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7:29-35, 이 세대의 사람들, 24.9.8, 박홍섭 목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던 주님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두 가지로 평가하십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은 백성과 세리들은 하나님을 의롭다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29-30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왜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이 됩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손을 씻는 정결 의식만 있었지 물세례가 없었습니다. 물에 들어가는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만 베풀어졌습니다. 그런 유대의 상황에서 요한이 베푼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자신이 더러운 이방인처럼 회개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왜 요한의 세례를 거부했을까요? 자신이 이방인과 같은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의로움과 옮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 이 세대의 영적 상태를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로 설명해주십니다. 31-32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꽤나 유명한 본문입니다. 흔히 이 비유를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여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완악한 세대를 향한 꾸짖음으로 해석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장터에 앉아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이 세대의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거기 인칭 대명사를 유의해야 합니다. 이 아이들이 자신을 ‘우리’로 지칭하고 뒤에 온 아이들은 ‘너희’로 부릅니다. ‘우리’는 주님이 조금 전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다고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이 세대를 대변합니다. 이들에 의해 ‘너희’로 불림을 받는 대상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사람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33-34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귀신이 들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면서 비난합니까? 정말, 세례 요한이 귀신이 들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 것은 귀신 들려서가 아니라 광야의 소리로 회개를 외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궁전의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대신 광야의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을 비난합니까? 회개하라는 요한의 메시지를 인정하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꿈에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어떻게 죄인입니까? 율법을 받은 적도 없고 할례도 없으며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닌 이방인들이 죄인이지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상 받아 마땅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을 귀신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요한을 귀신들렸다고 비난했던 이들이 예수님을 향하여는 어떻게 비난했습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인데 요한은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안 먹어도 비난, 먹어도 비난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요한과 예수님이 전한 회개의 메시지가 문제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완악함을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장터에서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동무에게 피리를 불면 춤추고 슬피 울면 가슴을 치고 함께 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뒤에 온 동무가 그 놀이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동무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피리와 곡소리에 맞추어서 함께 놀자고 합니다. 그들 자신을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전하는 생명과 진리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맞아야 하고 자기 장단에 맞춰져야 합니다. 자신들이 피리를 불면 하나님도 춤을 춰야 하고 자기들이 곡을 하면 예수님도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생명과 의와 거룩함과 구원도 비난의 대상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도 자기들이 원하는 나라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도 거부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왕국에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몰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자기들 장단에 맞추어주기를 요구했지만,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셨습니다. 시대가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세대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지금도 이 세대는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구원과 진리마저도 자기 장단에 맞추어주기를 요구합니다. 오늘도 세상은 여전히 교회와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하여 자기들 장단에 춤추고 자기들 장단에 울고 웃으라고 말합니다. 부자들은 부자들의 복음을 요구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복음을 요구합니다. 병든 자들은 병든 자의 복음을 요구하고 건강한 자들은 건강한 자의 복음을 요구합니다. 거기에 따라주지 않으면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먹고 탐하는 자라고 욕합니다. 그러나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건강한 자든 병든 자이든, 배운 자이든, 못 배운 자이든 예수님의 복음은 동일합니다. 누구라도 죄인들은 회개해야 하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바꾸고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이 비유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우리가 옳지 않고 하나님이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고 고치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잠언에 의하면 지혜는 예수님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지혜의 자녀는 지혜이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한 일의 결과인 동시에 그를 믿는 성도들의 회개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옳은 분입니다.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도 모두 옳습니다. 세례 요한을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을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는 이 세대가 옳습니까? 아니면 그들에게 욕을 먹어도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이 옳으십니까? 예수님이 옳으십니다. 세상의 곡조가 진리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세상 시류가 우리의 원칙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준이고, 신앙의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비난에 맞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용기가 없으면 그들의 장단에 춤추는 허수아비 교회가 됩니다. 성도에게도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용기가 없으면 세상의 곡조에 맞춰 노래해야 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됩니다. 우리가 주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온 세상이 즐기며 우리를 향하여 함께 춤추자 하여도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춤추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슬피 울며 가슴을 칠 때도 말씀이 웃으라고 하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추거나 그들의 곡소리에 따라 우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의 장단에 춤추고 말씀의 곡조에 울고 웃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려면,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우리 뜻대로 하나님을 요구하는 완악함이 있습니다. 현실이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하고 절망하며 침체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패역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십시오.
왕상 19:1-18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 850명과 혈혈단신으로 싸웠던 믿음의 용장입니다. 그런 엘리야가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협박을 듣고 극한 두려움에 빠져 도망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하며 절망하고 있는 엘리야를 다시 사명의 땅 호렙산으로 불러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지진이 있고 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진과 불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이 세대가 너무 완악하고 교만하며 험해서 믿음으로 사는 자가 너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않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겨주었으니 너는 가서 이 세대 가운데 내가 맡긴 너의 일을 하여라. 나는 여전히 역사 가운데 나의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일하는 나의 방식이 네 생각과 다르지만, 네가 옳은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 그러니 나를 믿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라.”
현실을 네 생각대로 해석해서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며 네 생각과 기대대로 되지 않는 그 현실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옳으심을 믿으며 너의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으로 역사하여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과 환경을 지진으로 무너뜨리고 불로 살라 제거하며 내가 가는 길을 순탄하게 만들어주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고 엘리야가 원하는 그 바람과 지진과 불 속에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일상을 믿음으로 살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추어서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로 요구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요구에 맞추어서 세미한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지혜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는 지혜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