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6:1-17, 삼손의 밤과 몰락, 23.9.6, 박홍섭 목사
사사기 16장은 삼손 이야기의 마지막 기사인 동시에 사사기에 나오는 12명의 사사를 다룬 내용의 결론 부분이기도 합니다. 17장부터 21장까지는 일종의 부록으로 사사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사사 시대의 종교적인 타락과 그로 말미암은 도덕적인 부패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6장의 전반부는 삼손의 심히 안타깝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삼손은 매우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나실 인으로 구별했고 강한 힘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맨손으로 어린 사자를 찢는 힘을 주졌고(14:6), 여우를 300마리나 붙잡는 능력과(15:4) 나귀 턱뼈로 1,000명의 대적을 무찌르는 괴력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서 가장 놀라운 힘을 가졌던 사람이 삼손입니다. 오늘 본문 16:3절을 보면 성 문짝들과 문설주 그리고 빗장을 빼서 어깨에 메고 산으로 올라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보여 줍니다.
이 힘을 누가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사명을 위해서입니다. 블레셋의 압제에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추수하는 사람에게 낫을 주시고, 논밭을 갈아엎을 자에게는 쟁기를 주시며 밭이랑을 긁을 자에게는 호미와 괭이를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명의 분량만큼, 사명의 종류만큼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삼손은 자기의 사명을 망각하고 육체의 정욕에 빠져 영적으로 몰락해갑니다. 왜 성경이 승리가 아닌 몰락의 과정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해놓았을까요? 우리도 삼손처럼 조금씩 죄를 용납하다가 결국은 사명을 잊어버리고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손은 나실 인입니다. 그는 부모를 통하여 나실 인의 법을 듣고 잘 알고 있습니다. 나실 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으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나실 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15장의 엔학고래의 회복을 경험한 이후에 또다시 가사로 가서 한 기생에게 들어가 나실 인의 금기사항을 어기고 있습니다. 가사는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게 약 60km 떨어진 곳으로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로 최남단에 위치합니다. 여기에 삼손이 왜 갔습니까?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녀 집에 갔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말씀 묵상했겠습니까? 기도회 했습니까? 복음전파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술을 퍼마시고 이방의 창녀와 성적으로 문란하게 어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든지 임할 수 있도록 그를 준비하고 있어야 할 나실 인이 가사에 내려가서 기생의 몸에 자기를 던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삼손을 사용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이 가사의 기생 집에 들어간 사실이 그곳 주민들에게 알려지자 가사 사람들이 기민하게 움직입니다. 성문으로 와서 그 기생 집을 에워싸고 밤새도록 매복했습니다. 술과 분탕질에 취해 깊이 잠든 새벽을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밤중에 일어나 성문의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서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골짜기로 갑니다. 무릇 모든 성문은 튼튼하게 무장합니다. 그런데 그 무겁고 튼튼한 성문의 문짝과 문설주와 빗장을 빼서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골짜기까지 유유히 갑니다. 가사에서 헤브론까지 60km입니다. 가사는 해변이고 헤브론은 산악지대입니다. 그 무거운 것을 평지도 아니고 산악으로 오르는 경사 지대를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어깨에 메고 가고 있습니다. 상상이 갑니까? 이런 삼손을 보면서 가사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가사라는 도시의 이름이 “강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가장 강한 도시 가사의 성문을 삼손이 아무렇지도 않게 쳐서 무너뜨리고 어깨에 짊어지고 어디까지 갔다고요? 헤브론까지입니다. 헤브론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의 부부가 묻힌 언약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나실 인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정욕에 빠져 기생에게 들어간 삼손이지만, 그를 죽이기는커녕 다시 힘을 주셔서 그를 통하여 아무리 강한 블레셋 족속이라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 앞에 이렇게 뽑혀서 패배할 것이라는 언약의 암시를 주시고 동시에 삼손에게는 다시 돌이킬 수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또다시 위험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사사기 저자는 딤나의 여인과 가사의 창녀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이 여인의 이름을 ‘들릴라’라고 밝힙니다. ‘들릴라’는 ‘매달리는 자’, ‘약하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함으로 매달리는 자에게 매달렸고 약하게 하는 자에게 매달려서 강한 자가 약한 자가 되는 몰락의 과정을 스스로 걷고 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했지만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블레셋 방백들이 삼손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과 그를 결박하여 굴복시킬 방법을 알아내라고 뇌물로 제시한 은 오천오백 개를 받고자 삼손을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집요한 ‘들릴라’의 추궁에 세 번이나 거짓말로 버티다가 결국은 실토하고 맙니다. 16-17을 보십시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 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들릴라’가 누구입니까? 세 번이나 자신을 블레셋에게 넘기려고 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빙자하여 또 힘의 근원을 말하라고 채근합니다. 얼마나 재촉하는지 날마다 마음이 번뇌하여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이제 이 여인과는 여기까지구나, 이 여인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 힘의 근원을 알아 블레셋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구나”하고 알아차려야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번민하고 고민하는 동안은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번민하면서도 ‘들릴라’를 포기하는 결정이 아니라 자기 본분과 비밀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내 삶에 심한 고민과 번민의 순간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 번민의 동기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자신의 본분과 영적 비밀을 지키는 바른 결정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삼손이 나실 인인 자신의 진실을 말하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머리카락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삼손은 머리카락만 잘리지 않으면 나실 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고, 부정한 시체를 가까이하고, 창녀와 어울려서 부정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머리카락만 잘리지 않으면 여전히 나실 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삼손의 근본적인 문제점입니다. 머리카락만 잘리지 않고 힘만 나타나면 여전히 자기가 나실 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머리털을 깎으면 힘이 없어지니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머리털만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이 맞는 생각입니까? 삼손의 힘이 머리털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에게서 나옵니까? 나실 인의 규정과 머리털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의 상징일 뿐이지 힘의 근원은 아닙니다. 나실 인의 힘은 밀지 않은 머리털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럼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주어진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자르지 않은 머리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건지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생각해서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에게 힘을 허락하사 블레셋을 물리쳐주신 은혜를 오해해서 자기가 나실 인의 법도를 다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손은 자신에게 있는 힘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허락된 힘이 아니라 머리털을 밀지 않아서 나타났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적 오해는 삼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모습과 증거를 보이지 못하면서 어떤 종교적인 형식 하나를 잘 지킨다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 4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싸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서 대패하여 4천 명이나 죽습니다. 이에 장로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여는데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하나님의 법궤가 없어서 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다음 싸움은 법궤를 동원합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더 크게 집니다. 무려 삼만 명이 죽고 법궤를 빼앗깁니다. 법궤를 동원했던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그의 아버지 98세의 엘리 제사장도 두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려져 죽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출산 중에 법궤의 빼앗김과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의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법궤를 빼앗긴 이스라엘과 이방 여인 ‘들릴라’에 빠져버린 삼손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영적 무감각과 무지입니다. 이런 영적인 무감각과 무지가 어디서부터 출발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맡겨주신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사명과 나실 인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조금씩 죄를 용납했던 순간부터입니다. 그 조금씩 조금씩이 마침내 죄에 대한 경계심을 다 풀어지게 만들고 결국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그릇된 사랑에 빠지게 합니다. 삼손의 ‘들릴라’ 사랑은 아름답고 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에 붙들려 스스로 자신을 몰락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잘못된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무지하게 만드는 이런 잘못된 사랑이 없는지 돌아보는 저녁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