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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4/5)
의혹
필립 롬버드는 아침 일찍 깨어나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 아침에도 그는 일찍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귀기울였다. 바람이 좀 약해진 듯했으나 아직도 불고 있었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8시가 되자 바람이 다시 세어졌지만 롬버드는 듣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9시 30분, 롬버드는 침대 끝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계를 귀 가까이 갖다댔다. 그리고 이리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10시 25분 전, 그른 블로어의 방문을 두드렸다. 블로어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은 잠에 취해 있었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잘 자고 있군. 아무 근심도 없다는 증거지.」
블로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체 뭐요?」
「아무도 오지 않았소?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느냔 말이오. 몇 시인 줄 알고 있소?」
블로어는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만 여행용 자명종 시계를 어깨 너머로 보았다.
「10시 25분 전, 이만큼 잔 것 같지 않은데. 로저스는 어디 있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일이오.」
「뭐라고?」
「로저스는 아무데도 없소. 방에도 없고, 부엌에 불도 피워져 있지 않소.」
블로어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 갔을까? 섬 어딘가에 나가지 않았을까?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려 주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 어떤지 물어 봅시다.」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두의 방을 돌아보았다. 암스트롱은 옷을 다 입고 난 참이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블로어와 마찬가지로 아직 자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그들은 저택 안을 돌아다녀 보았다. 로저스의 방은 롬버드가 말한 대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는 자고 난 흔적이 있고, 면도와 비누를 쓴 것같이 보였다.
롬버드가 말했다.
「일어난 것은 확실하오.」
베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마음놓을 수 없소. 보일 때까지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게 좋겠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이 섬 어딘가에 있겠지.」
블로어가 옷을 입고 나와서 함께 되었다. 수염은 아직 깎지 않은 채였다.
「미스 브랜트는 어디 갔을까, 이상하잖소?」
모두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에밀리 브랜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비옷을 입고 있었다.
「바다가 아직 거칠어요. 오늘도 배가 못 뜨겠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혼자 걷고 있었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블로어 씨. 나는 잠시도 마음놓고 있지 않으니까요.」
블로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로저스를 못 보았습니까?」
에밀리 브랜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오, 한 번도 못 보았어요. 왜 그러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수염을 깎고, 옷을 단정히 입고, 틀니를 끼우고 층계를 내려왔다. 그리고 열려 있는 식당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침 식사 준비가 되어 있군.」
롬버드가 말했다.
「어젯밤 차려 놓은 건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접시와 포크와 나이프가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커피 주전자를 놓는 펠트 깔개도 놓여 있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베러였다. 그녀는 판사의 팔을 꽉 잡았다. 스포츠로 단련된 듯한 센 힘으로 팔을 잡히자 판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인디언이! 보세요!」
테이블 한가운데의 도자기 인형이 여섯 개밖에 없었다.
로저스의 시체는 곧 발견되었다. 가운데 뜰을 지나서 있는 좁은 빨래터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부엌에서 쓸 장작을 패고 있었다. 조그만 도끼가 아직도 손에 쥐어져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도끼가 문에 기대어져 있었다. 도끼날에 갈색 피가 묻어 있었다. 그것은 로저스의 목덜미에 난 깊은 상처와 관련있는 것이었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확실해. 범인은 뒤에서 몰래 다가가 그가 몸을 구부리고 있을 때 일격에 찍어 넘긴 거요.」
블로어는 도끼 자루와 부엌에서 가져온 듯한 행주를 살펴보고 있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암스트롱, 이런 짓을 하려면 남자 힘이 필요하오?」
암스트롱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도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러 크레이슨과 에밀리 브랜트는 부엌으로 가 있었다.
「그 아가씨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아가씨는 스포츠로 단련된 타입입니다. 미스 브랜트는 약해 보이지만, 그런 여자가 생각지도 못할 힘을 지니고 있는 법이지요. 게다가 정신이 이상해졌을 때에는 뜻밖의 힘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어가 몸을 일으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문은 없소. 자루를 닦아 놓았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베러 크레이슨이 가운데 뜰에 서 있었다. 그녀는 크게 웃으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 섬에서 꿀벌을 치나요? 어디 가면 꿀이 있지요?」
그들은 여우에게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베러는 정신이 돈 것인가.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내가 미친 것 같나요? 내가 묻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꿀벌, 벌집 말예요! 모르나요. 저 저주스러운 자장가를 읽지 않았나요? 어느 방에나 걸려 있어요. 처음부터 경고하고 있었어요. 우리들이 재빨리 알아차렸다면, 바로 여기에 와 보았어야 했어요. 일곱 인디언 소년이 장작을 팼다. 그 다음 구절을 아세요? 나는 외고 있어요! 여섯 인디언 소년이 벌집을 건드리며 장난쳤다―그래서 묻는 거예요. 이 섬에서는 꿀벌을 치나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으세요…….」
베러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암스트롱 의사가 앞으로 나아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더니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본디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베러는 가운데 뜰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걸어가며 말했다.
「미스 브랜트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겠어요. 누구든 장작을 갖다 주지 않겠어요?」
의사의 손자국이 그녀의 볼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블로어가 말했다.
「참 잘한 처지였소, 의사 선생.」
「참을 수가 없었소. 이런 상황에 여자의 히스테리까지 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녀는 히스테리가 될 타입이 아니오.」
암스트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아가씨는 똑똑하오. 꽤 침착하지요. 다만 충격을 받았을 뿐이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오.」
로저스는 살해되기 전에 꽤 많은 장작을 패놓았다. 그들은 그것을 주워 모아 부엌으로 날랐다.
에밀리 브랜트가 난로의 재를 끌어내고 있었다. 베러는 베이컨 껍질을 잘라 내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고마워요. 되도록 서두르지요. 그렇지. 3,40분만 기다려 주세요. 난로에 불을 피워야 하니까요.」
블로어가 조그만 목소리로 필립 롬버드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겠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이야기하는 편이 빠를 거요. 생각해 보았자 헛일이니까.」
전직 경감 블로어는 농담을 모르는 사나이였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미국에 이런 사건이 있었소. 노인 부부가 둘 다 도끼로 살해되었소. 집에는 딸과 하녀밖에 없었소. 하녀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은 곧 증명되었소. 딸은 중년에 접어든 독신이었소. 종교적 믿음이 깊은 여자로 도저히 살인을 저지를 것으로 보이지 않았소. 끝내 그 여자는 무죄가 되었지만, 그러나 신앙심 깊은 여자라는 것 외에 무죄가 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소. 나는 도끼를 보는 순간 이 이야기를 생각해 냈소. 그리고 나서 부엌으로 가보니, 에밀리 브랜트는 아주 냉정하고 얼굴빛 하나 달라져 있지 않았소. 아가씨 쪽은 정신이 홱 돌아 버렸소. 아마 그게 정상일 거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럴 거요. 그게 정상이겠지요.」
「그런데 노처녀 쪽은 앞치마를 두르고 냉정한 얼굴로 일하고 있소. 저것은 로저스 부인의 앞치마겠지. 저 노처녀는 확실히 머리가 돈 것 같소. 나이든 독신녀에게 흔히 있는 일이오. 살인도 할 수 있을 거요. 믿음이 두터우니 자기를 신의 사도나 무언가로 여기고서 말이오. 방에서는 늘 성서를 읽고 있소.」
「그것만으로는 정신이 돌았다는 증명이 되지 않소.」
그러나 블로어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밖에 나갔었잖소, 비옷까지 입고―바다를 보러 나갔다고는 했지만…….」
롬버드는 고개를 저었다.
