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의 보금자리 '꽃재' 왕십리교회-남상학 장로
- 4대에 걸쳐 한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 1980년 왕십리교회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다. *
우리 가정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1950년, 내가 11살 때였다. 한 전도자가 외딴섬 이작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섣달그믐날 부락의 수호신을 모신 당산(堂山)에 올라가 산신령에게 안녕을 빌고, 풍어제라고 하여 어선이 출항할 때 풍어와 안전을 비는 외딴섬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가정은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의 가정으로 첫 출발을 내딛게 되었다. 할렐루야,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롬 10:15).
그 때 내가 처음 배웠던 찬송가는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와 “예수 사랑하심은”이었다. 나를 비롯하여 누나와 동생들은 이 찬송을 목청껏 불렀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섬을 떠날 때까지 간판도 없이 가정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다. 면소재지인 영흥도로 이사 온 뒤로는 집 근처에 있는 영흥감리교회를 다녔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내4리에 위치한 영흥교회는 섬 교회치고는 제법 큰 교회였다. 주일학교에도 꽤 많은 아이들이 모였다.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아버지 없는 슬픔을 달랠 수 있었다. 어느 주일 주일학교 선생님은 시편 23편을 읽고 나서, 벽에 걸려있는‘양치는 목자’성화를 가리키며 목자는 주님이시며 양은 바로 우리들이므로 양들은 목자만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들려 주셨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이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중략) 내가 비록 죽음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 말씀은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듬직한 지팡이를 들고 계신 목자의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그 날부터 예수님은 어린 나를 인도하는 아버지처럼 절대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비록 아버지 없는 외로움과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목자 되신 예수님이 나를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나에게 위로가 되었든지, 나는 당시의 심경을 훗날 <나의 사랑 영흥도>라는 글 속에 적었다.
주일 아침마다 꿈길에서 듣는 교회당의 새벽 종소리 청아한 소리 따라 손잡고 가는 길 이슬 맺힌 언덕길을 걸으며 뽀얀 한숨을 흰 구름으로 날렸지
높다란 십자가 종탑 위로 마음은 운동회 날 만국기로 펄럭이고 몰려 온 참새 떼 목청 높여 부르는 ‘예수님 사랑’
양치는 목자의 성화 앞에 앉아 나는 꿈꾸듯 아버지 얼굴을 그리곤 했지 빈 하늘 우러르는 홀로 그 때 쓸쓸함을 누가 알까
시편 23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슬픔에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섬에서 뭍으로 나와 처음 출석한 교회는 영월 읍내의 영월중앙감리교회, 제천에 정착한 뒤에는 제천제일교회에 출석했다. 나는 영월중앙교회에서는 초등부를 졸업했고, 제천제일교회에서는 중․고등부 6년을 다니면서 1954년 박신오(朴信五) 목사님에게 학습을 받고, 1958년 황인순(黃仁淳)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시기는 나에게 가치관과 인생관이 형성될 때였으므로 신앙은 나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 나는 교회에서는 고등부 회장, 학교에서는 기독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고등부 지도교사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셨기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부흥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나는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봉사하며 신앙을 키웠다. 1958년 여름방학 중에는 경희대학교에서 개최한 한국기독교학생총연합회(KSCF) 하기수련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 크리스마스 전야에는 눈 덮인 새벽길을 밟으며 성탄송을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왕십리교회는 1960년 대학생 때부터 내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서울에 이사 와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감리교회를 찾은 것이 왕십리교회였다. 이 곳 사람들은 왕십리교회를 ‘꽃재교회’라고 불렀다. 그 자리는 예전에는 철따라 꽃이 많이 피어 ‘꽃재’로 불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부속기관인 꽃재선교유치원, 꽃재평생교육원 등 ‘꽃재’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었고, 선교 회보의 이름도 《꽃재》였다. 당시의 19대 이문복(李文馥) 목사님은 전도에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다. 자전거에 풍선을 달고 심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1960년 12월 25일 입교했고,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청년기에 열정적으로 신앙 활동을 했다. 이 때 어머니는 속장으로, 누님은 성가대원으로 교회를 섬겼다.
