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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연극협회 연극인 선영(先塋) 순회참배(巡廻參拜)
2012년 10월15일 작고(作故) 원로 연극인 변기종 선생을 비롯해 박 진, 이진순, 오영진, 이해랑, 권오일, 김동훈, 이근삼, 김상열 선생의 선영(先塋)을 참배하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한국연극협회 박계배 이사장을 비롯해 한국연극연출가협회 김성노 회장, 김병호 전 아시테지 위원장, 원로배우 김길호 선생, 최대웅 선생, 양정현 선생, 전세권 선생, 박 웅 선생, 김도훈 선생, 정상철 선생, 한보경 여사, 임선빈 희곡작가 겸 연출가 한국연극협회 사무국 직원들과 촬영기사 및 필자가 참가해, 오전 8시 대학로 샘터파랑새 극장 앞에 대기한 전세버스에 동승해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제일 먼저 남양주시 천주교 영복동산에 안장된 변기종 선생의 묘소에 도착했다.
변기종 (卞基鍾:1895∼1977) 선생은 본명은 창규(昌圭), 서울에서 출생하여 계성학교(啓星學校)를 졸업하고, 1912년 연흥사(演興社)에서 혁신단(革新團)이 공연한 신파극 <진중설 陣中雪>을 보고 자극을 받아 연극에 몸담게 되었다.
1912년 11월 극단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을 조직하여 지방공연까지 하였으나 평양에서 해산되자, 곧 이어 개성에 있는 유일단(唯一團)에 가입하여 배우로서의 기량을 닦았다.
유일단이 1914년 말에 해산되자 이기세(李基世)를 따라 예성좌(藝星座)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7월에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에 잠시 참여한 뒤, 1920년 4월에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新劇座)로 옮겨 연쇄극에 출연하였다.
박승희(朴勝喜) 선생이 조직한 토월회(土月會)의 신극을 보고 자신의 연극에 통속성이 짙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파성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노인역을 잘 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연기자로서만이 아니라 연극계의 지도자로서 극단경영에도 주도적인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12월에는 이원규(李元奎)·강성렬(姜成烈)·김조성(金肇盛)·문수일(文秀一)·최성해(崔星海) 등과 함께 민립극단(民立劇團)을 창설하여 활약하였으며, 1926년 10월에는 이경환(李敬煥)·복혜숙(卜惠淑)·최성해 등 신파극의 인기배우들을 결집하여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를 창설하였다.
이 극단은 호남·서울·원산 등지의 공연을 끝내고, 북만주까지 가려고 함경남도 단천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1929년 12월에는 지두한(池斗漢)과 함께 신파극단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를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 11월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그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의 대표적인 배우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극단 자유극장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51년 극단 상록극회의 동인으로, 1953년 5월 극단 자유극회의 창립동인으로, 1955년 8월 극단 민극(民劇) 창립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4월 예술원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57년 6월 국립극단 단장, 1957년 3월 서울시 문화위원, 1958년 10월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 1961년 12월 개편된 국립극단원 및 연극협회 고문, 1972년 1월 국립극단 명예단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서울시문화상·예술원상·연예공로상 등을 수상하였고, 문화훈장·국민훈장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초창기 신파극부터 연극 외길만을 걸어온 뛰어난 연기자로 평가되고 있다.
두 번째는 같은 공원묘원에 있는 박 진 (朴珍:1905∼1974) 선생 묘소에 참배를 했다. 박 진 선생은 연출가 겸 극작가로 본명은 승진(勝進), 호는 우석(愚石)으로, 서울 출신이다. 1923년 양정고등보통학교(養正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동경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중퇴하였다. 1925년 토월회(土月會) 간부로 연극계에 투신한 뒤, 1927년 극단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하여 홍노작(洪露雀)의 <향토심 鄕土心>을 연출하였다.
1928년 극단 화조회(火鳥會)를 조직하였고, 1929년 개벽사(開闢社)에 근무하면서 토월회의 <아리랑고개>를 연출하였다.
1930년 단막희곡인 <절도병환자>를 시작으로 하여 희극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특히 동양극장의 연출가 겸 전속작가로 활약할 때가 전성기였다. 민족항일기 말기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를 지냈고, 한때 연극계를 떠나 중국을 방랑하기도 하였다.