「로저스는 장작을 패고 있을 때 살해되었소. 일어나서 곧 피살된 거요. 미스 브랜트가 했다면 밖에서 언제까지나 우물쭈물거리고 있지 않았겠지. 침대로 돌아와 코를 골고 있으면 되는거니까.」
「당신은 중대한 점을 빠뜨리고 있소. 만일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면 혼자서 밖을 돌아다니지 못할 것이오. 두려운 게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요. 자기가 범인이니까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지요.」
「흠……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걸.」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당신 눈에서 벗어나 있어 다행이로군.」
블로어가 거북스러운 듯 말했다.
「실은 처음에 당신을 의심했었소. 권총 문제며, 우리들을 힐난한 일도 있고 해서.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요.」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은 나를 의심하지 않겠지요?」
「실례될 지 모르지만 당신이 이 같은 계획을 세울 상상력을 가졌다고는 생각지 않소.
만일 당신이 범인이라면 참으로 훌륭한 솜씨라고 할 만하오. 나는 말없이 모자를 벗어 보이겠소.」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끼리 이야기인데, 내일까지 생명이 남아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우리들이오. 전에 이야기한 위증은 사실이겠지요?」
블로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숨겨 보았자 별수없지. 랜더는 확실히 무죄였소. 나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어 모두들 유죄로 몰고 말았소. 그러나 잘라 말하지만, 달리 증인이 있었다면 나는 그런 증언을 하지 않았을 거요.」
「듬뿍 맛잇는 국물을 먹었다는 거로군.」
「그런데 구두쇠들뿐이었소. 나는 다만 승진했을 뿐이오.」
「그리고 랜더는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죽었겠지.」
블로어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죽을 줄 몰랐소.」
「뭐, 당신 운이 나빴던 거요.」
「내가? 그의 운이 나빴지.」
「당신도 그렇소. 왜냐하면 그 때문에 당신도 죽게 되었으니까.」
「내가?」
블로어는 롬버드를 쳐다보았다.
「내가 로저스나 다른 사람들 같은 지경을 당하리라고 생각하오? 농담 마오? 나는 그런 길은 밟지 않소.」
「뭐, 좋소. 나는 내기 따위는 질색이거든. 또한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내가 얻을 건 없으니까.」
「롬버드,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롬버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안됐지만 블로어. 당신도 빠져 달아날 수는 없소.」
「뭐라고?」
「당신은 상상력이 모자라오. 함정에 빠뜨리는 데는 이유가 없지. UN 오윈같이 상상력 풍부한 범인이라면, 당신 목에 새끼줄을 감는 일쯤 아주 쉬울 거요.」
블로어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화를 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오?」
필립 롬버드의 얼굴에 대담한 표정이 나타났다.
「나는 상상력을 충분히 갖고 있소. 지금까지도 꽤 위험한 일을 당했지만 언제나 무사히 헤쳐 나왔소. 아니, 더 이상 말하는 것은 그만두겠소. 그러나 이번에는 꼭 헤쳐 나가 보일 테요!」
달걀이 프라이팬에 넣어졌다. 베러는 난로 앞에서 생각했다. 어째서 그토록 정신이 혼란되었을까?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침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허둥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크레이슨 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곧 시릴의 뒤를 따라 헤엄쳐 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지금 생각나는 것일까.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다. 시릴은 그녀가 바위에 닿기 훨씬 전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었다.
조수가 그녀를 앞바다로 밀고 나갔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배가 올 때까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러나 유고는 잠자코 그녀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유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약혼했을까, 결혼했을까.
에밀리 브랜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베러, 베이컨이 타고 있어요.」
「어머나……미안해요. 정신차리지 않아서.」
에밀리 브랜트는 마지막 달걀을 굽고 있었다. 베러는 새 베이컨을 프라이팬에 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몹시 침착하군요, 미스 브랜트.」
에밀리 브랜트는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신이 혼란되지 않도록 자라났어요.」
베러는 기계적으로 생각했다―어린 시절에 억압당하여 그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말했다.
「무섭지 않나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렇잖으면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건가요?」
죽음! 에밀리 브랜트는 가늘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뇌를 찔린 듯 느꼈다. 죽음? 아니, 나는 죽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지 모르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 이 아가씨는 모른다.
나는 물론 무서워하고 있지 않다. 브랜트 집안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모두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자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생활을 해왔다. 나는 수치스러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죽을 까닭이 없다.
「우리들은 모두 이 섬을 빠져 나갈 수 없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물론 매커서 장군이었다. 그의 사촌이 엘시 맥퍼슨과 결혼했다. 그는 죽음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치도 않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죽음을 가볍게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조차 있다.
비트리스 테일러……어젯밤 그녀는 비트리스 꿈을 꾸었다―그녀의 방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에밀리 브랜트는 그녀를 안으로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만일 안으로 들여놓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번쩍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 아가씨가 자기를 바라보며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되었군요. 가져가요.」
기묘한 아침 식사였다. 모두들 말씨가 정중했다.
「커피를 따라 드릴까요, 미스 브랜트.」
「크레이슨 양, 햄을 들겠어요?」
「베이컨을 하나 더 드십시오.」
여섯 사람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참나무 숲 속의 다람쥐처럼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일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잘될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거야.)
(신앙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그래서 미친 것이다. 그러나 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나 모두 기묘한 일뿐이야. 이래서는 머리가 돌아 버릴 것야. 털실이 없어졌어. 진홍빛 비단 커튼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조금도 예상할 수가 없어.)
(바보 같은 녀석.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다니. 이유는 없어. 그러나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
(여섯 개의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제 여섯 개뿐―오늘 밤은 몇 개가 될 것인가.)
「달걀이 하나 남아 있군요.」
「마멀레이드는?」
「고마워요. 햄을 드릴까요?」
여섯 사람……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하는 여섯 사람…….
