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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19편 1-6절
만물을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영광
시편 19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내용이라는 것이고, 노래의 형식으로 부르게 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르치고자 한 내용에 대하여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는가?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주제로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내는 것, 이것이 시편 19편 전체의 주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내고자 하시는가? 다른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명령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시편 19편에서는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권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신을 잘 반영해서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올바르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내는 것은 바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을 알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통해 이 시편을 기록하게 한 목적, 그리고 노래로 부르도록 하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낸다고 할 때 무엇을 통하여 그렇게 하시는가? 시편 19편은 두 가지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라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낸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은 7절 이하의 말씀으로 말씀의 속성과 함께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권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타내는 방식으로 만물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고 할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인데, 거기에 대한 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로마서 1장으로 가시면 18절 이하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8-20) 여기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느냐 할 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 그리고 불의에 대해서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를 불의로 막고 경건하지 않음으로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덮어 감추거나 삭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는가?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는 있지만, 일반계시를 통해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특별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물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앞서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일반계시를 왜 주셨는가? 사도 바울은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일반계시는 핑계하지 못할 성격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로마서 1장 21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릭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난 뒤로는 일반계시를 통해, 모든 만물을 통해 알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뭔가 하나님이란 존재는 인식하는 듯 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이란 존재를 23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썩어질 사람, 새, 짐승, 동물의 모양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피조물로 대체시켜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로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런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어 섬김을 받게 되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미개 지역에 가면 새와 짐승, 동물을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과 신성을 만물을 통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보이셨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대상은 결코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만이 만물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내신다는 점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될 부분은 바로 말씀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만물을 통한 계시를 일반계시라고 한다면 말씀 등의 방식을 통한 계시를 특별계시라고 하는데, 특별계시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기록의 형태로 남겨두신 이 66권의 말씀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는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만물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백성 외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을 통해 보여 알려졌기 때문에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저들에게는 핑계할 수 없는 역사로만 있을 뿐입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시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다윗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만 특별히 하늘과 관련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한 가지를 가지고 전체를 포괄하듯 그 내용을 우리에게 알리는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처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지만, 만물 가운데서도 하늘은 그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대표적인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하늘’이라는 말이 있고 ‘궁창’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른 의미보다는 같은 의미의 시적 표현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이 영광을 선포하는데, 그것에 대한 설명이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2절 말씀입니다. 2절을 보시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달리 번역하면 이 날은 저 날에게 말하고 이 밤은 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는 말입니다. 낮과 밤이 한 결 같이 변하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창세기에 있는 내용으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것(창1:4), 그리고 땅에 있을 동안에는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 그런 내용입니다(창8:22).
이렇게 볼 때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과학에서는 자연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이라는 말도 보면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고 저절로 생기게 되었다는 뜻인데, 이 말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법칙까지 붙임으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까지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이 시편의 내용은 그런 과학의 학설이 거짓됨을 증명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믿고 그분의 섭리를 믿는 우리는 낮이 되었다가 밤이 되고, 또 밤이 되었다가 날이 되는 이 모든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런 일련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도 생각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낮과 밤을 나누어 그것이 반복적으로 돌아가도록 하실 때 낮에는 활동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밤에는 우리가 쉴 수 있도록 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아는 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하나님의 택한 백성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통해 한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고 있지만 모든 만물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그의 선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반은총의 내용과 관련해 마태복음 5장에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마5:45), 우리는 비가 오면 많은 부분 불편하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근거하자면 비가 내리는 것을 통해서도, 또 내리던 비가 그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을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겁니다.
