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에 커피생각이 나서 산양면(山陽面)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이 집에서 커피를 판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쉬는 날이란다.
이집은 옛날 산양양조장(山陽釀造場)이였는데 지금은 집은 그대로 보존하며 커피를 판다고 한다.
그런데 닫힌 문안을 들여다 보니 커피만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다.
이름이 "산양정행소"란다. 정행소가 뭘까? 하고 여기 저기 찾아보았다.
"山陽征行所"라고 하며 정행(征行)은 여행(旅行)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즉 문경시 산양면을 여행하러 온 방문객에게 건강한 산양(山陽)의 먹거리와 감성적인 살거리,
아름다운 볼거리들을 안내하는 "복합문화공간"(複合文化空間)이라고 한다.
맞은쪽에도 오래된 집이 있어 가 본다.
"구 문경 금융조합 사택"(舊 聞慶 金融組合 舍宅)이란다.
이곳도 지금은 "볕드는 산"이란 커피집으로 이름이 있지만 이곳 역시 커피만 판매하는 곳은 아닌듯하다.
후원(後園)은 많이 없어졌지만 옛날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모습이다.
이곳에 있는 문경구곡(聞慶九曲) 그림을 보니 지금은 사라진 구곡(九曲)의 위치를 알것같다.
해가 저서 어두워 부지런히 정자(亭子)를 찾아 간다.
농청대(弄淸臺)
농청대(弄淸臺)를 정면에서 찍으면서 바위에 있는 "존도와"(尊道窩)라 쓴 암각서(岩刻書)를 미처 못보았다.
좌측 바위 흰색 부분에 세로로 씌어져 있다.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로 금천(錦川)이 흘렀다고 한다.
"존도서와"(尊道書窩)
처음에는 이곳을 "존도서와"(尊道書窩)라고 했다가 나중에 "농청대"(弄淸臺)라고 했다고 한다.
농청대(弄淸臺)가 있는 곳은 산양면(山陽面) 존도리(存道里)다.
지명(地名)의 존도(存道)에서 "存"을 "尊"으로 바꾸어서 "존도서와"(尊道書窩)로 했다고 한다.
서와(書窩)는 책읽는 움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농청대(弄淸臺)의 주련(柱聯).
"道心靜似山藏玉"(도심정이산장옥) 도(道)를 닦는 마음은 옥(玉)을 품은 산 같이 고요하고
"書味淸於水養魚"(서미청어수양어) 학문의 맛은 물고기 자라는 물보다 맑구나.
"四壁雲山摩詰畵"(사벽운산마힐화) 주위에 둘러진 구름 자욱한 산은 마힐(摩詰)의 그림같고
*마힐(摩詰): 왕유(王維)는 당(唐)나라 때의 인물로 남종화(南宗畵)의 시조이며 산수화를 발달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一窓花鳥杜陵詩"(일창화조두릉시) 창가에 어우러지는 꽃과 새는 두릉(杜陵)의 시(詩)로구나.
*두릉(杜陵) :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詩人) 두보(杜甫)를 말함.
농청대에서 암벽옆으로 만들어진 데크계단을 넘어가면 금천(錦川)이 가까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며 왼쪽 바위에 "농청대"(弄淸臺), "태고암"(太古巖), "불마애"(不磨崖)등 각자(刻字)가 있다는데
알지도 못했고 어두워서 미쳐 못보고 말았다.
이곳에 전에는 어떤 바위가 있었음직하다.
이곳 금천(錦川)상류 가운데 바위들과 함께 물길의 흐름을 좋게 하기 위해 없앴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지런히 금천(錦川)건너에 있는 고병숙 가옥(高柄璹 家屋)을 찾는다.
문이 닫혀있어 주저하는데 관리하시는 분이 달려와 문을 열어 주신다.
집 앞 솟을대문.
담장은 손을 본듯 깨끗하다.
이 집이 임진왜란시 의병을 하신 월봉(月峰) 고인계(高仁繼)(1564~1647) 선생이
녹문리(鹿門里)의 유래(由來)가 된 녹리(鹿梨)고성겸(高聖謙)(1810~1886) 선생이
국사편찬위원장과 서울대 총장을 지내신 녹촌(鹿村) 고병익(高柄翊)(1924~2004) 선생이 나신 곳이란다.