8·15광복과 함께 연극계에 다시 투신하여, 1948년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김영수(金永壽) 작 <혈맥 血脈>을 연출하여 연출상을 받았다. 그 뒤 국립극단 단장(1959)으로 활약하면서 연출에 전념하였다.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1950)을 비롯, 예술원 회원(1960)·한국연극협회 이사장(1962) 등을 역임하였다.
예술원상(1962)·문예상(1963)·5월문예상(1966) 등을 수상하였다. 주요 연출작품은 <향토심>(1927)·<아리랑고개>(1929)·<춘향전>(1935)·<꽃피는 나무>(1943)·<혈맥>(1948) 등이 있고, 주요 희곡작품으로는 <공작선생>(1951)·<끝없는 사랑>(1951)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자전적인 저술인 ≪세세년년 歲歲年年≫이 있다. 희극을 주로 썼고 역사극 연출에 능하였으며, 순수연극보다는 대중연극에 가까운 연극인이었다.
세 번째는 남양주시 영락교회 공원묘원에 모신 이진순 (李眞淳:1916∼1984) 선생 묘소에 들러 참배를 했다. 이진순 선생은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1938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졸업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선생은 재학시절부터 신극운동에 뛰어들어 이해랑(李海浪)·김동원(金東園) 선생등과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를 조직해 일본에서부터 아마추어 연극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대학을 마치고 즉시 귀국하여 1938년부터 극연좌(劇硏座)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그 단체가 해산 당하자 광복될 때까지 연극계를 떠나 있었다. 광복과 함께 중국에서 돌아온 그는 극단 신지극사(新地劇社)를 창단하여 조우(曺禹)의 <태양이 그리워>를 연출함으로써 연출가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연출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데다가 생활고까지 겹쳐서 상업적인 악극과 여성국극(女性國劇) 쪽으로 방향을 돌려, 대본 각색과 연출을 주로 하였다.
따라서 선생이 정통극 연출가로 본격 진출한 것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고, 국립극단의 <태풍지대>·<우물> 등이 그의 초기작품이다. 연극전문지 ≪연극≫을 창간하기도 한 선생은 1966년 극단 광장(廣場)을 창단하여 동인제 시스템의 주도하의 한 사람으로서 창작극 개발과 근대극 소개에 진력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중진연출가로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와 예술원 회원, 그리고 연극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연극의 방향을 상업주의 쪽으로 돌려갔다. 즉, 극단 광장을 선두로 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전쟁과 평화> 등의 대형작품을 자주 무대에 올린 것도 그러한 상업주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만년에는 창극연출에 심혈을 쏟았다.
국립극장의 창극정립작업에 앞장섰던 그는 중국의 고전극인 경극(京劇)을 부분적으로 모방하면서 창극연출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물론 그러한 그의 작업은 실패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창극을 실험적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주목 받을 만 하였다. 저서로 ≪한국연극사 韓國演劇史≫(제3기)가 있다. 2011년에 지촌 이진순 선생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김석만 연출로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했다.
네 번째는 같은 영락교회 공원묘원 내, 오영진(吳泳鎭:1916∼1974) 선생의 묘소에 참배를 했다.
호는 우천(又川). 평양 출신이다. 민족지도자 오윤선(吳胤善) 장로의 삼남매 중 막내로,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에 <영화예술론>이라는 논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고, 1938년에 <영남여성의 내방가사>라는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문맹자가 많았던 당시 민족계몽을 위해서는 영화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영화작가가 되기 위해서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영화를 연구하였다. 1942년 귀국하여 숭인상업학교에 근무하고, 1945년 조선민주당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 사무국차장에 피임되었다.
1952년 중앙문화사 사장 및 월간 ≪문학예술≫ 주간을 역임하였고, 그 뒤로도 예술원 회원·국제펜클럽회원·국제연극인협회(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 ITI) 한국본부부위원장·시나리오작가협회 고문·국제대학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에 처녀시나리오 <배뱅이굿>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맹진사댁 경사>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다.
선생은 안창호(安昌浩)·조만식(曺晩植) 등 민족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인 학도지원병제에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검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평양에서 조만식의 측근으로 우익민족주의 정치운동을 벌이다가 월남하여 공산테러리스트에게 총격을 받아 사경을 헤맨 적도 있을 만큼 철저한 항일반공투사였다.