좀 더 확대해서 우리의 모든 인생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변화와 관련해서 전도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1-8) 그런데 이런 인생 가운데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 가운데 기뻐하는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누가 슬퍼할 일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변화들을 우리 인생 가운데 주십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기준이 되어 내게 좋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일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 그것도 하나님의 선한 역사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인생을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한번도 자신의 선하심을 거둔 적이 없습니다. 내가 기뻐할만한 일만이 아니라 내가 슬퍼할만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기에 욥은 자신의 모든 외적 물질을 다 잃어버렸을 때, 심지어 사랑하는 모든 자녀가 한 순간 죽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0-21)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욥의 외적인 모든 물질을 거두어 가실 때, 그리고 그의 자녀들까지 다 거두어 가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셨던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영광을 연결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내가 잘 되는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하심 속에서, 그리고 모든 변화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시며, 또한 자신의 선하심으로 그 일을 행하십니다. 때문에 모든 일, 즉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에 이런 명령까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낮에서 밤이 되고, 밤에서 낮이 되는 이런 변화, 나아가 그 외 만물의 모든 변화, 그리고 인생의 모든 변화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없이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모든 일이 그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되었고, 작정된 바대로 실행됩니다. 때문에 모든 일에는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나아가 거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마땅한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그 뜻을 따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제 3절과 4절을 보시면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2절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즉 날과 밤이기에 언어도 없고, 말도, 소리도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리, 다시 말해 날의 소리, 밤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것들의 말이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언어, 말, 소리의 방식이 아닌 날과 밤의 변화를 통해 세상 끝까지 이르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절과 6절을 보시면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그러니까 지금 4절 하반부부터 6절의 말씀은 2절부터 4절 상반부 말씀을 좀 더 뚜렷하게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낮과 밤의 변화, 그것은 언어도 없고 말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되는데, 태양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태양과 관련하여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태양의 탁월한 미, 멋을 표현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와 같다고 하면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한다고 말하는데, 그만큼 빠르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태양의 신속성이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열기를 피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태양이 뿜는 열기를 묘사하는데, 그만큼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기 때문에 해를 볼 수 있는 낮이면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늘을 보면서 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볼 수 있고, 또한 해를 통해 주시는 그 열기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즉 해의 운행, 해를 통해 주시는 열기 등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해를 보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것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신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해의 뜨고 지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해의 열기를 모든 자들에게 내려주시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지만 하늘을 보면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알 수 있으며, 하늘에 있는 해를 보면 더더욱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의 형식으로 바꿔보자면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은 모습으로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누가 만드시며, 누가 운행하시는가? 마치 경주자가 경주를 하듯 그렇게 계속해서 질서 있게 돌고 도는 그것은 누구의 손길인가? 끊임없이 타 오르고 있는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멀리 있는 지구까지 그 열기를 전해주는 것은 누구로 말미암음인가? 그 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섭리 하지 않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해도 말하지는 않습니다. 언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살아계심을 증명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만물의 운행을 통하여 자신의 지혜를,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신 겁니다.
시편 104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해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1-9) 혹 이런 표현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육체로 계시거나 물질적인 존재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드러내실 때는 마치 만물의 장엄함을 빗대어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만물을 빗대어 말씀하신다고 해도 일부, 아니 일부의 일부도 되지 않습니다. 만물이 그의 영광을 다 담을 수 있느냐 하면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다 담을 수 있는가 하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물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마음에 감동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그런 만물을 자신의 옷으로, 자신의 수레로, 자신의 날개로 삼으시는 분이시란 겁니다. 만물에 대해서도 감탄하는 일이 있고, 감동 받을 때가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그분에 대하여 감탄하고, 그분에 대하여 감동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시편 104편을 통해 알리시는 바가 이것입니다. 한 마디로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배경이라는 겁니다. 모든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때문에 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계십니까? 만물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보고 계십니까? 만물을 통해 감탄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감탄하고 있습니까?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만물에 대하여 감탄하는 일이 간혹 있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감탄하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내 기준에 따라 대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잘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다보니 잘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듯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경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몰라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통해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 4절 하반부에서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다고 할 때 하늘이 있는 이유는 바로 해를 위해서인데, 창조의 역사를 통해 보면 앞서 지어진 것들은 다 뒤에 지어진 것들을 위해서 있습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날 궁창, 곧 하늘을 만드시면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땅을 드러내시면서 바다가 있게 하셨는데, 이것이 배경과도 같다면 이 배경을 채우는 것이 넷째 날부터의 역사입니다. 즉 배경은 배경을 채우는 것들을 위해 있습니다.
