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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9> 화폐 이야기 (9) 한국의 돈 100원 주화 ② / 일본의 천황제와 임진왜란까지의 일본 역사
‘비교(比較)’는 학문이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다. 단지 좋은 비교와 나쁜 비교, 해야 할 비교와 해서는 안 될 비교를 가려서 해야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훌륭한가 하는 것은 그 전적(戰績) 비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 7년 전쟁에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명종 원년)-1598(선조 31년)} 장군이 거둔 총 전적(戰績, score)은 필자가 이전 글(‘옹달샘 <28>’)에서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1905)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었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동향평팔랑), 1848-1934} 제독의 말을 인용하면서 ‘23전 23승 무패’이었다고 썼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알고 보니 ‘23전 23승 무패’가 아니라, ‘25전 25승 무패’이었다. 국내‧외의 공인 논란의 여지가 좀 있기도 하지만, 경이(驚異)롭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창호(李昌鎬, 1975- ) 9단이 1990년(15세) 바둑에서 세운 ‘41연승’ 세계 최다 연승 기록은 놀라운 것이다. 미국프로농구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1995년 3월 30일부터 1996년 4월 4일 정기시즌에서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 1963- )의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가 세운 44연승 기록도 아직 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다. 세계전쟁사의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을 다 읽어보았지만, 이순신 같은 위대한 장군은 없었다. 정복자로서의 장군은 있지만, 이순신과 같은 25전 연승(連勝)‧전승(全勝) 기록, 그리고 이순신과 같은 고매한 인격을 갖춘 장군은 없었다.
이순신과 비슷한 딱 한 사람을 말하라면 동로마제국(395-1453)의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5?-565) 장군을 들 수 있다.
로마제국에서 특출한 황제에게는 ‘대제(大帝, The Great)’[원래는 라틴어로 ‘마그누스(Magnus)’]라는 별칭을 붙이는데, 약 1,800년의 역사에서 단 6명만이 대제였다. 그 6명은 다음과 같다.
A. 로마제국(BC 28-AD 395) : 2명
①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74-337, 재위 306-337)
②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6-395, 재위 379-395)
B. 서로마제국(395-476) : 0명
C. 동로마제국(395-1453) : 2명
③ 레오 1세(Leo I, 401-474, 재위 457-474)
④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Ⅰ, 483-565, 재위 527-565)
D. 신성로마제국(800-1806) : 2명
프랑크왕국이 서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것이 신성로마제국인데, 그 기간을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962-1806년으로 가르치나, 서양에서는 800-1806년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론 후자가 옳다.
⑤ 카롤루스 1세{Carolus I, 742-814, 재위 768-800(프랑크왕국), 800-814(신성로마제국)} [※‘카롤루스’는 라틴어임. 그는 여러 나라 역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이 프랑크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 영어 등으로 혼용되고 있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움.]
⑥ 오토 1세(Otto I, 912-973, 재위 936-973)
이 6명 중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Ⅰ, 483-565, 재위 527-565)가 ‘대제’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5?-565) 장군이 있었던 덕분이다. 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시대에 이르러, 476년 게르만 민족(동고트족)에 의해 멸망된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회복했다[완전한 영토 회복은 아니었음]. 명장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5?-565) 장군의 활약에 의한 회복이었다.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무패(無敗) 연전연승(連戰連勝)의 전쟁 수행 능력, 국민으로부터 받은 인기 때문에 황제 자리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에게 적은 숫자의 군대만 주는가 하면, 갑자기 아주 불리한 전장(戰場)에 내보기도 하고, 약속한 지원병을 보내주지 않기도 하고, 아첨 떠는 내시 장군을 보내어 전투를 방해하기도 하고, 전쟁 수행 중인 장군을 소환하기도 했다. 그래도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언제나 승전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를 원망하거나, 반역하지 않고 끝까지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는 이순신과 닮아도 너무 닮은 서양의 명장이다.
