요하고, 환경 생태계의 보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단위의 중소농이 살아남으려면 시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가 아니면 어려운 것이다.
시장을 넘어서는 질서는 결국 사람들이 이윤 동기를 넘어서는 의식의 뒷받침이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가격 법칙을 넘어서 농민이 도시인들의 식탁을 책임지고, 도시인들이 농민의 삶(재생산 능력)을 보장하는 새로운 질서는 생산자인 농민, 소비자인 도시민이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농민의 의료․교육․노후 생활을 보장하는 문제도 국민적 합의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지금의 우리들 의식이나 현실로 볼 때 상당한 어려움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길, 즉 농업에 관한 한 시장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질서가 시장과 공존하는 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의 시장에서 보면 가장 낙후한 골칫거리인 농업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역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나타날 가장 선진적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북쪽에 새로운 시장 경제의 모델을!
일반적으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야만 한다. 시장의 장점을 최대로 살리면서도 언젠가 가장 선진적인 질서로 무리 없이 인간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은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토지만은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바탕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길은 없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한국은 이미 토지의 사적 소유를 근간으로 시장경제가 발전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그러다 보니 북쪽으로 시선이 간다. 지금의 수령절대주의와 같은 봉건적 독재체제가 민주화되는 것과 함께 그 이후 나타날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아마도 개인의 창발성과 에너지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시장경제로 전환되어야 하겠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국유의 원칙이 살려졌으면 한다. 토지가 투기와 축재의 온상으로 되지 않는 시장경제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북쪽이 갖는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그런 바탕에서 북쪽에 나타날 새로운 마을들이 그려진다. 서로 다른 사회 경제적 토대에서 출발하지만, 남북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그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를 향해 남북의 마을들이 서로 상생하고 조화되는 모습을 하루 빨리 볼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가자.
5. 좋은 소비
장수군 번암에 자리 잡은 지 벌써 석 달이 되었다.
장독에는 규모는 작지만 된장․고추장․간장이 담겨 있고, 마늘쫑과 마늘장아찌도 준비했다. 밭에는 고추 1,200주를 비롯해, 너무 많다 싶을 정도의 야채로 그득하다. 요즘은 더 그득하게 보이는 것이 풀이다. 역시 풀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가 큰 과제인 것 같다.
생산협동조합을 10월에 발족하기로 준비하고 있다. 경영 방식을 협동경영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까, 비록 지금은 우리 가족 한 가구가 살고 있어도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조만간 이루어질 이곳 마을의 선발대라는 생각이 마음 편하게 다가온다. 여러가지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그려지는 것도 있지만, 우선 잘 정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해보는 일도 많고, 특히 가공(전통 된장․고추장 등)을 주업으로 하려고 하다 보니 그 인허가 과정이 만만치 않아 어려움도 많았지만,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셔서 비교적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일은 순서가 있어서 서두른다고 빨리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면서, 공연히 마음만 바쁜 자신의 빈약한 내공(?)에 속상해 한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도움을 주신 분들의 따뜻한 정에 힘든 마음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특히 준비하는 전과정에서 아내와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한 가족이 자립할 수 있는 적정한 경제 규모에 대해서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앞으로의 삶이 ‘절약하며 내핍(耐乏)하는 생활’이 될 것인지 ‘자족하는 풍요로운 삶’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싶어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들 둘이 한꺼번에 대학을 가게 되어서 그 학비가 크게 부담스러웠고, 어머니의 입장과 아버지의 입장이 다른 면도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융자금․장학금 등) 할 수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경제적 부담으로부터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자녀의 교육비 부담은 부모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 학비 부담을 생각해서 월수입 250만 원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에 주로 거기에 맞추려고 생산이나 유통 계획을 짤 수밖에 없었는데 이 생각 자체가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해보지 않은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농촌에 정착해서 이웃과 사이좋게 살아가려는 꿈과는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들 학비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지면서 소득의 목표를 월 150만 원 정도로 낮춰잡으면서 우리는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느끼고 있다(물론 지금도 나와 아내의 감각의 차이도 있고, 사업가 기질이 있는 아내와 백면서생을 면치 못하는 나와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로 월 100만 원 소득을 얻는 것도 일반적인 귀농자에게는 대단히 어렵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목표를 많이 낮춰잡다 보니 우선 생각 속에서라도 훨씬 편안하게 다가온다. 다행히 소비 수준에 대한 우리 부부의 생각은 일치하는데, 그 목표는 단순 소박한 삶이다. 살아봐야 알겠지만 농촌에 사는 이점을 최대로 살린다면 넉넉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넉넉하게’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무엇일까. 이것은 삶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새롭게 많이 이야기되는 ‘단순한 삶’(Simple life)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단순한 삶
단순한 삶이란 무엇일까.