내 청년회 시절은 주일에는 찬양대원으로 예배를 돕고, 토요일 저녁에는 청년회 정기모임을 가졌다. 성경공부, 독후감 발표회, 음악 감상, 토론회 등 활동은 다양했다. 그리고 해마다 청년회 간행물 <초롱불>을 만들었고, 청년회전국연합회에서 개최하는 수련회에 참가하여 성경퀴즈대회, 성가경연대회, 간행물경진대회 등에서 1등을 휩쓸었다. 1962년 여름에는 서해의 작은 섬 이작도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했다. 또 1963년 3월 16일에는 정동교회 내의 젠센기념관에서 《기독교 문학의 밤》을 개최했다. 찬조출연으로 소설가 전영택, 시인인 김경수, 임인수, 석용원 씨도 초대되었다. 이것은 단일교회 청년회가 주최한 최초의 행사여서 교계의 주목을 받았다. 《기독공보》와 《크리스챤신문》은 우리의 작품을 게재하기도 했다. 활발한 활동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 해 감리교청년회 전국연합회 총무가 되었고, 전국임원수련회, M.Y.F 배지 보급, M.Y.F수첩 제작, 지방연합회 조직 및 지원 활동 등의 일을 했다. 3년에 가까운 군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왕십리교회의 주일예배에 빠진 적이 없다. 근무지가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였으므로 1년에 한두 번 비상이 걸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주 외박이 가능했고 그래서 나는 왕십리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다. 1968년에는 권사직을, 1980년에는 장로로 추천되었다. 나는 누님, 동생의 식구들을 포함하여 꽃재가족 형제자매 모두가 왕십리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기뻤다. 시 <꽃재언덕>은 그런 삶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4대문 밖 시구문 지나 왕십리 홍익동 언덕은 갖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예부터 ‘꽃재언덕’이라 불렀다. 돌밭 가시떨기 일궈 예쁜 꽃씨 뿌리고 당신 사모하는 애절한 마음이 햇빛과 봄비 맞아 하이얀 목련으로 피기도 하고 여름날 뜨거운 햇볕에 해바라기로 피기도 하고 추운 날 빨간 동백 한 송이로 벌게도 하고 저마다 아름다움 다투어 피는 꽃 숲에 우리는 신나는 나비와 꿀벌 되어 홍익동(弘益洞) 이름 그대로 하늘과 땅과 사람 두루 이롭게 하며 조화롭게 살았다. 새벽에는 푸른 종소리에 어둠의 날개 털고 맑은 이슬에 미역을 감았지. 낮에는 훨훨 날아 단 꿀을 여기저기 나누어 주다가 진액에 취하여 낮잠을 자고 깊은 밤엔 임 그리워 편지를 쓰다가 단꿈에 들기도 했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들의 경영(經營) 나팔꽃 꽃밭에선 하늘 향해 트럼펫을 불고 붉은 장미 밭에선 피 흘리는 임 그려 빈혈의 영혼에 수혈을 하고 온 누리 구석구석 향기를 뿜어낸다. 그대여, 햇볕과 바람과 우로(雨露)에 감사하며 찬미의 불꽃 꽃술을 달고 임 오실 날 기다려 오늘 한마당 판을 벌일까.
꽃재 언덕, 나는 꽃재언덕 왕십리교회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형제들과 함께 한 교회에서 신앙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누님 내외, 동생 내외와 조카들, 우리 두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은 왕십리교회에서 영의 양식을 먹고 자랐다. 한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을 불렀다. 그래서 ‘꽃재동산’은 모양과 색깔과 향기는 각각 다를지라도 꽃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아름다운 동산과 같았고, 그곳에서 나비와 꿀벌처럼 꿀을 나르며 은혜의 생활을 하는 모습들이 좋았다. 누님 가족은 먼 일산에 살면서도, 내 동생 상우(相祐)는 오랜 동안 외국에 살다 돌아와서도 믿음의 고향 꽃재를 잊지 못해 찾아왔다.