이순신도 꼭 그러했다. 그러나 열세의 군사력(軍事力)과 전황(戰況), 정치적으로 당한 방해와 고초에 있어서 이순신은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이순신은 소환은 물론, 삭탈관직(削奪官職)과 백의종군(白衣從軍), 투옥(投獄)까지 당했었다. 그런 가운데 전장이 초토화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부름을 받아 연전연승을 했으니 정말 놀라운 것이다. 거기에다 전적(戰績)에 있어서도 벨리사리우스는 이순신의 ‘25 연승‧전승’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이순신 장군에게 백 번, 천 번을 절하며 존경해도 부족한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이순신 장군이 왜 성웅(聖雄)이고,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인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해전(海戰)에 있어서 프랑스의 나폴레옹(Napoleon I, 1769-1821, 재위 1804-1815)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영국의 넬슨(Viscount Horatio Nelson, 1758-1805) 제독을 세계 최고 해군 제독으로 치고 있지만, 전적과 인격에서 이순신 장군을 따라올 수는 없다. 넬슨이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넬슨이 승리한 결과가 유럽과 영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덕분이고, 그리고 세계역사의 평가와 기록이 유럽 중심에서 이루진 덕분이다. 이순신 장군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이 글은 이순신 장군의 전적(戰績)만 아주 간략하게 쓰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일본 수군(水軍)이 형편없었던 탓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순신 장군의 ‘25전 25승 무패’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일본 수군과 싸워 이긴 것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군사력이 일본보다 월등하게 우수했을 것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오해를 풀고, 바르게 임진왜란의 해전과 이순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일본의 역사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군사력을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국왕 제도는 독특하다. 한국과 중국은 나라가 무너져서 국가 권력이 바뀌면 새로운 성씨와 혈통의 왕조(王朝)로 바뀐다. 그러나 일본은 나라가 바뀌어도, 왕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은 일본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약점이기도 하다. 일본의 약점이라고 하는 것은 천황제(天皇制)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 국민정서가 형성될 수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청년 시절(1974년 4월 29일) 한 친구(현재 LA에서 목회 중)와 함께 일본 천황의 궁성인 도쿄의 황거(皇居, ‘고쿄’로 발음)에 가본 적이 있다. 그 날은 우리나라를 겁박(劫迫)하여 삼키고 우리 국토와 민족을 불행에 빠뜨린 원흉(元兇)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주모자 중의 한 명인 당시 제124대 일본 천황이라는 히로히토{裕仁(유인), 1901-1989, 재위 1926-1989}의 생일[生日 : 그들은 탄신일(誕辰日)이라 하지만]이었다. 당시에는 일 년 중 그 날 하루만 황거가 국민에게 개방되었다. 만발한 벚꽃이 궁성을 뒤덮은 가운데 남녀노소의 인산인해(人山人海)로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여자들은 노소(老少) 없이 ‘기모노{着物(착물)}’를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일본에는 지방, 도시마다 개성적인 ‘축제(祝祭)’를 여는데, ‘마츠리{祭り}’라고 한다. 이 축제도 수없이 많이 봤다. 그 어느 것도 천황 생일만한 군중은 없었다.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였는데도 술 취한 사람, 휴지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 큰 소리 내는 사람, 크게 웃는 사람,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의 거대한 경건(敬虔)한 물결이었다. 니주바시{二重橋(이중교)} 위 다리에는 검은 세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초대받은 사람들로서 일본의 각 분야의 유명인사들이었다. 알현(謁見)을 마치면 그 아래 다리로 나온다.
▲일본 궁성 황거(皇居)의 니주바시{二重橋(이중교)}
나는 그 니주바시를 보면서 김지섭 열사(烈士)가 생각나서 우울했었다. 아마 그 날 만발한 벚꽃 숲과 화창한 봄 날씨, 그리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나만 이방인의 마음이었던 같다. 그게 바로 ‘군중 속의 고독’이었던 것이다.