동일한 논리 속에서 우리는 모든 만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빛과 어둠을 만드셨는가? 왜 하늘과 땅, 바다를 만드셨는가? 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는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땅에서 기는 짐승, 그리고 바다의 고기들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리는 것이 다음의 명령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그래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음을 받은 분은 아니시지만 창조주로서 사람에게 명령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모든 만물 위에 사람이 있지만 사람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 말은 만물이 우리를 위해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창조를 통해 질서만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는 그분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만 더 살펴보겠는데, 로마서 10장에 보면 오늘 본문을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선 11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1-13) 구약에서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구원과 관련된 내용이 소개되고 있지만,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부터는 믿음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복음의 전파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라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그러니까 복음이 들려지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그 전파를 통해 들려져야 하고, 들려지는 것을 통해 믿음이 생길 때 그때서야 비로소 구원이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씀이 복음에도 순종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전하였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듣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 시편 19편 4절이 인용됩니다.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시편 19편 4절은 일반계시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른다고 할 때 날과 밤의 소리, 날과 밤의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0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은 일반계시가 아니라 복음의 말씀입니다. 17절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잘못 이해하고 기록한 것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고 할 때 이런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기록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역으로 어떤 이들은 로마서의 말씀 때문에 시편 19편의 오늘 본문을 일반계시가 아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일들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이해입니다.
그럼 바울이 여기서 시편 19편 4절을 인용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간단히 말하면 일반계시를 통해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 그분의 영광을 부정할 수 없듯이 복음의 전파가 결국 이방인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을 내다보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약간 언급하자면 “하나님은 하늘이 선포하는 음성을 통해서 멀리서나마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같은 서언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또한 결국 자신을 알리시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었다.”는 그런 의도인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구원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말씀이 들려지지 않은 자들은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핑계할 수 없기에 그들은 구원에서 제외가 된다고 분명히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데, 그럼 유아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특히 태어나지 않고 뱃속에서부터 죽은 유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들은 분명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다 구원에서 제외가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0장 유효적 소명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3. 유아 때 죽은 택함 받은 유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중생되고 구원받습니다(눅 18:15, 16, 행 2:38, 39, 요 3:3, 5, 요일 5:12, 롬 8:9). 성령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곳에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요 3:8). 그처럼 다른 모든 택자들도 말씀 사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 받을 수 있습니다(요일 5:12, 행 4:12).
즉 택자인 유아라면 그도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중생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말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몇몇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해설을 보면 이 3항에 대한 해설로서 유아의 경우는 말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대개 수단을 통해 역사하시기에 말씀을 사용하시지만,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유아들의 경우 이런 수단 없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택함 받은 유아들’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선택이 앞선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는 분명 긍정적입니다.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 선택이며, 구원이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을 앞세운다는 점에서는 분명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수단으로서 말씀이 있다고 할 때 이런 경우는 말씀이 있어야 하고, 저런 경우는 말씀 없이 구원을 말할 수 있는가?
대부분이 여기에 대해 긍정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리는데, 분명 시편 19편은 4절은 일반계시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하여 인용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 시편 19편 3절과 4절을 다시 보시면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말할 때 유아들에게 우리와 같은 언어의 형태, 소리의 형태로는 없으나 성령께서 그의 말씀을 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실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아들의 경우 우리처럼 들을 수 없지만 성령께서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이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구원을 주실 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44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이 내용은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 세례 요한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는 내용인데, 15절에 의하면 세례 요한의 경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즉 성령으로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문안하러 왔을 때 그 소리를 듣고는 기쁨으로 뛰놀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를 통해 탄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없는 유아일 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할 때는 이런 일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없이도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기보다는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시되, 유아들의 경우, 그것도 택자로서의 유아들에게는 언어의 형태, 소리의 형태로는 없으나 성령께서 그의 말씀을 사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라고 생각되는데, 여러분도 이 부분과 관련해서 한번 고민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 때부터 한번도 그의 영광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비록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바르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믿는 자들은 이 성경을 통해 알리고 계시는 만물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만물보다 더한 확증은 어쩌면 여러분 자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매일매일 잠자리에 드셨다가 다시금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시는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오장육부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또한 생활 속에서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모든 역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지키시겠습니까? 그럼 혹 우리의 오장육부가 탈이 나고,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하나님은 계시는 않는 것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에선 죄에 대한 징계일 수 있고, 어떤 면에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우리 삶 가운데 고난이 주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조차 하나님의 손길을 떠나 생각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분의 지혜,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선하심은 어딜 보더라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는 분명 악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범사에 그분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