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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짐의 정서와 돌봄에 관하여
-김태선 문학평론가
팬데믹을 지나오는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가장 문제적인 것으로 떠오른 것들 가운데 하나는 돌봄 노동일 것이다. 돌봄 노동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영역을 담당하는 동시에 마찬가지로 가장 취약 한 상태에 놓여 있다. 코로나19 감염증이 사회를 강타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취약성과 직접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그와 같이 취약한 영역이 우리 사회를 움직 일 수 있도록 하는 핵심적인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 다. 최근 다양한 논의들과 새로운 길에 관한 모색들이 나오고 있으 나, 돌봄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 코로나 이전 단계에 머물 러 있는 듯하다. 이 글에서는 돌봄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찾 기 위해, 황인숙의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문학과지성사, 2022)에 수 록된 시 두 편을 함께 읽으며 그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우선 시 「어 디 사는지 모른다」를 읽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자. 다소 긴 작품이기 에 이곳에는 시의 전반부만 인용한다. 1
심야 편의점 알바 청년이 / 어디 사는지 나는 모른다 / 그도 단골인 내 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 우리는 밤에 산다 // 청소차 꽁무니에 한 발 올 려놓고 / 매달려가는 미화원 / 연둣빛 형광 조끼 안에 살지 않는다 / 어 디 사는지 모른다 / 우리는 밤에 산다 // 어둠 속에서 기척 없이 다가와 / 앞을 가로막고 선 오토바이 / 기함을 하는 내게 “허허!” 웃으며 / 신문 을 건넨다 / 신문 배달원은 내가 어디 사는지 안다 / 나는 그가 어디 사 는지 모른다 / 얼굴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만 만나서 / 그도 내 얼굴을 모 를 텐데 / 어찌 그리 잘 알아볼까 / 우리는 밤에 산다
—「어디 사는지 모른다」 부분
심야 편의점 알바 청년, 미화원, 신문 배달원 그리고 시를 노래하 는 자신……. 「어디 사는지 모른다」에는 밤에 사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 가운데 앞에 제시된 셋이 밤에 사는 까닭은,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듯 생계를 위한 노동 때문이다. 그에 반해, 화 자인 ‘나’의 경우는 일견 자신의 생계를 꾸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나’가 밤에 사는 이유는 인용에서 제외한 시의 후반부에 “밤 에는 졸졸 따라다니더니 / 날빛 속에서 너도 내가 낯선 게로구나”라 는 표현을 통해 간접적인 형태로 제시된다. 물론 이 작품에만 한정 하여 살핀다면 이와 같은 대목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편들을 살핀다면 시에 서의 ‘나’가 하는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 다. 시에서 말 건넴의 대상이 되는 ‘너’는 바로 고양이이다. ‘나’ 역시 밤에 사는 까닭은 그 시간에 고양이들의 밥을 챙기기 위해서이다. 밤 에 이루어지는 돌봄의 활동. 밝은 “날빛 속에서 너도 내가 낯선” 데 에는 그와 같은 이유가 있는 셈이다.
심야 편의점 알바 청년이나 미화원 그리고 신문 배달원 모두 ‘너’ 라 호명된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밤에, 그리고 밤을 함께 사는 이들이다. 그러하기에 낮의 시간에서는 모두 낯선 사람들일 터 이다. 이를 시에서는 “어디 사는지 모른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 디 사는지 모른다’는 것, 이는 또한 그러한 이들이 어떠한 사람들인 지 알지 못하며 친밀한 교유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 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나’에게 타자나 다름없는 존재들 이다. “어둠 속에서 기척 없이 다가”온 신문 배달원과 맞닥뜨렸을 때, ‘나’가 그 최초의 반응으로 기함을 했던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어디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 누가 사는지 모르는 집들을 지나간다”라는 시의 마지막 대목처럼, 사실 우리 모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각자가 고 립되어 닫힌 세계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에서 ‘모른다’라는 시어가 ‘알다’라는 말보다 더 깊은 관계를 가리 키는 표현으로 작동하고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 인 ‘모른다’라는 기호는, 시에서 “어디 사는지 모른다”와 같은 형태 로 우선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히 서로가 서로에게 별 다른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이른다. 나아가 이들이 맺는 관계가 ‘사는 곳’과 같이 특정한 혹은 공통적인 장소를 매개로 이루어져 있 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들 사이 에는 공통분모가 없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른 다’라는 상태가 이들을 엮어주는 공통점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문 배달원은 내가 어디 사는지 안다”라는 말처럼, 이 또한 시에서 는 공통점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의 사는 곳을 모르는 ‘우리’는 그야말로 서로를 모르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렇듯 ‘모른다’라는 말을 고찰하는 동안 독특한 사실 하 나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무관한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모른다’라는 말을 고찰하는 동안 시에 등장하는 인 물들과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엮이고 있다. 이처럼 서로 모르 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과정은, 우리가 시를 읽고 그에 관해 생각할 때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험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움직임의 과정은 비단 언어라는 형식을 고찰하는 차원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시의 목소리는 또한 “우리는 밤에 산다”는 말을 통해 밤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행하는 독특한 돌봄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돌봄’이라는 말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약자를 향해 베푸는 보살 핌, 혹은 재생산 노동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고 또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우리가 ‘돌봄’이라는 표현을 사용 하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들에 공통적인 모습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 취급받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돌봄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지만, 직접적으로 재화를 생산하지는 않는다는 이유에서 부차적이 거나 보완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돌봄은 단순히 노동력 을 재생산하거나 약자를 보살피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는다. 돌봄은 일방향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호혜적 인 행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들로 하여금 그 존재함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이루어가는 근원적인 소통과 생성의 움직임이 기도 하다.
