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5:1-42, 나발과 아비가일, 24.8.21, 박홍섭 목사
사무엘이 죽어 라마에 장사되고 다윗은 바란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때 다윗은 마온의 부자 나발의 목자들을 사나운 맹수와 강도의 위험으로부터 돌보아 줍니다. 그로 인해 나발의 목자들은 양 떼들을 하나도 잃지 않았고 나발은 양털을 깎는 수확의 기쁨을 누립니다. 보통 양털을 깎는 날에는 음식을 많이 준비해서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큰 잔치를 벌입니다. 다윗은 소년 열 명을 보내 자신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돌보아 준 일을 설명하고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좀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나발은 다윗이 베푼 호의와 친절을 조롱과 악의로 갚습니다(1-14).
음식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한 다윗은 자신이 베푼 선을 악으로 갚는 나발에게 분노하면서 칼을 찹니다. 그리고 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나발과 그의 가족을 다 죽이려 합니다. 이 사실을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듣고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 양 다섯 마리를 잡아서 요리한 음식과 볶은 곡식 다섯 새아와 건포도 백송이,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나귀에 싣고 다윗을 찾아가서 겸손히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말합니다. 남편 나발이 어리석고 미련한 탐욕의 사람이라면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선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기 대조가 보이십니까? 지금까지 사울과 다윗의 대조를 보여주던 사무엘서가 25장에서는 나발의 어리석음과 아비가일의 지혜를 대조시킵니다. 나발의 어리석음이 사울처럼 하나님의 뜻에 둔감한 미련함에서 기인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행하신 일들을 깨닫지 못하고 사울을 주인으로, 다윗을 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이 원한 사울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불 신앙입니다. 그는 큰 부자였고 상당한 힘을 가진 자였지만,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리석음을 보십시오.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 그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돌아오니 나발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왕처럼 잔치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다음날 술이 깨고 나서 아비가일로부터 어제 있었던 일을 듣자 그의 몸은 돌처럼 굳었고 하나님은 이런 나발을 열흘 후에 직접 죽음으로 심판하십니다. 어리석은 나발의 이런 최후는 사울의 미래도 암시하고 있습니다(37-38).
동시에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분노의 사람 사울과 달리 지혜롭고 선한 믿음과 관용의 사람으로 대조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한순간에 사울과 똑같이 분노에 휩싸여 나발의 가정을 몰살시키려 했습니다. 이전에는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믿음의 시와 노래를 만들어내었던 다윗이 지금은 분노의 칼을 차고 나발과 그 집안의 사람들 다 죽이려는 무서운 살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다윗도 얼마든지 지혜로운 자리에서 사울처럼 어리석은 자리로 떨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다윗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분노입니다. 나발이 탐욕으로 미련해졌다면 다윗은 분노로 미련해졌습니다. 탐욕과 분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를 마비시키고 믿음의 생각을 멈추어 버립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막아주지 않았다면 다윗은 사울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통해 다윗의 충동적인 살인을 막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에게 용서를 구할 뿐 아니라 화가 난다고 분노로 나발을 죽이면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니 그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워주시고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 싸게 속에 싸여 있기에 절대로 원수가 해하지 못하며 원수들의 생명을 물매 돌을 던지듯이 멀리 던질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가일의 입술에 말씀을 두어 다윗을 깨닫게 하고 분노로부터 돌이켜 원래의 지혜로운 믿음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아비가일의 말을 들으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을 통해 자신의 손에 복수의 피를 묻히지 못하도록 막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39절입니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그는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을 보내사 자신이 악한 일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셨을 뿐 아니라 자기 대신 원수도 갚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련한 여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있었으며 이름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행동과 말로 다윗의 충동적인 살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나단이 죽자 다윗의 아내가 되어 구원을 얻습니다. 미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43-44을 보십시오.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었더라. 사울의 그의 딸 다윗의 아내 미갈을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더라” 하나님은 사울이 자신의 딸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재혼시켜 다윗을 버렸을 때 지혜로운 믿음의 여인 아비가일과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을 새로운 아내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만약 다윗이 헤브론의 유지 나발을 칼로 죽였다면 공공의 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는 것을 멈추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발을 죽음으로 심판하셨고 아비가일과의 결혼으로 다윗은 나발의 막대한 재산을 자연스럽게 소유하게 되고 헤브론의 지지를 얻게 됩니다. 이는 나중에 사울이 죽은 이후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아비가일은 어떻습니까? 남편이 죽자 바로 다윗의 아내가 되는 모습이 지조 없는 여자라고 보일 수 있지만, 그녀는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아직 다윗은 왕이 아닙니다. 여전히 사울에게 쫓기고 있으며 앞날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형편입니다.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되면 자신의 앞날도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하여 다윗을 따릅니다. 다윗의 외적인 조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대로 그녀의 인생은 다윗의 아내가 되어 절정을 맞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와 같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우리의 신랑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되어 참된 삶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가 언제 가장 아름답고 충만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신랑과 함께할 때입니다. 이 일에 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아비가일은 참으로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랑 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한걸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비가일이 다윗을 붙들고 바라보았듯이 주님을 붙들고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신랑과 함께 하는 믿음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