단순한 삶이라 하면 동양에서는 주로 노장 사상이나 오래 전부터 그려오던 안빈낙도의 삶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런 삶은 나이가 든 좀 특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나 관심을 갖는 삶의 형태일 뿐,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렸었다.
근대화의 격랑을 거치면서 부의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사람들의 마음을 틀어쥐고, 더 넓은 주택, 좋은 차, 훌륭한 가전제품, 그 가격에 의해 평가되는 고가의 문화용품 등을 갖추기 위한 경쟁의 대열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한다.
남보다 뒤처지지 않게 자녀의 결혼식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보험에 드는 것처럼 수많은 결혼식에 참가한다. 아이를 좋은 학교에 넣기 위해서 그 사교육비를 충당하려고 궂은일도 마다 않는 모정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삶의 활기가 평일에도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단순 소박한 삶이라는 말은 뭔가 생소한 말, 경쟁에 뒤진 사람들이나 시대와 동떨어진 사람들의 넋두리처럼 들렸었다.
그런데 나는 왜 ‘들렸었다’고 과거 시제로 말하는 것일까? 아직 많지는 않지만 이 ‘단순한 삶’이라는 말이 ‘Simple life’라는 영어로 이제 가장 진취적인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영어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서양 선진국에 대한 사대(事大)의 경향에서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어로 표현되어서 우리 앞에 다시 등장하는 이 ‘Simple life’라는 단어 속에 사실은 역사 발전의 과정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여러 선진국들의 발전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여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의 집약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 빈곤의 상태, 물질적 수요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의 사회나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일차적 목표는 물질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물질적 풍요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되는 것이다. 이런 단계에 속한 사회에서는 ‘단순한 삶’이란 일부 높은 정신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안빈낙도’의 삶으로 비쳐지게 되고 일반 대중의 삶과는 유리되는 목표로 비춰진다. 오히려 에너지를 떨어뜨리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 못하게 하는 은둔적인 삶으로 비쳐진다.
그런데 ‘Simple life’는 그런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게 다가온다. 왜일까?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도의 물질문명, 경쟁과 과시의 삶을 살아본 선진 사회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지금까지의 삶의 형태를 그 근원에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직접 그런 물질적 풍요를 경험해보고 나서 그 허무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바로 자기의 주위에서 그런 삶이 귀결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생기기도 한다. 한 사회가 적어도 총체적 궁핍에서 벗어나서 고도 소비사회를 경험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단순한 삶’이라는 목표를 자기 삶의 목표로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그 사회가 전반적으로(자신은 그렇지 않는 경우도 포함해서) 고도 소비사회를 경험하게 되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다 고차적인 삶의 목표를 갖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게 된다.
‘보다 고차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정신없이 추구해온 목표들이 결코 진정한 행복으로 되지 않는다는 자각이야말로 보다 고차의 삶을 추구하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다 고차적인 삶이란 한마디로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인 것이다.