나아가 돌봄은 단순히 인간과 같은 인격적인 존재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황인숙의 시에서 ‘나’가 밤에 살아가는 이유 역시 고양이와 함께 나누는 돌봄에 있다. 고양이 먹이를 챙기는 일은, 인간의 관점에선 한쪽 방향으로만 이루 어지는 돌봄으로 보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이 이루어 지는 가운데 실은 ‘나’ 역시 고양이로부터 돌봄을 받는 존재가 된다. 시에서는 “밤에는 졸졸 따라다니더니”라는 말로 그에 관한 이야기 를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행동은 먹이를 얻기 위해 애교 부 리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도를 조금 달리하여 살핀다 면, 우리는 고양이의 움직임에서 종과 종 사이에 자리한 벽을 허무 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또한 발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소통 을 통해 ‘나’와 고양이는 정서를 나누는 가운데 서로 이어져 있음을 또한 느끼게 된다. 시인이 포착한 인간과 동물 혹은 인간과 비인간 적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교통의 움직임을 우리는 『내 삶의 예쁜 종아리』에 수록된 다른 시편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저 사람이 저렇게 / 아름다운 개를 키워도 되는 걸까 / 제 한 입 먹이 기도 힘들어 보이는 / 저렇게 불쌍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 아, 저 아 름다운 개를 // 털은 윤이 나고 눈빛은 그윽하네 / 귀한 혈통을 타고나서 / 잘 보살펴진 듯 / 콰지모도 같은 주인은 숭배하듯 개를 애지중지하고 / 개는 주인을 사랑하는 듯 / 하지만 쪽방촌 거리에서 너무 아름다운 개 / 그렇다면 뭐 아름답지 않은 개는 / 저 사람이 키워도 괜찮단 말인가 / 그러면 뭐 저 사람은 / 당최 아무 개도 키워서는 안 된단 말인가
—「삶과 개」 전문
「삶과 개」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는 목소리는 바로 “저 사람이 저 렇게 / 아름다운 개를 키워도 되는 걸까”라고 하는, 경탄과 물음이 188 뒤섞인 표현이다. “저렇게”라는 말로 시의 목소리는, 독자에게는 현 전하지 않았던 사태를 현재적인 것으로서 불러들이고 있다. ‘나’가 마주한 광경을 ‘저렇게’라는 말로써 시간과 공간의 단절을 넘어서 우리로 하여금 함께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만큼 ‘저렇게’라 는 말이 가리키는 사태는 ‘나’에게 강렬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있 다. 시의 화자가 그와 같은 표현을 쓰게 된 까닭은, 맞닥뜨린 장면이 그로 하여금 숭고의 감정과도 같은 것을 느끼게 하였기 때문일 터이 다. 여기서 ‘숭고’라 한 까닭은, 노래하는 이가 자신 안에 척도처럼 자리했던 것을 넘어서거나 무너뜨리는 무언가와 만나고 있으며 그 감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렇게’라는 표현은 또한 이와 같은 격정을 집약하고 있기도 하다. ‘나’로 하여금 놀라움을 느 끼게 만든 것은 바로 ‘저 사람’이라는 말로 지시된 누군가가 ‘아름다 운 개’를 키우는 모습이다.