정치에서 손을 뗀 뒤로는 희곡과 시나리오, 영화평론 등을 썼으며, 오리온영화사를 설립, 운영하였다. 6·25전쟁중에는 월남문인들과 함께 문총북한지부(文總北韓支部)도 만들었고, 월간 ≪문학예술≫지도 운영하였다. 전쟁 직후 미국을 시찰하였고, ITI한국본부부위원장으로 유럽도 여행하였다.
대표적 시나리오로 꼽히는 <시집가는 날>로 아시아영화제의 최우수희극상을 받았고 예술원회원으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면(張勉) 정권 때 국무총리 문화담당 특별고문과 5·16군사정변 직후 최고회의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조민당(朝民黨) 당수도 역임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잠시 국제대학교수도 역임하였지만 희곡창작에 더욱 전념하였다.정치와 손을 뗀 뒤로는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건강관계로 고통을 많이 받았다.
영화평론과 시나리오로 출발해서 한국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생은 <하늘은 나의 지붕>·<종이 울리는 새벽>·<심청> 등의 우수한 시나리오작품을 많이 남겼고, <살아 있는 이중생각하>·<해녀 뭍에 오르다>·<허생전 許生傳>·<동천홍 東天紅>·<무희 舞姬> 등의 희곡작품을 발표하였다.
선생의 작품은 대체로 희극적 세계로서 현세의 어리석음이나 물욕을 비웃고 꾸짖는 경향을 띠고 있다. 선생은 작품의 소재를 전통적인 민속과 고전소설에서 많이 가져오고 독특한 표현양식을 구사하였다.
<배뱅이굿>·<맹진사댁 경사>·<한네의 승천> 등 3부작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소재의 원천으로 한 작품이며, <나의 당신>이나 <허생전> 같은 작품은 고전소설의 현대적 재창조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로, 그의 이러한 작품들은 전통의 현대화라는 측면에서 모범적인 예를 제공하였다.
선생은 민속 등 고전의 재창조를 통한 전통단절을 극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말년에는 격렬한 반일·반공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아빠빠를 입었어요>나 <모자이크게임> 등은 배일사상(排日思想)을 주제로 삼고 있으며, <무희>는 반공정신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밖에도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는 동안 <며느리>·<부부>·<누나>·<섹스> 등 사이코드라마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한국인의 해학과 풍자를 잘 표현한 뛰어난 희극작가로 평가되며 전통소재를 현대화하는 데 재질을 보였다.
다섯 번째는 경기도 광주시 용문산 이해랑(李海浪:1916∼1989) 선생 묘소다. 이해랑 선생의 본명은 해량(海良)으로 서울 출생이다. 고조부 종응(宗應)은 조선 철종의 사촌이고, 할아버지 재영(載榮)은 왕실 의전 실장이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속 병원 외과부장을 지낸 근용(瑾鎔)의 장남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항일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카와중학(金川中學)을 졸업하고, 중국 상해의 후장대학에 다니던 중 장티푸스에 걸렸으나 극적으로 살아나 귀국하였다.
부산 집에서 요양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하여 연극을 공부하였으며, 재학중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아마추어 연극단체를 조직하여 연기생활을 시작하였다.
1938년 니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귀국하여 아버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후신인 극연좌(劇硏座)에 가입하였다. 말단 배우로 취직하였으나, 극연좌가 일본경찰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여 1년 여만에 실직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뒤 대중적 성격이 강한 극단 고협(高協)에 정단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시는 대학에서 연극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드물던 시대였으므로 이론을 갖춘 선생은 매우 필요한 배우였다. 그러나 괜찮은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작고 목소리가 가느다란 것이 흠이 되어 각광을 받지 못하고, 주연 배우로서 주목을 끌지 못했다.
선생은 연극계의 젊은 지도자로,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좌우익 연극인들이 주도권다툼을 할 때 그 당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좌익 연극에 대항하여 극단 전선(全線)뿐만 아니라 극예술협회(약칭 극협)를 조직하는 등 우익 민족진영의 선봉장에 서서 연극의 정통성을 지켰다.
