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기(氣) 싸움
윤재의 단호한 음성에 George가 순간 움찔했다. 테이블을 꽉 쥐며 물었다.
“윤재 씨! 드릴 말이 있다고요? 도대체 그게 뭡니까?”
“성장세를 타고 있는 기룡자동차에 힘을 실어주기 바랍니다. 기업 간의 비즈니스는 어차피 투자 아닙니까?
이제 기룡은 하늘에 날아오르려는 비행기처럼 탄력을 받는 중입니다. 이때 AMC가 조금만 힘을 실어준다면 그대로 날아 높이 올라갈 겁니다.
일단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그다음은 순항입니다. 기룡은 AMC에 대한 보답을 순항에서 얻어지는 결실로 반드시 크게 보답할 겁니다.
기룡이 짧은 역사에 이만큼 성장한 것도 그동안 쌓아온 신용 때문입니다. 기룡이 제시한 부품 국산화율, 40% 가 되도록 선처해주십시오.
AMC가 매듭지으려는 30%는 너무 낮습니다. 기룡은 현재에 머무르는 기업이 아닙니다. 성장 가능성 있는 기룡을 보고 투자한다는 개념으로 결정해주십시오.“
George의 동공이 확 벌어지는가 싶더니, 거친 말투로 윤재에게 역공을 날렸다.
“아니?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궤변입니까? 다 된 밥에 무슨 재라도 뿌리겠다는 협박입니까? 협상은 협상 아닙니까? 룰은 룰이지요. 더는 재고 없습니다.”
윤재와 George가 언성을 높이며 난타전을 할 때, 회의실 뒤쪽에 수석 매니저 John이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진지한 모습이었다.
입과 턱에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지그시 대고 눈을 감았다. AMC와 기룡의 기(氣) 싸움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윤재가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우리 기룡이 날강도식으로 떼를 쓰는 것 아닙니다. AMC가 주는 게 있으면 기룡은 반드시 더 줍니다. 기룡 사훈이 신용, 노력, 꿈입니다. 사훈처럼 할 겁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기룡은 한다면 합니다.”
“윤재 씨! 그런 추상인 말로 더는 떼쓰지 마세요. 숫자로, 기한으로 구체적 명시를 하면 한 번 고려해보겠습니다.”
여기까지면 됐지 싶었다. 윤재가 슬쩍 정 팀장 쪽을 쳐다봤다. 말없이 지켜보면서 몸을 풀고 있던 정 팀장이 알았다는 듯 협상 링 위로 올라왔다.
이제는 윤재가 쉴 시간. 바톤을 주고 받았다. 링위의 긴장감은 더 팽팽해졌다. 정 팀장이 서류 한 부를 George에게 건네주며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George! 윤재! 이제들 진정합시다. 오늘 좋은 협상 결과를 내는 게 중요하지, 언성 높이는 건 이만합시다. 그 서류 좀 보세요.
George가 주장한 숫자와 기한. 모두 적힌 저희 기룡의 장기 계획입니다. 국산화율을 30%로 했을 때의 기룡의 손익 계산입니다.
또 40%로 하면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차이가 큽니다. 40%로 추진 시 나온 이익을 기룡이 모두 챙기겠다는 건 아니지요. AMC에도 더 배분됩니다.
아직은 회사 대외비 사항인데, 다음 추진 중인 개발 차량 협상에 AMC측에는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George의 내 천(川)자 이마가 다소 펴지는가 싶었다. 그때, 회의실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석 매니저 John이 메모지에 뭔가를 빠르게 휘갈겼다.
자리를 일어나며 Jenny에게 그 메모지를 건네고 회의실을 나갔다. Jenny가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좀 망설이다가 George에게 메모지를 전했다.
메모지를 받아 읽어보던 George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로지 공은 George 손에 있어서 윤재와 정 팀장도 긴장한 얼굴로 숨을 죽였다.
한참 후, 정적을 깨고 George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부품 국산화율, 35%로 결정합니다. 그에 따른 추가 도면을 제공하겠습니다. 특별히 John 수석 매니저의 배려에 의한 결정사항임을 알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난항인 협상 포인트를 합리적으로 매듭지어주신 John 수석 매니저의 결정을 수용하겠습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나돌았던 난타전 협상 링 위에서 모두 내려왔다. 서로 악수를 했다.
협상은 협상이고, 사람은 사람이었다. 경계선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여지를 남겼다. 결정에 따른 후속 일을 바로 이어갔다. 급물살을 탔다.
속전속결이었다. 모든 일을 깨끗이 마무리 지었다. 서류와 관련 도면 박스를 챙겨들고 일어섰다. 정 팀장과 윤재가 John 수석 매니저 룸에 들렀다.
“John 수석 매니저님. 오늘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 팀장이 감사 인사를 드릴 때, 윤재가 준비해간 선물 세트를 전했다.
“이것은 한국산 건강식품, 홍삼입니다. 옛날부터 한국 왕이 들었다는 귀하고 약효 좋은 홍삼입니다. 부디 건강히 지내십시오. 다음에 뵙겠습니다.”