이 ‘존재의 삶’도 우리가 옛날부터 엄청나게 해온 말이고, 모든 성현들이 그것을 지향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그동안 소유 지향의 사회 문화 속에서 그다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에 유행어처럼 이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바로 ‘웰빙’이다. ‘Well being’ - 이 얼마나 기다려온 말인가. 뭐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직역하면 ‘잘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인데, 이것은 삶의 목표에서의 혁명인 것이다. 그렇게 어렵고 멀리 느껴졌던 존재의 삶이라는 목표가 ‘Well being’이라는 영어로 우리 옆에 유행어처럼 친근하게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말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Well being = Simple life
요즘 웰빙이라는 말이 가장 잘 쓰이는 것은 아마도 ‘웰빙 아파트’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대단히 넓은 평수(그 안에 인조 정원을 꾸밀 정도), 고급의 환경친화적 소재, 도시의 아파트 공간에 옮겨놓은 인조의 자연 등이 먼저 연상된다. 이것은 나쁜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웰빙의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본질적인 것은 ‘소유의 삶’으로부터 ‘존재의 삶’으로 그 목표가 바뀌는 것이다.
일부 부유층이 그 인조의 자연친화적 환경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웰빙의 본질을 근본에서 왜곡시킬 수 있다. 자연친화적 삶과 ‘소유와 경쟁’의 삶의 방식은 사실 근본에서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자연친화적 삶이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행복한 삶이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사이좋은 삶인 것이다. 값비싼 인조 자연을 만들어 그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는 삶이 과연 웰빙일까? 마음이 풍요로운 ‘존재의 삶’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Well being’은 ‘Simple life’를 실현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Simple life’는 물질생활과 사회생활, 정신생활 전반에 걸쳐 일관된, 즉 서로 모순되지 않는 삶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마을의 삶의 내용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로 ‘Well being’과 ‘Simple life'를 들고 싶다.
웰빙을 위하여
마음과 물질이 다 같이 쾌적하고 풍요로운 삶이 ‘웰빙’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 수준은 마음의 상태와 사회 전반의 복지 수준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우선 마음이 단순해야 한다.
마음이 단순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비교 경쟁심과 우열감을 극복해야 한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채 끝없이 경쟁하려고 하는 마음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런 마음에서 해방되는 것이 물질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단순하게 하는 근원이 된다. 돈과 권력, 명예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결코 단순한 삶은 실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을 초월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비본질적인 것은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신장시키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은둔자의 삶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새로운 생활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또는 자신의 종교에 따라(종교가 없는 경우도 포함) 다양한 영성 개발이 생활화된다. 명상․기도․참선이나 예술활동이 생활화되는 것이다.
일정한 부(富)나 정당한 권위,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은 자연스럽게 올 때만 마음의 평화를 맛볼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이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면 물질에 대한 욕구가 자연스럽게 단순해진다. 보다 높은 안정과 평화를 맛보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나 과시를 위한 소비 욕구는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의식주 생활 전반에서 소박함이 우러나게 된다. 쾌적함은 이런 소박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웰빙족이다.
농촌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일과 생활에 편리하도록 설계되고 가능하면 친환경적인 소재의 주택, 검소하면서도 실용적인 옷차림, 직접 재배한 깨끗한 야채로 풍성한 식탁이 그의 삶을 쾌적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허례허식에 의한 각종 스트레스에서 해방된다.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은 함께 슬퍼하는 아름다운 풍속은 살려지겠지만, 지금의 결혼․장례문화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우선 자기 자녀의 결혼식을 청첩장 없이 알릴 수 있는 사람들이 축복하는 가운데 하기 때문에 결혼식을 앞둔 신랑신부나 그 가족들이 결혼식 준비에 신경쓰느라고 막상 가장 중요한 결혼을 위한 준비는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결혼한 사람들은 이혼율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웰빙족의 새로운 결혼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장례문화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일종의 보험에 드는 기분으로 열심히 챙겨야 하는 그런 허례허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자녀의 교육에 대해서도 출세를 위한 교육에서 부모가 해방되면 아이는 자신의 적성과 희망에 따라 오히려 잘 성장하게 될 것이다. 이 분야에서야말로 비교와 경쟁심, 우열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웰빙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자녀의 교육 분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교육에서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에 웰빙족이 앞장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적어도 고등학교 정도의 교육은 국가가 책임을 지는 사회로 될 것이다.