그런 동생이 장로로 추천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동생은 미국 하버드, MIT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로 복귀하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늘 자신을 비우고 헌신적인 섬김의 삶을 살았다. 교우들은 그의 믿음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여 장로로 추천했던 것이다. 나는 꽃재교회의 새벽 제단에 엎드렸던 어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가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힘들고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돌아가시는 날까지 자녀들의 신앙을 위하여 새벽 제단을 열심히 지켰던 것이다. 나는 동생의 장로 취임식 날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 이 날을 감사해야지요>라는 글을 썼던 것이다.
언 땅에 꽃씨 한 줌 뿌려 놓고 긴 겨울 언 가슴으로 오르시던 왕십리 꽃재 언덕에 오늘은 금빛 햇살이 눈부십니다, 어머니
가녀린 새싹 그 품에 보듬어 안고 기도의 열기로 작은 꽃망울을 맺으시더니 은혜로운 햇살 받아 오늘 화사한 꽃으로 피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 낯익은 얼굴 틈으로 어머니, 활짝 웃으며 달려오십시오. 이 환희의 날 주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 아름 꽃다발을 드려야지요.
돌아보면 언제나 부끄러움뿐인 것을 어이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지 부르시고 택하여 세우시는 은혜는 더더욱 고마워서 눈물 고여 오는 감사의 마음을 받쳐 들고 옥합을 깨뜨리듯 제단을 쌓고 꽃술 흔들어 고운 하늘에 짙은 향기를 날립니다.
오늘은 형제자매 한 자리 어우러진 꽃무리 속, 축제의 날 은혜의 빛 둘레에서 두 손 모으고 어머니, 이 날을 영원히 감사해야지요.
동생은 장로로 파송 받은 뒤에는 외국인선교회를 이끌면서 외국인의 생활과 편의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다시 일본의 아시아개발은행 근무와 이어 베트남 개발계획을 돕는 일에 종사하면서 거듭 외국생활이 이어지면서 교회는 그를 평신도 선교사로 파견했다. 그는 일본에서 도쿄 뉴오타니호텔 가든 채플에 출석하면서 채플을 인도하는 버틀러 목사(박사)의 베드로전서 강해설교를 영역하여 <고난 받을 때 기뻐하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꽃재언덕 위의 왕십리교회는 우리 가정과 내 신앙생활의 터전이었다. 하나님은 42년간 믿음을 꽃피운 터전에서 31년 간 장로로 일하게 하셨다. 1978년에는 안병관 장로님과 함께 <왕십리교회 70년사>의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고, 1988년에 창립 80주년 기념 축시 ‘은혜의 빛 둘레에서’를, 1998년에는 창립 90주년 기념축시로 ‘해바라기의 노래’를, 그리고 1993년 왕십리교회 교회가를 제정하면서 작사를 맡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누님과 자형은 자타가 공인하는 왕십리교회 성경통독왕으로 평가될 만큼 성실하게 믿음의 생활을 지켜나갔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후회가 남지만, 나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내가 왕십리교회를 섬기는 동안 여덟 분의 담임목사님을 만났다. 그 동안 담임 목사님으로 내 신앙을 지도해 주셨던 분은 이문복, 김영신, 김우영, 김광원, 이천, 최이우, 김성철, 김성복 목사님이었다. 나는 이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특히 형제들과 함께 4대에 걸쳐 한 교회를 섬기게 하신 것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꽃재’는 내 어머니의 눈물과 찬송이 쌓인 제단이요, 우리 형제들과 우리 부부의 헌신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은 두 아들과 그 후손이 섬김의 본을 보일 수 있기를 기도한다.
* 1980년 장로취임 후 2011년 은퇴까지 31년동안 왕십리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했다. *
* 남상학 장로에 뒤이어 동생 남상우 장로가 왕십리교회에 장로로 취임하다 *
* 장로은퇴 축하 및 고희 감사예배를 끝내고 직계가족(상)과 처가식구들과의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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