▲단신으로 일왕 처단 거사에 나섰던 김지섭(金祉燮, 1884-1928) 열사
풍산(風散) 김씨로서 안동 출신인 김지섭{金祉燮, 1884(고종 21년)-1928} 열사는 어릴 때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능통하여 ‘천재(天才)’ 소리를 들었었다. 그는 법관의 꿈을 접고, 인재양성을 위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우리나라가 점점 암울해지는 것을 보고, 무인(武人) 체격이 아닌데도, 독립투사가 되기를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배우기를 거부했던 일본어를 독학으로 2개월 만에 습득하고, 1920년(37세)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를 통해 상하이로 가서 항일무장독립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3년 9월 1일에 도쿄를 포함한 지역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해서 사망‧실종자가 4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와 약탈을 일삼고 있다”라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렸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아직까지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학살당한 조선인 수가 2,000명이라고 했다가, 4,000명, 6,000명, 6,600명이라고 했다. 2013년 8월에는 우리 언론이 23,058명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김지섭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그 해 1923년 12월 21일 몸에 수류탄 2개를 품고 일본 석탄 배에 숨어들었다. 그것도 석탄가루를 싣는 화물창(貨物艙, cargo hold)에…. 거기 말고는 숨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재작업으로 석탄가루가 쏟아질 때 완전히 파묻히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그렇게 무슨 개미귀신(명주잠자리 애벌레로서 모래에 팽이를 꽉 눌렀다가 빼내면 생기는 그러한 함정을 만들어놓고 거기 모래 속에 숨어 있다가 개미가 빠지면 쑥쑥 올라와서 잡아먹음)처럼 석탄가루와 사투(死鬪)를 벌여야 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화물창 커버를 덮고 항해를 할 때였다. 석탄에서 발생되는 가스에 의해 질식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배들은 엉성한 틈이 있어서 그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있었던 덕분에 그는 약간의 공기를 들여 마실 수 있었다. 상하이를 출한한 지 10일 만인 1923년 12월 31일 밤 일본 규슈{九州(구주)} 지방의 후쿠오카{福岡(복강)} 항에 도착했다. 그는 완전히 탈진하여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강골(强骨)이 아닌 김지섭이 그렇게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다.
그런데 오사카{大阪(대판)}로 진출했을 때 그만 조직폭력배 야쿠샤{役者(역자), ‘야쿠자’가 아님}를 만났다. 수류탄도 빼앗겼다. 두목이 수상한 놈이라며 김지섭의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게 해서 일본도로 자르려고 했다. 김지섭은 두 손 잘린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또 죽어도 거짓말을 하기 싫다고 생각하여 유창한 일본어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다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야쿠샤 두목이 오히려 도와줌으로써 김지섭은 1924년 1월 5일 도쿄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김지섭 열사는 1924년 1월 5일 낮 유일한 황거(皇居) 입구 길인 니주바시를 현장답사하고, 그 날 밤 삼엄한 니주바시를 침입하다가 경비 순사에게 들켜버렸다. 순사가 “당신, 누구야?”라고 하며 다가왔다. 김지섭은 수류탄 하나를 집어던졌다. 수류탄이 떼굴떼굴 굴러오자 순사는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런데 수류탄은 그저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순사는 속았다고 생각하고 다시 달려왔다. 김지섭은 천황을 죽이겠다는 거사 목적을 잊어버린 듯 마지막 남은 수류탄마저 핀을 뽑고 집어던졌다. 그러나 이것도 약한 불꽃이 피식피식하더니 터지지 않았다. 그렇게 김지섭 열사는 체포되어 투옥 중 1928년 2월 28일 순국하셨다.
나는 청년 때 김지섭을 읽으면서 한없이 울었었다. 그러니 1974년 그 날 나는 화창한 봄과 어마어마한 벚꽃 숲, 기모노의 인파와 물에 비친 그림 같은 니주바시가 하나도 아름답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전 글(‘옹달샘 <22>’)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벚꽃을 억제하고, ‘무궁화’ 심기와 사랑하기를 해야 한다고 썼던 것이다. 필자가 여러 가지 꽃을 그리면서, 벚꽃은 단 한 번만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리지 않는 것은 1974년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천황제(天皇制)를 모르면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천황 하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 지금 일본 우익 정치인들은 천황을 앞세우고 재무장을 진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의 수도를 서울로 옮겨야 한다는 ‘경성천도설(京城遷都說)’이 주장됐다는 것, 우리가 듣기에는 기절초풍할 ‘신정한론(新征韓論)’이 요즘 다시 대두되고 있다는 데 대해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일이다.