당장 ‘저 사람’이라는 말로 급하게 표현하는 만큼 시의 화자인 ‘나’ 는 격앙되어 있으나, 우리는 그 인물이 어떠한 사람인지 곧 알게 된 다. 세 번째 행부터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저 사람’에 관해 묘사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저 사람’은 바로 “제 한 입 먹이기도 힘들어 보이는 / 저렇게 불쌍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라 묘사된 모습을 한 인물이다. “불쌍하고 험상궂게 생긴 사람”과 그가 기르는 “귀한 혈통을 타고”난 것 같은 ‘아름다운 개’의 대비가 ‘나’에게는 제 안에 자리했던 어떤 틀을 무너뜨릴 만큼의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보이는 인물이 자신 말고도 다른 생명을 더 부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동시에 돌 보는 이의 모습과는 다르게 털에 윤이 나고 좋은 혈통으로 보일 만 큼 아름답게 키우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불가해한 수수께끼로 다가올 189 시선과 시선 법하기도 하다. 그러나 수많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기르 는 개가 “잘 보살펴진 듯” 보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콰지 모도 같은 주인은 숭배하듯 개를 애지중지하고 / 개는 주인을 사랑 하는 듯”이라는 대목에서 읽을 수 있듯, ‘저 사람’과 ‘아름다운 개’ 사이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애지중지 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의 반 려견은 “쪽방촌 거리에서 너무 아름다운 개”이다. ‘저 사람’과 이 거 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에게 자리했던 ‘틀’이 어떠한 것인지 발견 하게 된다. 그것은 주거지역이나 소득의 수준으로 나뉘는 계층에 알 맞은 나름의 삶의 양식이 있으며,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 인 모습이라는 관념이다. 아마도 이러한 관념은 비단 시에서의 ‘나’ 만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관념, 즉 상식과 같은 것 일 터이다. 이러한 틀 혹은 척도는 세상을 편하게 이해하도록 만드 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실상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 다. 이를테면 ‘콰지모도’라 표현될 만큼 ‘저 사람’은 ‘쪽방촌 거리’에 서 살아가는 이들 중에서도 낮은 곳에 자리한 인물이며 험상궂은 인 상을 하고 있을 터이다. “제 한 입 먹이기도 힘들어 보이는”이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세인의 관점에서 ‘저 사람’이 개를 키우는 모 습은 사치스러운 태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개가 아름답다 는 것, 그리고 “주인은 숭배하듯 개를 애지중지하고 / 개는 주인을 사랑하는 듯” 서로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사람’, 그리고 이 ‘쪽방촌 거리’에서 ‘아름다운 개’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가운 데 이루어지는 정서의 나눔 때문이다. 즉 둘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소통에서 기인한다.
각자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교통의 과정은, 또한 그 움직임을 지켜보는 ‘나’의 인식을 변화시킨다. 즉 ‘나’의 안 에 자리했던 ‘틀’을 깨부수고 눈앞을 가리던 베일을 벗게 만든다. 그 리하여 시의 마지막 네 행에 쓰인 바와 같이 “그렇다면 뭐 아름답지 않은 개는 / 저 사람이 키워도 괜찮단 말인가 / 그러면 뭐 저 사람은 / 당최 아무 개도 키워서는 안 된단 말인가”라며, ‘나’로 하여금 그 동안 우리의 삶을 옥죄는 틀에 균열을 내는 물음을 던지도록 한다. 이와 같은 장면은, 돌봄의 과정이 타자를 살아있게 하는 움직임에 그 치지 않고 삶의 양상 자체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나아가 이 힘은 또한 근대적 주체성이라는 관념에 자리한 한계를 넘 어서는 길을 또한 살필 수 있게 한다.