꿀벌 살인
식사가 끝났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헛기침을 했다. 그는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모여 의견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소. 30분 뒤 응접실로 모여 주기 바라오.」
모두들 곧 찬성했다. 베러는 접시를 포개기 시작했다.
「내가 치우겠어요.」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모두 함께 날라다 드리지요.」
「고마워요.」
에밀리 브랜트는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 한숨을 쉬었다.
판사가 말했다.
「어디 편찮으시오, 미스 브랜트?」
에밀리는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크레이슨 양을 도와주고 싶지만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워요.」
「어지럽다고요?」
암스트롱 의사가 그녀의 곁으로 갔다.
「무리도 아니지요. 아까 받은 충격이 크니까요. 무슨 약이라도…….」
「싫어요!」
그 말은 포탄이라도 터지듯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암스트롱 의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확실히 공포와 의혹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의사는 어색하게 말했다.
「무리하게 권하지는 않습니다, 미스 브랜트.」
「약은 보기도 싫어요.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이대로 여기 조용히 앉아 있겠어요.」
모두들 식사 뒤처리를 했다.
블로어가 말했다.
「나는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도와드릴까요, 크레이슨 양.」
베러가 말했다.
「고마워요.」
에밀리 브랜트만 식당에 남겨졌다. 잠시 동안 부엌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기분은 좋아졌으나 이번에는 졸음이 왔다.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귀에 날개 소리가 들려 왔다. 방안 어디에서 들려 오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꿀벌이다, 꿀벌이 있는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꿀벌이 보였다. 창문 유리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아침에 베러 크레이슨이 벌 이야기를 했었는데.
꿀벌과 벌꿀……에밀리 브랜트는 벌꿀을 좋아했다. 벌집의 꿀을 모슬린 주머니로 거르면 뚝, 뚝, 뚝…….
방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흠뻑 젖어서 옷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비트리스 테일러가 강에서 올라온 것이다.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볼 수 없었다.
소리질러 누군가를 불렀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녀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저택에는 달리 아무도 없다. 그녀 한 사람뿐인 것이다.
발소리가 들려 왔다. 바닥에 끌리는 듯한 조용한 발소리가 등뒤로 다가왔다. 익사한 여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 퀴퀴하니 습기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문 유리에서는 꿀벌이 날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덜미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벌이 목을 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응접실에서 에밀리 브랜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이 말했다.
「불러올까요?」
블로어가 당황하며 말했다.
「기다리시오.」
베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이상스러운 듯 블로어를 보았다.
그는 말했다.
「어떻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지금 식당에 가면, 범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오. 그 여자가 우리들이 찾는 범인이라고 믿소!」
암스트롱이 물었다.
「동기는?」
「신앙이 너무 깊은 거요. 당신 의견은 어떻소?」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반대는 하지 않소. 그러나 증거가 없소.」
베러가 말했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참으로 이상했었어요. 눈이…….」
그녀는 몸을 떨었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런 일로 판단할 수는 없소. 우리는 모두 정신이 어떻게 되어 있소.」
블로어가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레코드의 말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소. 왜 그랬을까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요.」
베러가 의자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건 틀려요. 나에게 이야기했어요. 나중에.」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했소, 크레이슨 양?」
베러는 비트리스 테일러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조리있는 이야기요. 사실을 이야기한 게 틀림없소. 크레이슨 양, 책임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소?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을 후회하는 태도는 없었는지요?」
「조금도 없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심장이 부싯돌같이 단단한 여자요. 그런 여자는 모두 그렇소! 질투같은 거지요.」
판사가 말했다.
「벌써 11시 5분 전이오. 미스 브랜트를 불러오는 게 좋겠소.」
블로어가 말했다.
「손을 쓰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 없소. 단순한 혐의에 불과하오. 그러나 암스트롱에게 부탁해 미스 브랜트가 정신이상이 되어 있는지 어떤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럼, 모두 식당으로 갑시다.」
그들이 식당으로 가니 에밀리 브랜트는 아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등뒤에서 보았을 때는 그녀가 그들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리 다른 점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핏기가 없고 입술이 새파랬으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블로어가 말했다.
「죽어 있잖소!」
워그레이브 판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한 사람, 혐의가 풀렸소. 풀리는 게 늦어졌지만…….」
암스트롱은 에밀리 브랜트 위로 몸을 굽혔다. 그는 입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머리를 갸우뚱하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롬버드가 기다릴 수 없는 듯 말했다.
「어떻게 죽었소? 우리들이 그녀를 이곳에 두고 나갔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암스트롱의 주의가 그녀의 목줄기 오른쪽에 있는 상처에 쏠렸다.
「피하 주사 자국이오.」
창문에서 날개 소리가 들려 왔다.
베러가 외쳤다.
「보세요. 벌이―벌이……내가 말한 대로예요.」
암스트롱이 말했다.
「그녀를 쏜 것은 벌이 아니오. 사람 손이 주사기로 찌른 것이오.」
판사가 물었다.
「독은 무엇이오?」
「내 상상으로는 청산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앤터니 머스턴의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 아마도 질식해서 금방 숨졌을 겁니다.」
베러가 외쳤다.
「하지만 저 벌은―우연으로 보기에는…….」
롬버드가 말했다.
「아니, 우연이 아니오! 우리들 살인범의 세밀한 작품이오! 꽤 장난이 심한 사람 같소. 할 수 있는 한 자장가대로 하려 드는군.」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오랫동안 위태로운 세상을 살아오면서 단련된 롬버드의 신경도 결국은 항복하고 만 듯했다.
그는 세차게 부르짖었다.
「미치광이야! 모두 미쳤어! 모두 미치광이야!」
판사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이성을 갖고 있소. 누가 이 섬에 피하 주사기를 가져왔소?」
암스트롱이 몸을 굳히며 자신없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가져왔습니다.」
네 사람의 눈이 의사에게로 쏠렸다. 그는 적의를 품은 의혹의 눈길을 의연히 받아 냈다.
「언제나 갖고 다니지요. 의사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
판사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오. 그 주사기는 지금 어디 있소?」
「내 방의 가방 속에.」
「확인해 보겠소?」
다섯 사람은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가방 속의 물건들이 바닥에 펼쳐졌다. 피하 주사기는 없었다.
암스트롱이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훔쳐 갔어!」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암스트롱은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네 사람의 눈이 의혹과 적의에 차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호소하는 듯한 눈길로 베러와 워그레이브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훔쳐 간 거요.」
블로어는 롬버드와 마주보았다.
판사가 말했다.