전설이 가득 차 있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에 완성된 일본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나, 저자가 미상이고, ‘열전(列傳)’이 없으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같은 허구(虛構)가 많아 정사(正史)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는 “기원전 660년에 진무{神武(신무)} 천황(天皇)이 즉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중국의 신화 역사와 같은 맥락의 소설 같은 허구(虛構)이다.
실제로 일본의 천황제가 성립된 것은 신라의 제26대 진평왕(眞平王, ?-632, 재위 579-632) 후기인 7세기 초라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의 쇼토쿠{聖德(성덕), 574-622} 태자[왕은 되지 못했으나, 부왕을 보필, 섭정하며 일본에 불교를 포교하는 데 공헌했음]가 중국 수(脩)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동쪽 나라의 천황(天皇)이 서쪽 나라의 천제(天帝)에게”라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은 ‘천제(天帝)’, 일본은 ‘천황(天皇)’으로 인간을 신격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천황(天皇, 덴노)을 우리는 꼬박꼬박 ‘천황’이라고 할 필요가 없고, ‘왕’, ‘국왕’, ‘일왕’이라고 하면 된다. 국가든 민간이든 외교상으로는 ‘천황’으로 말할 경우는 있겠지만….
소위 천황이라고 하는 일본의 왕은 고대(古代)에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러나 막부시대(幕府時代)인 중세(中世)에 와서는 실제 권력자는 쇼군{將軍(장군)}이었고,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일본 역사의 시대구분은 학자에 따라서 다르다. 일본의 역사를 ① 선사시대, ② 고대, ③ 중세, ④ 근세, ⑤ 근대, ⑥ 현대로 구분하고 간략하게 살펴본다. 선사시대(先史時代) 중 약 300년간(야마토 시대와 아스카 시대)을 ‘원사시대(原史時代)’로 나누기도 한다. ‘원사시대’란 약간의 역사적인 문헌이 존재하는 시대를 말한다. 그러나 문헌이 미흡하여 연도가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사시대’를 그저 ‘선사시대’에 넣기도 한다. 이 ‘원사시대’에는 지도층의 무덤이 흡사 우리나라의 봉분(封墳) 무덤과 같은 고분(古墳)들이 있기 때문에 ‘고훈{古墳(고분)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와 같은 시기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지도층이 한반도의 도래인(渡來人), 더 나아가 지배자(支配者)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역사가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 ‘원사시대’, 즉 ‘고훈 시대’ 이후부터는 봉문 무덤이 사라지고 없다. 왜냐하면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의 화장(火葬)을 따랐기 때문이다.
4세기의 ‘야마토{大和(대화)} 시대(4세기경-7세기 초)’에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가 생겼고, 왕의 세습이 이루어졌다. 백제를 통해 4세기 말에는 한자와 유교가, 6세기에는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비로소 일본은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시대(歷史時代)로 접어들었다. 아래 지도에서 보는 오늘날의 나라{奈良(나량) 현이 야마토 시대의 정치 근거지이다.