‘저 사람’과 ‘아름다운 개’의 관계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 자 신을 비롯해 세상에 나온 모든 것들은 고립된 채로 존재할 수는 없 다.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이다. 어떤 개체를 이루는 요소들은 실 상 모두 타자였던 것들이며, 생명체의 경우라면 자신 바깥의 존재자 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가운데에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지속시킬 수 있다. 즉 당신과 나,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관계의 산물이 자 그 한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러한 교통의 과정은 너무나 당 연한 것으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기에, 역설 적으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의식되곤 한다. 그로 인해 우 리는 자기 자신이 타자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 한 채 살아간다. 한편 근대적인 인간관 혹은 주체성에 관한 이상에 서 ‘의존성’이라는 성질은 또한 취약성으로 이해되기에 극복되거나 감추어야 할 무언가로 여겨지고 있다. 돌봄 역시 존재의 취약성과 연관된 활동이기에 인간의 경우 다른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차적 인 것으로, 또는 은폐해야 할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저 사람’과 ‘아름다운 개’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듯, 돌봄 은 존재하는 것들이 지닌 취약성이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 려 각각의 개체들을 이어주도록 하는 조건이자 삶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나아가 돌봄은 단순히 생존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로 하여금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을 설립하고 또 새롭게 감각하는 길 을 개척해갈 수 있도록 하는 미학적 운동이기도 하다. 「삶과 개」의 무대가 되는 ‘쪽방촌 거리’에서 ‘아름다운 개’는 일반적으로 어울리 지 않고 불필요한 존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저 사람’과 ‘아름 다운 개’가 함께하는 돌봄은 삶의 감각을 재편하는 미학적 힘의 운 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감각을 재편하는 일은 또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새롭게 배 치한다는 점에서 또한 정치적이기도 하다. 때문에 ‘저 사람’과 ‘아름 다운 개’의 돌봄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함께 변용된 정서는 또한 “그 러면 뭐 저 사람은 / 당최 아무 개도 키워서는 안 된단 말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도록 ‘나’를 이끈다. 삶에 기성의 양식과 상식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균열을 내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 자기 자신을 비롯하 여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로 하여금 또한 삶의 질서를 재편하는 길을 모색하도록 추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 가운데에서 그 동안 기성의 질서에 의해 은폐되었던 것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어디 사는지 모른다」로 돌아갈 필요 가 있다.
시의 목소리가 노래하는 밤에 사는 이들은 모두 낮의 세계와 그 질서에서는 감춰져 있던 존재자들이다. 화자인 ‘나’가 그러한 이들 192 을 다시 눈에 보이는 존재로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밤이라는 시간 에 이루어지는 돌봄에 함께 참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 겨봐야 할 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렇게 밤에 사는 이들이 서로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렇게 밤에 사는 ‘우리’ 는 또한 “밤이 어디 사는지 모른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이 대목 에서 ‘모른다’라는 것이 긍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야 편의점 알바 청년, 미화원, 신문 배달원 그리고 시를 노래하는 자신과 고양이 등 밤에 사는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지연이나 학연과 같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공통적 요소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밤에 산다”라는 말에서 보듯 ‘밤’이라는 시간이 이 들을 서로 동일시할 수 있게 하는 공통점이 아닌가 하는 반문을 던 질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 ‘밤’은 “밤이 어디 사는지 모른다”라는 말 로써 ‘우리’에게는 공통의 요소로 엮일 수 없는 타자로 머물러 있다. 즉 이들은 어떤 공통적인 것도 이루지 않는 가운데에 서로가 서로에 게 의존하고 또한 서로를 돌보는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 문에 신문 배달원과 같이 “얼굴을 모를 텐데”도 불구하고 또한 서로 를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앎’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 라, 서로가 서로의 삶을 나아가 나누고 있음으로 인해 이끌리는 그 무엇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어짐의 정서는 밤에 사는 이들 사 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아침의 사람들이 오 간다 / 어디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 누가 사는지 모르는 집들을 지나간다”고 쓰인 마지막 연에 이르러 시인은 ‘모르는’이라는 말로 모두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러한 관계는 비단 ‘사람들’ 사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렇듯 이어짐의 정서는 ‘모른다’라는 말을 부정적인 것과는 다르 193 시선과 시선 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렇다. 「어디 사는지 모른다」에서 ‘모른 다’라는 표현은 부정의 표현이 아니다. 시인은 ‘모른다’라는 말로써 기성의 사회 질서가 은폐하고 부정적인 것이라 여겼던 바들을 가시 적인 존재로 다시 불러들이고 긍정한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는 존 재하는 것들의 취약성으로 이해되어왔던 상호의존성 및 그와 연관 된 활동인 돌봄에 관해 살폈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자면, 돌봄은 누 군가 생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방적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돌 봄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호혜적인 행동이며, 삶의 감각과 양식들 을 새롭게 하는 미학적인 움직임이다. 미학적이라는 점에서 돌봄은 또한 우리 삶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갈 수 있는 정치적 힘을 배 태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른 삶, 다른 질서를 상상하고자 할 때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며 의 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취약성과 돌봄을 긍정하는 일에서 부터 우리는 더 나은 다른 내일을 시작할 수 있다.
김태선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