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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사정거리
(민 23:1-3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민수기 23장 <원수의 사정거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원수의 사정거리.
좀 풀어서 말씀을 드리면 원수가 내게 해악을 미칠 수 있는 그 사정거리 라는 뜻이지요. 원수가 내게 해코지를 하고 내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그 사정거리.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이자 아주 유명한 얘기가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라고 하는 학자가 사람의 친밀감에 관해서 연구를 해서 문화인류학적인 차원에서 그래서 그것을 공간 개념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사람이 친밀감을 느끼고 적대감을 느끼고 하는 그런 어떤 문화의 근간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람과 사람이 사회를 이루어서 살면서 문화를 이룰 때 그 문화의 밑바닥에는 친밀감을 느끼는 공간 개념이 습관적으로 특정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에요.
그게 동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친밀감을 느끼는 어떤 공간 개념을 세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 번째, 경계의 거리라는 게 있어요.
그것은 동물의 경우에 사자가 적이 보여도 얼룩말이 마음놓고 풀을 뜯고 있는 그러니까 사자가 있지만 그 사자가 나를 해칠거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거리 이게 경계 거리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동물이 나타나도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것이에요.
근데 이제 사자가 점점 접근을 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얼룩말은 경계거리, 자기가 안심할 수 있는 거리만큼을 뒤로 물러납니다. 이 뒤로 물러나는 거리를 도주거리라고 말합니다.
근데 이게 때마다 동물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에요.
도주거리. 이제 얼룩말의 예를 들었으니까 그 사자가 만약에 배가 부른 사자다 라는 걸 얼룩말이 느끼면 배를 쳐다보든지 하여간 직감적으로 느끼든지 그렇게 배가 부른 사자라고 느끼게 되면 임계거리 도망치는 거리 그러니까 자기가 안심하고 걱정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거리를 50m로 잡습니다. 50m를 도망간다는 거예요.
근데 만약에 굶주린 사자라고 느끼게 되면 300m를 도망갑니다. 300m 바깥에 있어야 내가 안심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근데 점점 사자가 가까이 쫓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임계거리, 임계거리란 무엇이냐?
사자가 달려드는 데도 얼룩말들이 빙 둘러서서 뒷발질을 하면서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름대로 방어의 몸짓을 합니다. 거리를 유지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공격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임계거리라고 그래요.
이것을 동물들에게서 연구하면서 사람에게로 그대로 가져온다는 것이에요.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러한 내용을 오늘 본문에 한번 적용을 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내용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남단부로부터 가나안을 향해 북진을 합니다.
그러니까 미리 자리잡고 있던 민족 중에 모압이라고 하는 민족이 있는데 거기 왕이 발락이에요. 이 발락이 어제 말씀드린 대로 다른 여느 왕과는 다르게 군대를 동원해서 무찌르려고 하지 않고 군사력을 동원하려고 하지 않고 이 이스라엘 민족 배후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이 백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영계에서의 싸움을 주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샤만적이고 주술가인 발람을 데려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함으로서 이기려고 하는 그런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내용이 뭐냐 하면,
발람이 발락에게 와서 이제 저주를 하게 되는 거예요. 저주를 하기 위해서 모든 조처를 취하고 저주를 하게 하는데 근데 저주가 안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그 입술, 이 사악한 주술가 발람의 마음과 입술을 확 주장해버립니다. 그래가지고 마땅히 저주를 해야 되는데 저주가 안 나오고 오히려 축복을 하고 오히려 칭송을 하는 그런 내용의 예언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예언을 했는데 그런 칭송을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부분에서는 발락이 생각하기를 상당히 주도면밀하고 집요한 사람이에요. 발람이 저주하라고 시켰는데 칭송을 하고 축복을 하는 걸 보고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아, 지금 이스라엘 250만 명이 진을 치고 있는 들판을 보다 보니까 이 사람이 이 250만 명이 진치고 있는 모습에 압도되어버렸구나.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진 치고 있는 곳 중에 한 부분만 보이는 장소로 옮겨가면 아마 저주를 할 수 있을거야. 이렇게 위압되지 않고 저주할 수 있을거야.
그래서 장소를 바꿔서 다시 한번 저주하게 하는 부분을 우리가 읽은 것인데 거기서 이 발람이 얘기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께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시려고 하는 축복을 내가 어찌 돌이킬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말로 우리가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려고 하고 축복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할 수 없다. 이건 무슨 얘기냐 하면, 지금 발락의 생각을 통해서 보통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이나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들을 하나님이 끄집어내시는 거예요.
발락의 생각이 뭐가 잘못됐느냐?