수석 매니저 John이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악수를 했다. George와 Jenny에게도 홍삼 선물 세트를 안겨주었다.
입이 벌어지는 George와 정 팀장이 악수를 하는데, 그 모습을 윤재가 사진으로 찍었다. 그래,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넷이서 포즈를 취하자 지나가던 여직원이 사진을 찍어줬다. 윤재가 사진기를 받아 들려는 순간, Jenny가 윤재 팔짱을 끼며 한 장 더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찰칵 소리가 경쾌했다. 해맑은 Jenny 모습에 윤재도 덩달아 기분이 피었다.
“Tom & Judy 같아요.”
여직원이 조크를 날렸다. Tom & Judy라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아~ 중학교 영어 교과서 책 이름이 아닌가. 동화 속 주인공 같았는데. 그렇지.
한국에서는 ‘강윤재 그리고 서혜림’, 미국에서는 ‘Tom & Judy’. 그러고 보니 오른쪽과 왼쪽 아닌가. 무슨 좌청룡 우백호도 아닌데, 입에서 운율을 타네.
혜림이가 연수받을 때 지리산 등정하다 아프고 힘들다 해서 손 봐줬던 오른발. Jenny가 넘어져 침까지 놔주고 주물러 줬던 왼발. 그래서 어쩌라고.
글쎄 모르겠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장래 일도 몰라요. 어릴 적 성탄절 때, 빵 주고 과자 줘 들렀던 교회당에서 부른 노래가 왜 나오냐.
업무는 업무고 추억은 추억이다. 하여튼 여유가 생겼다는 것. Not Bad.
George와 악수를 하며 헤어지려는데 내일 시간이 괜찮냐 물었다. 내일 10시에 Peter 어머니 장례식이 있다고.
시간 되면 와보라고 장례식 안내 쪽지를 주었다. 글쎄, 내일 일은 난 몰라요. AMC 출장 건은 무난하게 끝났다.
***
“정 팀장님. 시차 적응 중에 숨 가쁜 출장 일. 이렇게 매듭짓고 나니 긴장이 비로소 다 풀리네요. 웨스트인 호텔 숙소에서 맞는 저녁 만찬, 참 좋네요. 자, 와인 한잔 드시죠.”
윤재가 편안한 복장으로 호텔 레스토랑에서 정 팀장과 식사를 하며 잔을 부딪혔다. 연극을 막 끝내고 나온 배우 같았다. 일은 일, 휴식은 휴식.
“윤재 너, 아까 George와 말싸움하는데 포스가 죽이더라. 파괴력 있는 음성에 날카로운 눈매. Jenny가 넋을 잃고 바라보더라. 웃음 참느라 참 혼났다.
George도 좀 쫄았더라고. 밀어붙이고 추궁하는 큰 목소리에 결국 수석매니저 John까지 들어오고. 초반 선수 역할 수행 잘했어.”
“출장 전날, 정 팀장님과 리허설한 대로 한 것뿐인 걸요. 그 작전, 정 팀장님이 짠 거잖아요.
제가 감정적으로 강하게 초반 분위기 잡고 나면, 마무리는 정 팀장님이 이성적으로 마무리하는 걸로. 진짜 연극하는 기분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연극 좀 해봤거든요.“
“직장도 연극무대야. 강하게 밀어붙이기도 하고, 약한 척 물러서기도 하고. 밀당이라는 게 있지. 협성, 네고세이션이 뭐 별거냐. 기(氣) 싸움이지.
다 뒤로는 후속 카드를 들고, 앞에선 쉽게 안 보여주는 거지. 처음부터 35%로 올려주세요. 해봐라. 절대 안 들어주지. 5%면 엄청난 금액인데.
40%로 확 올려서 야단법석을 쳐야 은근히 선심 쓰는 듯 35%를 주는 거지. 그럼 이쪽에선 고맙다고 예우를 해주는 거고. 양쪽 입장도 세워주는 거지.
왜 음악회도 봐라. 미리 앙코르 곡까지 다 준비해놓고도. 프로그램대로 끝나면 지휘자가 나가잖아. 그걸로 음악회가 끝나냐?”
“아니지요. 관람객들은 열렬히 앙코르 박수를 쳐야지요. 그럼 지휘자는 못 이기는 척 들어와서, 클라이맥스 곡으로 관객에게 감동 음악을 선물하고요.”
“그거야. 알게 모르게 묵계를 인정하는 거야. 아까 John도 그렇게 한 거지. 이쪽에서 강하게 요구 안 했으면 그 35% 카드 안 내놓았지.
회사에서도 노장과 고수는 때에 맞게 숨긴 패를 가지고 상대를 컨트롤 하는 거야. 우리가 누구냐. 기룡의 일당 백하는 정상열과 강윤재 아니냐!“
“정 팀장님! 하여튼 술맛 납니다. 자, 다시 한번 건배하시지요.“
“원더풀!!!”
그때였다. 누군가 정 팀장과 윤재가 자리한 테이블로 반갑게 달려왔다.
“윤재 형 아냐? 나 민혁이야!” *
28화 끝 (4,201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