▲고대, 중세와 근세 일부 역사 배경인 일본 간사이{關西(관서)} 지방 지도
야마토 시대를 이은 ‘아스카{飛鳥(비조)} 시대(593-710)’의 정치적 근거지도 간사이{關西(관서)} 지방의 ‘나라{奈良(나량)’ 중심이었다. 아스카 시대의 시작 연도는 538년, 550년, 593년 등 들죽날죽이다. 아스카 시대인 701년부터 ‘日本(일본)’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쇼토쿠{聖德(성덕), 574-622} 태자는 이 시대 사람으로서 일본 불교 포교에 공헌했다. 일본의 천황제(天皇制)는 아스카 시대 후기인 7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일본 고대, 중세, 근세 일부 역사의 배경인 간사이 지방에 있는 유적지 나라{奈良(나량)}, 교토{京都(경도)}, 오사카{大阪(대판)}는 일본 정부가 역사교육 차원에서 ‘일본인이라면 평생에 세 번 간사이 지방을 견학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유적지들에는 평일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것을 볼 수 있다. 2013년 한 해 동안 일본을 방문한 해외관광객만 1,000만 명을 돌파했다. 들어오는 외국관광객 숫자도 선진국 조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통일신라의 제33대 성덕왕(聖德王, ?-737, 재위 702-737) 제8년인 710년부터 ‘나라{奈良(나량)} 시대’(710-794)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대부터가 일본 역사의 고대(古代)이다. 이전에도 수도 개념이 있었지만, 그 수도는 고정된 지역이나 도시가 아니라, 왕궁 그 자체가 수도였다. 710년 나라{奈良(나량)} 시대가 시작되면서 나라{奈良(나량)} : 오사카 동쪽에 있음} 서쪽에 ‘헤이조쿄{平城京(평성경)}’를 수도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수도이다. 이 시대에 불교가 융성해지고, 이 시기에 일본 최초 역사서 『고사기(古事記)』[712년 : 저자 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태안만려), ?-722}],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 저자 미상)가 기록되었다.
794년 수도를 나라{奈良(나량)}에서 교토{京都(경도)}로 옮기면서 ‘헤이안{平安(평안)} 시대’(794-1185)가 12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여기까지가 일본 역사의 고대(古代)이다.
그런데 이 헤이안 시대에 무사(武士)들의 세력이 점점 커져 갔다. ‘헤이안{平安(평안)}’이란 글자 그대로 나라가 평안해지기 위해서 적의 공격을 미리 차단해야 했다. 말하자면 안보(安保)이다. 왕이 있는, 즉 중앙정부가 있는 나라{奈良(나량)}가 평안하기 위해서 각 지방마다 무사계급으로 우두머리를 두었는데, 그것이 ‘다이묘{大名(대명)}’, 즉 지방 영주(領主)이다. 다이묘는 헤이안 시대에 생긴 것이다. 이 다이묘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들이었다.
이 시대 전까지 왕(그들이 말하는 천황)은 힘이 있었다. 그런데 왕이 평안을 위하여 키운 다이묘들이 못 말릴 세력으로 커져서 충성 경쟁을 하면서 수도로 들어오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렇게 왕의 세력을 능가하는 군벌(軍閥)이 돼버린 다이묘들이 곧 ‘쇼군{將軍(장군)}’이다. 쉬운 말로 하면 ‘다이묘’는 작은 장군이고, ‘쇼군’은 큰 장군인 셈이다. 다이묘의 임무는 지방 안보였다. 그런데 다이묘와 다이묘가 싸워 이긴 자가 점점 세력을 키운 쇼군은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정치적인 통치조직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쿠후{幕府(막부)}’이다. 원래 중국에서 ‘막부’는 출진 중인 장군이 군정(軍政)을 집행하는 막사(幕舍)였다. ‘막부’는 수도에 두지 않고, 쇼군의 지방 군사근거지에 두었다. 쇼군이 겉으로는 왕에게 최고의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나, 실제로는 쇼군이 실권자이고, 왕은 명목상의 통치자였다. 요즘 북한이 잘 쓰는 말 ‘양봉음위(陽奉陰違)’ 그것이었다. 그러나 쇼군이 왕을 죽이지는 않기 때문에 왕의 세습은 계속되었는데, 이것이 천황제였다. 이 점이 일본의 왕조가 한국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다.
이렇게 1192년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고대(古代)도 끝이 났다.
‘쇼군{將軍(장군)’은 원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정이대장군)}’인데, 끝 단어만 남은 것이다.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정이대장군)}’은 도후쿠{東北(동북)} 지방의 오랑캐들을 정벌하기 위해 헤이안 시대의 중앙정부가 파견한 장군이었다.