이 발락은 영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라는 것은 현실과 무관한 영적인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주도하는 영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발락의 생각으로는 이 현실을 주도하는 영적인 세계의 지배권 중에서 하나님이라는 한 신의 지배권이 있고 또 다른 영역이 여유분으로 남아 있는 줄로 알았어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지배권 바깥에 있는 영역을 자기가 장악해서 하나님과 대결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이런 생각을 믿는 사람조차 갖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이 발락의 마음을 끄집어내서 성경 속에 기록하고 계신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계말고 다른 힘이 작용하는 그런 영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발락의 마음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복지의 삶을 살 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발락의 마음을 그대로 끄집어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시하시면서 아니다 없다. 아무리 발락이 하나님과 대결하기 위해 다른 영역을 정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왕권을 가지고 발람을 시켜서 저주하게 하려고 해도 그 사악한 주술가의 입술조차도 하나님이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늘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게로 갖고 옵니다. 또 선민에게 하나님이 가르치시려고 했던 것이기까 우리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게 무슨 뜻의 말씀이겠느냐? 하는 말이에요.
이걸 여러분,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경계거리. 내가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거리. 아무리 원수가 나타나고 적이 나타나도 또 나쁜 사람이 나타나도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거리.
이 경계거리가 믿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겠느냐 라는 것이에요. 이 경계거리를 침범 받아서 내가 공격합니다. 사람이 싸우고 물고 뜯고 하는 게 뭐예요? 결국은 침범 당했다고 하는 피해의식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거리를 상대방이 침범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난 주일날 유산에 관한 예를 들었거든요. 유산을 놓고 형제들이 싸웁니다. 그거 왜 그렇습니까? 내가 지금 안전하게 방어하면서 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나의 세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갈 수 있는 거리를 내 형제들이 침범했다고 믿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왔다고 믿기 때문에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 경계거리, 원수가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정거리 이거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정리가 되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지금 보여주는 것이에요.
발락의 생각을 따라 갈 것이냐, 발락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짜 마치 하나님이 지배하는 지배권 바깥에 다른 영역이 있어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선민으로 택한 나의 삶을 다른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다른 힘이 나를 침범할 수 있고 나를 손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고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결정하라는 얘기에요. 믿음의 사람이 되고 가나안 복지를 살려면 나를 해칠 수 있는 영역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를 내 마음이 한번 되씹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경계거리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경계거리가 없다는 거예요.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선민을 해치려고 하는 원수와의 관계는 어떠한 모양으로 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하면, 제가 캐나다에 있으면서 아이가 세 살 네 살인가 어렸을 때 그 아이를 데리고 집사람과 함께 마켓을 갔어요. 무슨 월 마트라든지 큰 마트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우리 아이와 노랑머리 서양 아이와 싸움이 붙었어요.
근데 우리 아이의 상태가 어떤 아이의 상태였느냐면 누가 그 아이를 때리잖아요? 자기가 맞았다고 하는 것과 그 아이가 자기를 때린다고 하는 게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게 화를 내야 될 일이다, 이게 지금 맞서 싸워야 될 이다 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때리면 이게 뭔가 그냥 이렇게 보는 거예요. 판단이 안 서는 거예요. 아이가 세 살 네 살이 돼도 그렇게 늦대요. 세 살 네 살만 돼도 내 물건을 빼앗아 가려면 뺏고 서로 싸우고 그러지 않습니까? 근데 맞았는데 쟤가 날 때린다는 상황이 이게 나를 해치는 거라는 거 이런 걸 모르는 거예요. 이게 뭔가 멀뚱멀뚱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갔어요. 가서 보니까 그놈은 씩씩 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놈이 남의 귀한 아들을 막 때려요. 그래서 내가 아이를 한 손으로 잡고 그 서양아이 머리를 잡고 이렇게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가 아무리 때리려고 해도 우리 아이에게 손이 닿지를 않는 거 아닙니까? 사정거리 바깥에 있는 거예요. 그 서양아이의 팔의 길이가 미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 왜 그래? 너 왜 내 아들 때려? 이렇게 말을 물어보는데 대답은 안 하고 계속 씩씩 거리는 거예요. 걔도 상황 파악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화를 내고 때린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것을 보면 우리 아이보다 진일보한 아이지요. 비슷한 키에. 우리 아이는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근데 내가 붙잡고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 상태라는 것이에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선민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배력이 어떻게 미치느냐 하면, 하나님이 선민을 이렇게 껴안으시고 그리고 선민을 해치려고 하는 모든 사회적 힘, 사람들의 힘, 원수들 일 모든 자들을 이렇게 버티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 사실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선민을 해칠 수 있고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어떠한 영역도 능력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라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말을 하고 그렇게 믿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내가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거든요. 내 돈을 사기치는 사람이 있는데 뭐. 그리고 나를 험담하고 나를 헐뜯는 일이 있는 것이 현실인데 뭐.
