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고자 하면 결코 깨닫지 못한다
<20>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②-5
[본문] 혹시 보았는지요? 옛날 관계(灌谿) 화상이 처음 임제(臨濟) 스님을 참례했을 때의 일입니다. 임제스님이 관계화상이 오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선상(禪床)에서 내려가서 멱살을 움켜잡으니 관계화상이 즉시에 말하기를,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제스님이 그가 이미 깨달은 것을 알고는 곧 밀쳐내 버리고 더 이상 말이나 글귀로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관계화상이 무슨 사량과 계교로서 상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로부터 이와 같은 본보기가 있는데도 지금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가지고 중요한 문제로 삼지 아니하고 다만 거친 사람의 마음이라고만 여깁니다.
증득하기 기다리는 마음 앞서면
四天下 돌아치더라도 못 깨달아
[강설] 관계화상과 임제스님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깨달음의 인연을 들고 있다. 선불교의 원형은 조사선이다. 조사선이란 간화선도 포함하지만 차원이 다소 다르기 때문에 엄격하게 나누면 간화선 이전의 선을 말한다. 관계화상과 임제 선사의 거량에서 간화선 이전의 조사선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즉 후대에 발생한 화두가 끼어들 틈이 없는 조사선 불교다. 즉 사람을 보자마자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멱살을 잡힌 사람도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임제스님도 그가 이미 깨달은 것을 알고는 더 이상 알아보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에서 달리 무슨 사족을 붙일 수 없지만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낸다면 임제스님이 멱살을 잡고 관계화상이 멱살을 잡힌 사실을 안 것에 일체불법이 다 갖춰져 있다. 도가 있고 법이 있다. 해탈과 불성과 진여가 그 일에 다 넘쳐나고 있다고 하겠다. 순간의 직관으로 느끼고 알아야 할 일이다.
임제스님도 처음 황벽스님을 친견하여 “무엇이 불법의 정확한 뜻입니까?(如何是佛法的的大意)”하고 물었다.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20방(棒)을 후려쳤다.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연달아 세 번 60방을 후려쳤다.
그리고는 대우스님에게 가서 “황벽선사가 그렇게도 노파심으로 친절하게 가르치던가?”라는 말을 듣고는 진정한 불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는 스스로 말하기를, “황벽스님의 불법이 참 간단하구나(黃蘗佛法無多子)”라고 하였다.
흔히 불법을 설명한다고 구구하게 늘어놓지만 그것은 모두 가짜다. 진정한 불법은 위와 같이 간단명료하다. 다만 사량 분별로 헤아려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한순간의 직관으로 깨닫는 것이다. 대혜선사는 증시랑에게 조사선의 진면목을 예를 들어 보여주었다.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간화선은 위와 같은 사실에 계합이 되지 않으므로 우정 화두라는 방편을 만들어서 억지로 가까이 가게 하는 방법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본문] 관계화상이 당초에 만약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증득하기를 기다리거나 쉬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있었더라면 그때에 멱살을 잡히고 곧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손발을 묶고 사천하(四天下)를 한 바퀴 돌아치더라도 또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쉼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설] 참선은 깨닫기 위한 참구법이지만 그렇다고 그 깨달음에 대해서 한 생각이라도 있다면 결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 참선공부다. 이론적으로는 너무나도 모순이 많지만 깨달음의 문제는 세속적 논리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만약 깨닫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멱살을 잡는 정도가 아니라 손발을 묶어서 전 세계를 수십 바퀴를 돌아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60방망이가 아니라 6만 방망이로 사람을 두들겨 패서 가루로 만들더라도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부디 이 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서 참선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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