이에 대비되는 ‘친쥬후쇼군{鎭守府將軍(진수부장군)}’은 지방 군 정부 최고 책임자였으나, 막강한 ‘쇼군’의 막부가 시작되면서 이 직책은 사라져갔다.
‘사무라이{侍(시)}’도 ‘쇼군’과 함께 헤이안 시대에 생긴 말이다. ‘사무라이’의 원형은 ‘사부라후모노(侍ふ物)’이다. 일본어 동사 ‘사부라후{侍(시)ふ}’는 ‘윗사람을 곁에서 모시다’라는 뜻, 즉 ‘경호하다’라는 뜻이다. ‘모노{物(물)}’는 ‘물건’, ‘것’, ‘자(者)’의 뜻이다. 그러니까 ‘사부라후모노(侍ふ物)’는 ‘윗사람을 가까이서 모시는 자’, ‘경호원’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사무라이{侍(시)}’로 변형되었다. 처음에 ‘사무라이’는 글자 그대로 왕, 귀인(歸仁), 쇼군 등 상관, 웃어른의 경호인(警護人)이었으나, 차츰 ‘무사(武士)’ 일반을 이르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사무라이는 오랫동안 일본 정치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일본인의 독특한 의식구조(‘사무라이 정신’)가 되었다. 이 ‘사무라이 정신’이 임진왜란, 명성황후 시해, 태평양전쟁의 가미카제{神風(신풍)} 특공대, 할복자살(割腹自殺) 같은 데에서 볼 수 있다.
최초의 쇼군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원뢰조), 1147-1199}이었고, 그에 의해서 막부시대(幕府時代), 즉 무인정치가 시작되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미나모토노 요리모토{源の賴朝}’로 읽기도 하는데, 이는 ‘미나모토 가(家)의 요리모토’라는 뜻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당시 가장 유력한 무사 세력으로서 ‘타이라지{平氏(평씨)}’ 집안과 ‘겐지{源氏(원씨)}’ 집안이 있었다. 처음에는 ‘타이라지{平氏(평씨)}’ 집안이 우세했으나, 나중에는 ‘겐지{源氏(원씨)}’ 집안이 이겼다. 그가 최초의 ‘쇼군{將軍(장군)}’인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원뢰조), 1147-1199}이다.
1185년경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원뢰조), 1147-1199}는 도쿄{東京(동경)} 부근인 도카이{東海(동해)} 지방인 가나가와{神奈川(신나천)} 현에 있는 가마쿠라{鎌倉(겸창)}에 바쿠후{幕府(막부)}를 설치했다. 이리하여 고대(古代)의 헤이안{平安(평안)} 시대가 끝나고, 중세(中世), 즉 막부시대(幕府時代)가 열린 것이다. 이 ‘막부시대(幕府時代)’는 우리 고려시대의 ‘무단정치(武斷政治)’와 비슷했다. 이것이 ‘가마쿠라{鎌倉(겸창) 시대’(1185-1333)이다. 13세기 말에 몽골(고려 합세)의 두 차례 침입을 받았으나, 두 번 다 태풍이 막아주었다. 그때 ‘가미카제{神風(신풍)}’라는 말이 생겼고, 그로 인해 그들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믿었다. 그러나 그 후 권력투쟁의 내란이 일어나서 두 왕을 두게 되어 남북으로 나뉘었다. 그래서 이 60년 동안을 ‘남북조(南北朝) 시대’라고도 한다. 결국 남북이 분열된 상태에서 1333년 가마쿠라 시대는 멸망했다.
▲가마쿠라 시대(막부시대)와 함께 중세가 시작된 일본 도카이{東海(동해)} 지방의 가나가와{神奈川(신나천) 현 지도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족리의만), 1368-1394}가 남북조를 통일하여 가마쿠라 정권을 멸망시키고, 1333년 나라{奈良(나량)}의 수도였던 교토{경도(京都)}에 막부를 설치하고 ‘무로마치{室町(실정)} 시대’(1336-1573)를 열었다. 제2기 막부시대(幕府時代)이다.