그때 알라는 겁니다. 뭘 아느냐?
발람이 저주를 하는 거, 여러분 저주를 했다고 해서 저주가 임하겠습니까? 임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니까 발람이 뭐라고 지껄이든지 상관없다는 얘기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술을 주장하시는 이유는 저주 한 마디 하는 거 실제로 저주가 임하지도 않는 공수표인데 그래도 그것을 주장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가 뭐냐?
누가 나를 헐뜯는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다는 거예요. 발람이 저주하는 걸 막으셨다는 이야기는 말 한마디 까지도 하나님의 지배권 아래 있다는 걸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를 저주했다. 그걸 내버려 두시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껴안으시고 그 저주하고 나를 헐뜯는 거? 손으로 버티고 계셔요. 아무런 해악이 없는 겁니다. 아무런 해악이 없고 그가 나를 해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배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하나님의 지배권 바깥에서 나를 헐뜯는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발람에게 저주의 말을 못하게 하신 것을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배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저주받지 않으십니까? 십자가에 달려서 미움 받아서 돌아가시지 않으십니까? 그때 예수님의 생각이 뭡니까? 하나님의 지배권 바깥에서 저들이 나를 죽인다고 생각하신 게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지배권 안에서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 믿은 것이에요.
하나님이 결국은 뭡니까? 하나님이 저들을 통해서 나를 십자가에 내 거시는 것이라고 믿으신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경계거리가 무엇입니까? 없어요.
예수님의 경계거리가 없고 임계거리 즉, 너무 다른 사람들이 당신 자신을 침범하고 손해를 끼치고 해악을 끼치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공격해야 된다고 생각하셔서 공격적으로 나온 그런 거리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좋은 예가 있지 않습니까?
다윗.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자기가 미리 들어가서 숨어 있던 동굴로 들어 왔습니다. 거기서 일을 보는 거예요. 아마 대변을 본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쭈그리고 앉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서서 대변보는 사람 없으니까. 등 돌리고 대변보고 있으니까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찔러 죽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그 사람. 우리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데 원수 아닙니까 원수. 근데 그 원수가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 찔러 죽이면 되는데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는 임계거리, 경계거리가 없는 거예요.
다윗이 느끼기에는 시편 23편에서 노래하듯이 이렇게 노래하는 거예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원수가 지금 바로 앞에 있습니다. 내가 공격을 해야 됩니다. 내가 방어를 해야 됩니다.
근데 다윗은 방어도 공격도 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끌어 안으시고 목자가 양 끌어 안으시듯 끌어 안으시고 손으로 버티고 있다는 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수가 아무리 이렇게 해도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거 아니라는 겁니다.
근데 진짜 사울에게 쫓겨서 동굴로 전전하는 건 손해 아닙니까? 손해지요. 근데 다윗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이것은 사울 때문에 내가 도망다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내가 도망다니고 있다 라고 본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도망다니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좋은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내 파트너로 하여금 내 돈을 사기치게 만들었습니다. 다 뜯어갔어요. 내가 알거지가 됐어요. 그럼 하나님 지배권 바깥에서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그 원수를 향해서 경계 태세를 가지고 임계거리에 침범해 들어온 그 원수를 향하여 재판을 하고 싸워야 됩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배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이러한 피해의식. 사람들이 나를 죽이는 순교 현장에 있습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스테반의 경우를 보더라도 스테반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았던 신앙의 선배들의 순교의 현장에서 그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생각한 것입니까?
네로 황제가 나를 죽인다고 생각한 겁니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네로는 나에게 손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네로가 나를 죽이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냐? 하나님의 지배권 영역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불러가신다고 본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산상속 문제를 가지고 지난 주 말씀 중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형제들끼리 싸워서 내가 받을 유신 몫을 너무 얌체머리없이 다 떼어갔다. 억울해 죽겠다.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지배권 바깥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받을 유산을 갖고 가신 거예요. 그러면 내가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있었던 유산을 하나님이 갖고 가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데 분명히 내 동생을 통해서 내 형을 통해서 갖고 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원수 같지만 원수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갖고 가신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 몫으로 들어올 유산을 다 동생과 형들을 통해서 갖고 가버리게 한 그것은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당연히 좋은 거예요.
이것을 믿는 게 믿음 아닙니까? 돈이 들어와야만 좋다고 믿는 게 믿음입니까? 돈이 들어와야만 좋다고 믿는 게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가나안 복지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느냐?