그때는 유치진(柳致眞) 선생과 같은 인물이 친일문제로 칩거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연극이론 및 극단운동, 그리고 완력으로 좌익 연극을 물리쳐야 하였다. 결국, 극단 극협은 광복 직후 민족연극운동을 정도(正道)로 들어서게 하였고, 이것이 1950년 봄 국립극장 설립과 함께 창단된 극단 신협(新協)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 국립극장 활동은 정지될 수밖에 없었으나, 전쟁 중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연기생활과 함께 연출도 겸하기 시작했다. 예술원 발족과 함께 30대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59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잠시 동안 환도(還都)한 국립극장 전속극단 단원으로 있다가 드라마센터 개관과 함께 극장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드라마센터가 재정난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연극 외적인 일, 즉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5선)과 민주공화당 창당멤버로 활약하였다.
1970년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두 번 지냈으며, 다시 연극에 복귀하여 주로 국립극단의 연출을 많이 맡았다. 1984∼1987년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 <천사여 고향을 보라>·<들오리>·<황금연못>·<뇌우> 등이 있고, 저서로는 ≪또 하나의 커튼 뒤의 인생≫과 ≪허상과 진실≫이 있다.
2008년 이해랑 예술극장이 동국대학교에 개관되어 기념관 겸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섯 번째는 역시 경기도 광주시 시안공원묘지에 모신 권오일(權五鎰:1931
~2008) 선생을 참배했다
연출가 권오일 선생은 1931년 11월 경상북도 영양군 출생으로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상담 심리학과를 졸업했다.대학 3학년때 硏劇會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졸업 후 제작극회 활동을 걸쳐 1969년 극단 星座를 창단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블랙코메디>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등의 대표 연출작품이 있으며 <봄날>이라는 작품으로 대한민국연극제대상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대표 연출작으로는 <성난얼굴로 돌아보라, 70> <노틀담의 곱추, 71>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80> <블랙코메디, 82> <시련, 82> <페드라> <적과백, 83> <밤으로의 긴 여로, 84> <봄날, 84><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85> <쟁기와 별, 89> <초승에서 그믐까지, 86> <젖섬시그리블, 88> <베니스의 상인, 92><통 뛰어넘기, 9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아카시아 흰 꽃은 바람에 날리고, 98> <소나무집 여인아, 00> <오코치의 화려한 가출, 01>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02> 외 다수이고, 수상경력은 83‘ 대한민국연극제 대상(적과백) / 84‘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연출상(봄날) / 90‘ 대한민국 예술대상 / 95‘ 서울시 문화상 / 02‘ 한국연극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7 특별상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이 있다.
일곱 번째로는 용인가톨릭공원묘지에 안장된 김동훈(金東勳:1939∼1996)선생은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부터 연극 <혈거부족> <군도> <암야의 집> 등에 출연을 시작한 선생은 연출가·제작자·소극장경영자 등 활동 폭이 넓었다.
1960년 극단 실험극장의 창립단원으로서 기성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과 함께 주요 작품의 주조연급 배우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드라마센터 공연의 <햄릿>·<포기와 베스> 등에서 주 조연을 한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실험극장 대표로서 타계할 때까지 연극계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아들을 위하여>·<심판>·<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 등이 있다. TBC, KBS 등의 전속탤런트로도 활약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연출도 많이 했다.
선생의 대표작으로는 <휘가로의 결혼>·<오셀로>·<화니> 등이 있다. 운니동에 실험소극장을 열어서 <에쿠우스>(1976년) 공연으로 연극 판도를 크게 변화시켰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장기공연 체제 확립과 연극의 직업화 등이라 하겠다. 그는 연극사상 처음으로 지방연극제를 창설하였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직을 역임하였으며, 동아연극상·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운니동의 소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만년에는 거의 무대에 서지 않고 단국대학교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여덟 번째로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된 이근삼 선생은 1929년 6월 27일 평양에서 출생하고. 동국대학 영문과를 거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58년 영문으로 쓴 희곡 「끝없는 실마리」를 캐롤라이나 극단에서 공연하였다. 국내에서 발표한 첫 희곡은 1960년 단막극 「원고지」이며, 그후 계속해서 「대왕은 죽기를 거부하였다」(1962), 「동쪽을 갈망하는 족속들」(1961) 등의 단막극을 발표해오다가 1962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상연한 「위대한 실종」을 계기로 장막극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주요작품으로는 위의 작품 외에도 「거룩한 직업」(1961), 「데모스테스의 재판」(1964), 「제18공화국」(1965), 「국물 있사옵니다」(1966), 「유랑극단」(1972), 「30일간의 야유회」(1974), 「일요일의 불청객」(1974), 「게사니」(1983), 「막차 탄 동기동창」(1987), 「이성계의 부동산」(1994) 등이 있고, 1967년 창작희곡집 『제18공화국』을 출판한 이후 『유랑극단』(1976), 『대왕은 죽기를 거부하였다』(1986), 『국물 있사옵니다』(1988), 『이성계의 부동산』(1994) 등의 희곡집을 발간하였다.