농촌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이 제일 걱정하는 것이 자녀교육에 대해서인 경우가 많은데, 웰빙을 위해 농촌 생활을 원한다면 자녀의 교육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웰빙이 되는지에 대해 마음에서 뭔가 ‘넘어섬’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몇 가지 분야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지만, 사실 이런 삶의 태도들이 제대로 뿌리내리려면 사회적 국가적 환경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국가적 환경을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인정 넘치는 마을
그동안 우리 가족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상 인연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던 곳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땅을 일구어온 사람들이며, 나를 이곳에 오게 한 많은 사람들의 인연을 생각하면, 때로는 하나로 이어져 있는 세상살이의 불가사의함마저 느낄 때가 많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만 하더라도 전엔 아홉 가구가 살았었다. 이제 이곳에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마을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와 이농(離農)의 물결이 지나간 다음, 노령화되고 빈집이 많은, 심하게는 마을 전체가 비어버린 농촌을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물결은 어떤 것일까.
한 가지로 뭉뚱그려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의 이농이 경제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새로운 귀농은 문화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귀농하려는 사람들의 구체적 동기는 천차만별이지만 그 공통점이 단순한 경제적 동기를 넘어서서 산업사회 이후의 삶을 꿈꾸는 데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물질도 마음도 막힘없이 흐르는 사회, 돈이 아니라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 우리 모두가 그리는 꿈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구체적 방식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가장 편한 방식으로
자신도 그동안 여러 차례 그 방식이 바뀌었고, 앞으로도 더 좋은 방식이 있으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마다 조건(경제력․노동력․식구 등)과 개성․취향이 다르다. 통나무집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흙집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한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양옥을 편해 하는 사람도 있다. 가까이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고, 좀 떨어져서 사는 것이 편한 사람도 있다. 개별적으로 사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고, 공동체적 삶이 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농산가공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일(교사․공무원, 기타)을 할 수도 있다. 농촌에 정착해서 웰빙을 하려고 할 때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어떤 삶, 어떤 경영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먼저 자신의 속마음을 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삶의 형태와 자신이 가장 편해 하는 삶이 일치하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나로서는 우선 자신이 편한 삶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게 시작해서 점차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이행해가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자신이 그리는 이상은 공동체의 삶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억지로 맞추려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의 상태[自然]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 공동체를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것이라는 형태에 사로잡혀서는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고 무리수를 범하기 쉽다.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훌륭하게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농촌에는 다양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있다. 정보가 폭 넓게 공유되고 네트워크가 잘 이루어지면 자신에게 맞는 삶을 편하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동안 인정이 넘치는 마을을 만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좋은 욕구, 좋은 생산, 좋은 유통, 좋은 소비생활 등에 대해 나 나름대로의 꿈과 생각을 피력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한 조건들이라고 믿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 간의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이야말로 마을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정치적인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나 사회의 민주화는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독재나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과거에 비하면 비할 수 없이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이제 더 본질적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독재에 항거할 때는 그것이 당면 과제이기 때문에 아직 인식되지 못했지만, 일단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면 더 근본적인 것들이 보이게 되는데, 그 자체가 진보라고 생각한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방식으로는 뭔가 해결이 안 되는 것들이 느껴진다. 다수결만 가지고는 증오나 반목이 없이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나 이견을 조정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점점 많이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넓은 범위(국가나 넓은 지역)에서는 다수결을 넘어서는 의사소통 방식을 실현하는 것은 아직은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이러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작은 단위는 가족이고, 그 다음에 해봄직한 것은 마을이다. 여기서는 다수결을 넘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연습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진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끼리의 소통이 사실은 대단히 어렵다. 이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의지와 방식과 기술을 다 함께 연습해가야 한다.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이 연습이 각자의 의식과 태도를 바꾸는 데 상승작용을 할 수 있으면 대단히 좋다고 생각한다. 이 연습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아집이 대단히 강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남에 대해서든 자신에 대해서든, ‘왜 이렇게 아집이 강할까’ 하고 비난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면 연습이 제대로 되기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아집이 강한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여기서부터 조금씩 소통의 폭을 넓혀가는 것을 서로 기뻐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다.
