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권의 부패와 개혁운동
교황권의 부패
신성로마제국과 신성로마교회는 중세 유럽의 통일된 양대 세력으로서, 이 시대의 큰 역사의 줄기는 이 두 세력의 교합(交合) 또는 충돌로 인해서 빚어진 것이 많았다. 중세의 교황권이 비대해진 이유를 한두 가지 들자면, 우선 레오 1세와 그레고리 1세 등의 인물들이 교황의 자리에 올라 큰 권세를 장악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속 권력의 행정 관리를 대행하며 증대해 가는 스스로의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교회는 거대한 권력을 가진 관료 제도의 세력을 전 유럽에 펼쳐 나갔다. 이 관료 제도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서기(clerk)였다. 서기란 사제(司祭)로 서임(敍任)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자로서, 그 위계는 문 지키는 자, 책 읽는 자, 기도사, 시제(侍祭)라는 네 개의 하급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실제로 사제직까지 진급하는 서기는 적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세속 법정에서의 심리를 면제 받고 군무에 종사하지 않아도 될 만큼 특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 시대의 교황들은 정치적 분쟁에 휩쓸리거나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등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한마디로 교황청은 탐욕과 폭력과 사탄의 올무가 가득한 곳이라고 표현될 수 있었다. 특히 제 10세기에는 교황권을 둘러싸고 교황 정치 내부에 독일 당과 이태리 당으로 양분되어 살륙의 역사가 번져갔다. 이 당시에 교황권 쟁취를 둘러싸고 가장 치욕스러웠던 사건을 한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데오도라(Theodora)라는 매우 부유한 미망인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그중 한 딸의 이름은 마로지아(Marozia)였다. 그런데 마로지아는 자신의 남자 첩을 904년에 교황의 자리에 올리게 되어 그의 이름을 세르기오(Sergio) 3세라 하였다. 그런데 914년에는 어머니 데오도라의 남자 첩이 요한 10세로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후 마로지아는 요한 10세 교황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교황 자리에 올려 요한 11세라 칭하였다. 그러나 요한 11세 교황의 동생이 형을 죽이고, 네 명의 교황을 세운 연후에 다시 자기 아들을 교황에 세우고 요한 12세라 불렀다. 그런데 이 교황은 남의 아내와 간통하여 그녀의 남편에게 살해 당했던 것이다.
교황권의 권력 확장을 부추겼던 이유 중에 날조된 ‘콘스탄틴 대제의 기부서(寄附書)’ 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콘스탄틴의 기부서는 샬레만 시대에 나타난 거짓 문서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기부서는 콘스탄틴 대제의 나병(癩病)이 교황 실베스터(Sylvester)의 기도로 나았다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콘스탄틴 대제가 실베스터 교황의 후계자에게 라테란(Lateran) 궁정과 로마의 토지와 이태리(Italy)의 토지 전부를 기증했다는 내용의 날조(捏造)된 문서였다.
이 외에도 가짜 ‘이시도르의 전집’ 속에는 교황이 모든 논쟁의 최고 심판자로서 하나님 외에는 그 위에 설 자가 없다고 하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특권 사상이 나타나 있다. 가짜 이시도르의 전집은 9세기 중간에 나타난 것으로서, 이는 제 1세기 로마의 클레멘트로부터 9세기 그레고리 2세까지의 교회 회의의 결정들을 편집한 것이라고 잘못 전해졌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기부서는 1433년 니콜라스 데 쿠자(Nicolas de Cusa)에 의해, 그리고 가짜 이시도르의 전집은 1446년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에 의해 거짓임이 뒤늦게서야 밝혀졌다.
크루니 수도원
910년 프랑스 중남부의 크루니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단에서 나타난 부패성을 깨뜨리고 열정의 결핍을 회복하기 위해서 베르논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멸망을 향해 돌진하고 있음을 똑똑히 보았다. 문제는 엄청나게 크게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수도단을 개혁하여 교황권의 권위를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속 영주에 의한 서임식, 성직 매매, 성직자의 결혼, 성직자의 동거생활, 성적 방종 등 숱한 악폐로부터 성직자들을 구원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회 내부의 정화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었다.
처음에 크루니 수도사들이 추구하였던 바는 단지 베네딕트의 수도원 규칙을 온전히 따르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곧 그들의 시계(視界)가 확장되었고, 클루니 수도원장들은 선구자 베르논의 모범을 따라 수도원들에 대한 개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크루니 수도원의 개혁 활동은 왕이나 후원자들에 의한 모든 세속적인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와, 그리고 감독들과 수도원장에 대한 자유 선거에 중점을 두었다. 이 수도원은 또한 열정적으로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끝까지 견지했다. 크루니의 영향력은 그 엄한 훈련의 소문과 함께 광범위하게 퍼졌다.
크루니 수도원이 밑에서부터 개혁 운동을 하였다면 교황은 위에서 개혁을 서둘렀다. 재빨리 개혁에 착수한 교황 니콜라우스 2세의 1059년 칙서에 의해 교황을 선거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추기경단(樞機卿團)으로 제한되었다. 이어서 추기경들의 지위가 대폭 강화되었다. 추기경들은 어느 교구의 성직자들도 감독하거나 심지어는 파문할 수도 있었고, 그 지역의 여러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처결을 할 수도 있었다.
크루니 수도원은 그 강력한 조직 형태로 인해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다. 베네딕트파 수도원은 자율적이었으므로 여러 압력 앞에 힘없이 허물어져 그 대부분은 타협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크루니 수도원은 하나의 강력한 체제로 결속되어 있었다. 게다가 크루니 수도원 자체가 면속(免屬) 수도원이어서, 수도원 사람들은 세속 영주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직접 로마 교황 밑에 소속하고 있었다. 그러자 수 세기 동안 크루니의 수도원장들은 교회에서는 교황 다음 가는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고, 그가 지배하는 수도원 영지는 매우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신자들이 막대한 선물과 유산을 계속 제공함으로서 수도원의 재산은 끊임없이 증가하였다. 실질적으로 축적되는 재산은 교회 개혁의 가장 큰 방해물이었다. 결국 축적된 거대한 재산이 나중에 클루니 개혁운동이 실패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에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