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8> 성태용
‘일체중생 실유불성’ 아는 것이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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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재가자들의 모습. |
어떤 토론의 자리에서 한 스님이 활발하게 좋은 의견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 스님이 넌즈시 “저 스님은 깨달으셨나봐? 말씀도 잘 하시네”하고 끼어들은 다음부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아 버렸다. 이 현장을 보고 나서 얼핏 들은 생각은 “차라리 깨달음도 민주주의 식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도 자칫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될 위험이 있다 하는데, 높고 높은 깨달음의 영역에 있어 어찌 민주란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나 깨달음이 우리를 분발시켜 나가게 하는 지향점이 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는데 무슨 행동을 하며 무슨 말을 하겠어” 하는 식으로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정말 안될 일이다. 차라리 우리들이 깨닫지 못한 중생들일망정, 무명의 구름 사이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조그만 깨달음의 빛들을 모아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 했고,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 하였으니 완전한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가끔은 옳은 지견을 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말이 안되는 줄은 안다. 그러나 깨달음 측정기도 없는 형편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가리는 것은 까마귀 암수 가리기보다 더 힘든 일일 것인데, 누가 “나 깨달았다”고 외치며 나선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는 깨닫지 못했으니 입 꼭 닫고, 그가 휘두르는 깨달음의 철혈독재를 감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독재에 짓밟히는 것보다도 더 비참한 정신적 영역의 굴종이 될 것이다. 부처님도 그렇게는 안하셨다. 차분하게 설득하셨고, 깨달음을 구현한 참 생명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자연스런 인정을 받으셨다.
누가 당장 깨달음 영역의 독재자로 나서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틀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해서다. 우선 위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이 가장 큰 문제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딱 둘로, 대립적으로 나눠놓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왜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불자들 스스로 그렇게도 무시하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중생탈을 쓰고 있는 부처라고 인식한다면 우리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부처를 드러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나의 무명에 쌓인 중생상을 꾸짖고 채찍질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부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분발심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나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니까” 오직 깨달음에만 매달리면서 자신을 주눅 들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중생으로만 한정짓는 것이며, 오히려 깨달음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화되면 잘못된 깨달음 병에 걸린 두 부류의 불자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첫 번째는 깨달음에 대한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부류이다. 좀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깨달음이 급하다고 손도 내밀지 않을 부류이다. 깨닫지 못한 형편에선 내 행동의 어느 것도 확실히 옳은 것이 없는데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식이다. 참으로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없겠지만, 문제는 이렇게 철저하게 깨달음을 추구하지도 않으면서도 깨달음을 핑계로 내세우며 현실의 문제에는 슬쩍 눈감는 사이비 구도자가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가 있다.
‘나는 못깨달은 중생…’ 주눅들거나 포기해선 안돼
참선만 하지말고 총체적 삶을 통해 꾸준한 수행필요
이런 극단적인 깨달음에 대한 편집증의 반대편에는, 깨달음은 그렇게 철저하게 모든 것을 배제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이번 생에는 깨달음 추구를 포기해버린 부류들이 있다. 오죽하면 불자들이 즐겨 읽고 듣는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에도 “이 세상의 명과 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지혜 날로날로 늘어나서”라 하고 있을까. “이 생에서 무슨 수로 그 어렵디 어려운 깨달음을 추구할 것인가. 이번 생은 아예 포기하고, 내생에서나 동진출가해 철저하게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지고…”
바로 이런 내용을 주로 하는 발원문을 즐겨 독송한다는 것이 재가불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서글픈 패배주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생에 미뤘던 사람이 다음 생이라고 미루지 않을까. 업(業)이 이어지는 것은 버릇 때문이라면 한번 미뤘던 버릇이 어디로 갈까. 그렇게 미루는 버릇 계속된다면, 아에 부처 종자를 끊는 무서운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우리가 취할 길은 이러한 양 극단의 태도를 배제하고 중도를 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의 추구를 잠시도 미뤄서는 안된다. 이 생에 바로 여기에서부터 깨달음을 얻겠다는 서원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깨달음에 대한 초조함과 조급증에 빠져 모든 것을 눈감아버리고 거기에만 매달리는 잘못을 범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많은 불자들이 오직 깨달음에만 매진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듯하다.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서원을 크게 세웠다면 오직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초조한 편집증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태도 속에는 깨달음에 대한 중대한 오해가 발생하기 쉽고,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의 오해는 앞서 지적했듯이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부처와 중생을 철저하게 대치적인 것으로 놓는 비불교적이고 비(非)연기적인 태도이다. “나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요. 중생이요”하면서 중생상만을 계속 뇌리에 각인시키면서 깨달음을 지향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의 오해는 깨달음을 너무나 정적(靜的)이고 지적(知的)인 측면의 수행을 통해서만 추구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깨달음’이라는 말이 지니는 뉘앙스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불교가 남긴 잘못된 잔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선불교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깨달음이 왜 머리 속에서 번득이는 지적(知的)인 확신처럼 여겨지는가. 오로지 참선 수행 등의 정적(靜的)인 수행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인가? 부처님의 큰 깨달음으로 깨달음의 빛은 이 세상에 충만하게 됐고, 그분께서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가르쳐주신 올바른 길에 따른다면 우리는 부처님께서 겪으셨던 그 험한 고생 겪지 않고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보면 깨달음이란 결국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요, 사성제(四聖諦)의 틀에서 본다면 멸성제(滅聖諦)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이루는 길로 제시된 것은 바로 도성제(道聖諦)에서 제시된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의 내용을 보라. 어디 꼭 지적이고 정적인 수행으로만 채워져 있는가? 우리의 총체적인 삶이 깨달음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깨달음을 이루어 고해를 건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대승의 육바라밀(六波羅密)에 들어오면 그러한 모습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런데도 많은 불자들이 그러한 삶의 총제적인 결과로서 오는 해탈과는 별개로 깨달음을 생각하고, 그런 수행 필요없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하는 희안빠꼼한 묘약으로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인 이상 우리 불자들이 깨달음을 지상의 목표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적이고 정적인 수행에만 매달리는 편집광적인 추구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총체적인 삶을 통한 수행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바로 지금의 삶이 깨달음을 향해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성하며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지만, 초조해하지 않고 당당하게 언제나 불퇴전의 자세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오직 우리가 그런 길을 나아가고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깨달음이란 결국 깨닫지 못함과 깨달음의 차별까지도 부수는 것이기에, 깨달음이라는 눌러앉을 자리도 용인하지 않는다. 깨달은 존재도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혹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그 자리에 눌러앉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지를 반성하자.
그리고 혹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깨달은 삶의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거기에 눌러앉아 “이 세계는 이렇게 좋구나”하는 공허한 소리만을 외치고 있지 않은지도 살펴보자. 그렇게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고 안주하려는 작은 깨달음의 유혹을 뿌리치고, 내 과거 무수한 생의 업장을 뿌리까지 녹여내며, 중생의 괴로움에 대한 큰 자비심과 이상적인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큰 서원으로, 자신의 온 삶을 걸어 추구해 나가는 큰 깨달음의 길로 당당하게 나아가자.
성태용/ 건국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78호/ 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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