뒤채에는 이곳을 관리하시는 분이 거주하시는듯 했다.
마당에서 보는 대문.
집 오른쪽 작은 마루에 있는 "녹파정사"(鹿坡精舍)
동네 앞에 있는 느티나무.
고병숙 가옥(高柄璹 家屋)앞에도 오래된 집이 하나 있다.
대문 왼쪽은 행랑채가 아니고 화장실이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사람이 거주하지는 않는 폐가(廢家)인듯하다.
녹양정(綠楊亭)이라 써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거주하는 곳보다는 정자(亭子)역할을 하던 곳인듯하다.
앞 마당에는 물이 마른 연못도 있다.
담장의 일부가 허물어져 흉해보이지만 잘 가꾸면 쉼터로 유용할듯 하다.
경체정(景棣亭) 대문.
이곳에는 원래 "함취정"이란 정자가 있었다는데 1971년 경체정(景棣亭)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몇년 전 이곳을 왔을 때 금천(錦川)건너편에서만 보았기에 늦었지만 찾아보았다.
금천(錦川) 건너편에서 본 경체정(景棣亭)
정자 앞 바위 위에서 본 금천(錦川)
지금의 금천(錦川)에서는 이곳의 수심(水深)이 제일 깊단다.
난간위에서 본 금천(錦川)
물건너 왼쪽 산아래가 주암정(舟巖亭)이다.
경체정(景棣亭)의 뒤에는 바위를 깍아 통로를 만들고 정자(亭子)로 물이 흘러들지 않게 조치를 하였다.
경체정(景棣亭)앞 바위에 있는 성혈(性穴)들.
이외에도 여러모양의 성혈(性穴)이 많이 있다.
이제 전에 와 봤던 주암정(舟巖亭)을 들러본다.
주암정(舟巖亭) 입구.
저 멀리 이곳을 직접 관리하시는 "채훈식"옹(翁)께서 늦은 때인데도 길을 쓸고 계신다.
"채훈식"옹(翁)은 이 정자(亭子)를 만든 주암(舟巖) 채익하(蔡翊夏)선생의 후손(後孫)이다.
78세의 고령(高齡)인데도 직접 정자(亭子)를 관리하고 계신다.
정자앞 바위로 건너가는 징검돌.
이렇게 바뀌니 훨씬 보기 좋다.
전에는 이런 모습이였다.
주암정(舟巖亭)의 주련(柱聯)들을 살펴본다.
첫번째 주련(柱聯)은 들어서면 곧바로 있다.
舟巖萬古泛錦川(주암만고범금천) 주암은 오랜 세월 금천에 떠 있고,
絶壁橫松倒立奇(절벽횡송도입기) 절벽의 누은 소나무는 넘어질 듯 매달렸네.
顯祖醉月遊常處(현조취월유상처) 옛 선조어른 달에 취해 노닐던 자리에,
賢孫羹墻築小亭(현손랑장축소정) 어진 후손이 사모하여 정자를 세웠네.
柳岸樓花娟春輝(유안루화연춘휘) 버들 언덕 정자에 핀 꽃은 봄빛에 아리땁고,
마지막 주련(柱聯)은 정자(亭子)를 돌아서야 보이지만 돌아가기가 나빠 찍지를 못했다.
煙霞依然包削壁(연하의연포삭벽) 자욱한 안개는 변함없이 벼랑을 안고 있네.
바위의 뱃머리쪽에서 본 모습.
옛날에는 이 바위아래로 금천(錦川)이 흘러 내렸다고 한다.
폭우와 여러가지 변화로 물길이 바뀌어 지금은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물이 흐른다.
"채훈식"옹(翁)이 이를 안타까이 여겨 이 아래를 파서 큰 연못을 만들고 연(蓮)을 심었다고 한다.
여러 정자(亭子)중 유일하게 후손이 관리를 하여 정비가 된 까닭인지 "주암정 사랑회"라는 모임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