이 두 막부시대, 즉 ‘가마쿠라{鎌倉(겸창) 시대’(1185-1333)와 ‘무로마치{室町(실정)} 시대’(1336-1573)가 일본의 ‘중세(中世)’이다.
그 다음의 두 시대,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안토도산)} 시대’(1573-1603)와 ‘에도{江戶(강호) 시대’(1603-1867)가 일본의 ‘근세(近世)’이다. 이 두 시대의 세 인물을 다룬 대하소설(大河小說)이 ‘일본의 삼국지’라는 말을 듣는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산강장팔), 1907-1978}가 17년 동안 썼다는 『대망(大望)』(1950-1967년작, 일본어 원작은 전26권, 번역본은 전12권 등)이다. 이 소설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용장(勇將),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장(智將),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덕장(德將)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2008년까지 1억부가 팔렸다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 여러 다이묘{大名(대명}들은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교토{京都}로 몰려들었다. 실상은 막부의 실권자 쇼군{將軍(장군)}이 될 대망(大望)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다른 시대에도 전쟁은 계속됐지만, 특히 치열했던 100년간(1467-1568년)을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오늘날의 아이치{愛知(애지)} 현에 있는 기요스{淸須(청수)}의 영주(領主)이자 오와리{尾張(미장)} 국(國)[오늘날의 아이치{愛知(애지)} 현]의 태수(太守)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직전신장), 1534-1582}가 대부분의 다이묘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쇼군이 되지 않았고, 왕이 ‘간파쿠{關伯(관백) :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일본의 관직으로서 재상(宰相)}’ 직을 내렸으나, 오다 노부나가는 사양했다. 그러니까 그는 실권자이면서도 바쿠후{幕府(막부)}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통일을 목전에 두고, 배신한 부하의 습격을 받았을 때 스스로 불을 지르고 자결(自決)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연 오다 노부나가의 처음 근거지인 기요스{淸須(청수)} 성이 있는 도카이{東海(동해)} 지방의
아이치 현 지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연 오다 노부나가의 나중 근거지로 삼은 아즈치{安土(안토)} 성이 있는 간사이{關西(관서)} 지방의
시가{滋賀(자하)} 현 지도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 1537-1598}가 1582년 주군(主君)의 배신자를 징벌하고, 1587년에는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桃山(도산) 시대’(1587-1603)를 열었다. 보통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를 합해서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안토도산)} 시대’(1573-1603)라고 부른다. 오늘날 간사이{關西(관서)} 지방의 시가{滋賀(자하)} 현에 있는 ‘아즈치{安土(안토)}’는 오다 노부나가가 후에 거처한 성(城)이고, 오늘날 간사이{關西(관서)} 지방의 교토{京都(경도) 부(府)에 있는 ‘모모야마{桃山(도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에 거처한 성(城)이다. ‘모모야마{桃山(도산)’라는 명칭은 당시에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에 거처했고, 1598년 병사(病死)했던 ‘후시미{伏見(복견)}’ 성을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시대에 ‘모모야마{桃山(도산)’ 성으로 불렀다. 그 성이 있는 구릉에 복숭아 밭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안토도산)} 시대’(1573-1603)를 두 사람의 성(姓) 첫 글자를 따서 ‘쇼쿠호{織豊(직풍)} 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성(城)에 대한 지도는 위의 첫 번째 지도를 보면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 1537-1598}는 후시미 성에 거처하기 전인 1583년부터 오사카{大阪(대판)} 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완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근거지로 삼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오다 노부나가처럼 쇼군에 오르지 않고, 바쿠후{幕府(막부)}를 세우지 않았으나, 다이묘들을 양성해서 자기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가 쇼군이 되지 않고 막부를 세우지 않은 것은 원래 출신이 워낙 미천(微賤)한 탓에 전국의 다이묘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국을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그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1585년 왕으로부터 ‘간파쿠{關伯(관백)}’에 임명되고, ‘후지와라{藤源(등원)}’라는 성(姓)을 하사받았고, 1586년에는 ‘도요토미{豊臣(풍신)}’라는 성으로 바꾸었다. 그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상업과 농업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썼다. 또 포르투갈의 예수교(가톨릭교의 반종교개혁을 한 교단) 선교를 허용하는 한편, 당시의 최신무기인 조총(鳥銃)을 수입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 1537-1598}의 초상
