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세종에게 양보한 것도 기인도 아니었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
이름은 제(梯), 자는 후백(厚伯), 시호(諡號)는 강정(剛靖)이며, 태종 이방원의 맏아들이다.
1404년 (태종 4)에 11살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명나라 사신 접대 등 세자로서의 일정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
학문에 게으르고 무절제하다고 태종에게 지적을 당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더욱 방종해지고 태학과 정강이 계속되었다,
또한 매와 개 등 동물을 좋아하고 군소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다.
양녕대군은 처음부터 원자이자 세자의 위치에 줄곧 있었기 때문에, ...
처음부터 " 양녕대군 "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가 양녕대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부터인데...
양녕(讓寧)의 뜻이 사양할 양(讓), 편안할 녕(寧), 즉 세자의 자를 양보함으로써 편안하다..는
뜻임을 살펴 볼 때 양녕대군이라는 호칭은 그의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417년에는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조선 왕실의 최초 족보)을 ...
열어 봄으로써 더욱 큰 불신을 받게 된다.
이 당시에 양반 곽선의 첩인 ...
"어리"를 취한 사실도 밝혀지게 되어 부자간에 격론이 오고 가지만 양녕대군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1418년 유정현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어 동생인 충녕대군(뒷날 세종)에게
세자의 지위를 물려 주고 궁궐을 떠나 경기도 광주에서 유배생활을 지낸다.
폐세자 사건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 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 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 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2부에서...