「여기에 우리들 다섯 사람이 있소. 이 가운데 하나가 범인이오. 나머지 네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야 하오. 암스트롱, 당신은 어떤 약품을 갖고 있소?」
「그곳에 약품 상자가 있습니다. 조사해 보십시오. 수면제로서 트리오날과 즐포날, 프로마이드 한 포, 중탄산 소다, 아스피린.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청산가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도 수면제를 갖고 있소. 아마 즐포날일 거요. 수면제도 너무 많이 먹으면 생명이 위험하오. 그리고 롬버드, 당신은 권총을 갖고 있지요?」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암스트롱 약품, 나의 즐포날, 당신의 권총, 그 밖에 약품이나 총기류가 있으면 한데 모아 안전한 곳에 놓아두기로 합시다. 그리고 나서 한 사람씩 몸과 소지품 검사를 하는 거요.」
롬버드가 말했다.
「권총은 건네 줄 수 없습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엄격하게 말했다.
「롬버드, 당신은 몸이 건강하고 힘도 셀 거요. 그리고 블로어도 훌륭한 몸집을 하고 있소. 당신들 두 사람이 싸우면 어떤 결과가 될지 모르나, 한마디 확실히 해둘 게 있소. 나와 암스트롱 의사와 크레이슨 양은 블로어 편이 될 거요. 그러니 당신이 끝까지 반대하면 자신을 위해 이로울 게 없지. 불리한 것이 확실하니…….」
롬버드는 흰 이를 드러내며 내뱉듯 말했다.
「알았습니다. 따르지요.」
판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런데 권총은 어디에 있소?」
「침대 옆 테이블 서랍 속에 두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시다.」
필립 롬버드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어디까지나 믿지 않는군.」
그들은 복도를 지나 롬버드의 방으로 갔다. 롬버드는 침대 옆 테이블로 재빨리 가서 거칠게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서랍은 텅 비어 있었다.
롬버드가 물었다.
「이해되오?」
그는 벌거벗고 있었다. 다른 세 사람이 방안 수색을 막 끝낸 참이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복도에 나가 있었다.
수색은 돌아가며 행해졌다. 암스트롱, 판사, 블로어의 순서로 한 사람씩 방과 몸을 수색했다.
네 사나이는 블로어의 방에서 나와 베러 곁으로 갔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은 알고 있겠지요. 권총을 어떻게 해서든 찾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은 수영복을 갖고 왔겠지요?」
베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복을 입고 이곳으로 나오시오.」
베러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몸에 꼭 달라붙는 비단 수영복을 입고 다시 나타났다.
워그레이브는 말했다.
「고맙소, 크레이슨 양. 여기서 기다려 주시오.」
베러는 방 수색이 끝날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판사가 말했다.
「이로써 이제 아무도 위험한 총기나 약품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소. 이번에는 약품을 보관할 안전한 장소를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부엌에 은그릇을 넣어 두는 상자가 있을 텐데.」
블로어가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만, 열쇠는 누가 갖습니까? 당신이 갖나요?」
판사는 대답하지 않고 걸어갔다.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은그릇을 넣는 조그만 금고같이 생긴 상자가 벽장 속에 있었다.
판사의 지시에 따라 그 상자 속에 약품을 넣고 열쇠를 채워 벽장 속에 넣었다.
판사는 상자 열쇠를 롬버드에게 주고 벽장 열쇠는 블로어에게 주었다.
「당신들은 둘 다 힘이 세오. 당신들 둘 가운데 하나가 열쇠를 차지하기는 힘들 거요. 따라서 나머지 우리들이 열쇠를 손에 넣기는 더욱 어렵소.
벽장문을 부수고 상자를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리고 소리가 날 것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지 않고 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오.」
판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아직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소. 롬버드의 권총 행방이오.」
블로어가 말했다.
「주인이 알고 있겠지요.」
필립 롬버드는 금방 얼굴빛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요! 도둑맞았다는 것을 모르오!」
워그레이브가 물었다.
「맨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소?」
「어젯밤입니다. 잠자기 전 확인했을 때는 서랍 속에 분명히 있었습니다. 만일의 경우 곧 쏠 수 있도록 해두었지요.」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우리들이 로저스를 찾고 있을 때나, 또는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의 소란스러운 참에 도둑맞았겠지.」
베러가 말했다.
「집안에 숨겨 둔 게 틀림없어요. 찾아봐요.」
판사는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 찾아봐야 헛일일 거요. 범인은 우리가 모르는 장소를 연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테니까.」
블로어가 말했다.
「권총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사기가 어디 있는지는 압니다. 나를 따라오십시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 저택을 따라 걸어갔다. 주사기는 식당 창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 곁에 도자기 인형이 산산이 부서져 뒹굴고 있었다. 다섯번째 인형이었다.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범인은 그녀를 죽인 뒤 창문을 열어 주사기를 던지고, 또 테이블 위의 인형을 꺼내 내던진 것이오.」
주사기에는 지문이 없었다.
베러가 말했다.
「권총을 찾아봐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찾아봅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데 뭉쳐 있어야 하오. 떨어지는 것은 범인에게 기회를 주는 결과가 되니까.」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지붕 위부터 지하실까지 빠짐없이 수색했다.
그러나 결과는 헛일이었다. 권총의 행방은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어둠 속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똑같은 말이 다섯 사람의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다섯 사람, 서로 경계의 눈을 빛내고 있는 다섯 사람.
이제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를 적대시했으며, 그들을 한데 묶어 놓고 있는 것은 자기 방어 본능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섯 사람 모두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나이든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쉴새없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전직 경감 블로어는 건장한 몸이 어딘지 모르게 굳어 보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둔한 짐승과도 같았다. 눈은 언제나 핏발이 서 있었다. 흉폭함과 우둔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강한 자에게 쫓겨 죽을 힘을 다해 반격하려는 동물 같았다.
필립 롬버드도 쉴새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의 귀는 아주 조그마한 소리에도 날카롭게 움직였다. 가벼운 걸음으로 재빠르게 걸어 돌아다니고, 때때로 흰 이를 드러내며 기분나쁘게 웃음지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꿈꾸듯 똑바로 앞만 지켜 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고 떨어져 사람 손에 쥐어진 참새와도 같았다. 공포로 말미암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다만 구원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암스트롱은 안타까울 정도로 초조해 있었다.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두 손을 떨었다. 줄곧 담뱃불을 붙였다가는 이내 재떨이에 비벼 끄곤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이상한 말을 떠들어댔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안 돼!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야! 예를 들면 신호불을 피우든가…….」
블로어가 말했다.