필자가 1973년 가을 오사카 성 천수각(天守閣)에 올랐을 때 가장 관심 있게 본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였다. 조선을 침략하여 7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준 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작자일까 하는 궁금증에서 비롯된 관심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보고를 살펴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만 2년 전인 1590년 4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황윤길(黃允吉, 1536-? : 황희 정승의 증손자)을 정사(正使)로, 김성일(金誠一, 1538-1593 : 퇴계 이황 선생의 수제자)을 부사(副使)로, 허성(許筬, 1548-1612 : 서자 허균의 이복 맏형으로서 적자였음)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한 200여명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했다. 오사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와 어전회의에서 선조에게 아뢴 정사와 부사의 보고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서인(西人)인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보고했다. 동인(東人)인 부사 김성일은 “전혀 그런 조짐이 없었사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선조가 “풍신수길의 인상은 어떠했는가?”라고 질문하자, 황윤길은 “눈에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사옵니다”라고 했고,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으니 두려울 것이 못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할 수 없이 선조가 동인(東人)인 종사관 허성에게 묻자, 허성은 동인이면서도 서인 황윤길과 같은 대답을 했다. 그로 인해 허성은 동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해야 했다.
당시 동인들이 집권세력이었기 때문에 동인 김성일의 보고가 채택되어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 상반된 보고로 인해 당쟁은 더 심화되고 국론은 분열되어서 임진왜란이 끝난 지 38년 만인 1636년(인조 13년) 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고 말았다.
김성일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그랬노라고 말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함께 퇴계 선생에게 동문수학(同門修學)한 류성룡의 간청으로 죄를 씻을 기회를 얻어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이르고 격려하고 전투를 돕는 임시 관리)로 임명되어 의병장 곽재우와 진주성주 김시민을 돕다가 전쟁 발발 이듬해에 병사했다.
1973년 필자가 천수각에서 본 초상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얼굴은 두 사신의 말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얼굴은 말라서 주름이 잡혔고, 눈은 푹 꺼졌고, 입은 유난히 튀어나와 정말 원숭이 같이 보였다. 장신(長身)인 오다 노부나가와는 대조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키가 워낙 작아서 앉을 때 방석을 여러 겹으로 놓은 후에 앉았다고 한다. 작은 덩치를 숨기기 위해서 엄청나게 품이 넓은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양 어깨에는 막대기를 걸어서 어깨가 아주 넓은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하고 있어서 코믹해 보였다.
그 때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는 위에 게재한 이 초상화가 아니었다. 2013년 봄에 다시 오사카 천수각에 갔었다. 그런데 40년 전에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 초상화는 없었다. 물어보니 박물관으로 보냈다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의 일본 역사를 조금만 더 말하겠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후 1603년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 1543-1616}가 에도{江戶(강호) : 오늘날 도쿄의 옛 이름}에 막부를 세워 ‘에도{江戶(강호) 시대’(1603-1867)를 열었다.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안토도산)} 시대’(1573-1603)를 빼면 세 번째 막부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와 에도 시대를 일본 역사의 ‘근세(近世)’라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1854년 미국의 무력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했고, 1867년 하층 무사들의 주도로 왕정복고(王政復古)가 일어나 ‘에도 막부시대’는 막을 내렸다. 일본의 무인정치(武人政治) 시대인 막부시대(幕府時代)는 세 번째 막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끝이 났다.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인 1945년 8월 15일까지가 일본의 ‘근대(近代)’이고, 그 후부터 오늘날까지가 ‘현대(現代)’이다. [다음 호에 계속 / 2013.12.28.(토). 조귀채]
첫댓글 일본역사 여행을 재미있게 잘 하고 갑니다.
앞으로 전개될 이순신장군의 흥미진진한 해전과 승전담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좋은 일 많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