사람 살아가는데 어차피 원수들에게 둘러싸일 수밖에 없어요. 누군가 나를 헐뜯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누군가 나를 비방하는 사람이 있고 내 돈을 노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내게 억울한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근데 원수들이 있는 가운데서 어떻게 복지로 살아갈 것이냐를 하나님이 정리해주시는 거예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그런 말처럼 하나님이 나를 끌어 안으시고 다 이렇게 손을 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그 어떤 원수도 나를 근본적으로 해를 끼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예를 들어 내 돈을 사기쳤다 그러면 그 돈이 내게 있으면 분명히 독이 될 거였습니다. 저는 아주 단언할 수 있어요. 그 돈이 내게 들어오면 독이 될 수가 있는 것을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돈을 갖고 가게 해서 악역을 담당하게 하는 겁니다. 내가 하도 돈을 붙잡고 있으니까. 내가 하도 돈을 좋아하니까. 좀 스스로 하나님께 내기도 하고 좋은 일에 쓰기도 했으면 좋으련만 내가 너무 그 돈을 붙드니까 나를 위해서 옆의 사람들에게 악역을 담당시킨거라고 보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돈 뿐만이겠어요? 내 명예를 갈구고, 나를 비방하는 거, 또 심지어 확대하면 사회가 정한 신념체계가 있지 않습니까? 사회가 정한 성공을 하지 않으면 실패한 자다. 그런 거 아니라는 얘기에요. 좋은 대학 들어가지 않으면 못 산다. 이런 거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대학이 내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 나쁜 대학이 내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에요.
하나님의 지배권 안에 있는 것이고, 내가 만약에 나쁜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직장을 못 구한다는 것은 나쁜 대학에 들어갔으니까 직장을 못 구한다는 이 생각은 사회가 정한 생각이지 지금 내가 직장을 못 구하고 있는 이 현실은 하나님 지배권 안에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고 계시는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의 사정거리 밖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분명히 세상 사람들 눈에는 저 사람은 원수에게 당한 것이야. 우리가 당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보면 가나안 복지를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내막을 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내막을 보면 원수가 나를 해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수의 사정거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원수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원수가 없는 거예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삶. 하나님의 선민들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죄 한 번 없고 잘못 한 번 없는 분을. 그러니까 다 원수일 텐데 예수님은 그렇게 원수로 가득 차 있어야 될 세상을 원수 하나 없이 사신 것이에요.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신앙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나타나는 게 뭡니까? 기쁨과 감사와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교통. 기뻐하라,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고 하는 복지의 삶의 심리 상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살아갈 때 말입니다. 제일 중요한 거 기억하셔야 돼요.
자, 하나님께서 나를 끌어안으시고 원수를 이렇게 밀고 계시기 때문에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원수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본다 해도 그게 손해가 아니에요. 돈이 없어져도 내가 누구에게 헐뜯게 된다고 해도 내 복지가 절대로 망가지는 게 아니에요.
근데 복지를 망가뜨리는 장본인이 있어요. 근데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나 자신이에요.
누가 내 돈을 훔쳐가거나 사기를 치면 그 사람을 마음에 담아버려요. 원수를 마음에 담고 있으니까 원수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 거예요.
마치 내가 내 아들을 이렇게 붙잡고 아이를 밀고 있는데 내 아들 놈이 내 손을 뿌리치고 그 아이가 손을 휘두르고 있는데 앞으로 다가가는 거예요. 얻어터지는 거예요.
원수라고 생각해서 마음에 담는 거 이게 우리 스스로가 원수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원수가 쏜 폭탄이 저 앞에서 터지지 않고 그냥 딱 떨어졌어. 그걸 내가 쫓아가서 그 폭탄을 마음에 담아버리는 겁니다. 이 원수새끼 이러면서.
나만이 나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원수가 내 돈을 뜯어가고 나를 헐뜯고 비방하고 내게 손해를 끼쳐도 이게 모든 것이 하나님이 천수 백수를 내다보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섭리 안에서 아구가 착착착착 맞아들어가면서 나의 삶을 기가 막히게 인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돈이 뜯겼어요? 그거는 없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길 가는 거에요.
나를 비방하고 있어요? 그 비방이 있어야 되는 거라고 아예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가세요.
그러므로 오늘 하루 살아갈 때에 여러분은 죽어도 죽어도 손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원수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원수가 내게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절대로 가까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지배하고 계시고 섭리하고 계시는 것 뿐입니다.
내막을 보면 원수의 사정거리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겉으로 보면 원수가 내게 깊이 들어온 것 같지만 내막을 보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원수의 사정거리 밖에 있다는 것을, 누구도 나를 손해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욕을 먹고 손해를 보더라도 감사하고, 아멘하고, 그 원수를 조금도 미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지배하고 계시니까요! (2007.08.29)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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