「이런 날씨에도 불이 붙소?」
비가 다시금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바람은 포효하며 불어 닥쳤다. 후려치는 듯한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응접실에 있었다. 방에서 나가는 것은 한 번에 한 사람으로 제한했다. 그들 사이에 그것은 어느 틈에 묵계가 되어 있었다. 다른 네 사람은 한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롬버드가 말했다.
「시간문제요. 날씨가 좋아지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소. 신호도 할 수 있고, 불을 피울 수도 있고, 뗏목을 만들 수도 있소.」
암스트롱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문제라고? 그런 소리를 해선 안 되오! 그때까지 우리들은 모두 죽고 말 거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낮고 똑똑한 말투였다.
「아니, 경계를 태만히 하지 않으면 염려없소. 경계만 잘하면…….」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나 서로 말은 나누지 않았다. 다섯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가 식량 저장고를 열고 통조림이 많이 비축된 것을 보았다. 그들은 쇠고기 통조림 하나와 과일 통조림 두 개를 꺼내 부엌 테이블 둘레에 선 채로 먹었다.
식사를 끝낸 뒤 한데 모여 응접실로 돌아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다시 서로 경계의 눈을 번뜩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지식있는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암스트롱임에 틀림없다.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다. 그것은 미치광이의 눈이다. 의사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 의사가 아닐 것이다! 병원에서 달아난 미치광이인지도 모른다. 의사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그게 틀림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까, 큰소리를 지를까. 아니, 그에게 경각심을 줄 뿐이다. 더욱이 그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거든.
……지금 몇 시일까? 아직 3시 15분밖에 안 되었다. 하느님, 나는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 암스트롱이다. 지금 나를 보고 있구나…….)
(나는 당하지 않는다! 당할 리 없다.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 왔다. 그건 그렇고, 권총은 어디로 갔을까. 누가 훔쳤을까.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그건 알고 있다. 모두 몸을 뒤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 머리가 돌았다. 죽음의 공포.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나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구차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서 읽었던가. 수상한 것은 저 여자다. 그렇다, 저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4시 20분 전. 아직 4시 20분 전이다. 시계가 섰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지금 일어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들은 눈을 뜨지 못하는가. 눈을 떠라―응징의 날이다!
아니, 그런 일은 없다.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구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사실로 여겨지지 않는다! 몇 시일까……뭐야, 아직 4시 15분 전이 아닌가…….)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안 된다.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획은 충분히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의심받으면 안 된다. 누구일까. 그게 문제다……그렇다, 그다.)
시계가 5시를 알렸다. 다섯 사람은 모두 놀라며 몸을 움직였다.
베러가 말했다.
「누구―차를 드시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블로어가 말했다.
「마시고 싶군!」
베러는 일어섰다.
「준비해 오겠어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판사가 조용히 말했다.
「모두 같이 갑시다. 당신이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겠소.」
베러는 판사를 보고 소리높여 웃었다.
「그래요. 그편이 더 좋아요.」
다섯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차가 준비되어 베러와 블로어가 마셨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위스키를 마셨다. 새 병을 꺼내 고정되어 있는 사이펀을 사용했다.
판사가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들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여름인데도 방안이 어두웠다. 롬버드가 전등을 켜려고 했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켜질 리 없지. 로저스가 죽은 뒤로 모터가 움직이지 않고 있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모두 힘을 합쳐 움직이게 합시다.」
판사가 말했다.
「부엌에 양초가 있소. 촛불을 켭시다.」
롬버드가 방을 나갔다.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롬버드는 양초 상자와 조그만 접시 몇 장을 포개 들고 돌아왔다. 다섯 자루의 초에 불이 붙여져 방안에 놓였다. 시각은 6시 15분 전이었다.
6시 20분이 지났을 때, 베러는 그곳에 앉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어졌다. 자기 방에 돌아가 후텁지근한 머리를 찬물로 식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고 초를 가지러 되돌어와 불을 붙여서 접시에 촛불을 떨어뜨려 양초를 세웠다. 그리고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방에는 네 사나이만 남았다.
그녀는 층계를 올라가 자기 방문을 열자 그대로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 섰다. 코가 벌름벌름 움직였다. 바다……세인트 트레데닉의 바다 냄새였다.
그렇다, 그녀가 잘못 알 리 없다. 물론 섬에 있으면 바다 냄새가 나는 법이지만, 이 냄새는 달랐다. 그날의 바닷가 냄새였다. 조수가 빠지고 바위에 엉겨 붙은 해초가 햇볕에 말라 있었다.
「섬까지 헤엄쳐 가도 괜찮아요, 크레이슨 선생님? 왜 섬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말을 듣지 않는 장난꾸러기! 이 아이만 없었다면 유고는 재산을 얻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유고……유고는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창문으로 불어닥친 바람이 촛불을 꺼버렸다. 촛불은 흔들거리다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갑자기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스스로 꾸짖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 돼. 걱정할 것 없어. 네 사람은 아래층에 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어. 있을 리 없다. 쓸데없는 일을 상상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저 냄새―세인트 트레데닉 바닷가 냄새―그것은 상상이 아니었다. 분명히 냄새가 났다.
그리고 확실히 누가 있는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확실히 들렸다.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갑자기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줄기에 닿았다. 바다 냄새나는 젖은 손이…….
베러는 부르짖었다. 공포의 절규였다. 구원을 청해 부르짖은 것이다. 아래층에서 의자가 넘어지고 문이 열리며 발소리가 층계를 달려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의식에 남아 있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공포뿐이었다.
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복도에 촛불이 흔들리고 남자들이 소리 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베러는 몸을 떨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위에서 굽어보며 그녀의 머리를 억지로 그녀의 무릎 사이로 밀어 넣으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별안간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저걸 보오.」
베러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눈을 뜨고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촛불을 비추어 보고 있는 곳으로 눈을 옮겼다. 폭넓은 젖은 해초가 천장에서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이 목줄기에 닿은 것은 해초였다. 그것을 익사한 사람의 손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킨 듯 웃었다.
「해초였군요. 그 냄새도 해초에서 났군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또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를 무릎 사이로 밀어 넣으려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모두 그녀에게 무엇을 마시게 하려고 했다. 글라스를 그녀의 입술에 갖다대고 있었다. 브랜디 냄새가 났다. 베러가 기쁘게 그것을 마시려 할 때, 돌연 위험을 알리는 벨소리 같은 것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울렸다. 그녀는 글라스를 밀어젖히고 고쳐 앉았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지요?」
블로어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아래층에서 가져왔소.」
「마시지 않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롬버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오, 베러. 기분이 좋아졌군요. 머리도 괜찮나 보오. 내가 새 브랜디 병을 가져오겠소.」
그는 급히 방을 나갔다.
베러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물을 마시겠어요.」
암스트롱은 그녀를 도와 일으켜 세웠다. 베러는 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세면대 쪽으로 가서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블로어가 기분나쁜 얼굴로 말했다.