다른 사람과 소통이 안 되면 우선 자신이 힘이 드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일 것이다. 공포․미움․화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한 하늘 아래서 다른 사람과 사이 나쁘게 살아간다면 결코 유쾌한 삶으로는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소통이 잘 안 이루어진다. 따라서 소통을 위해서는 여러 방면의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첫째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또 자신의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이 원활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굳세게 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소통’을 마음속에서 다짐하거나 벽에 써 붙여놓고 강조하는 것으로는 연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연습한다는 것은 ‘나는 소통하고 싶은데 저 사람 때문에 안 돼’ 하는 생각이 들 때 ‘과연 내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나’ 하고 반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소통의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 연습의 방향이 잘못 되어 있는 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진정으로 소통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면 먼저 자신을 검토하는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아무리 검토하면 뭘 해, 저 사람은 꿈쩍도 안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이 연습의 고비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한 발 더 내딛는 것(상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소통을 원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는가를 점검할 좋은 기회로 삼는 것)이 진정한 연습으로 될 것이다. 개인이 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분위기가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더 쉽게 자신을 먼저 검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소통의 방식을 연습하는 것이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또는 누가 옳은지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방식으로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점에서는 야마기시회에서 추구하는 ‘연찬’ 방식이 대단히 뛰어난 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코 단정하지 않고 끝까지 그 시점에서 가장 옳은 것을 함께 탐구해가는 것이다.
단정하는 사고방식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전제로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다. 또 그 생각과 자기가 꽉 밀착되어 있어서 그 생각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면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서 참지 못한다.
연찬이란 상대를 향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이 방식이 대단히 이상적이기는 하나 아집이 많은 지금의 사람들에게 과연 어느 정도 가능할까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나 자신도 8년 가까이 연찬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 실태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방식의 방향만은 옳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수준에서 우선 가능한 사람들이라도 ‘상대를 향한 토론 문화’에서부터 ‘진리를 향한 연찬 문화’로 이행해가는 연습이 마을 민주주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하기 쉬운 것부터, 예를 들면 ‘마을의 조경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든지 ‘재활용’ 등과 같이 이해관계가 비교적 적게 걸린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농약이나 비료 사용’, 더 나아가면 ‘아이들의 교육’이나 ‘경영이나 유통’에 이르기까지, 연찬 방식을 점차적으로 넓혀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 번째로는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여러 면에서 기술(테크닉)을 연습해가야 한다. 전통적인 명상법이나 참선․기도 등과 함께, 근래 의식변혁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들이 성행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로 보인다.
공통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루고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기법들이 있는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기법을 생활화하는 것은 자신의 아집을 줄이고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대단히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소통에 대한 의지도 있고, 연찬 방식으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자신의 마음의 상태가 그렇지 못하면 공염불이 되기 쉽다.
자신의 마음을 보다 자유롭게 하기 위한 테크닉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 경우에 이런 테크닉이 자신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편하게 하는 데 그쳐버리면 그 효과가 오래 가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적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 막힘이 없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때 진실한 것으로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가족 또는 마을 성원들이 함께 할 수 있다면 대단한 상승효과가 있을 것이다. 각자가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수양’하고, 함께 연찬회 등을 하면 좋을 것이다. 마을 민주주의를 위해 이런 다양한 방법들이 창조되었으면 한다.
마음을 다루는(자기 수양) 기법 외에도 사람들 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기술이다. 서로가 선을 정해서 그 선을 넘어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스템일 수도 있고 규범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마음, 마음 하다 보면 지금 사람들의 의식의 실태에서 볼 때 무리가 생기기 쉽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지금의 실정에 맞게 ‘해야 할 일’이니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최소한의 약속을 바탕으로 자유도(自由度)를 높여 가는 것이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요즘은 사람들 간에 특히 가까운 사람들 간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원활한 소통을 의미한다. 물질도 사회적 관계도 마음의 세계에서도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때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인정이 넘치는 사회 속에서 살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