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송악산을 빙둘러 돌아간 다음 "알뜨르 비행장"을 봐야 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길 우측으로는 차가 다니는 길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풀밭사이로 사람만 다니는 작은 길이 있다.
송악산을 보지않고 비행장으로 가려면 그길로 가면 시간이 많이 절약될것이다.
아침에 보기 시작한 '산방산'은 오늘 하루종일 눈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다.
송악산과 그 주변 일대가 모두 일제때 군사 시설물로 가득했던 곳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동안 이곳 주민들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을까?
송악산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산을 넘는 것이 아니고 해안 절벽길을 가는 것이다.
바다로 향한 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옛날 "해안동굴진지"가 보인다.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있다.
처음 제주도를 올 때 들은 이야기.
관광가이드가 "가파도"와 "마라도"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두 섬에 사는 사람들이 무척 순박했단다.
바다에서 나온 해산물을 제주도에 와서 팔았는데 외상으로 많이 팔았단다.
나중에 돈을 받기로 했지만 떼어먹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그래도 그것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는 않았단다.
그후부터 이 두 섬사람들의 물건 값은 갚아도 말아도 걱정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 변하여 "가파도"와 "마라도"라는 지명이 탄생되었단다.
이곳에서 보는 "형제섬"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전망대에서 보면 "산방산"과 "한라산" 그리고 우리가 걸어 온 길이 아득하게 모두 보인다.
날만 좋았다면 모든 풍광이 더 아름다웠을 것인데,,,,,
그래도 이만큼 보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망대 아래의 모습.
마라도 끝자락의 등대가 확실하게 보인다.
해안을 따라 돌아가는 절벽위의 길은 시간만 있으면 정말 천천히 걷고 싶은 길이다.
다음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에서 보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더 가깝게 보인다.
지난번 여행 때 가봤기 때문일까?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가퍼도의 포구와 마을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전망대를 지나 되돌아 본 광경.
가파도와 마라도가 겹쳐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송악산코스도 서서히 끝이다.
지금은 많이 무너져 입구가 작아졌지만 저런 굴들이 무척 많이 있다.
입구는 작아보여도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제 송악산을 다 돌았다.
이곳을 돌아 차도를 건너면 '셋알오름'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길을 특히 "Dark Tourism"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이곳을 걸어가 봐야 알수가 있다.
또한 고난과 슬픔을 극복하고 우리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며 걷는 "평화의 바람길"이기도 하다.
언덕을 오르며 뒤돌아 보면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오래 전부터 그냥 무심하게 이곳의 비행장을 보고 싶어 이길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도 숲이 무성하다.
조금 걸으니 나타나는 올레길 시설물과 그 앞에 살짝 보이는 검은 시설물.
일제시대 "고사포 진지"다.
이곳에 설치된 "고사포"(高射砲)는 바퀴가 없는 "고정 회전식"(固定 回轉式)이였을 것이다.
빙 둘러 파놓은 홈은 포탄을 저정하기 위한 것이고,이래쪽으로는 배수로인듯한 것도 있다.
이곳에만 두개의 "고사포 진지"가 있다.
고사포 진지를 보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장소가 나온다.
도대체 왜 제주도에서만 이렇게 많은 곳에서 학살이 일어 났을까?
제주도는 이북과 제일 먼 곳인데 유독 이곳에만 소위 빨갱이가 그렇게 많았단 말인가?
90이 넘으신 저 어른께서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보신 분이라고 한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당시의 일을 알려주기 위해 나와 계신다고 한다.
감히 존함도 여쭈어 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멀리에 비행기 격납고와 비행기 활주로인듯한 곳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시신을 바다에 밀어 넣는 장소를 택했기 때문이
유골을 찾아낸 이곳이 제주도 내의 유일한 학살터의 현장인 곳이다.
원래 이곳은 일제시대 무기고였다고 한다.
해방이 된 후 미군에 의해 폭파 된 곳이어서 건물의 잔해인 철근이 같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 왼쪽 큰 웅덩이는 "백조일손 유해발굴 터"이고,
오른쪽 작은 웅덩이는 "만벵디 유해 발굴터"라고 한다.
저 고무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런 검정고무신을 신고 지냈다고 한다.
이곳으로 끌려올 때 마지막임을 직감한 분들은 고무신을 벗어서 길가로 던졌다고 한다.
검정고무신은 다 똑같아 보이지만 오래 신어서 찢어져 기운 자리가 각각 달랐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우리 부모 우리의 형제가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힘들게 걷기도 했지만 4.3사건의 현장을 보니 더욱 마음이 착찹해진다.
오른쪽으로는 높게 제방처럼 만들어 궁굼해서 어렵게 올라가 본다.
여러곳에서 비행기 격납고가 보였다.
격납고 속의 비행기는 모형이다.
격납고는 비행기 한대가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졌다.
이곳의 지명을 "셋알오름", "섯알오름"으로 표기해 놓았는데 어느 것이 올바른 표기인지 모르겠다.
이런 것은 하루 빨리 하나로 통일을 시켜 표기해야 하겠다.
스템프를 보고나니 이미 날이 어두워 진다.
지도를 보니 목적지까지는 대략 4~5k정도를 더 가야 하는데 산길이다.
문제는 이곳에서 버스를 타는 곳까지 가려고 해도 그 정도는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멀리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가 있어서 우리 박회장님이 가서 길을 확인한다.
잠시 후 우리 보고 빨리 오란다.
버스를 타는 곳까지 태워다 주신단다.
40대의 이곳 주민이신 부부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니 제주도를 방문해 주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하신다.
용머리해안 첫번째 해녀분들께 회를 먹었다고 하니 깜짝 놀란다.
어머니가 그곳의 해녀라고 하신다. 그것도 첫번째에서 판매를 하시는,,,,,
어찌 이런 인연이 있을 수 있을까?
그분들의 집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침에 내렸던 곳까지 와서 내려 주신다.
마침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오자 그앞을 막고 세워 주신다.
그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버스에 오르며 바삐 그분들의 차만 사진으로 남겼다
이분들로 인하여 제주도가 더욱 가까워지고 또 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
정말 감사를 드린다.
첫댓글 고마운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셔서 아름다운세상을 같이 살고 있는 뿌듯함이......
세상을 밉게 보면 한없이 밉지만 조금만 방향을 돌리면 좋은 일들이 더 많이 다가오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