「이 브랜디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어떻게 아오?」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소. 당신은 나를 의심하는 거요?」
「당신이 독을 넣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누가 병을 만졌는지 모르잖소.」
롬버드가 새 브랜디 병과 병마개를 갖고 돌아왔다. 그는 베러 앞으로 병을 내밀었다.
「보오, 새것이오!」
그는 납으로 봉한 뚜껑을 따고 크로크 마개를 잡아 뺐다.
「술이 많이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야. 그러고 보니 오윈에게도 괜찮은 데가 있군.」
베러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롬버드는 암스트롱이 가지고 있는 글라스에 브랜디를 따랐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마시는 게 좋소, 크레이슨 양. 충격이 컸으니까…….」
베러는 글라스에 입을 댔다. 곧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롬버드가 웃으며 말했다.
「능숙한 범인도 이번만은 계획대로 하지 못했군!」
베러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적이었을까요?」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일도 있겠지요, 의사 선생?」
암스트롱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소. 크레이슨 양은 아직 젊고 건강하오. 심장이 약하다고는 생각지 않소. 아마도 그런 계획은 아니었을 거요. 그보다는…….」
그는 블로어가 가져온 브랜디를 집어 들어 손가락에 찍어서 맛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음…이상없는 것 같군.」
블로어가 얼굴빛이 달라지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내가 독을 넣었다고 생각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브랜디로 기운을 되찾은 베러가 화제를 바꾸었다.
「판사님은 어디계세요?]
세 사나이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상한데. 함께 온 줄 알았는데.」
블로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어떻소. 의사 선생? 당신은 내 뒤에서 층계를 올라왔는데…….」
암스트롱이 말했다.
「뒤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었소. 물론 우리보다는 느리겠지만.」
세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찾아야 돼!」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모두 뒤따라갔다. 베러가 맨 끝으로 따라갔다.
층계를 내려가며 암스트롱이 외쳤다.
「워그레이브 씨! 워그레이브 씨! 어디 있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좀 가늘어진 빗소리가 들릴 뿐 저택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응접실 문가에 왔을 때 암스트롱은 얼굴빛이 달라지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 겹치듯 서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누군가가 외침 소리를 질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방 한구석에 놓인 등받이 높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양쪽에 두 자루의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판사가 진홍빛 의상을 두르고 머리에 판사들이 쓰는 가발을 쓰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다른 사람들을 제지하고 판사 곁으로 걸어 갔다. 취한 사람처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판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재빠른 동작으로 머리를 젖혔다. 가발이 마루 위로 떨어지고, 벗겨진 앞이마가 드러났다. 그 한가운데에 피가 엉킨 둥그런 상처가 있고, 거기서 무엇인가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떨리는 손으로 판사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표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사살되었소.」
블로어가 말했다.
「뭐라고! 권총으로!」
의사가 말했다.
「머리를 꿰뚫었소, 즉사요.」
베러는 바닥으로 몸을 수그려 가발을 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브랜트가 잃어버렸던 회색 털실이에요.」
블로어가 말했다.
「게다가 이건 욕실에서 없어진 진홍빛 커튼이오.」
베러가 속삭였다.
「이런 데 쓰려고 그랬군요.」
갑자기 필립 롬버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로 자아내는 웃음소리였다.
「다섯 인디언 소년이 법률에 열중했다. 한 소년이 대법원에 들어가 네 소년이 되었다. 이것이 워그레이브 판사의 마지막 무대였던 것이오! 그는 이제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었소. 법정에 설 수도 없소. 죄없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도 없게 되었소. 에드워드 시튼이 여기에 있었다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틀림없이 크게 기뻐했겠지!」
그가 너무도 큰소리로 떠들어댔기 때문에 세 사람은 놀랐다.
베러가 말했다.
「그렇지만 범인은 판사라고 당신이 말한 게 어제 아침 일이었지요.」
필립 롬버드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흥분이 가라앉은 것이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었소. 나는 잘못 알고 있었던 거요. 또 한 사람, 범인이 아닌 것이 입증되었소. 좀 늦긴 했지만…….」
사라진 의사
그들은 워그레이브 판사의 시체를 그의 방으로 옮겨 침대에 뉘었다. 그런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와 홀에 선 채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블로어가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롬버드가 말했다.
「먼저 무엇이든 먹읍시다. 먹어 두지 않으면 안 되오.」
그들은 부엌으로 들어가 소 혓바닥 통조림을 따서 기계적으로 입에 넣었다. 맛이 형편없었다.
베러가 말했다.
「난 한평생 소 혓바닥 고기는 안 먹겠어요.」
그들은 식사가 끝나자 부엌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블로어가 말했다.
「드디어 네 사람이 되었소.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암스트롱이 지그시 블로어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거의 기계적으로 말했다.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블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도 늘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죽어 버렸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어떻게 죽였을까?」
롬버드가 말했다.
「훌륭한 계획이야! 크레이슨 양 방에 그런 것을 걸어 놓아 우리들에게 그녀가 살해된 것으로 생각케 했소. 그리고 그 소동을 이용해 노인이 방심한 틈을 노렸소.」
블로어가 말했다.
「어째서 아무도 권총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롬버드가 머리를 저었다.
「크레이슨 양이 큰소리로 부르짖은데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고 있었소. 더욱이 우리들은 외쳐대며 뛰어 올라갔으니 들릴리 없지.」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런 계략은 이제 성공할 수 없소. 이 다음에는 더욱 기발한 술수를 생각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을 거요.」
블로어가 말했다.
「틀림없이 또 생각해 내겠지.」
그 말에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보았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이제 네 사람밖에 없소. 그러면서도 우리는 누가 범인인지 아직 모르고 있소.」
블로어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소.」
베러가 말했다.
「나도 알아요.」
암스트롱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짐작은 가는데…….」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소.」
다시금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베러가 힘없이 일어섰다.
「머리가 아파요. 좀 자고 싶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그러는 게 좋을 거요. 서로 흘겨보고 있어 봤자 이익될 게 없으니까.」
블로어가 말했다.
「나도 찬성이오.」
의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무도 잠들 수는 없을 거요.」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블로어가 말했다.
「권총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행동은 희극의 한 장면 같았다. 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방문 손잡이를 한손으로 잡고 복도에 섰다. 그리고 신호에 맞추듯 동시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빗장을 내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의자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에 쫓긴 네 사람의 남녀는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성채에 틀어박혀 있었다.