동국대와 중앙대를 거쳐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근대영미희곡개론』(1962), 『구미연극산고』 (1970), 『연극의 정론』(1970), 『서양연극사』(1982), 『연극개론』 (1984) 등의 다수의 극이론서를 저술하는 한편, 『오닐 단막집』, 『인지 희곡선』 등 다수의 역서를 발간하였다. 이근삼 선생은 정통 리얼리즘극을 고수하고 있던 기존 작가들의 사실주의 집착에 반기를 들고, 서사 기법 등 다양한 형식의 참신성을 보여주었으며, 과거의 희극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적 희극형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양식적 실험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풍자와 해학을 통해 현대인의 위선적인 의식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작품군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작품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대왕은 죽기를 거부하였다」(1962), 「제18공화국」(1965), 「아벨만의 재판」(1975) 등은 우리의 정치현실을 풍자한 극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이근삼 선생의 작품에 대해서는 첫째 우리 연극계의 상투적이고 통념화된 연극 공간을 깨뜨리고 새로운 연극 공간 개념을 확장시킨 점, 둘째 시간 개념의 확대, 셋째 극적인 제시방법의 새로운 도입, 넷째 극적인 언어 영역의 확대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제시방식에서는 서사적 수법, 우화적 수법, 표현주의적 수법, 극적인 아이러니의 수법, 소극적 수법, 음악적 요소의 삽입, 시적 분위기의 도입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천안공원묘역에 안장된 김상열 선생은 1941년 서울 출생으로. 1965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후, 1966년 극단 가교의 상임연출자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하였다.
1974년에 동남아 4개국 순회공연을 가졌고 「유랑극단」으로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대상 및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1976년 문공부 희곡 공모에 「까치교의 우화」가 당선되었고 1977년에는 삼성문화재단 희곡공모에 「길」이 당선되었다 1977년부터 극단 현대극장의 상임연출을 맡아 1978년에 「멀고 긴 터널」로 대한민국연극제 대통령상과 연출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연출상을 수상하였다. 1979년에는 「종이연」으로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였고 1981년에 「등신과 머저리」로 백상예술대상 희곡상을 수상하였다.
1981년부터 1년간 미국 뉴욕의 라마마극장에서 연수하였다. 1982년 대표작인 「언챙이 곡마단」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984년부터 2년 동안 극단 마당세실극장 대표를 역임하였다. 1986년 「갈매기」로 백상예술대상 TV극본상을 수상하였다. 1988년 극단 「신시」를 창단하고, 1990년 「우린 나발을 불었다」로 서울연극제 작품상 및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1991년 한국 연극 연출가 협회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같은 해에 한국 뮤지컬 협회 부이사장으로 피선되었다.
뮤지컬 연출가로도 활약하면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피터팬」, 「올리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사운드 오브 뮤직」, 「에비타」 등을 연출하였다. TV극작가로도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MBC-TV 「수사반장」을 3년간 100회에 걸쳐 집필하였으며, 대표작으로 특집극 「아베의 가족」, 「갈매기」, 「동방의 북소리」와 주말연속극 「풀잎마다 이슬」이 있다.
부인 한보경 여사가 김상열 연극사랑회와 김상열 연극상을 제정해 14년 째 남편의 유지를 이어오고 있다.
이상 아홉 선생의 묘역을 오전 8시부터 오후8시까지 순회참배하고 일행은 밤이 늦어서야 귀가했다. 유족 중 김상열 선생의 부인 한보경 여사가 순회참배에 참여해 조용하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원로연극인들과 일행의 뒤를 따랐다.
그간 임기 중 연극인선영순회참배를 주관한 박계배 한국연극협회 이사장과 묘소의 정확한 위치와 안내를 맡은 김병호 전 아시테지 위원장과 연극협회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차기 이사장체제에서도 순회참배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10월15일 박정기(朴精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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