필립 롬버드는 문 손잡이 밑에 의자를 밀어붙여 놓고 마음놓이는 듯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화장대 앞으로 가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굉장히 야위었군.」
그는 승냥이 같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서둘러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가 팔목시계를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다음 서랍을 열었다. 그는 서랍 속에서 권총을 발견하고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침대에 누웠다. 한쪽에서 촛불이 타고 있었다. 끄고 싶지 않았다. 어둠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되풀이 들려주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무사하다.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아니, 일어날 리 없어. 빗장을 걸고 열쇠를 채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
갑자기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그렇다! 이 방에 있으면 된다! 열쇠를 잠그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구원의 손이 미칠 때까지 이 방에 있으면 안전하다! 하루든―이틀이든―.
이곳에 있으면 된다. 그러나 있을 수 있을까. 몇 시간이나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하는 일없이 생각만 하면서…….
그녀는 콘월에서의 일, 시릴에게 한 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귀찮도록 매달리는 소년이었다.
「크레이슨 선생님, 왜 바위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나는 헤엄쳐 갈 수 있는데.」
거기에 대답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던 것일까?
「물론 헤엄쳐 갈 수 있어, 시릴. 알고 있어요.」
「그럼, 가도 되지요, 크레이슨 선생님?」
「하지만 시릴, 어머니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 그러니 이렇게 해. 내일 바위까지 헤엄쳐 가. 내가 바닷가에서 어머니에게 말을 걸어 눈치채지 못하게 하겠어. 그리고 어머니가 알아 차렸을 때, 네가 바위 위에 서서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거야. 어머니는 틀림없이 깜짝 놀라시겠지.」
「고마워요, 크레이슨 선생님.」
그렇다! 내일이 되면 유고는 뉴기니아에 간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게 끝난 뒤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잘 안 된다면? 시릴은 구조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말하겠지.
「크레이슨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때는 좀 위협하면 된다.
「왜 거짓말하는 거야, 시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누구나 그녀를 믿으리라. 시릴은 끝까지 거짓말한 것이 되겠지. 그는 그리 정직한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시릴 자신은 알고 있겠지만. 그런 것을 마음에 둘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잘되지 않을 리 없다. 뒤에서 헤엄쳐 가면 된다. 헤엄치면서 따라가지는 않는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유고는 의심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상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던 것일까? 그래서 신문이 끝나자 서둘러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일까?
그는 한 번도 편지에 답장해 주지 않았다.
유고…….
베러는 침대 속에서 몸을 움직였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아니, 유고를 생각해선 안 된다. 가슴이 아프다! 이제 끝난 일이다.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까는 왜 유고가 이방에 있는 듯 여겨졌던 것일까?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방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검은 갈고리를 보았다. 해초는 거기에서 밑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목줄기에 닿았던 차가운 느낌을 생각해 내고 몸을 떨었다. 그녀는 천장의 갈고리가 무서워졌다. 그러나 갈고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커다랗고 검은 갈고리에서…….
전직 경감 블로어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핏기어린 조그마한 눈이 표정없는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먹이에 달려들려 하는 멧돼지처럼 보였다.
그는 자고 싶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 바로 옆에까지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열 사람 가운데 여섯 사람! 그토록 두뇌가 날카롭고 그토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던 노판사도 다른 사람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블로어는 잔혹한 만족 같은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 노인은 뭐라고 했던가.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애써 한 말이지만 이젠 경계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언제나 자기만이 옳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
이제 네 사람밖에 없다. 크레이슨, 롬버드, 암스트롱, 그리고 나다. 곧 누군가가 또 없어지겠지. 그러나 윌리엄 헨리 블로어는 아니다! 자기는 남의 전철을 밟는 사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권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 권총은…….)
블로어는 침대 위에 앉아 눈썹을 모으고 조그만 눈을 가늘게 뜨고는 권총 문제를 생각했다. 정적이 깃든 저택 안에서 아래층의 시계가 시간을 알렸다. 12시였다.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옷은 벗지 않았다.
그는 누운 채 경감으로 근무할 때처럼 모든 일을 처음부터 순서있게 생각해 나갔다. 주도면밀한 생각만이 마지막 결정을 짓는 것이다.
초가 거의 다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성냥이 바로 손닿는 곳에 있는 것을 보고 촛불을 불어 껐다. 이상하게도 어둠 속이 되자 그의 눈앞에 여러 가지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천년의 공포가 눈을 뜨고 그의 머리 속에서 우위를 다투고 있는 듯했다.
여러 개의 얼굴이 공중에 떠올랐다. 회색 털실을 머리에 뒤집어쓴 판사의 얼굴, 로저스 부인의 차가운 죽은 얼굴, 앤터니 머스턴의 괴로움에 일그러진 보랏빛 얼굴…….
또 하나의 얼굴, 안경을 쓰고 조그마한 밀짚빛 수염을 기른 젊은 얼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이 섬에서 본 얼굴은 아니다. 아니, 더 옛날에 본 얼굴이다.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 자주 본 얼굴은 아니다. 경찰에 끌려온 사나이 같은…….
그렇다! 랜더다! 어째서 지금까지 랜더의 얼굴을 잊고 있었을까? 어제도 생각하려 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뚜렷이 떠오른 것이다.
랜더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슬픈 얼굴을 한 여윈 여자였다. 14살쯤 된 딸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블로어는 처음으로 그 일을 생각했다.
(권총! 권총은 어디로 갔는가. 그게 훨씬 중대한 문제다.)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어진다. 이 저택 안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아래층에서 시계가 1시를 쳤다.
블로어는 갑자기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슨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였다. 문 밖 어디선가 들려 왔다.
칠흙같이 어두운 집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얼굴에 땀이 흘러내렸다. 누구일까. 복도를 조용히 걷고 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음에 틀림없다.
블로어는 소리나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문 안쪽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소리가 들려 왔었다. 바로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그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긴장했다.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여 어둠 속을 걷고 있다. 그는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 소린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블로어는 새로운 유혹에 사로잡혔다. 문 밖으로 나가서 조사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나 문을 여는 것은 위험하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블로어는 가만히 선 채 귀를 쫑긋했다. 이번에는 여러 곳에서 갖가지 소리가 들려 왔다. 물건 부딪치는 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 나지막히 속삭이는 소리. 그러나 그 소리들이 망상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별안간 망상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려 왔다. 겨우 들릴락말락한 발소리였다. 블로어처럼 귀를 곤두세운 사람에게나 들릴까말까한 희미한 발소리였다.
발소리는 조용히 복도를 걸어 다가왔다. 롬버드와 암스트롱의 방은 층계 건너편 복도에 있었다. 발소리는 그의 방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블로어는 마음을 정했다. 누구인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발소리는 그의 방 앞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 같다. 어디에 가는 것일까? 블로어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재빠르게 행동하는 사나이였다. 몸집이 탄탄하여 둔한 것처럼 보이나 뜻밖에 몸놀림이 가벼웠다.
그는 침대로 돌아가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전기 스탠드의 플러그를 뽑아 코드를 스탠드 다리에 감았다. 크롬제 스탠드로 무거운 에보나이트가 붙어 있었다. 무기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문 쪽으로 가서 손잡이 밑에 밀어붙여 놓았던 의자를 치우고 소리나지 않게 빗장을 풀어 문을 열었다.
그는 복도로 나왔다. 아래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블로어는 양말신은 발로 소리나지 않게 층계 아래로 달려갔다. 그때 왜 소리가 들렸는지를 알았다.
바람이 완전히 자고, 아마 하늘도 맑게 개인 것으로 여겨졌다. 창 틈으로 엷은 달빛이 새어 들어와 아래층 홀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블로어는 정면 문으로 나가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층계를 뛰어 내려가려다가 멈춰 섰다. 위험한 찰나였다! 그를 집 밖으로 끌어내려는 술책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사나이도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2층의 세 침실 가운데 하나는 비어 있을 것이다. 어느 방이 비어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블로어는 급히 복도로 돌아왔다. 처음에 암스트롱 의사의 방문을 노크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깐 기다렸다가 필립 롬버드의 방으로 갔다. 곧 대답이 있었다.
「누구요?」
「블로어요. 암스트롱이 방에 없는 것 같소.」
「……기다려 주오.」
그는 반대편 복도로 뛰어가 끝에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크레이슨 양, 크레이슨 양.」
베러가 놀라며 대답했다.
「누구세요? 왜 그러세요?」
「걱정할 것 없소, 크레이슨 양. 기다려 주오.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는 롬버드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고 롬버드가 왼손에 촛불을 들고 나타났다. 잠옷 위에 바지를 입고 있었다.
롬버드는 날카롭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블로어는 급히 설명했다. 롬버드의 눈이 빛났다.
「암스트롱이라고? 그럼, 그 녀석이었을까?」
그들은 의사의 방 앞으로 갔다.
「블로어, 미안하지만 확인해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소.」
그는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암스트롱! 암스트롱!」
대답이 없었다. 롬버드는 무릎꿇고 열쇠 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열쇠 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안에 열쇠가 없소.」
블로어가 말했다.
「문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가져간 거요.」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이번에야말로 잡아야 하오! 잠깐 기다려 주오.」
롬버드는 베러의 방으로 뛰어갔다.
「베러!」
「어떻게 되었어요?」
「우리는 암스트롱을 찾으러 가오. 그가 방에 없소.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열면 안 되오. 알았소?」
「알았어요.」
「혹시 암스트롱이 돌아와 내가 살해되었다고 해도 믿어서는 안 되오. 알겠소? 블로어나 내가 부르지 않는 한 문을 열어선 안 되오.」
「알았어요. 나도 그처럼 바보는 아니예요.」
「좋소.」
그는 블로어 곁으로 돌아갔다.
「자, 갑시다! 수색이오.」
블로어가 말했다.
「주의하는 게 좋소. 녀석은 권총을 갖고 있으니까.」
필립 롬버드는 층계를 뛰어 내려가며 웃었다.
「그렇지 않소.」
그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문고리가 풀려 있군. 돌아왔을 때 손쉽게 열 수 있게 되어 있소.」
그는 말을 이었다.
「권총은 내가 갖고 있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권총 총구를 내보였다.
「어젯밤 서랍 속에 돌아와 있었소.」
블로어는 저택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것을 보고 롬버드가 말했다.
「걱정 마시오, 블로어. 당신을 쏘지는 않겠소. 같이 가는 게 싫으면 집에 남아서 방안에 처박혀 있어도 좋소. 나는 암스트롱을 잡겠소!」
그는 달빛 속으로 달려나갔다. 블로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스스로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셈이지만, 그러나…….)
그는 권총 가진 범인을 상대한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비록 어딘가 모자라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용감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위험해도 사나이답게 싸우자. 눈에 보이는 위험은 두렵지 않다. 그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인 것이다.
베러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녀는 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믿음직스러운 문이었다. 열쇠도 채워져 있다. 손잡이 밑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밀어서 깨뜨릴 수 없다.
범인은 힘센 사나이는 아니다. 살인을 저지르는 데에도 힘보다 책략에 의하는 사나이인 것이다.
그가 쓸지도 모르는 수단을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롬버드가 말한 대로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고 하며 그녀에게 달려올지도 모른다. 또는 중상을 입은 것같이 꾸며 문 밖에서 신음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생각되었다. 저택에 불이 났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두 남자를 집 밖으로 꾀어낸 뒤 미리 뿌려 놓은 휘발유에 불을 지른다.
그런데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엄중히 방비된 방안에 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다.
베러는 창가로 갔다. 뛰어내리자―여차하면 여기로 달아나자.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마침 밑에는 꽃밭이 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녀는 몸을 굳혔다. 무슨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였다. 아래층 어디에선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귀기울였다. 그러나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가만가만히 걷고 있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층계를 밟는 소리, 옷스치는 소리. 그러나 정말로 들렸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블로어가 그랬듯, 그녀는 자기가 망상에 사로잡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 더욱 뚜렷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사람이 걷고 있다. 소리도 들려 왔다. 그리고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 닫히는 소리, 지붕으로 올라가는 발소리, 이윽고 발소리는 그녀의 방쪽으로 복도를 걸어왔다.
롬버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러, 아무 일도 없었소?」
「네, 어떻게 되었어요?」
블로어의 목소리도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오.」
베러는 의자를 치우고 열쇠를 돌린 다음 다음 고리를 풀고 문을 열었다.
두 사나이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발과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어떻게 되었지요?」
롬버드가 대답했다.
「암스트롱이 없어졌소.」
베러가 큰소리로 외쳤다.
「뭐라고요?」
롬버드가 말했다.
「섬에서 사라져 버렸소.」
이어서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다! 요술쟁이같이 사라져 버렸소!」
「하지만 그럴 리 없어요.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예요.」
블로어가 말했다.
「아니, 숨어 있지 않소. 이 섬에는 숨을 곳이 없소. 아무데도 없소. 달이 밝은데 보이지 않을 리 없소.」
베러가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왔을지도 몰라요!」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안도 찾아보았소. 찾는 소리가 들렸을거요. 그는 여기에 없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소!」
베러가 말했다.
「믿어지지 않아요.」
그러자 롬버드가 말했다.
「그러나 틀림없소. 틀림없다는 사실이 있소. 식당 유리창이 한 장 깨어져 있고, 테이블 위에 인디언 인형이 세 개가 되어 있소.」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